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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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상식

2014. 5. 1.

 

강서구

<가락동>
가락동(駕洛洞)은 행정동으로 김해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서낙동강의 서안(西岸)에 아담하게 솟아 있는 죽도(竹島, 대섬)를 거점으로 500여년 전까지도 무인도였던 이곳에 사람이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계속 김해에 속해 있다가 1895년 관제개혁에 따라 김해군 가락면이 되었고 1989년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가락동이 되었다.
가락동에는 식만리·죽림리·죽동리·봉림리 등 4개의 큰 마을로, 식만리는 밥만개라하여 땅이 길고 기름져서 쌀이 많이 나고 먹을 것이 많다고하여 생긴 이름이다. 죽동리는 옛날 대나무가 무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리는 댓섬이라 하여 홍수 때 이 섬이 마치 바닷물속에 떠있는 댓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림리는 오봉산 남쪽 기슭에 있어 1914년 죽림리와 덕도면 제도리 일부를 합해 생긴 마을 이름이다. 1918년 읍·면 통합에 따라 가락면은 김해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곳 죽도 기슭에 있는 3층 바위는 김수로왕이 이곳을 찾아와 낚시를 즐겼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는 왜적의 침입을 척후어행(斥候御行)한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지리지(1496)』에 보면, 죽도는 주위가 바다로 논밭과 가옥도 없는 무인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란 이후에는 왜침을 방지하기 위해 대변청(待變廳)을 설치하는 등 국방의 요충이기도 했다.

<강동동>
강동동(江東洞)은 행정동으로 낙동강 삼각주 서쪽에 위치한 대사동 ·상덕동 · 북정동 · 제도동 등 4개의 법정동과 19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평강천(平江川)과 서낙동강에 둘러 싸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남 김해군 덕도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김해군 가락면에 병합되었다가 1978년 2월 김해군 대저읍과 명지면 일부, 가락면 일부가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강동동이 되었다.
강동동에 처음 사람이 살게된 것은 삼각주가 있는 하구지역으로 어패류가 풍성하였고, 삼각주안에 제법 큰 동산인 하나의 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 북정리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유적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강동동을 비롯한 삼각주 일대는 아득한 옛날에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김해 또는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여 바다 해(海)자를 붙인 것과 고려시대 이곳을 임해현(臨海縣) 또는 임해군(臨海郡)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강동동은 농업을 주업으로 살아온 곳이며, 이곳은 특히 갈밭이 많아 한때는 갈자리와 갈대꽃을 뽑아서 만드는 청소용 빗자루가 강동의 명산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강동동의 명칭은 낙동강의 본류인 선암강(仙岩江)의 동안(東岸)에 위치한다 하여 강동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녹산동>
녹산동(菉山洞)은 행정동으로 북쪽으로는 굴암산에서 흘러내려 옥녀봉과 금병산, 범방대로 이어진 산맥을 경계로 김해시 장유면 율하리와 수하리에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은 진해시 가주동과 경계를 남쪽은 천가동(가덕도)과 마주하고 있다. 녹산동은『여지도서(1760)』에는 녹산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지도에는 녹도(菉島)의 기록은 보인다.『경상도읍지(1832)』김해부 방리조에 '녹산리는 부에서 50리에 있다'고 하여 비로소 녹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1914년 녹산과 태야 두 면(面)을 합하여 녹산면이 되었다가 1918년 읍·면 통합으로 김해군 녹산면에 속하였다. 198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시로 편입되면서 강서구가 신설되고 녹산동이 되었다. 녹산동에는 법정동인 녹산동·송정동·화전동·생곡동·구량동·범방동·지사동·미음동·신호동 등 10개의 법정동과 31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녹산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녹산(鹿山)인데 녹산(菉山)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풍수지리설로 봉화산의 동쪽은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 기록주야형(飢鹿走野形)의 명당이기 때문에 녹산(鹿山)이라 하였다 한다.

<대저동>
대저동(大著洞)은 행정동으로 삼국시대 김해근교의 일부 삼각주로 농경이 시작되고 약간의 인가들이 들어섰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저동(大渚洞)은 대부분 갈밭이었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문헌자료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제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노전(蘆田)을 비롯한 전답에 관한 것 뿐이다.
낙동강변에 대홍수를 막기위해 언제인가 제방을 쌓았는데 온 동민이 징을 울리며 밤잠을 못자고 감시했으며, 제방에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보수하는 등 전전긍긍하는 형편이었다. 이 제방이 터지면 마을주민들이 피신할 사이도 없이 대저도가 물바다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구제방(舊堤防) 안의 다소 지면이 솟은 강 언덕에 덕두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대저도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었다. 섬 이름은 "큰 모래톱"이라 하여 "대저도"라고 불렀지만 중심이 되는 마을은 덕두리였다. 이때의 강폭은 현재보다 매우 좁았으므로(약 50m로 추정) 덕두리에서 사상(沙上)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으며 대저도의 크기는 현재보다 훨씬 넓은 섬이었다. 대저동 자리는 아주 오랜 옛날은 바다였다. 그 바다로 낙동강 물길에 실려온 토사가 쌓여서 삼각주의 섬이 되어 대저도가 되었다가 행정구역으로 대저동이 되었다. 큰 대(大) 물가 저(渚)의 대저는 큰 물가란 뜻이다. 대저동은 출두리·사덕리·대지리·평강리·사두리·소덕리·율만리·덕두리· 도도리·맥도리 등 10개의 법정리와 4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해군에 속했다가, 1918년 8월 읍·면통합으로 김해군 대저면에 속하였다. 1973년 대저면이 대저읍으로 승격하였다가 1978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산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지동>
명지동(鳴旨洞)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이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지도의 어느 곳에서도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지도(鳴旨島)에 대한 기록인『신증동국여지승람(1530)』김해부조의 명지(鳴旨)에 대한 내용을 보면, 명지도의 위치와 크기를 말한 뒤 "큰비나 큰 가뭄 또는 큰바람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섬이 천둥소리나 북소리 혹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우는데 섬에서 들어보면 그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으나 어디서 울려오는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명지도의 또 한 이름은 명호(鳴湖)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현재도 '명지' 보다는 '명호'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욱 많은 것 같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명호' 라는 지명을 더욱 많이 사용한다. 명지도는 농지로 사용되기 전에는 온 섬이 갈대밭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농토가 아닌 곳에는 온통 갈대가 무성하다. 바닷바람 소리와 해면에 가까운 갈대 섬의 바람소리가 울리는 소리를 이런 어귀로 전하고 또 기록했을 것이다. 명지도 또는 명지동이란 이름의 울 명(鳴) 뜻 지(旨)는 울음소리에 연유한 것이다.
명지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해군에 속했다가 1918년 7월 읍·면통합 때 김해군 명지면이 되었다. 1978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호리를 제외한 명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명지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가동>
천가동(天加洞)은 행정동으로 낙동강 물이 남해로 흘러드는 강 하구의 남쪽에 위치한 가덕도(加德島)와 눌차도(訥次島)의 2개 유인도와 11개의 무인도를 포함한 1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부산시에서 제일 큰 섬으로 영도의 1.6배로 해안은 동쪽과 남쪽이 단조로운 반면 서쪽은 소규모의 곶(串)과 만(灣)으로 이어져 있고, 북쪽은 가파른 해식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중기(중종 39 (1544))에 가덕진과 천성진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59년(철종 10) 두 진이 폐지된 이후에도 가덕도는 군사적인 요충지로써 일제시대에는 외양포에 포진지를 만들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우리해군이 주둔하여 외양포는 진해 해군사령부의 발상지가 되었다.
천가동은 1906년 웅천군 천성면과 가덕면이었다가, 1908년 웅천군 천가면으로 합하여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창원군 천가면(눌차·동선·성북·천성·대창리)이 되었다가,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의창군 천가면이 되었다. 1989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강서구의 승격으로 강서구 관할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교통은 진해 용원선착장에서 가덕도의 5개 선착장으로 연결하고 있는 정기적인 도선을 이용하고 있다. 천가동은 눌차동·대항동·동선동·성북동·천성동 5개의 법정동과 17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금정구

<금사동>
금사동(錦絲洞)은 조선시대 동상면(東上面) 지역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금사동이란 행정동명은 없었는데, 일제강점 초기 금천(錦川)마을과 사천(絲川)마을의 첫 글자를 합하여 동명이 되었다.『동래군지(1937)』에 의하면, 동래읍 금사리(錦絲里)와 회동리(回東里)를 합한 지역이다.『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보면, 오늘날 수영강 상류를 사천(絲川)이라 한다. 사천은 기장군 원적산(圓寂山)과 경계의 사배야현(沙背也峴)의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해운포로 유입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적조에는 동대(東臺)는 사천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丈) 가량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數丈)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금천(錦川)·사천(絲川)·회천(回川)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동대(東臺)는 이 강가의 가장 경치좋은 장소의 하나임을 엿볼 수 있다. 금사동은 법정동으로 광복이후 줄곧 있어왔으나, 행정동인 서동에 속했다가 1985년 서3동이 분동되면서 이 지역은 옛 지명을 찾아 금사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성동>
금성동(金城洞)의 명칭은 금정산성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정산성은 사적 215호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 축성논의에 따라 축성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왜구를 방어할 책략을 지시하였다. 그후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太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본격적으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금성동에는 부산지역의 특산물의 하나인 산성막걸리가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휴일에는 금정산성을 찾는 등산객과 가족나들이 장소로 많이 이용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리었는데 조선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성동이란 이름을 가졌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구서동>
구서동(久瑞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구세리(仇世里)라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시기 구세리와 두실리의 두 개 자연마을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서(九瑞)·두실(斗實)·금단(琴端)의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구서리라 칭하였고, 동래군 북면에 속하게 되었다.『동래군지(1937)』에는 구서리(九瑞里)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서동의 지명유래는 이 지방 토박이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구세(仇世)는 구세동거(仇世同居)에서 따온 말로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는 고사(古事)에서 집안이 화목한 것을 이르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한 고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또한『동래부지』의 효자효녀조에 나오는 구주성(俱周星)의 성씨를 따서 구세(九世)로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실상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구주성 또한 구서동의 인물이 아니고 사상(沙上)에 효자비가 있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구서동은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굿판 굿터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금정산 번우암이 이 동네 위에 있어 기우소(祈雨所)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여기에 굿을 자주 벌여 동네 이름이 구세가 되었으며 뒤에 뜻이 좋은 한자음으로 바꾸어 구서동이 되었다고 한다. 1985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아파트 등의 신축으로 구서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동>
남산동(南山洞)의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쓰여진 이름이다. 『동래부지(1740)』방리조에도 동래부 북면에 남산리라 하여 '부 관문에서 북으로 18리에 있다'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동래군지(1937)』에도 북면의 남산리로 기록하고 있었다. 남산동은 남산·남중(南中)·신암(新岩)의 3개 자연마을이 있으며, 남산마을 조금 떨어져 작은 마을로 반남산(半南山) 마을이 있다. 이중 가장 취락이 먼저 발달한 곳이 남산마을로 지세는 북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남산이라 하였다 한다.
한편, 남산동은 범어사의 사전(寺田)이 많아 범어사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남산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암마을은 이 지방사람들이 '서근덤'이라 부르는데 썩돌이 많아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동래에서는 옛부터 이 지방의 물이 좋은 순서를 말하는데, 일(一) 남산, 이(二) 초읍, 삼(三) 연지라 하여 남산의 수질이 으뜸이었으나, 청룡동저수지가 생긴 이후부터는 물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노포동>
노포동(老圃洞)은『동래부지(1740)』의 기록에 의하면, 북면 작장리(鵲掌里)와 소산리(蘇山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동래군지(1937)』에는 작장리와 소산리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노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노포동은 노포·작장·대룡(大龍)·녹동(鹿洞) 의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작장마을이 대표적인 마을이었으나, 울산방면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노포마을이 중심마을로 대두되었다. 노포라는 지명은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또는 농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늙은 농부를 뜻하는데, 노포동이란 농사가 잘되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하여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84년 발굴된 노포동고분군은 부산지방의 고분군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적으로 노포동은 어느 지역보다 앞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이들은 노포동을 말 그대로 오래된 채밭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1910년에는 동래부에 속했다가, 1914년 부·군 통폐합에 따라 동래군 북면 노포리로 되었다. 1966년 리제의 폐지로 노포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구동>
두구동(杜邱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북면 두구리(豆口里)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두구리의 명칭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두구리(杜邱里)로 기록되었다. 두구동의 명칭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동래의 읍지(邑地)를 물색할 때 초읍동에 들러 산세가 좋고 자리가 음양에 맞다하여 우선 초(抄)해 놓고, 이 보다 더 좋은데가 없나하고 다니던 중, 두구동의 지세가 뛰어나 정하려 했으나, 지금의 동래읍(수안동 일대)을 보고는 동으로 학소대(鶴巢臺)와 남으로 대조포란형(大鳥抱卵形)이 서울의 장안과 견줄만하여 이곳을 읍지로 정하였다. 그래서 읍지를 초(抄)한 곳은 초읍동이라 하였고, 두고 보자고 점찍은 땅은 두구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물론 호사가들이 지어낸 것으로 생각되나 두구동이 평탄하고 좋았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두구동에는 조리(造里)·죽전(竹田;대바다)·대두(大豆)·임석(林石)·중리(中里)· 수내·소정(送亭) 등 7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4년 부·군 통폐합 때에 동래군 북면 소속이었으며, 1963년 부산시에 편입되어 동래구 북면출장소 관할 하에 있다가 1966년 리제 폐지로 두구동이라 칭하였다. 1975년 동래구 직할동으로 있다가 1988년 금정구가 분구되자 금정구 관할이 되었다.

<부곡동>
부곡동(釜谷洞)이란 동명의 연혁은 어느 동보다도 오래되었으나, 그 유래를 밝힐 만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 부곡(部曲)이 양민 및 천민의 집단마을인 향·소·부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지만 위치상의 비정이 곤란하다. 부산지방에는 생천향과 4개의 부곡이 있었다. 그러나 이중 생천향(生川鄕)은 현재의 대연동이고, 고지도부곡(古智道部曲)은 아치섬, 조정부곡(調井部曲)과 형변부곡(兄邊部曲)은 범어사부근, 부산부곡(釜山部曲)은 자성대 또는 좌천동 부근으로 거리 상으로나 위치상으로 도저히 부합되지 않는다.
부곡이란 명칭은 가마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넘어가는 산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부곡동은 동북쪽에 구월산을 등지고 동 일부에 산업도로가 지나고 있다. 특히 기찰은 부곡동의 다른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동래부지』관방조에 십휴정(十休亭) 기찰(譏察)마을이 있어 여기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1976년 부곡동의 일부를 당시 동상1동(현 서1동)에 편입시켰으나 인구의 증가가 급격하여 1979년 1월 부곡1,2동으로 분동하였고, 1985년 부곡2동을 부곡2,3동으로 분동하였다. 1982년 법정동의 경계를 조정할 때 부곡동의 일부가 서동으로 편입 되었으며, 이때 행정동의 명칭과 경계조정이 있었는데 부곡1동의 일부가 명륜2동에 편입되었다.

