과거-현재-미래 이야기/훈훈한 이야기

경기북부보훈이 2013. 1. 16. 09:31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좌우대립과 정부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정국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암살당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도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이지만, 해방정국에서 처음으로 암살당한 비운을 맞이한 인물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한 고하 송진우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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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송진우는 1890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을미사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항일정신을 갖추어 갑니다.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0년 4월 일본 와세대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고는 귀국합니다. 스승이었던 기삼연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한 송진우는 방황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남은 공부를 마치고,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유학 중 송진우는 한인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 안재홍, 여운형, 김준연, 장덕수, 신익희, 조봉암, 김약수, 조만식 등 독립운동에서 광복 후 정계에서 활동할 여러 인재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1916년 귀국하여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걸 도운 뒤 그 곳의 교감이 되어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1917년 단군·세종대왕·이순신을 남산에 모시는 삼성사 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가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방해하여 좌절되었습니다. 그 후 중앙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3.1운동을 준비하는데 참여하여 학교 교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1920년 석방되어 고향에서 학교설립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추진한 조선독립문제가 상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와도 긴밀히 연락하고 독립운동을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1925년 특파원 자격으로 조선총독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파견되는 조선인 대표단 일행을 따라 하와이를 다녀옵니다. 이 때 하와이의 이승만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하고 귀국한 후 1926년 3·1운동 7주년 기념사를 번역하여 전문 게재하였다가 체포당합니다.

 

그 해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송진우는  정인보와 함께 순종의 '유칙' 위작(遺勅僞作)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고,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습니다.

 

석방 후에도 언론활동과 함께 실력양성을 위한 문맹퇴치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다시 브나로드 운동을 지원을 지원하는 한편,  백야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명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 구입과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1만원가량씩 네차례나 군자금으로 제공하여 독립을 준비하였습니다.


 

 

 

 

<사회사업가 최송설당 자택을 방문한 송진우와 여운형>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임하고, 1940년 이후 창씨개명과 학도병 권유유세를 거부하다가 경성방송국 편성과 PD로 근무하고 있는 양제현을 통하여 단파방송 내용을 들어 일제가 선전하는 거짓 소식이 아닌, 태평양전쟁의 실제 전황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김병로, 이인, 허헌 등 국내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송진우는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폐인 행세를 하면서 은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합니다.

 

광복 후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을 주도하고, 미군정과 의견 조율을 하는 등 정치활동을 펴다가 1945년 12월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처음엔 반대입장이다가 아직 국가조직이 완비되지 않았으니 불가피하다는 주장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12월 29일에 송진우는 김구를 비롯한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는데, 의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하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들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는 한편 모두 출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송진우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는 5년 이하이고 우리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일이며 신탁기간은 5년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니 여유를 갖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고 주장합니다.


 

 

 

<회의를 마치고 한민당사를 나서는 송진우>

 

하지만 송진우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서울 원서동에서 6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온 한현우에 의하여 송진우는 암살당합니다.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하였다는 암살범 한현우는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곳에서 200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송진우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1983년 9월 2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1991년 5월 8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167번지 관어공원내에 '고하 송진우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2009년 담양현지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2010년 생가 옆에 고하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사상가로서 교육자로서 언론인으로서 겨레가 나아갈 길을 밝혔던 송진우 선생, 이제 선생의 행적들은 추모비와 생가 복원, 기념관의 건립 등으로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현 시대의 사는 학생들과 청년들은 그곳에 방문하여 송진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보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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