<서동>
서동(書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동상면 서리(書里)로 기록되어 있다. 1942년 동래군이 부산부에 편입됨에 따라 동상면의 중심마을인 서리·금사리·회동리를 합하여 서동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서동은 1968년 시내 영주동·충무동 등의 고지대 철거민의 정책이주지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74년 준공업지구로 선정되어 농촌 변두리지역에서 도시 공업지역으로 바뀌었다.
원래 서리로 불리던 서동은 섯골(書谷)마을과 내곡(안골)마을의 두 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내곡은 안마실(안마을)이란 뜻으로 동명으로 부적격하여 서리마을이 동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서동은 1959년 동상동으로 개칭하였다. 1975년 10월 동상1,2,3동으로 분동되었고, 1978년 동상2동을 동상2,4동으로 분동하였다. 1982년 동명 개정 때 동상동은 영도구의 동삼동과 혼동이 많았던 까닭에 서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동>
선동(仙洞)은 조선시대부터 선동이라 불러졌다.『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도 동래부 북면 선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 때에는 선리(仙里)라고 불리다가 1966년에 선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동은 두구동의 임석마을과 같이 선돌(立石)이 있어 이를 표지물로 동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설뫼'를 입산(立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자의 뜻을 취한 것이고, 선돌을 선동이라 한 것은 한자의 음(音)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선동에는 하정(荷亭)·상현(上賢)·하현(下賢)·신현(新賢)·신천(伸川) 등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하현마을은 1942년 회동수원지의 건설로 사라져 4개의 자연마을만 남아있다. 이중 하정리는 조선시대 소산리(蘇山里)라 하였고, 여기에 역원(驛院)이 있었다. 당시 동래부 관내에는 소산역(하정)과 휴산역(휴산역, 연산동과 수영동 사이)의 2개의 역이 있었다.『동래부지(1740)』에는 북면 선동이라 하여 동래부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때는 오히려 선리(仙里)라고 불리어왔으며, 1963년 직할시승격 때 부산시에 편입되어 북면출장소의 관할에 있다가 1966년 리제 폐지로 선동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륜동>
오륜동(五倫洞)은『동래부지(1740)』의 고적조에 보면,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20리의 사천(絲川)에 있었는데 대(臺)에서 4, 5보(步) 가량으로 시내에 임하고 암석이 기이하여 구경할만 하다. 속전(俗傳)을 다 갖춘 까닭에 이 같이 이름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 때까지는 오륜대라는 이름은 대(臺)에 가까이 사는 어떤 사람의 행실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되어있다.《동래부지(1832)》에는 '오륜대는 동래부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시내와 바위가 기이하다. 옛날 다섯 명의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유상(遊賞)한 까닭에 이로 인하여 이름지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래군지(1937)』에는 '오륜이라는 모양은 월륜(月輪)과 같아 내(川)에 잠겨있는데 무릇 다섯 군데에 있다. 이 대(臺)는 그 가운데 있으므로 오륜리(五倫里)라고 이름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오륜리라는 이름은 당시 주자학을 숭상하던 시대에 경승지인 이곳은 처사(處士)들이 은둔과 유상하기 알맞은 곳이므로 높여 부른 이름인데 그후 풍수지리가들에 의해 더욱 윤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전동>
장전동(長箭洞)은『동래부지(1740)』는 물론 이후 모든 읍지에도 북면 장전리(長箭里)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洞)의 형성은 일찍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上里인 장전마을과 下里인 소정마을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장전(長箭) 유래는 긴 화살이라는 뜻으로 금정산의 선안 죽전마을과 같이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전의 전(箭)자는 이대 즉 설대로 이 지방 사투리로는 '서느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중부이남과 해안지방에 많은 바구니와 조리 따위를 만들기도 하고 담뱃대나 화살대를 만드는데 쓰이는 것을 말한다. 즉 장전은『동래부지』의 군기조(軍器條)의 장전(長箭)·편전(片箭) 등을 만드는 곳이거나, 그 원료를 공급하는 곳이라 풀이된다.
장전동은『동래부지(1740)』『동래부읍지(1832)』『동래군지(1937)』에 모두 북면 장전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자연마을인 장전마을과 소정마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1970년 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전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동>
청룡동(靑龍洞)은『동래부지(1740)』에는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청룡동이란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동래군지(1937)』에는 동래군 북면 청룡리라 한 것으로 보아 청룡이란 지명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청룡은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동방에 있는 일곱성수(星宿)를 총칭하기도 하며 사신(四神)의 하나로 동쪽하늘을 맡은 신을 뜻하기도 한다. 청룡동(靑龍洞)은 범어사의 동편마을이란 뜻에서 지어진 동명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편, 동네의 고로(古老)들은 계명봉(鷄鳴峰)이 계룡의 형상으로 산의 중턱에는 계명암(鷄鳴庵)이 있고 서단을 마주 대하여 미륵암이 있고, 동단에는 용의 머리가 있다하여 청룡동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이곳의 고로(古老)들은 미륵암을 미리암이라 부르며, 현재 항측도 상에도 미리암으로 표기되어 있다. 미리는 우리말로 용을 뜻하며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한다. 청룡동의 자연마을은 청룡·용성·신리·상마·하마의 5개로 이중 청룡마을 외에도 용성마을도 용과 관계가 깊다.

<회동동>
회동동(回東洞)은 조선시대 동래군 동상면 지역으로 회동(回東)이란 지명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회천(回川)과 동대(東臺)마을을 합하여 회동리(回東里)라 했고, 금천마을 일부와 섯골을 합해서 서리(書里)라 했다.『동래부지(1740)』고적조에 보면, '동대(東臺)는 사천(絲川)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丈) 가량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數丈)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금천(錦川)·사천(絲川)·회천(回川)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동대(東臺)는 이 강가의 가장 경치좋은 장소의 하나임을 엿볼 수 있다.
회동동의 자연마을로는 동대(東臺)마을과 회천마을이 있었으나, 일제시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 두 마을이 합쳐져 회동(回東)마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회동동에는 6세기를 전후하여 조성된 회동동 고분군에서 철기와 토기류(土器類)의 발굴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59년 법정동인 서동·금사동·회동동을 합병하여 동상동(東上洞)이란 행정동으로 개칭하였고,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1985년 서동과 금사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사동은 넓은 면적으로 법정동인 금사동과 회동동이 병합되어 있으며 회동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상이하여 행정업무 수행에 부작용이 많기 때문에 분동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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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기장읍>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으로 기장은 큰 벌이라 불렀고 큰마을의 뜻이다. 갑화량곡 이라는 옛 이름을 "가벌둔"이라고 하여 현대어로 "산에 둘린"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갓벌"이라 하여 "변두리 마을"이라고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옛 지명에 갑(甲), 가는 갓(邊) 뜻이고, 화(化)는 "불" "벌"로 발음하고 벌은 마을, 성을 뜻하므로 변두리 마을로서 변성(邊城)의 뜻이라고 한다. 모두 타당한 풀이로 생각되지만 갑화량곡은 "큰 마을"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을(織機)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그 별호를 차성(車城)이라 하였다고 한다. 차성가도 이설에 의거하여, "읍기를 구어 보니 옥녀직금 분명하다"라고 하였고 수령산(繡嶺山), 성산(筬山) 수계교 (繡溪橋), 직금루(織錦樓) 등의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이 설에서 유래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기장의 古老나 선비들은 모두 이설을 절대적으로 따랐다고 한다.
둘째로는 대읍성설(大邑城說)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장과 갑화량곡은 같은 뜻이라는 전제로 이를 대응시켜서 설명하는 것이다. 갑(甲)은 크다(大)이고, 기(機)도 크다(大)의 표기이다. 화량(火良)은 "활"의 표기로 이를 불, 부리, 벌, 펄로서 화(火), 벌(伐), 불(弗), 부리(夫里), 부리(富里)의 표기와 같다. 신라의 장보고(張保皐)를 궁복(弓福)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서라벌의 벌도 마을의 표기인 것이다. 따라서 갑화량은 큰벌, 기장도 큰벌로서 모두 "큰 마을"이다. 개화(皆火), 가불성(加弗城), 거발성(居拔城), 지벌지(只伐只), 부부리(夫夫里) 등의 옛 지명도 모두 "큰마을"이라는 표기라 할 것이다. 기장읍의 법정 마을로는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사라리, 대변리, 죽성리, 연화리, 시랑리, 청강리, 내리, 만화리, 신천리, 교리, 석산리, 당사리, 등 15리로 구성되어 있다.

<장안읍>
장안(長安)은 성내(城內)라는 뜻으로 잣안이 장안으로 바뀌었다. 서울을 장안이라 하는데 장안은 잣안이고 잣은 城의 고어(古語)이고, 안은 안쪽 내(內)이다. 기장군 장안읍의 소재지가 되는 좌천리가 옛날의 성내이고 장안이다. 성을 뜻하는 고대어는 자, 잣, 재, 사로서 지금도 잣(城)이라 한다. 지명에 좌(佐), 자(自), 자(慈), 사(斯), 시(市)로 표현된 곳은 거의 성(城)이 있던 곳이다.
부산진성이 있는 곳을 좌천동이라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좌천마을 서쪽 골짜기를 지금도 시리성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의 성촌(城村)은 저재, 저자라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촌을 좌안(佐內)이라 하였다. 좌천리는 옛날에 좌방(佐坊)이었는데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동과 서로 구분하여 동쪽은 佐東이고 서쪽은 佐西라 하였으며, 좌서가 좌천(佐川)이 되었다. 옛날에는 북쪽의 화철령(火鐵嶺)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동래의 거칠산국이고, 북쪽은 울산의 우시산국으로서 좌천리는 국경지대에 있는 큰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접경지대에 있는 명례리는 울례라 하였는데 이는 책촌(柵村)이라는 뜻의 진영이고, 월내리도 울내라 하였는데 울안이라는 말로서 역시 책내(柵內)라는 뜻의 진영이고, 임랑리는 임을 랑이라 하였는데 이는 임울안 이라는 말로서 주책내(主柵內)라는 뜻의 진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좌천리는 북쪽의 명례리·월내리·임랑리에 있는 진영의 방비를 맡고 있는 성내가 된 것이다. 이처럼 북쪽의 변두리에 여러 성책이 있었고, 좌천리는 그 후방이 되는 안쪽에 있었으니 안마을이 되었다. 또 좌천리는 시장마을이니 저자마을이다. 그래서 좌천리를 옛날에는 잣안이라 불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내를 장안이라 하였다는 예로서는 서울을 잣안이라 하였던 것이다.
장안이라는 지명은 1914년 3월 군·면의 정비로 기장현 상북면을 장안면으로 개칭하였다. 옛부터 장안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장안사라는 절 이름이 있었고, 절 이름에 따라 장안리가 있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장안이라는 좌천리는 장안이라 하지 않고 좌촌이라 표기하였다. 지금도 좌천리라 하지 않고 자천리라 부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깊은 역사적인 연유가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장안읍의 법정 마을로는 좌천리, 좌동리, 덕선리, 용소리, 기룡리, 장안리, 명례리, 반룡리, 오리, 고리, 길천리, 월내리, 임랑리, 호암리 등 14리로 구성되어 있다.

<일광면>
일광(日光)의 명칭 유래는 일광산(日光山)에서 유래되었으며, 일광산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은 그 주봉되는 백두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산은 기장의 옛 읍성(邑城)이 있었던 곳의 진산이었던 것이다.『기장현(읍)지』의 산천조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며, 팔대명산에도 없다.〈차성가(車城歌)〉에는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峰) 높았는데, …… 백두산 늙은 바우 지기석(支機石)되어 있고…라고 되어 있으니 약 2백년 전에도 일광산,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있은 것은 확실하다. 이보다 앞서 기장향교에 있는 남루상초문에 "일광산색탱천극(日光山色撑天極)"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것은 인조 6년( 1638)에 지은 상초문이므로 약350년 전이다. 그러므로 일광이라는 이름은 몇 백년 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주봉은 백토(白土)로서 토박하여 풀도 제대로 자생하지 못하여 백토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백색(白色)의 화강석만 널려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백설(白雪)이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옛날은 산이 흰빛으로 보이니 흰빛뫼라 하였을 것이다. 흰빛 뫼를 이곳 방언으로 희빛뫼→해빛뫼로 불렀을 것이다. 해빛 뫼를 그 뜻대로 해 일(日), 빛 광(光), 뫼 산(山)으로 日光山이라고 차훈표기를 하였다. 일광산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너무나 안이하고 통속적인 해설이 된다.
일광산이 옛 기장의 발상지이고 고성(古城)의 진산이라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전국각처에 있는 고성의 진산은 모두 나라사라 이름 하였고 이는 나라 의성(義城)이라는 뜻으로 차훈하면 국성(國城)이 되는 것이다. 옛날의 고성이 있었던 곳으로 횡성군·보은군·산청군·공주시·하동군·상주시·예천군에 있는 주산은 모두 국사봉(國師峯)이라 표기 되었고, 합천군 등은 국토봉(國土峯)으로, 진천군은 국사봉(國寺峯)이라 하였는데 모두 그 속명은 나라사라 부른다.
나라사는 나라(主)와 사(嶺)는 자, 재, 잣의 고대어는 사이므로 嶺, 城의 뜻이다. 이처럼 일광산은 나라사라 불렀고, 그 뜻은 나라의 성이 있는 산이라는 말로써 주산(主山), 국성산(國城山), 주성산(主城山)이 된다. 이는 전국각지에 있는 고성에 있었던 모든 산은 국성산(國城山)으로 해설되고 있으므로 일광산도 국성산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일광면의 법정 마을로는 삼성리, 학리, 청광리, 동백리, 화전리, 횡계리, 용천리, 문동리, 문중리, 칠암리, 신평리, 원리 등 13리로 구성되어 있다.

<정관면>
정관면의 이름은 소두방재〔聳岩嶺〕에서 유래하였는데 소두방재를 정관령(鼎冠嶺)이라 하였다. 소두방재는 정관면 사람들이 동래(東萊)로 내왕하는 유일한 관문이었기 때문에 1914년 3월 군·면의 행정구역 개정 때 정관면의 이름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소두방은 솥뚜껑의 이곳 방언이다. 이를 솥 정(鼎), 갓 관(冠)자로서 아주 멋있는 작명을 하였다. 소두방재라고 한 것은 재(嶺) 근처에 있는 매바우가 꼭 소두방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매바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두방처럼 생기지 않고, 큰 바위가 산처럼 솟아 있을 뿐이다.
매바우를 옛사람들은 솟아 있는 바위(聳岩)라 하여 솟은 바위를 이곳 방언으로 솟은방우→솟은바우→소든방우, 소두방이라 한 것이다. 즉 이곳 방언으로 소두(聳), 방우(岩)인데 방우는 방으로 줄여서 소두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따라서 그 참뜻은 솟은 바위이지 솥뚜껑〔鼎冠〕은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소두방재가 있는 곳을 소산평(蘇山坪)이라 하였는데 이는 솟은(용), 뫼(산), 들(평), 즉 용산평(聳山坪)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소두방(聳岩)을 그 모양이 뫼처럼 생겼다 하며 뫼바위(山岩)라 한 것이다. 뫼바위(山岩)를 이곳 방언으로 매바우라 하기 때문에 한자로 매암(梅岩)이라 하였고, 그 아랫마을은 매곡(梅谷)이라 하였던 것이다.
옛날 매바우에 두루미가 살고 있었다하여 소학대(巢鶴臺)라는 멋진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백운산에 있었던 기장 제일의 대가람이었던 선여사(船餘寺)에 딸린 망일암(望日庵)이 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겨 이곳 관문은 이제 송림속에 길이 묻혀 내왕도 어렵게 되었다. 소두방재라는 본래의 이름은 용암령(聳岩嶺)이라는 뜻이 되니 정관면이라는 이름 역시 그 본래의 뜻대로 한자로 표기하면 용암면(聳岩面)이 되는 것이다. 정관면의 법정 마을로는 예림리, 달산리, 방곡리, 매학리, 용수리, 모전리, 병산리, 두명리, 월평리, 임곡리 등 10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철마면>
철마(鐵馬)라는 지명은 철마산(鐵馬山)에서 유래 되었다. 철마산은 쇠말산, 샛말, 소멀미 등 비슷한 속명이 있다. 옛날 이곳은 큰 홍수와 해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었는데, 미역 바위의 용굴에서 동해 용왕의 명을 받은 용마(龍馬)가 나와서 물을 다스리고 나서부터는 물이 없어 용마는 환궁하지 못한 채 햇볕에 말려져 점차 굳어져서 작은 쇠말이 되어 최근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쇠로 된 말이 있는 산이라 하여 쇠(鐵), 말(馬), 뫼(山)로 철마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철마산의 쇠(鐵)는 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쇠는 새 샛과 소리인데 東風을 샛바람이라 하고 있다. 鐵原郡 本 高句麗 鐵原郡 景德王改名今東州에서 鐵 = 東의 뜻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新)도 역시 東의 뜻이다. 
신라는 새벌로 읽고 새는 새벽 해의 효(曉)뜻이고, 광명(光明), 신성(神聖)의 뜻을 취한 성지이며 동방(東方)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말(馬)은 지명에 흔히 쓰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크다(大)의 뜻으로 해석되는데 말의 뜻으로 해석 될 때도 있다. 철마의 마는 산령(山嶺)의 뜻이 되는 마루〔嶺〕의 뜻으로 해석된다. 산마루 마라(宗), 말(棟), 머리(頭)는 동계어(同系語)이다. 그러므로 말은 짐승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마루의 뜻으로 嶺이 되는 것이다. 소멀미는 흔히 우두산(牛頭山), 牛嶺(우령), 우도(牛島), 우봉(牛峯) 등으로 표시되고 있다. 소는 솟음 즉 용의 뜻이고, 멀은 머리가 아니라 마루 즉 嶺의 뜻이고, 미는 뫼로서 산의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멀미는 우뚝 솟은 산을 말하는 솟은 마루산으로서 용령산(聳嶺山)으로 해석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는 쇠, 새와 같은 말로서 역시 동의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마산을 소멀미라 속칭하는 것도 동령산(東嶺山)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말(馬)이 크다(大)의 뜻으로 해석되는 예로서 韓山郡 本 百濟 馬山縣에서 보듯이 韓 = 馬로서 한은 대의 뜻이니 馬 = 大가 된다. 그리고 소, 쇠는 수리(首)의 뜻으로 해석하고 지명에 있는 소(蘇), 서(徐), 사(斯), 정(鼎) 철(鐵)은 上, 高의 뜻으로 풀이하여 철마산은 상대산(上大山), 고대산(高大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철마산은 쇠(鐵), 말(馬), 뫼(山)로 쇠말산 이라 하며, 쇠는 소, 새와 같은 말로 東風을 샛바람이라 하듯 동쪽의 뜻이고, 말은 마라(宗), 말(棟), 머리(頭)와 동계어로서 마루라는 말로서 산마루 嶺으로 산등성이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쇠말산은 쇠(鐵)로 된 말(馬)이 아니라 이는 동쪽 산등성이라는 뜻으로 동령산(東嶺山)이 되는 것이다. 정관면의 법정 마을은 예림리, 달산리, 방곡리, 매학리, 용수리, 모전리, 병산리, 두명리, 월평리, 임곡리 등 10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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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감만동>
감만동(戡蠻洞) 바닷가에는 감만포가 있어 조선초기에 수군진영을 두었다. 감만포란 포구의 이름은 그때 수군이 주둔하면서 오랑캐에 이긴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감만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夷)자도 오랑캐란 뜻과 벤다 또는 친다는 뜻을 가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이곳으로 유인해 전멸시켜 감만(오랑캐에 이기다)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나 '감만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그 이름이 있었다. 또한 일본측 기록을 따라 '가마리(釜里)'로 보고 부산의 지명과 유관하게 보기도 하나 그는 일본사가의 아전인수격인 식민지사관에서 온데 지나지 않는다. 일본인이 말하는 '가마'란 일본말의 '감'인 우리말의 '두꺼비'로 말했으니 해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감만동은 수군진영에서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는 뜻으로 따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이곳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태종 때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것을 임란 직전 수영으로 옮겨졌다가, 임란 직후인 인조 13년(1635)에 이곳 감만으로 옮겨와 수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비밀의 누설 우려가 있다하여 효종 3년(1652) 다시 수영으로 이전되기까지 주요 군사요충지였다.

<대연동>
대연동(大淵洞)은 옛날에는 못골이라 했다. 못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었다. 그 못은 아주 커서 마을의 이름을 지을 때 큰못이란 뜻으로 큰 대(大), 못 연(淵)이 된 것이다. 『동래부지』에는 이 못을 길이 18척, 너비 125척이라 했다. 옛날에는 이 못의 수원을 이용하여 대연동 일대 50만평 넓은 논을 경작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인 1930년에는 수리조합이 조직되어 옛날부터 있던 못(옛 공업대학의 자리)의 윗자리에 둑을 쌓아 다시 새로운 못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못도 흔적이 없고 주택가로 바뀌었다.『동래부지』제언에는 생천언이란 제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못골에 있었던 못은 바로 이 생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못은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 축조방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이전의 못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동래현조에는 향과 부곡이 있었는데, 향이 바로 생천향(生川鄕)이다. 생천향은 생천언과 이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신라 및 고려 때에 생천향의 옛땅일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대연동은 일제시기 대일리(大一里)·대이리(大二里)로 불리다가, 1940년 동래군 남촌면 대연리로 바뀌었다. 1953년 대연동으로 되었다가, 1970년 대연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75년에는 대연3,4동이 분동되었고, 1979년에는 대연5,6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현동>
문현동(門峴洞)의 옛 이름은 찌께골이라 한다. 찌께골은 지게골에서 온말로서 지게는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팎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이라는 뜻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양쪽으로 산에 의해 에워싸여 있어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기 때문에 옛날부터 찌께골로 불리어 왔다. 일제시기까지만 하여도 인가는 적었고, 찌께골 고개밑의 좌우에 초가만 드문드문 있었다고 한다.
한편, 문현과 관련하여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있다. 문고개라 함은 문현안동네 즉 성동초등학교의 동편의 문현1동쪽에 상당히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를 문고개라 했다는 것이다. 문고개의 유래는 조선후기 문안동네에 영산신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고, 그후 문밖동네에 몇집이 생기게 되어 이 두 마을에 사람이 왕래할 때에는 이 고개가 문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문고랑 명칭이 붙었다 한다. 1919년 동래군 서면 문현리에서 1946년 문현동으로 개칭되었다. 1957년에는 부산진구 문현동이 되었다가, 1962년 문현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75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진구에서 남구에 편입되었고, 동년 7월 문현3동이 분동되고, 1982년 문현4,5동의 분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암동>
우암포(牛岩浦)는 옛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한다. 우암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 포구안의 언덕에는 하나의 큰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모양과 같다하여 이곳 포구를 우암포라 하고 동리명을 우암이라 불렀다 한다. 일제시대 때 바다의 매축을 위해 산을 굴착하였는데, 이때 소모양의 바위가 없어졌다 한다. 우암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1678년 이후의 한일 양국의 외교문서인『대마도문서』『조선사무서』 『동문휘고』 등에 우암포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이로 볼 때 적어도 조선 숙종 이전에는 명칭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숙종 때의 표류민 접수처의 지역은 지금의 우암동 서쪽 높은 지역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한다.
원래 철우(鐵牛)는 중국 고사에 전하고 있는데, 우(禑) 임금이 수환(水患)을 막기 위하여 철우를 만들어 강물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 우암포의 지세는 동천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이 지역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6.25전쟁으로 인한 다수의 피난민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증하였다.
1953년 대연출장소 우암동이 되었다가, 1976년 12월 우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 

<용당동>
용당동(龍塘洞)은 신라시대 때 남해신(南海神)에 제사하는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가 행하여진 형변부곡(兄邊部曲)의 위치로 추정된다. 용당이라 함은 지금의 상하 용당리의 중간에 옛날 큰 못(澤 : 塘)이 있었고, 이 못을 둘러싼 부근 산세가 용의 모양과 같다하여 이 못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마산이 용이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어느 해에 용마산의 앞머리 부분인 신선대 앞을 절단하여 토지를 일군적이 있었는데, 이곳을 잘랐을 때 땅속에 붉은 혈흔이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재앙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농사가 잘되지 않는가 하면 이 지역 김씨 문중의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한 해에 수십명씩 죽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당이란 지명은 지형이나 지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형변부곡의 위치에서 생겨난 지명으로 풀이된다. 용당은 해신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곧 용왕을 모신 당집이 있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산지역에는 용(龍)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데, 이는 모두 해신(海神)이나 기우소(祈雨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거나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 계속 용당리로 불리어 오다가 1959년 동명 개정 때 용당동으로 바뀐 이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용호동>
용호동(龍湖洞)의 장산봉 아래에 호수같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하늘을 오르지 못한 용이 이무기(깡철이)가 되어 있었다고 해서 용호동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용호동은 인가라고 거의 없었고, 소금을 굽는 동이〔盆〕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 있는 갯가라는 뜻에서 분개(盆浦)라 불려졌던 것이다. 염전은 중앙에 찰흙으로 1평 정도의 구덩이에 파놓은 것이 있는데, 이 구덩이를 서실이라 한다. 서실속에는 깨끗하고 결이 고운 모래를 넣어 두고 있는데 이를 파내어 염전에 엷게 써레질하여 둔 다음, 바닷물을 끌어들이면 햇볕에 물기는 증발하고 염분만 모래에 엉켜 보얗게 된다. 이 보얗게 된 모래를 다시 서실에 넣고 바닷물을 길어 부으면 염도가 아주 짙은 소금물이 서실밖으로 넘쳐나는데 이를 작은 개울을 통하여 가마에 받아 끓인 것이 이른바 소금이다. 이 서실을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분(盆)이라 불렀다.
『동래부지(1740)』에는 '분포리(盆浦里)는 부의 관문에서 남으로 28리 거리에 있다'고 하고 있다. 용호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쓰게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며, 일설에는 용호동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승천하지 못한 용(이무기)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생긴 동명이라 한다. 1975년 10월 시조례에 의해 용호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2년 9월 용호3동이, 1983년 용호4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구

<범일동>
범일동(凡一洞)은 동구 범6동에서 범4동으로 이어진 계곡 주위로 숲이 우거져 있는 그 계곡의 내를 범내라 했다. 범천(凡川)은 계곡 중간을 흐르는 내를 가리키며, 이를 범내라 부른 것은 이곳 냇가에 때때로 범이 나타났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날은 범천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호랑이를 뜻하는 범이라는 음을 한자에서 빌려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범내골 시장통에 세워져 있는 "호천석교비"는 범내가 호랑이 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범일동의 서쪽 산비탈은 '널박'이라 불렀다. 널박의 뜻은 이 주변에 민가가 밀집해 있는 상태, 즉 인가가 널리 밀집되어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이곳이 양지인 데다 앞에 있는 바닷물이 반사하여 낮에도 유달리 늘 밝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인가가 널리 밀집하여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 범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자 범천1리 범천2리라 했는데 일제강점 이후 범천1리와 범천2리가 병합될 때 범천1리의 약칭인 범일동(凡一洞)을 동명으로 삼았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범일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범일4동을 4동과 6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구역조정으로 범일3동 일부를 남구 문현동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일부를 범일2동과 범일5동에 편입시키고 범일3동을 폐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정동>
수정동(水晶洞)은 조선시대에 동래부 동평면 두모포리(豆毛浦里)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의 기장현 관방조의 기록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장에 있었지만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난 부산포의 방위를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게되자, 울산의 개운포와 함께 부산진 부근에 이설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 지명도 그대로 두모포리로 쓰이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6년(1614)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국교가 회복되자, 두모포에 왜관이 개설되어 약 70년간 존속하다가 숙종 4년(1678) 용두산일대로 옮겨갔다. 용두산일대의 왜관을 신왜관(新倭館)이라 한데 대하여, 두모포왜관은 구왜관(舊倭館) 이라하여 신관, 구관으로 불러왔다.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자리는 황토가 적고 지면에 모래가 많아서 비가와도 신발에 물이 묻지 않았으며, 또 이곳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어서 수정동(水晶洞)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수정동에는 성이 있었는데 정상에 큰 분지가 있으며, 그 일대를 조금만 파도 크고 작은 수정이 나왔으므로 그 산을 수정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산 아래 마을 이름도 수정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또 지금의 수정동·초량동 뒷산을 통칭하여 사병산(四屛山)이라 하였는데, 특히 수정동 뒷산은 마이성(馬餌城, 馬里城)이라 불렀으며, 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흐르는 시내의 이름 역시 수정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수정의 출토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수정1,2,3,4,5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좌천동>
좌천동(佐川洞) 이라는 이름은『동래부지(1740)』에 나오는 좌자천(佐自川) 이라는 이름의 약칭이다. 좌자천은 가야산 및 감고개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수정동의 중앙을 거쳐 부산진 동쪽을 돌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말한다. 이 좌자천의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 좌자천리이며, 이는 각기 1,2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좌천동의 해안은 조선말기에 개운포라 불리었다. 이 개운포란 이름은 부산에 단일 왜관이 설치되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국방을 튼튼히 할 필요에 따라, 울산군 대현면(大峴面)의 개운포를 없애고 지금의 좌천동 해안으로 옮겨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기장현의 두모포를 오늘날 수정동 해안으로 옮기면서 그 이름을 사용하여 두모포리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좌자천 지역에 인가가 광범하게 산재해 있었다. 범천동 일부와 좌자천 일부가 범일동으로 개편되자, 좌자천리는 좌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좌자천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곳이 바다의 입구이므로 태풍의 피해가 잦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물이 깊지 않고 잦은 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좌천동(佐川洞)이 되었다고 한다. 1959년 동개편 때 좌천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좌천2동을 2,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량동>
초량동(草梁洞)의 유래는 1678년 초량소산(草梁小山)인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왜관이 설치되기 이전, 지금의 부평동에 어민들이 얼마간 살았을 뿐 초량 이남은 사람이 살지 않은 억새풀과 띠풀의 초원지대로「샛디」라하여 초량이었다. 지금의 중구· 동구·서구지역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초원지대였다. 이 초원지대인 풀언덕을 초량이라 했는데 그 초량이란 이름이 맨 먼저 쓰인 곳은 그때의 사천면(沙川面)인 지금의 서구 일대였다. 그뒤 지금의 초량을 신초량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자니 동래부사 정현덕은 같은 고을에 같은 이름이 둘 있을 수 없다하여 신초량을 초량이라 하고, 구초량을 부민동이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의 부민동은 지금의 부민동에서 남부민동까지를 말했고 신초량인 초량은 지금의 초량에서 남쪽으로 용두산 끝자리까지를 말했다. 풍수상으로 부산의 지형은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如臥牛形)이라 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한편, 초량동(草梁洞)은 조선후기 해정리(海丁里)라고 하였으며, 이 지역에는 고분이 있었고 해정리의 해변은 노송이 울창하여 이곳을 일인들이 기석빈(棋石賓)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물로 씻은 깨끗한 돌들이 널려 있어서 흡사 바둑돌과 같았다는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초량동은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동개편 때 초량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에는 초량4동을 인구의 증가로 초량4동과 초량6동으로 분동하였고, 초량5동은 인구감소로 인해 1995년 10월 초량3동에 흡수·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래구

<낙민동>
낙민동(樂民洞)은 옛 동래구의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 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신락(新樂)· 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낙민동의 명칭에 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낙민동은 조선시대 남문동변동(南門東邊洞)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이곳은 동래부 수령이 민정을 살피러 나가는 지역인데,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에서 낙민동 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蓮田)이었으며, 그 이후 매축되어 집단아파트가 조성되어 주택가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민동은 법정동으로서 1957년 1월 수안동과 낙민동을 합하여 행정동인 수민동이 탄생하였다.

<명장동>
명장동(鳴藏洞)이라는 명칭은『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동면 명장리(鳴壯里)로 표기되었다가 조선후기에는 동상면 명장리(鳴藏里)로 되었다. 195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나리꽝과 야산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불과하였던 변두리였으나, 1975년 안락북지구 구획정리사업 이후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명장동의 유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없고 다만 인근의 염창리(廉倉里)와 같이 명편(鳴鞭)을 간수했던 곳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명편은 옛날 의장(儀仗)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숙하게 하는 물건으로 일명 정편(靜鞭)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사는 동래 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 아니라 인근의 양산·기장의 군사까지 지휘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간수케 하였다 하여 명장(鳴藏)이라 전한다. 명장동은 1910년 동래부 동래읍에 속했다가, 1959년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0년에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와 학교의 설립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90년 1월 명장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륜동>
명륜동(明倫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신향교동(新鄕校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어 그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 또는 교리(校里)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래도 조선초기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했는데 향교가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앉게 되자 구교동, 신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 일대는 옛부터 대낫들이라 불렀는데, 이는 옛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에 동래부사가 부임해 올 때나 전임되어 갈 때에 이곳에서 이속, 군졸과 육방관속들이 환송 및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기지창검의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 한 것에서 '큰' 이 '대'로 바뀌어 '대낫들이'로 불린 명칭이다. 이를 일명 개복장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명륜동은 신향교동이라 하다가 1906년 교동이 되었다. 그 교동이 구교동과 엇갈려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동이라 이름을 고쳤다. 1978년8월 명륜1,2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천동>
복천동(福泉洞)의 유래는『동래부지』성곽조에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야정동(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복천동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의 수장급 무덤으로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옛부터 생활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정동인 복천동과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하여 행정동인 복산동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수안동>
수안동(壽安洞)은 옛 동래구의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 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되고, 신락(新樂)· 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이 지역은 옛부터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사실상 동래의 중심지이다. 수안동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안동은 동래 토박이들에 의해 수안(首安)·수안(水安)으로 쓰여지고 있다. 수안동을 수안(首安) 이라고 한 것은 동래부의 수장이던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으뜸되는 관아안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수안(水安)동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땅밑을 조금만 파내려가면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칭해진 이름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곳에 동래읍성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안의 동네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인 미나리꽝이었으나 지금은 매축되어 주택가로 변하였고, 동래지역 행정관서가 밀집되어 있다. 법정동인 수안동과 낙민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되어 행정동인 수민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직동>
사직동(社稷洞)에는 17세기부터 동래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의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임금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올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서면 여고리·석사리의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 석사리(石寺里)라는 이름은 석사(石社)로 바뀌었다.
1916년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으로 불리었으며, 갯밭(현 신정시장 일대), 딧밭(현 동래정보여자고등학교 부근으로 논과 밭이 있어 농사를 짓던 옛 마을의 이름) 등 신촌·칠층대 등의 자연마을도 있었다. 이 사직단은 일제 강점시대 일제가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일체의 제사를 금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논밭과 미나리꽝이었던 것이 1967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1979년 시 조례에 의해 분동되고, 같은해 8월 사직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락동>
안락동(安樂洞)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읍내면 동부에 속했던 효현리(狐峴里)·충렬사리(忠烈祠里)·안락리(安樂里)·염창리(廉倉里)·
구향교동(舊鄕校洞) 등을 포함하는 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 염창(廉倉)은 염창(鹽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염창은 현 충렬사와 동래고등학교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마을로, 옛 수영이나 명장지역은 염전이 있어서 여기서 나는 소금을 보관한 창고가 많아서 불렀다.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마을로 바뀌어 호현(狐峴)·화현(華峴) 등의 4개 마을을 합하여 원리(院里)라 하였다.
원리란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등을 모신 안락서원(安樂書院)이 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書院)이란 선현에 제사드리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이어받아 가리키는 서재가의 기능을 합한 곳이다. 충렬사는 본래 사당만이 지어져 사액을 받은 것인데 뒤에 송상현 공, 정발장군 등 학덕을 본 받을 만하다 하여 강당인 소줄당(昭줄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음으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즉 충렬사란 사당에 학교기능을 가진 소줄당이 더해짐으로서 서원이되자 마을 이름도 원리로 바뀌었다. 1942년 서원의 명칭인 안락을 따서 안락정(安樂町)이 되었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으로 안락동이 되었다. 1982년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안락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천동>
온천동(溫泉洞)의 유래가 된 동래온천장에서 온천이 자연용출 한 시기는 신라시대부터로 본다. 그러나 산저리(속칭 차밭골)와 장전리 일부를 합하여 행정구역상의 온천동(溫泉洞)으로 독립시킨 것은 1910년 일제강점 이후가 된다. 그 이전은 금산마을(또는 금정마을)과 온정리 등 자연마을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온정원(溫井院)이라 하여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공영의 여관이 있었을 뿐 집단적인 취락은 형성되지 않았다. 지금은 온천이 나면 위락시설을 갖추어 손님을 받아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할 테지만 그때로서는 고관대작과 병자들이 오가서 민폐만 생길 뿐이었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는 지금의 온천동 일부가 서면의 산저리에 속하고 일부는 북면의 장전리에 속했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온천시설을 갖춘 바도 있었지만 대중성이나 영리성을 띄지 못했다.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영리를 목적으로 한 위락시설을 갖추고부터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설치로 온정리라 하고,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미남·산저정의 두 마을을 합하여 온천2동으로 개정하였다. 1979년 온천2동을 온천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칠산동>
칠산동(漆山洞)은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하여 있었는데, 이를 신라가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 하였다가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東萊郡)으로 바뀌었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지금의 동래읍성의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삼한시대의 가야문화가 발생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복천동과 합하여 하나의 행정동인 복산동(福山洞)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부산진구

<가야동>
가야동(伽倻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가야라는 동평면에
속한 지역으로 관문에서 2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라는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 학계에서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금의 고관, 즉 수정동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였던 까닭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가야리란 명칭은 이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동평면과 단절되고 대신 서면의 가야리로 되었다. 190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에 의하면, 달성 서씨가 세거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체로 16대(代)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이주해 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1959년 개금동을 흡수하였다가, 1963년 다시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가야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9년 가야2동을 다시 가야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금동>
개금동(開琴洞)의 조선시대 행정명은 와요리(瓦要里)라 칭하다가 1904년 개금리라 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리와 상대하여 경부철도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개금동이라 하였다. 이곳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토착지를 등지고 하염없이 피난길을 헤매던 어느날 푸른 산림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늑한 계곡이 뻗어 있는 이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이 장차 평화의 뿌리가 뻗어날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어 전란의 시름을 달래면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거문고로 한 곡조를 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문고를 말미암아 이곳에 살게 되었으므로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최씨, 배씨, 송씨 등이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가장 오래된 경주 최씨도 18∼19대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개금동의 명칭이 1900년 이전의 읍지에는 나타나지 않고『동래군지(1937)』에 개금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부터 개금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1959년 가야동에 흡수되었다가, 1963년 가야동에서 분동되었고, 1975년 인구의 증가로 개금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6년 개금1동에서 개금3동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감동>
당감동(堂甘洞)은 금정산의 주맥인 백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에 위치하여 있으며, 삼국시대의 동평현의 치소(治所)로 현재까지 동평현성이 남아있다. 당감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이는 동평면의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의 두 마을을 합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감리라고 고쳐부르게 됨으로서 생긴 동의 이름이다.
오늘날 당감동의 고무나무골에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데,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동으로 직선을 그어 북쪽은 과거의 당리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한다. 당리라 한 것은 마을에 오래된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순조 25년(1825)에 세운 영숙사라는 신당이 남아 있다. 감물리가 변하여 감물이 되었다는 설과 신이라는 뜻의 검물내〔神川神水〕라는 설이 있다. 이로 견주어 볼 때 감물내는 부산천을 의미하는 고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낳게한다. 당감동은 1914년 군면제 실시이후 당감동이라는 명칭을 사용되어오다가 1951년 당감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당감1동에서 동평동이 분동되었다. 1979년 당감1동에서 당감3동이 분동되었고, 동평동이 당감4동으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범전동>
범전동(凡田洞)은 조선시대 동래부의 서면 범전리였다. 범전이란 명칭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명칭이다. 이곳에 조개무지(패총)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범전이라는 명칭은 사직동의 금용산(일명 쇠미산)에서 발원하는 범천(凡川, 虎川)의 가장자리인 평지로서 논이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동래부지(1740)』의 이정조에 의하면, '연지리, 전포리, 범전리 등이 모두 동래읍성에서 같은 방향으로 11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세 마을은 인접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양정초등학교가 있는 산을 기점으로 하여 산 아래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범전동이라 하고 좌우를 각각 전포동과 연지동으로 불렀던 것이다. 1936년 동래군 서면 범전리에서 부산부 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구제실시로 부산진구 범전동으로 편입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범천동>
범천(凡川)은 오늘날의 자성대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강으로 동천(東川)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 강을 풍만강(楓滿江)·보만강(寶滿江)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풍만(豊滿)이라는 음이 변하여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동천을 범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범천의 물줄기가 원래 자성대의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유입되었는데, 자성대 부근의 매축 때 두 시내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동천이란 부산진성의 지성(支城)인 자성대 쪽에서 볼 때 성의 동편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범천은 증산(甑山)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서식하였는데, 호랑이가 이 계곡에서 자주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따라서 범천은 한자식으로 호천(虎川)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범천동이라는 동명은 범내〔凡川〕에서 유래되어 범내골을 중심으로 그 인근의 지역을 지칭하는 동명이 되었다. 1957년 구제실시로 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동구 범일4동을 진구에 편입시키면서 범천1,2,3동으로 개칭하였다. 1966년 범천2동이 범천2,4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남구의 신설로 범천3동은 남구에 편입되었다가, 1982년 문현5동에 편입되었다.

<부암동>
부암동(釜岩洞)은 부전동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옛 고대리(古代里)에서 지금의 개성중학교의 언덕바지 산인 통칭 백양산 앞의 지역을 말한다. 감물내가 시작되는 곳은 조선시대 지명으로 당리이고, 하천이 넓어지기 시작한 곳이 감물리이며, 그 아래 지역을 고대리(古代里, 古垈里)라 하였다. 감물내의 고대리 아래지역을 모두 부현리(釜峴里)라 하였는데, 이 부현리가 오늘의 부암동과 부전동으로 분리되었다. 부전동은 감물내의 동쪽 중 전포·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인데 비하여, 부암동은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암(岩)자가 붙여진 것으로 고대리와 이 마을 북쪽에 뒷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1979년 시조례에 의해 부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2년 동평2동을 부암3동으로 행정명칭을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전동>
부전동(釜田洞)은 조선시대의 경우 동래부 동평면 부현리(釜峴里)에 속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부다대현(釜多大峴)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당감동 즉, 감물리에서 지금의 부암로터리 밑인 고대리로 난 고개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날의 하마정에서 송상현 동상까지 마비현(馬飛峴)의 별칭이라는 설이다. 이중에서 부다대현은 부산포에서 다대포로 넘어가기 위해 넘는 고개로 위치상 합당치 못하며, 마비현은 광복 이후까지도 모너머고개 머나머고개로 불리어 왔다. 따라서 부현리의 지명은 감몰리에서 고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현 당감동 입구인 부암고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에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가 마치 가마솥〔釜〕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현〔가마고개〕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 같다. 이중 부현고개 아래의 범전리·전포리와 인접하는 곳을 부전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1936년 시·구명 정비 때 부전동이란 이름이 쓰여지게 되었고, 1938년 부전동을 부전1,2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54년 부전1동에서 부전3동이 분동되었다가, 1959년 부전3동을 부전1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정동>
양정동(楊亭洞)은『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황령산 아래에서 화지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양정동은『동래부지(1740)』에는 양정리(羊亭里) 라 하였다. 양정(羊亭)이란 정자는 고적조나 루정(樓亭)조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자(亭子)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의 고로들에 의하면, 양정본동 일대에는 수양버들의 실같은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곳을 버들 양(楊)으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또 양정은 양지골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양정동에서 황령산을 바라보면 세갈래 능선이 갈라져 나가고 있는데, 왼쪽은 당산능선, 중간은 평전(平田)능선, 우측은 취병장(吹兵場)능선이 뻗어 내리고 있다.
왼쪽 당산능선 아래쪽에 양지곡 골짜기가 있다. 양지는 음지의 응달에 비하여 양달이라 하여 햇빛이 많이 드는 땅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양달은 양지의 음이 높아 한자의 양(羊)으로 표기되고 지(地)는 정자골(亭子谷)이 정자꼴로 읽히는 것으로 보아 정(亭)으로 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고사하여 해제된 양정 이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으로 추정되어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양정이 양지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뒷받침 해준다 1970년 양정1,2동으로 분동하고, 1979년 양정1동을 양정1,3동으로, 양정2동을 양정2,4동으로 분동하였다. 1995년 양정3동을 양정1동에, 양정4동을 양정2동에 통합하였다.

<연지동>
연지동(蓮池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의 연지초등학교 자리이다. 이 못은 조선시대에는 신지언(新池堰)이라 불렀다. 1740년에 간행한『동래부지』에 산천조에 보면, "신지언은 동래부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길이는 2백 68척 넓이는 2백 24척이라"하여 동래부에서 둘째로 큰 제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지라는 동리명은 연못골에서 나온 이름으로 이곳 못에 연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이 못을 연지언이라 하지 않고 새못이란 뜻을 가진 신지언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 초읍동에 화지언이란 역사적으로 유래가 오래된 옛 못이 있었는데, 연지동의 못은 그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못이라는 뜻에서 신지언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기인 1947년 부산출장소 연지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 연지동과 초읍동을 성지동으로 통합하였다. 1963년 인구증가로 성지동을 다시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포동>
서면의 동천이 지금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로 올라 갈수록 동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는 서면의 북쪽인 육지쪽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말하자면 바다가 지금의 서면의 육지 깊숙이 들어서 있었는데 홍수 때면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메워진 자리가 갯가가 되고 논밭이 돼 간 것이다. 그 논밭으로는 벼와 보리, 채소들이 재배되었다.
지금은 전포동의 평지는 시가지가 돼 있지만 그때는 갯가의 밭인 밭개였다. 그 밭개가 밭 전(田) 갯 포(浦)의 전포리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의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전포동(田浦洞)의 노막리 또 농막리까지 조수가 들어 배가 많이 정박하였다고 한다. 1949년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인구 증가로 전포1동은 전포1,3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전포2동은 전포2,4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읍동>
초읍동(草邑洞)은 연지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금정산의 남북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북쪽으로 금용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연지를 지나 부산평야로, 동으로는 화지산이 서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의 작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로는 금용산(쇠미산)의 산맥이 뻗어있어 천연의 성벽을 이루는 분지이다. 이곳의 동의 명칭이 초읍으로 된 연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동평현이 생긴 후 읍의 치소(治所)를 물색하기 위해 명사들이 초읍동에 들러 보았는데, 산의 지세가 좋고 지리가 음양에 맞아 이곳을 우선 읍의 치소(治所)로 선정해 놓고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나하여 현 금정구의 두구동으로 가보니 역시 산세가 좋아 두고 보자한 후 현 동래성에 들렀더니 동으로는 학소대와 남으로는 대조포란형(大鳥포卵形)이 서울 장안의 산세와 같으므로 이곳을 읍치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먼저 초한 곳이란 뜻에서 초읍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호사가들의 일담에 지나지 않고 실제는 새터가 원래의 고을 이름인 것으로 파악된다. 초읍은 초량을 '새뛰'라 부르는 것과 같이 초는 새로 읽히며 읍은 량·탁·벌·성 등의 터로 읽혀 '새터'로 불릴 수 있다. 새터는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뜻이다. 즉, 동평현의 치소(治所)가 지금의 당감동 부근이었는데 고려후기 이후 빈번한 왜구들의 침입으로 동평현이 피폐해지자 천연의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새터 즉 초읍으로 불렀던 것으로 풀이된다. 초읍동은 조선후기 동래부 서면 초읍리에 속하였고, 그후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2년 연지동과 함께 성지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62년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구

<구포동>
구포동(龜浦洞)의 옛 지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구(龜)를 갑우 또는 거뵈로 보아 '거뵈개'라는 설과 구(龜)를 검(神)으로 해석하여 '굿개'라는 설이 있다. 또한 정인보는 가야란 반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낙동강에 붙여진 강물 이름을 의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물줄기는 반도의 동서(東西) 중간을 뚫고 흘러내리므로 '갑우내'라고 부르던 것이 '갑우'는 곧 정중의 뜻으로 지금의 '가운'의 원래 말이며 가야는 곧 갑우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의 산천 이름으로는 아직 옛날 호칭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있는데, 김해의 구지봉이 '거뵈티'이고 '거뵈'가 곧 '가뵈'이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가 구포인데, 구포는 '거뵈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포를 굿개로 보는 견해는 고대의 제사인 굿을 하는 나루란 뜻이다. 굿은 원시신앙 또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중심세력이 있었던 지역의 중심행사의 하나이다. 따라서 구포는 굿개이니 옛날 제사가 행해지던 장소의 하나로 상징될 수 있다. 또한『양산군지(1899)』에 나와 있는 구포에 관한 기록을 보면, '감동진 일명 구포라고 하여 구포를 감동나루'라고 불러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감동(甘東)이란 신의 뜻이므로 구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1896∼1904년에는 양산군 좌이면에 속했다가, 1910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동래군으로 1918년부터는 좌이면을 구포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1943년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가 1963년 구포동으로 이후 인구의 증가로 1979년 구포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94년 구포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곡동>
금곡동(金谷洞)의 금곡(金谷)이라는 이름은 금정산에 골이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이라는 뜻은 흔히 '쇠실'로 풀이하는데, 이같은 마을 이름이 붙은 것은 전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편, 금곡동의 금은 고어에서 '쇠'로 발음되는데, 쇠의 뜻인 동(東)·백(白)·신(新)이 될 수 있다. 금정산에서 떠오르는 해를 따라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할 수 있으나, 금곡동 율리에 신석기시대 이래의 유적이나 당산·성혈 등이 있는 점을 보면 금곡동의 금(金)을 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금곡동 율리의 주민 가운데에는 이 마을에 옛날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율리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신의 뜻에서 온 마을 이름이 더욱 확실하다. 이렇게 본다면 금곡이나 율리는 말은 다르나 같은 뜻이 될 수도 있다.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부터 금정산의 서쪽 골짜기에 금(金)이 나오는 곳이 많으며 삼박골 등 곳곳에는 금맥을 찾아 뚫은 굴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금이 많이 나오는 골짜기라 해서 금곡동이라 했다고 한다.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으로 동래군 구포읍 금곡동이 부산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천동>
덕천동(德川洞)은 원래 속등 또는 숙등(淑嶝)마을과 남산정(南山亭)·의성(義城)· 기찰(譏察)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구포에 포함된 지역으로 불리어지기도 했으나, 마을 이름은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마을은 문헌상에 덕곡촌(德谷村)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낙동강변의 덕천천(德川川) 하구에 자리잡은 덕천동은 한 동안 구법곡(仇法谷)이라고도 불렀으며, 감동포(甘洞浦) 또는 감동진(甘洞津)이라고도 하여 구포에 포함시켜 불리기도 하였다. 덕곡천이라는 마을 이름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이며 아마도 만덕사와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덕천동은 만덕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리고 숙등·남산정·의성 등의 마을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숙등(어떤 지도에는 속등이라 기재)은 수정(戍亭)에서 나온 이름이 와전되었을 것이며, 남산정 역시 구포왜성이나 금정산성과 관련된 이름일 것이다. 의성마을도 구포왜성을 의성이라고 부른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보인다. 덕천동은 새로운 주택지로 변모하면서 아파트 신축과 인구가 급증하여 1983년 덕천1,2동으로 분동되고, 1992년 덕천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덕동>
만덕동(萬德洞)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이에 따라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만덕동에는 옛부터 기비현(其比峴) = 사비현(射比峴)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낙동강연안에서 동래로 통하는 이 고개는 동래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길이 워낙 높고 험하고 숲도 많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에 따라 이곳은 장꾼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동래부 관내에서 도둑이 심하기로는 만덕고개가 으뜸이고, 다음은 모너머고개(송상현공 동상이 있는 고개)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혼자 만덕고개를 넘는 것을 겁내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만덕사를 만덕동에 지금 남아 있는 사지를 그 만덕사 텃자리로 본다. 그 만덕사로 인해 만덕고개란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만덕동은 신도시로 인구의 급증으로 1989년 만덕1,2동으로 분동되고, 1990년 만덕3동이 분동되었다.

<화명동>
화명동(華明洞)은 검얼뫼 또는 새얼뫼라고 해석되는 금정산을 배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금정산 계곡에서 강변에 이르는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다. 화명천은 일명 대천천이라고 부르며, 하류에 위치한 대천마을의 이름도 이 시내에서 따온 것이다. 화명동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고대부터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화명은 해붉이〔日明〕에서 온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해가 화(華)가 되고, 붉이 명(明)이 되었을 것이다. 화명동에는 화명이란 마을 이름이 없으며 화잠(華岑)이 제일 가까운 이름이며 조선시대나 최근세의 기록에는 양산군 또는 동래군의 좌면 또는 좌이면(左耳面) 화잠리(華岑里)로 나와 있다. 화명동은 북쪽부터 대천(大川)·와석(臥石) 또는 화잠(華岑)·용당(龍堂)·수정(水亭)의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래군 좌이면에서 부산시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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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구

<감전동>
낙동강에 조성된 삼각주의 북쪽은 삼락동에 속하고, 남쪽이 감전동에 속하는데, 이곳은 습지로 쓸모 없는 땅이었으나 사상공단 조성으로 매립되어 공장지대로 부산의 대표적인 공단지대로 바뀌었다.
『동래부지(1740)』의 기록에는 사천면 상단(上端) 장문리지역 이었고, 『동래부사례(1895)』에 감동리(甘洞里)이란 지명이 처음으로 보인다. 감전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원래는 감동(甘東)마을로 감동촌 또는 감동리(甘洞里)로 불러왔다. 감동(甘洞)의 어원은 '검도' '검터(劒瀆)'이다. 검은 '감, 곰, 금' 등으로 호전하여 신(神)이란 뜻이며, 동은 독(瀆)으로 제방, 둑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부터 우리 나라에는 곰(熊)이라는 동물을 토템으로 삼아 신성시하며, 이를 곰이라 불렀다. 오늘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곰이란 말은 곧 신(神)이란 말이된다.
감전동의 이름의 유래는 농토가 비옥하여 감전(甘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속설이 있는 듯 하나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옛날부터 마을의 명칭이 생기는데는 더 깊은 전통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중에는 '감'이라는 말이 붙는 곳이 많고 대개 '감(甘)'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흔하다 부산만 하더라도 당감동(堂甘洞)· 감천동(甘川洞) 등에서도 알 수 있다. 1978년 8월 공업지대로 발전하면서 급증하는 인구증가로 감전1,2동으로 분동하였다.

<괘법동 >
괘법동(掛法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사천면 상단 괘내리로 그 이후 계속해서 괘내리로 불리게 된 지역이다. 1901년(광무 5)의 기록에는 사상면에 냉정촌·주례촌·감동촌·괘내촌·덕포촌·모라촌 등 6개 촌이 기록되어 있어 촌과 리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괘법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괘내(掛乃)마을이 제일 먼저 생기고 뒤이어서 두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동쪽의 것은 동괘(東掛), 서쪽을 서괘(西掛)라 한 것 같다. 괘내는 괘법동의 서쪽을 흐르는 작은 내를 중심으로 개(海)를 흐르는 내(川)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이 고인 곳'이 '물이 괸 곳'이므로 이곳을 '괴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며, '괴'를 한자로 적자니 괘(掛)가 된다는 것이다. '개'나 '괴'가 '괘'가 될 수 있는 것 처럼 비약적으로 '계(桂)'가 된 경우도 있다.
괘법이란 동명은 괘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닷가나 강가에 있는 마을 또는 물이 고여 있는 마을이란 말로 추정되며, 사상 팔경대의 법곡(法谷)과 같이 붙여져 얻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괘법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1975년 구포 및 사상출장소의 통합으로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 북구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행정구역개편으로 사상구로 분구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포동>
덕포동(德浦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상단 덕포리(德浦里)의 기록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포는 옛이름이 '덕개'이며 덕(德)을 득(德)으로 발음하였다. 덕은 '언덕' '두덕' '부'의 차자(借字)로 옛부터 지명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득개', '덕개'는 '언덕개'라는 말이며 언덕에 있는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언덕 끝에 배를 대는 포구에 '득포 또는 덕포'라는 이름이 붙는다.
지금의 덕포동에는 낙동강을 향하여 길게 뻗어나온 긴 동산이 한 곳밖에 없다. 즉 상강선대와 하강선대의 중간 간선도로변에 있는 바위 언덕이 그것이다. 이곳이 바로 언덕개 즉 덕포동의 원위치가 되는 셈이다.
이 언덕이 바로 동리의 포구였고 여기에서 동리이름이 덕포동이 된 것이니 이곳이 퍽 유서깊은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바위에는 강물의 침식을 받은 흔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해안석(海岸石)인 셈이다. 1982년 아파트가 신축되는 등 인구의 증가로 덕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

<모라동>
모라동(毛羅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모라리(毛羅里)에 속한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래부읍지(1832)』에 의하면, 사천면이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분리되면서 사상면 모라리가 되었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모라'를 '모란'이라고 변음하여 부르며 모라동의 뒷산기슭에 옛날에 모란(牧丹)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동리이름을 '모란'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라'라는 말은 '마을'이라고 우리말의 고대어(古代語)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집회소(集會所)가 있고 이 집회소의 명칭이 '마을'이며 이것이 촌락의 명칭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회소를 사용하던 건물이 후세에 내려오면서 지방에 따라 도청(都廳), 공청(公廳), 모정(茅亭)으로 변하고 그 뒤에는 집이 없어졌어도 정자나무 밑에 모여서 마을일을 의논하였다.
'정자나무'라는 이름은 그 식물명이 아니라 집이 없더라도 정자에서 모였던 것처럼 동민이 고목밑에 모이는 곳이라는 뜻에서 부른 것이다. 이 집회소를 우리말로 '마을' '모을' 또는 '말' '몰' 또는 '마슬' '마실'이라고 했으며 동시에 집회소가 있는 촌락을 같이 말하게 된 것이다. '마슬' '마실'은 마을의 변음이다. 1991년 9월 시조례로 모라1,2동으로 분동되고, 1994년 신라대학의 이전과 신흥 주택지로 변모되어 모라2동을 모라2,3동으로 분동시켰다.

<삼락동>
삼락동(三樂洞)이라는 지명은『동래부지(1740)』는 물론 이후 읍지의 어느 곳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낙동강 하구지역은 갈대밭으로 삼락동이 육지로 된 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삼각주가 형성되어 사주가 굳어져 사람이 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좁은 사주가 있었는데 이곳을 유두(流頭)라 하였고 이강을 유두강이라고 했으며, 유두동(流頭洞)이 여기에 있었다. 1932년 사상제방의 축조로 이곳의 유사퇴적으로 이루어진 농토는 비옥하여 영농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68년 이 지역의 공업단지 조성과 강변도로의 개통으로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삼락동의 유래는 사락(砂礫)에서 온 것으로 보이며, 낙동강변 서쪽에 형성된 삼각주에 위치한 까닭에 삼락동이란 동명을 가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락이란 세 가지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군자의 삼락(三樂)과 인생의 삼락의 두 가지가 있다. 군자의 삼락이란 부모가 함께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대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 그리고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진심상편(孟子盡心上篇)에 있는 말이다.
삼락동은 앞에서 말한 사락(砂礫)의 뜻에서 온 삼락이지만 이 말의 뜻이 공자와 맹자의 글에서 좋게 나와 있어 동명으로는 적정한 것으로 보인다. 삼락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가 되었다가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엄궁동>
엄궁동(嚴弓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엄광리(嚴光里)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상면 엄궁동(嚴弓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엄궁동의 유래에 관하여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낙동강에서 바라본 동리의 모양이 활과 같아서 활궁을 붙여서 엄궁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궁(弓)'은 그렇다 치더라도 '엄(嚴)'에 관하여는 설명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설에는 엄광산은 '엄비치산'으로 해가 먼저 비치는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엄궁(嚴弓)은 엄광산의 엄광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설은 엄광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엄광'일 것인데 이것이 잘못 전하여 '엄궁'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산기슭에 생긴 마을의 이름이 그 산의 이름과 같이 통칭되는 예는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보기 어려우며, 부산의 경우 여러개의 산이 있으나 그 산 이름이 마을이름이 된 예는 없다. '암·엄'의 궁극적 어원이 '곰', 즉 '신'이며 곧 여신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엄궁이라는 동명의 뜻은 신성한 신의 마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엄궁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 진구의 사상출장소,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례동>
주례동(周禮洞)은 '주례(周禮)'라는 말의 어원은 '두리'로 파악되고 있다. '두'와 '주'가 같은 음이며 '리'가 '례'로 적힌 예도 있다. '두리·도리'는 지명이 되어 불리우는 경우 대개 '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몇가지 예를 들면 충청도의 주현(周縣)·주성산(周城山), 강원도의 주진(周津), 전라도의 주로치(周路峙), 함경도의 주원(周原) 등이 그것이다.
또한『삼국사기』김유신전에는 일작 두솔(兜率)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두리·두루‥'에서 온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두레'는 한 마을의 농사를 힘을 합하여 이른바 '품앗이'를 하고 농악을 중심으로 결속하며 농촌사회의 공동체를 이루는 단체였으며 이 '두레'가 한자로 표기된 것이 '주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동래부지(1740)』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주례리(周禮里)라 하여 부의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례동의 위치가 동평현의 현치(縣治)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나오다 낙동강변으로 도는 곳에 있으므로 해서 이런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하고, 또 낙동강변에 있기 때문에 변(邊) 즉 가(邊)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11월 시조례에 의해 주례1,2동으로 분동, 1992년 아파트의 신축 등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주례1동은 주례1,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장동>
학장동(鶴章洞)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사천면 상단 장문리(場門里)가 나오는데 '장문리는 부에서 35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광산 기슭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주례동과 학장동을 동서로 이어진 학성(鶴城)이 있었다. 엄궁동쪽에서 주례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두레재' '두루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두루재'에 마을이 들어서고 그 마을 명칭을 '두루재'를 한자로 '학성(鶴城)'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학성을 '두루잣'이라고 하였는데 '드르잣(野城)과 음이 비슷하나 지리적 사정으로 보아 '드르'가 '두루'일 것이다. 또한 장문리(場門里)에 있었던 장문시장(場門市場)이 유명하였다 한다.
학장동에는 자연마을인 장문리(場門里)·구덕리(九德里)·학성리(鶴城里)가 있었으며, 학성리와 장문리 두마을 합하여 학장동(鶴場洞)이라 했다가 장(場)을 보다 부르기 좋은 장(章)으로 바꾸어 학장동(鶴章洞)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장동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유적 발굴을 통해 도로변에서 김해문화(金海]文化) 토기편을 발견하였고, 또한 학장동 조개무지는 낙동강 하구지역에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금관가야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보인다.
학장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사상출장소에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고,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속했고,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하구

<감천동>
감천동(甘川洞)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이며, 감(甘)은 '검'에서 온것이며, 검은 '신(神)'이란 뜻이다. 천(川)은 '내'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그 이전에는 '內'로 적혀 감내래리(甘內來里)이며, 지금도 지역의 노인들은 감천이라고 하지 않고, 감내(甘內 또는 甘來)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혹은 감천은 물이 좋아서 감천(甘泉) 또는 감천(甘川)이라 했고, 많은 선박들이 옛날에 이곳에 들어와서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검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내는 한자어로 '천(川)·양(壤)·내(內)·내(乃)·군(郡)' 등으로 적히며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감천(甘川)이란 말의 뜻은 신읍(新邑)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갖는 지방에서는 대체적으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마제석기(磨製石器)를 볼 수 있으며, 소도(蘇塗)와 같은 신성시되는 곳이나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감천동에서는 검내의 마을 이름에 걸맞게 지석묘 6기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부족사회의 어떤 권력자가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감천(甘川)이라 하여 모든 선박들이 이곳에서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나 이는 검내를 감천(甘川)이라 표기하고 천(川)을 천(泉)으로 잘못 표기한 것에 맞추어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감천에서 선박들이 급수한 사실은 후세에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들어 감천(甘泉)또는 감천설(甘川說)을 주장할 수 없다. 감천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 서면(西面)에는 감천리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감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

<구평동>
구평동(舊平洞)의 본동은 속칭 "구서평(舊西平)"이다. 뒤에 "성개에 축성이 되고 이곳을 서평진" 이라고 부르면서 원래의 서평은 구서평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개는 구서평리에 속하는 곳이다. 진보(鎭堡)가 성개로 옮기기 전에는 구서평리에 있었는데 여기 토성지가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토성이 언제 쌓아지고 이곳에 진성(鎭城)이 언제부터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토성의 상태나 거기에서 출토되는 신라토기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이미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 같다. 서평진은 다대진과 더불어 해륙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구평동은『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서면 하단으로 독지리(禿旨里)에 속한지역으로, 이곳 독지장(禿旨場)은 동래·부산·좌수영장과 함께 조선시대 유명한 장이었으나, 장이 있었던 장소와 행정범위 등을 잘 알 수 없다. 한말에는 동래부에서 부산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의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괴정동>
괴정동(괴정동)은 사람들이 살기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괴정동의 뒷 줄기인 속칭 '아래머리' 구덕산을 '용호부리'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낙동강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를 이렇게 부르며 풍수지리설에서 온 이름인 듯하다. 구덕산의 강안(江岸)에 뻗은 말맥(末脈)이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폭풍과 낙동강을 불어 내려온 강풍을 막아주고,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티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의 괴정동을 옛날에는 목장리라 했다. 이 괴정동 주위는 조선시대에는 국마(國馬)를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이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목장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던 모양이니 괴정동을 목장리라고 부르게까지 되었고, 지금의 희망촌 일대를 마꼴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다대포첨사가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이었는데 어느 감독관 때 감목행위가 너무 지나치게 가혹해서 마을사람들이 팔정자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입었다고 한다. 그 팔정자나무의 하나가 지금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인데 이 나무가 있는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이 괴정으로 괴정동이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14년 대티동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그때 부산부에서 동래군 사하면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의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59년 괴정1,2동으로 1965년 시조례에 의해 괴정1동을 괴정1,3동으로 분동하였다.
1979년 8월 괴정1동이 괴정1,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대동>
다대동(多大洞)은 우리나라 기록인《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일본서기》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5년기의 다다라노쯔하 계체기(繼體記)에 나오는 다대라원(多大羅原), 그리고 추고기(推古記)에 나오는 다다라(多多羅) 등이 상고시대부터 다대진(多大鎭)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다대포와 일치되는 지명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낙동강 주류가 불아미(佛岩)·가락(駕洛) 명호(鳴湖)로 흐르는 줄기였다고 보는데서 다대포에서 대저(大渚)에 이르는 일대를 다대진으로 표현했을지 모른다. 또 일설에는 다대진은 지금의 다대포가 아니라 장림포라고 하기도 하는데 모두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또『일본서기』계체(繼體) 23년조에는 이사부(異斯夫)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다다라원(多大浦)에 머물면서 웅촌(熊村) 등 4촌에 내주(來駐)한 왜병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다다라(多多羅)는 다대포의 원래 명칭이다라고 한다. 이 밖에도 다다라는『일본서기』민달 4년기와 추고 8년기에도 나오는 바 모두 다대포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다대포는 역사시대 초기부터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일통상외교의 주요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대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의하면, '다대리는 부의 관문으로부터 5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조선후기 이후에 와서는 군사적인 중요성으로 보아 상당히 큰 촌락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이었다가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92년 9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다대1,2동으로 분동되었다.

<당리동>
당리동(堂里洞)에는 제석골(帝釋谷)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다. 이 계곡에 제석단을 쌓고 기우제를 드린데서 붙여진 듯하며 일설에는 제석골에 사당을 짓고 여신을 모신데서 온 것이라는 속설도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제석사라는 사찰이 있고 기우제(祈雨祭)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절 부근에서는 고려시대의 목엽문와편(木葉文瓦片)이 발견되었으며 그 밖에는 별다른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누석단(壘石壇)도 있어 민속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이 마을 뒷산까지 괴정의 목마장이 뻗어 있는데 이 부근에서는 성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제석이란 불교용어로 제석곡이란 이름이 붙은 곳도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이런 곳에는 대개 기우제단이 있다.가까이에는 아치섬을 제석곶이라고 하며 여기에도 역시 기우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제석곡에 사당이 있어 지난날에는 여신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신주를 모신 당집의 곳이라 하여 당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리동은 1914년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서구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 사하구의 승격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평동>
신평동(新平洞)은 신평동(新坪洞)이라고 기록된 적도 있으며 북쪽에 강한 강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지고 앞에는 낙동강이 만입(灣入) 되었던 곳에 간척지가 전개되어 있는 밝고 따뜻한 마을이다. 신평동은 망후촌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유래의 하나는 조선중기 임경업 장군의 조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는 구전때문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영의정 김자점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당했을 때 그의 조카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려고 올까 봐 뒤를 돌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망후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신평동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마우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 위치로 보아 다대진(多大鎭)의 후망소(侯望所)였던 까닭에 망후촌(望後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은 원래 모래 등이 많아 어패류가 많이 잡힌 곳이나, 1939년 이곳에서 장림까지 제방을 쌓아 강의 만입부(灣入部)가 농지로 변했다. 신평은 '새로운 평지'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새마을, 신촌, 새벌, 새마 등과 통하는 지명으로 파악된다.
신평동은『동래부지(1740)』에는 보이지 않고,『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 신평동이란 행정지명이 처음으로 기록이 보인다. 1992년 9월 시조례에 의해 신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장림동>
장림동(長林洞)은 자연마을로 안장림(安長林)·바깥장림(外長林)·보덕포(補德浦 ; 부득포 또는 비득포)의 3개 마을이 있다. 외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형태를 갖추고 반농반어의 취락형태를 이룬 조용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안과 밖 장림이 주택으로 이어졌으나, 원래는 안장림이 옛날의 장림이며 바깥장림은 부산과 다대간의 도로개설 이후 도로변에 새로 집들이 들어서서 생긴 마을이다. 보덕포는 안장림에서 두송산 줄기가 북쪽으로 끝나는 능선을 넘어 낙동강 강가에 가면 응봉봉수대의 북쪽 기슭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장림이란 숲이 우거진 곳이라기 보다는 지형적으로 아미산 둘레에 길에 늘어선 동네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보인다. 장림이란 지명은『동래부지(1740)』에 사천면 하단에 장림리로 다대진(多大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고다대(古多大)라 전해지기도 하였다. '장림리는 관문으로부터 4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촌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 장림동이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83년 10월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시조례에 의해 장림1,2동으로 분동되었다.

<하단동>
하단동(下端洞)의 옛 마을 이름은 평림리(平林里)라고 불린 일이 있으며 하단리라고 불리기도 했다.『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래군 사천면을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는데 上端을 사상지역이고 下端은 사하지역이다 그런데 당리·괴정리·감천리· 구평리·신평리·장림리·다대리를 모두 사천면 즉 하단이라 하였다.
동명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구덕산이 용호몰리(용호머리)이고 거기에서 강을 향하여 괴정 뒷산줄기를 이루어 뻗은 곳이 아래몰리(아래머리)이니 아래몰리의 끝이 아래치로 불려졌다는 설이다. 또는 낙동강류의 맨 아래쪽이라는 뜻에서 아래치 혹은 끝이라는 데서 하단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또 한가지는 사천면(沙川面) 하단중에서 인구가 가장 번창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사천면 하단의 지명이 이곳에 붙게 되었다는 설이다.
일설에는『동래부지(1740)』에 기록된 구초량을 하단을 이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구초량리는 관문에서 3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하단 지역들이 관아와의 거리가 '40리'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거리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1914년 하단동이라 하여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75년 사하출장소에 1983년 사하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하단1,2동으로 분동되었다.


서구

<남부민동>
남부민동(南富民洞)은 부민동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 남부민동으로 분리하여 나온 동이며, 본래는 부민동과 함께 부민포(富民浦)로 불리우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의 옛 이름은「샛디」인 셈이다. 일부에서는「샛디」를「신성(新姓)」이라고 풀이하여 구초량을 하단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샛디는 초량이라는 뜻으로 구초량을 의미한다.「샛디」는 남부민동과 초장동 일대의 옛 지명이며,「샛디재」는 충무로 광장에서 송도로 가는 윗길 입구의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송도로 가는 아랫길은 없었고, 또 송도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송도로 가려면 배를 타지 않는 한 이「샛디재」를 넘어가야 했다. 이 지역의 古老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이 곳을「샛디」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14년 앞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터를 만들었는데, 이 때 부민동 남쪽에 있다하여 남부민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남부민동으로 바꾸었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남부민1,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남부민 2동을 2, 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대신동>
동대신동(東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 「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동대신동은 1926년 동대신정과 서대신정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 1947년 일제식 명칭만 바꾼 동대신동 1,2,3가로 불리우게 되었고, 1959년 1월 동명개정 때 동대신1,2,3동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민동>
부민동(富民洞)은 보수천 하구일대로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예로부터「샛디」라고 불러왔다.「샛디」는 초량(草梁)이란 말로 해정리(海汀里, 지금의 초량)까지도 초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인가가 매우 적은 시대이긴 하지만 이 넓은 지역을 모두 초량이라고 부르기에는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정리를 신초량리라 하고, 원래의 샛디는 구초량리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지명은 개항(1876년) 당시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부임(1864년) 하여 같은 고을에 똑같은 초량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신초량을 부민동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부민동이란 이름의 유래는 보수천 하구의 부민포에서 따온 것으로 보여지며, 부민포는 부산부곡의 옛 명칭이 부산(富山)이며, 부산부곡의 사람들이 쓰던 포구라는 뜻으로서 부민(富民)이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추측된다. 또한 부민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곳이 천석(千石)을 하는 부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90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수천을 경계로 부민동에서 부평동이 분할되었고, 1925년 4월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여 1983년 7월 창원으로 이전하여 갈 때까지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부용동>
부용동(芙蓉洞)은 시약산에서 근원한 계류가 서대신동 중앙을 지나 지금의 부민초등학교 뒤쪽을 돌아 보수천으로 빠지는 냇물과, 아미골짜기에서 근원한 계류가 지금의 토성중학교 뒤쪽을 거쳐 보수천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그 작은 계류들로 인하여, 이 일대는 마치 시냇물에 둘러싸인 섬처럼 보이는 지대였다.
이와 같은 보수천가의 섬같이 생긴 형태로 말미암아 원래 행정구역상 부민동에 속하던 곳이지만 최근세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통칭되었으며, 일제시기에는 중도정(中島町)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1947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의 동명으로 개칭할 때 부용동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원래 행정구역상 부민동이었다가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부민의 부(富)라는 글자와 부(富)를 상징하는 부용화(芙蓉花)를 동시에 고려하여 지은 동명인 듯하다.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부용화가 많이 피어 있어서 부용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부민동에 통합되었다가, 1962년 부민동에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대신동>
서대신동(西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 「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대신동은 1926년 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 일제식 명칭만 바꾸어 서대신동 1,2,3가로 부르게 되었다가, 1959년 동명개정 때 서대신1,2,3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70년 서대신3동을 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미동>
아미산의 아미동(峨嵋洞)이다. 그러나 아미산은 아미골이란 골짜기 이름이 먼저 나고, 그 골짜기 이름에서 아미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긴 뒤 아미산이란 산 이름이 생겼다. 그렇게 마을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생겼지만 마을의 이름과 산의 이름이 같음으로 마을과 산은 보다 분명해진다. 아미동의 본래의 아미의 뜻은 지금의 아미동 지역에서 내려다보는 토성동의 옛 토성이 반월형이 되어서 누에나방이 가진 예쁜 눈썹 같아서 미인을 가리켜 아미라 하는 그 아미로 미화된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이곳에 있던 토성의 모양인 반월형을 후세에서 아미월(峨眉月)이라 부른데서 아미골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미월이란 음력 초사흘 날인 초생달을 말하며 반월성의 모양이다. 아미란 누에 나방처럼 예쁜 눈썹을 가진 미인을 말하는데, 이 눈썹 모양이 초사흗날의 달 모양이라 한다. 아미골이라는 말이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나 동명이 고려 이후에 생겼다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진다.『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구초량리 지역이었다가 1866년(고종 3) 사하면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부민동 일부를 곡정(谷町) 1,2정목(丁目)이라 하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아미동 1,2가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암남동>
암남동(岩南洞)은 장군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천마산 남쪽 기슭에서 해안까지의 송도(松島)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암남동에는 원래 세칭 혈청소라는 곳의 옆에 모짓개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모짓개 마을이 암남동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겼으며, 당시 다른 지역에는 인가가 거의 없었으며, 후일에는 모지포(毛知浦)라고 불린 곳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마을을 모치포·모짓개·모지포 등으로 부르고 있다.
암남동이란 동명은 과거 동래군 사하면 암남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 기록에 암남(暗南)으로 적혀 있는 곳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음에 맞추어 한자를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경우「암남」은「아미골」의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南)이라는 말이 붙은 것을 보면, 그렇게 오래된 이름은 아닐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인가가 들어서 살기 시작한 조선후기부터라고 생각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시세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구제 실시로 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장동>
조선시대 때 지금의 천마산·아미산·시약산·승학산으로 이어진 산지에는 옛날 조정에서 운영하던 목마장으로 다대포첨사가 관장하고 있었다. 천마산의 산 이름만 해도 용마가 초원이 좋아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따라 생겼다고 한다. 동리에 구전되고 있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초원이 좋아서 용마(龍馬)가 하강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초원이었다고 하여 초장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초장동 뿐만 아니라 주변일대가 거의 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운영하는 목마장이었다.
초장동이란 이름 역시 초원의 장(場)인 초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초장정(草場町)이란 기록은 일제 때인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다. 광복 이후 1947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동명으로 개칭 때에 일제식 지명이 아니라 하여 그대로 초장동1,2,3가라 하게 되었다. 1957년 1월 시조례에 의해 초장동1,2가는 토성동에 병합시키고, 3가를 초장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무동>
충무동(忠武洞) 지역은 원래 부민포에 속한 해변이었다. 대정공원(大正公園, 충무동초등학교 자리)이 1918년 설치되면서 그 아래 광장이 생겨났으며 이 곳이 유명한 충무동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도로 개설로 인해 로터리가 생겼다. 로터리가 되기 이전의 충무동광장은 당시 부산에서 가장 넓은 지대였기 때문에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는 집회 장소였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모든 행사와 집회 등이 자주 자주 개최되었다. 따라서 이 광장은 부산의 심장부와도 같은 자리로서 이후 남쪽해안과 서쪽해안이 매축되고 시가지가 번창하면서 이곳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일제시기 한때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 소화정(昭和町)이라 불리었다. 1947년 우리식 동명으로 개칭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고 충무동로타리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충무동의 지명은 일본인이 물러간 후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서 지은 이름을 일본을 무찌른 장군의 시호를 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1959년 동경계 조정으로 충무동1,2,3가는 중구 남포동에, 충무동4가는 서구 충무동으로 편입, 충무동5가는 남부민동에 편입되었다. 1982년 완월동을 충무동에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성동>
토성동(土城洞)이란 동명은 이곳에 토성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토성은 아미동 구 화장장 부근을 중심으로 아미골 아래쪽에 반월형으로 축조된 성으로서 현 토성중학교 부근을 통과하며, 성내 면적이 3∼4천평 되는 반월성이다. 성의 높이는 4∼5척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성의 모양이 반월형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성은 1906년 일본거류민단에 의해 설립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고 전신)를 현 토성중학교 자리에 신축할 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토성초등학교 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차례로 들어서서 현재는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단편적으로 토성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아미동 중턱에 올라서서 이 부근지대를 관찰하면 토성이 둘러졌던 높은 지대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대마도 문서인『초량화집』에 보면, 이곳에 토축성(土築城)이 있다고 하나, 이 성의 양식이 일본성의 축조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월성이므로, 옛부터 전하여 오는 토성을 일본군이 진소(鎭所)로 이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토성동이란 이름은 바로 이 토성에서 비롯된 것이 명확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민동 일부를 분할하여 토성정 1,2,3정목이라 하였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일제식 명칭이 아니라 하여 토성동1,2,3가로 고쳤다가, 1959년 1월 시조례에 의해 초장동1,2가를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영구

<광안동>
광안동(廣安洞)에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알수 있는 기록은 없다.『동래부지(1740)』에 보면, 광안리의 기록은 없고 '남문외리는 부에서 1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남촌면 축산동에 속하던 지역이다. 1903년에는 동래부 남상면 광안리라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수영중학교 부근을 장대골이라 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시설의 하나인 장대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라 한다.
또한 성분도치과 병원부근을 범바위골이라 하였다. 범의 형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무렵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바위를 보고 범이 나타난줄 알고 혼비백산 기절하여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이후부터 이곳을 범바위라 불러 지명으로 전래된 듯하다. 그러나 이 지명은 지금의 광안동 전체를 일컫는 것은 아니고 일부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보인다.
일제시기 구획정리로 수영동이 수영성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나머지 지역의 덕명(德名)으로 지었는데, 광안동 지역은 해안과 모래 벌판을 가진 곳이라 넓은 해안이란 뜻의 광안(廣岸)이라 이름 짓는 것이 옳으나 풍수상으로 보아 광안(廣安)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이곳은 경상좌도의 수군들이 바다를 방어하던 곳으로 바다가 널리 평안하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있다. 1975년 10월 광안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9년 8월 광안1동이 광안1,3동으로, 1982년 9월 광안2동이 광안2,4동으로 분동되었다.

<남천동>
남천동(南川洞)은 금련산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내(川)인 남천에서 비롯된 지명이다.『동래부지(1740)』의 산천조에는 남천이 없으나, 각면각리원근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남촌의 1동 15리중에 남천리가 있으며 동래성으로부터 20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남천포가 보이는데 "동래부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어장이 있다"고 적혀있다. 금련산(金蓮山)에서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쪽으로 내리는 내가 남천이다. 이 남천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지금의 남천동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에는 남천포였다.
古老들에 의하면, 남천동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00년 전이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금련산 기슭의 가장골에 언제부터 있어왔는지 모르지만 동제당이 있었는데 일제시기 없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수리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53년 진구 대연출장소에 속했다가 1975년 10월 남구승격으로 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3년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남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 

<망미동>
망미동(望美洞)은《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남촌면의 북문외리·서부리에해당하는 지역으로 이 일대는 넓게 보아 수영지역에 포함되나 수영동의 설치에 따라 배산(盃山)주변은 망미동으로 칭하게 되었다. 망미동이란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배산은『동래부지』산천조에 척산(尺山) 또는 배산(盃山, 또는 盈山)이라고 불리며, 산 위에는 김겸효(金謙孝)가 살았다는 겸효대(謙孝臺)가 있다고 전한다. 배산의 연산동 기슭에는 배미산신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어 지금도 주민들은 이 산을 배미산(盃美山)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에 있는 산을 망산(望山)이라 하는데 망미동은 망산의 망(望)과 배미산의 미(美)자가 합쳐서 된 동명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망미동은 동래부의 고읍성(古邑城)이 있던 자리로 좌수영성의 북문 밖에 위치하며, 좌수영의 수사(水使)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올렸는데서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의 망미인(望美人)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1979년 1월 수영동에서 분동하여 망미동이라는 동이 생겼으며, 1982년 9월 신흥주택지의 조성으로 망미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락동>
민락동(民樂洞)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인근 수영동에 경상좌수영이 설치된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동래부지(1740)』나 그 이후의 다른 읍지에도 민락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시기 구획정리로 수영동이 수영성을 중심으로 구획되자, 이때 덕명(德名)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따라서 민락(民樂)은 여민동락(輿民同樂) 여민해락(輿民偕樂)의 준말로 임금은 즐거움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수영의 진산(鎭山, 지금은 백산이라는 산으로 추측된다) 앞의 동리이며 수영강의 어귀를 점한 유상처였던 까닭에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치라는 데서 붙여진 동명으로 풀이된다. 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가 수졸을 호령할 때 진산에서 군악을 연주했는데 동네의 고로들은 이 군악이 연주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것이 옳다고 하기에는 그 의미가 부족하다. 1957년 1월 동래구 수영출장소 민락동이었다가 1975년 남구의 승격으로 남구에 소속되었다. 1995년 수영구 분구로 수영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영동>
수영동(水營洞)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절도사영의 약칭으로 관아명(官衙名)이 동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된 것이다. 경상좌수영은『동국여지승람』이나『문헌비고』를 고찰해 볼 때 조선 태종 이전에는 부산의 감만포에 있었으나 태종 때 이를 울산 태현면(太峴面)의 개운포로 이전하였고, 이후 다시 동래 해운포는 오늘의 좌수영의 구성지(舊城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사천(絲川)의 홍수로 말미암아 수로가 매몰되어 병선의 출입과 정박이 불편하여 인조 때에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효종 3년(1652)에 다시 오늘의 좌수영에 옮겨 고종 32년까지 약 250년간 존치하였다. 수영에는 주위 1193, 높이 13척의 수영성이 쌓여져 이 성의 내부만을 수영동이라고 하였다가 점차 확대되었다. 지금의 수영동에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 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을 줄여서 '좌수영' 또는 '수영'이라 했다. 일반적으로 수군진영을 줄여서 말할 때는 '좌수영'이라 했고, 지명을 말할 때는 '수영'이라 했다. 한때는 남수동(南壽洞)이라 했다가 수영동으로 개칭되었다.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 수영출장소 수영동이었다가, 1973년 3월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에 속하였고, 1975년 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2년 5월 광안3동 일부가 수영동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영구가 승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제구

<거제동>
오늘날의 거제동(巨堤洞)은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며 동리명은 거벌리라 하였다. 『동래부지(1740)』에는 "거벌리가 동래부에서 5리 떨어져 있다"라 하였으며,『동래부읍지(1832)』에는 동래부에서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어 큰벌을 뜻하는 원야(原野)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산동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역이 바로 거벌리였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역과 그 인근을 "홰바지"라 불렀다. 홰바지는 해받이라고 불리는데 '동래부에서 부산으로 나들이갔다 돌아오면 하루해가 걸리는 지점이라는 설과 옛날 부산에는 5일마다 열리는 부산장(현 부산진시장)은 매4일과 9일에 열리는데 매우 성시를 이루어 영남에서는 대구장 다음으로 가는 큰 장시(場市)였다. 동래에서 부산장에 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지므로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두 보행(步行)이어서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거벌리에 일제시대 범어천·온천천·서천 등의 이름을 가지면서 동래로 흘러내려 오는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아 온천천을 수영천과 합류케 했다. 그렇게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고 난 뒤부터 거제리란 이름이 생겨났다. 거제동은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7월 시조례에 의해 거제1,2,3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 인구의 급증함에 따라 시조례로 거제3동을 거제3,4동으로 분동되었다.

<연산동>
연산동(蓮山洞)이란 지명은 낮은 늪지대로 수련이 많고 배산과 황령산쪽은 산지로 되어 연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의 시발은 금련산(金蓮山)이어서 '연산(蓮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연산동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증되며 배산성지 또한 삼한시대 성축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의 연산동과 거제동의 낮은 지대는 지난날 저습지로 연(蓮)이 자생했다. 그래서 연이 많아 연산리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옛날은 연이 자생하는 저습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마땅찮고 금련산 아래 산기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텃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연산동의 이름은 금련산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이 배산의 서북쪽으로 그리고 연이 피는 거제동의 얼안이었던 늪지대로 퍼져간 것이다.
연산동에는 토곡·안락·후리(後里)·골리(谷里)·대리(大里)·신리(新里)· 전리(田里)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 발전하였다. 1914년 동래군 읍내면 지역에 속했다가 1942년 10월 부산부 동래출장소 연산리가 되었다. 1946년 연산1동을 연산1,2동으로 분동, 1966년 1월 연산2동을 연산2,3동으로 분동, 1970년 7월 연산2동에서 연산4동이 분동되었다. 1975년 10월 연산2동에서 연산5동이, 1979년 8월 연산3동에서 연산6동이 연산4동에서 연산7동이 분동되었다. 1982년 9월 연산1동에서 연산8동이 1985년 12월 연산8동에서 연산9동으로 분동되어 부산지역 단일지역의 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


영도구

<남항동>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당집은 영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옥성학교 시절까지 울창한 산림사이에 있었으나 학교 부지확장에 따라 훼손되었다. 이 하씨당은 원래 아씨당에서 연유된 것으로 풀이되는데 여자를 주신으로 모신 것이었다. 당의 주인이 여신선인 까닭에 1885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지명을 정할 때 새로운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신선이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44년 북서쪽의 개펄을 매립하여 산수정(山手町)이라 불렀으나, 1947년 일본식 동명 개칭 때 신선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봉래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고 높은 지대라 선인이 살았다고 전하는 선경(仙境)의 지대이며 광복후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뜻에서 동명을 지었다고 한다. 1961년 동명개정 때 신선동1가를 신선1동으로, 신선동2,3가를 신선2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66년 신선동을 신선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선동>
영선동(瀛仙洞)은 영도에서 제일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대한제국 건양 원년(1896)에 행정체계가 전국 8도에서 13도로 개편될 때 동래부 사하면 영선리란 지명이 제정되었다. 당시의 영선동 영역은 지금의 봉래동·신선동·남항동·대평동 일대로 옛 이름은 나릿가(津)였다.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동명을 새로이 지을 때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에 있는 전설상의 섬 이름인 영주(瀛州)의 이름을 따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기슭이라는 뜻에서 영선(瀛仙)이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25년에는 이곳을 일본쪽을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어영정(御影町)1,2,3정목(丁目)이라 하였다.
광복 이후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우리의 지명인 영선동1,2,3,4가란 이름을 다시 찾게되었다. 1965년 영선동1,2가를 영선1동으로, 영선동3,4가를 영선2동으로 개칭하였고, 1982년 신선1동 일부를 영선1동으로 편입시켰다.

<청학동>
청학동(靑鶴洞)은 선사시대의 패총(조개무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옛부터 조상들의 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이후 영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한말에는 6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청학동의 동명은 이곳이 숲이 울창하여 청청(靑靑)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지대가 학맥설(鶴脈說)에 따라 해운대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마치 학(鶴)이 남쪽으로 날으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하여 청학동이란 동명을 짓게되었다고 한다. 청학동이라 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청학동시장과 부산은행지점 바닷가 일원을 조내기라 불러왔다. 조내기 일대는 어장으로 많은 생선이 잡혔다고 한다. 어장의 개발에 따라 뚜겁바구, 넉섬방우, 덤버들 등의 해안지명이 생겨나고, 이후 인가가 들어섬에 따라 조내기라는 지명도 얻게되었다. 조내기란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곳의 바닷가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는 조락(潮落)한 곳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는 통신사(通信使)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여 조씨가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여 조내기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현재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0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래부 사중면 청학동이었다가, 1944년 청학동을 청산정(靑山町)으로 개칭하였다. 광복이후 1947년 일제식 동명개칭 때 청학동으로 바꾸었고, 1970년 청학동을 청학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항동>
남항동(南港洞)의 옛 이름은 석말추(石末湫)였다. 이 지역의 앞바다에는 큰돌이 있었는데 썰물 때는 돌끝〔石末〕이 조금 보였다가, 밀물 때는 보이지 않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885년 절영도첨사 임익준(任翊俊)이 영도의 지명을 지을 때 동해는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신선과 연관된 이름을 많이 지었다. 이때 석말추는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의 영계(瀛溪)로 바꾸어졌다.
1934년 영도대교 개통시 인근 바다를 매립한 뒤 일본식 동명으로 석견정(汐見町)이라 불리었다. 석견이란 '썰물을 본다'라는 뜻인데, 이곳은 남항의 바닷가이므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광복이후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석견1,2,3정목을 이곳에 어업기지 및 수산관련 기관이 운집해 있고 부산의 남항을 끼고 있다 하여 남항동1,2,3가로 고쳤다가, 1961년 남항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교동>
대교동(大橋洞)은 영도의 관문으로 영도대교 가설 때에는 거의 60% 가량은 매축지로 형성되었다. 영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주거지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바뀌었다. 영도가 무인도로 바뀐 원인은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을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그후 초량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운 까닭에 사민책이 적극 장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어업 등의 이유로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지만 전체 100호 미만이었다고 한다. 1881년 절영도진(絶影島鎭)이라는 첨사영이 세워짐에 따라 주민의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교동은 1914년에 북빈정(北賓町)이라 불리었다. 북빈정은 지금의 자갈치 부근을 남빈이라 하였는데 반하여 북쪽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1934년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통(大橋通)이라 불리었으며 광복이후 1947년 일본식 동명 개칭 때 대교동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평동>
대평동(大平洞)은 원래 풍발포(風發浦)라 불렸다. 풍발은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의 지세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원래 영도에서 떨어져 있었던 섬이었다고 한다. 남항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대교맨션이 위치해 있는 14통을 비롯하여 15∼19통 일대는 바다였고, 일제시대 영도의 서북쪽을 매립하여 갑정(岬町)이라 하였다. 갑(岬)은 산허리 또는 바다로 뾰족하게 내민 땅이란 뜻으로 매축되기 전의 지형적 특성에서 이름지어졌던 것이다.
대평동은 매립이전에는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강해 풍랑을 피하기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일본 어선단이 대평동을 정박지로 삼아 이곳 대풍포를 중심으로 많은 선박이 모여들었다. 광복 이후 1947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동명으로 개칭 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풍(風)을 평(平)으로 바꿔서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이전 남포동 사이를 운항했던 나루터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동삼동>
동삼동(東三洞)은 상리·중리·하리의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이 세 마을이 영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삼동이란 동명이 얻어진 것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조개무지(패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후 영도가 사람이 살지 않은 섬으로 남겨져 있을 때 동삼동 지역은 어장으로 어민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절영진이 설치되기 이전에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동삼동 상리는 웃서발(上西跋)이라 하고, 하리는 아랫서발(下西跋)이라 하여 어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리는 검정방우〔黑岩〕라 불렀으며, 옛 진(鎭)이 설치되었던 부근은 동지(東池)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지형 지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서발에는 팔준마(八駿馬)가 물을 먹었다는 감연(甘淵)·감지(甘池) 또는 감정(甘井, 甘訂)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어 당시 목마른 말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여 갈증을 면하였던 곳으로 목장이었던 영도에서 가장 신선한 연지(蓮池)로 손꼽혔다.
절영도에 목마장이 생김으로 인해 첨사 임익준(任翊準)은 웃서발을 상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중리는 영도의 봉래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이중 진소(鎭所)가 있던 동지(東池)는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영주(瀛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무 7년(1903) 행정개편 때 사중면 상구룡동(上驅龍洞)· 하구룡동(下驅龍洞) 이었다가, 1931년 동산정(東山町)이라 불렀다. 광복이후 1947년 동명개칭 때 동삼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85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하여 동삼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래동>
봉래동(蓬萊洞)의 유래를 살펴보면, 영도는 하나의 큰산으로 되어 있는 섬으로 조봉(祖峯)·자봉(子峯)·손봉(孫峯)의 세 봉우리가 있다. 이 산의 이름을 일제시대 이후 한때 세칭 고갈산(沽渴山 또는 枯渴山)이라 불러왔다. 절영도 진의 첨사로 가장 오래 재임한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고쳐 지을 때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명명하였다. 봉래산은 영도의 모든 동이 봉래산 아래에 흩어져 있는데, 봉래산의 주맥(主脈)이 이곳에 닿은 곳이라 하여 봉래동(蓬萊洞)이란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 한다.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동래부 사하면 영선리에 속했다가, 1905년 영선정(營繕町)으로 개칭하였고, 1944년 항정(港町)1,2,3,4정목으로 바뀌었다.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우리의 고유지명인 봉래동1,2,3가로 개칭하였다. 1961년 동명개정 때 봉래동1,2,3가를 봉래1,2,3동으로 개정하여 부르다가 1979년 봉래3동을 봉래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선동>
신선동(新仙洞)에는 언제 때의 묘당(廟堂)인지 알수 없으나 오랫동안 많은 전설이 얽힌 영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산제당·하씨당이라는 당집이 있었다.


중구

<광복동>
광복동(光復洞)은 숙종 4년(1678)에 두모포왜관에 이설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의「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 존속하였던 곳이다. 그 이후 일제강점까지 일본인전관거류지로 이어졌다. 초량왜관의 중요 건물들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의 3대청이 있었다. 각 대청에는 동헌, 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일본의 강점 이후 초량왜관은 일본거류지로서의 일본단독조계가 설치되었다. 1914년 4월 부제실시로 부산부 관할구역이 되면서 광복동은 변천정·금평정·서정·행정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늘날의 광복동이란 동명은 광복이후 동명 개칭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그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 지역을 광복동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1956년 시조례로 법정동인 창선동과 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포함시켜 관할하고 있으며, 1977년과 1992년 동광동 일부를 광복동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포동>
용두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포(南浦) 일대의 바닷가를 자갈치라 한다. 이 자갈치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물중 하나이다. 남포동 바닷가 쪽에 시장과 횟집이 들어서 있어 '자갈치'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자갈치'는 본래 '자갈+치로' 구성된 지명이다. 이 지명은 이 해안이 매립되기 전에 이미 명명된 것으로 본래 주먹만한 크기의 옥돌자갈들로 이루어진 수려한 자갈해안이었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치'는 '언저리, 언덕빼기'라는 뜻이니 이에 '자갈치'는 '자갈언저리'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명명된 지명이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바닷가의 경치는 볼 수 없고 이름만 남아 과거의 아름다움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남포동'은 '남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포는 영도대교 (일명 영도다리)로부터 보수천 하구를 지나 부산공동어시장에 이르는 남항의 해안에 해당하는데 본래 이곳은 자갈치였다. 그런데 이곳이 매립되면서 일본식 지명인 '남빈'으로 불리다가 광복 이후인 1947년 우리식의 한자 지명인 '남포'로 바뀌어 지금의 동명으로 되었다. 1977년 시조례에 따라 중앙동과 동광동 일부가 편입되었고, 1982년 법정동인 대교동 3가와 동광동 1가가 편입되었다. 또한 1982년 충무동1,2,3가를 남포동4,5,6가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청동>
대청동(大廳洞)은 초량왜관(지금의 용두산부근 11만평) 북쪽 담장밖에 있는 수문너머, 동래부에서 30리 거리에 위치한 연향대청에서 유래하였다. 연향대청(晏饗大廳)은 일본사신을 맞이하여 동래부사나 부산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이라 불렀다.『증정교린지』에 따르면, 연대청은 35간으로서 거기에는 28간의 공수간과 38간의 외대문, 1간 반의 중문, 각 5간씩의 동고 및 서고 등이 있었으며, 내간자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다. 연대청의 부속건물로는 북문인 연향문과 1간의 내북문이 있었다.
북문은 연향시 왜사(倭使)가 출입하는 곳으로서 동복병장이 지키고 평시에는 봉쇄하였다. 이 연대청 찰에는 유원(柔遠)이란 액자가 붙어 있어서, 연대청은 일명 유원관, 유원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가진 연향대청은 현재의 남일초등학교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이로서 그 지명을 일제시기부터 대청정 (大廳町)으로 불렀으며, 광복 후에도 일본식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대로 대청동(大廳洞)이라 하게 되었다. 대청동은 1982년 법정동인 복병동을 대청동에 병합시켰으며, 복병동은 부산지방 기상청이 있는 복병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동광동>
초량왜관의 출입문은 수문(水門)을 비롯하여 수문과 북문이 있었는데, 수문의 통행이 가장 많았다. 이 수문을 비롯하여 재판옥지 (裁判屋址), 동향사지(同向寺址) 등이 오늘날의 동광동에 해당한다. 수문은 오늘날의 동광초등학교의 동편에 있었는데 왜관에서 일본인들이 관구(棺柩)를 운반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무상문(無常門)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북문은 대청동의 연혁에서와 같이 평상시에는 늘 열어두고 연향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동광동은 초량왜관 시대에 동관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동관은 바로 일본에서 오는 배가 정착하는 곳이며, 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관수(館守)의 집과 거래가 이루어지던 개시대청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본조계가 되자 본정(本町)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일본식 동명 개정에 따라 동관이 있던 자리라는 의미의 동관동으로 고쳐야 옳지만, 발음의 어려움과 이웃한 광복동의 동쪽에 위한다는 점등을 들어 동광동으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수동>
보수동(寶水洞)은 보수천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보수천은 부산개항 직후부터 부른 이름이며, 그 이전에는 법수천(法水川)이라고 불렀다.『감동어기전말등록』에는 구초량(舊草梁)의 법수천 동암(東岩) 밖이 곧 왜관 수문의 옆이라 하였고, 『순영등록』에는 초량 법수천이라 기록되어 있다.
법수라 함은 불법계에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정하게 한다는 것을 물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며, 중생의 마음 속의 때를 씻어주는 물이란 뜻이다. 법수천(法水川)이라는 이름이 어느 때부터 기원하였는지 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옛날 구덕산에 구덕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고, 또 18세기 중엽 왜인들의 약탈에 못이겨 그 절을 다른 곳으로 옮겨감으로써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 등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법수천이라는 이름은 이곳 구덕사의 승려들이나 그 불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법수천은 법수에서 따온 말로서 불교적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여 법주(法主)와 법왕(法王)이란 뜻으로 윤색된 표현으로 보인다. 근대개항 후 법수천의 법(法)을 보(寶)로 고쳐 보수천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법수와 같은 것이다. 1880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나무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다. 그후 1886년 나무 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으며, 1894년 보수천 상류에 물을 모으는 둑인 집수언(集水堰)을 만들고 자연여과장치를 시공하였다. 이와 아울러 거류지 가까운 곳에 대청배수지를 설치하였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상수도 기원이 되었다.

<부평동>
부평동(富平洞)은 부민동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며, 보수천 하구 일대는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옛부터 샛디라고 불러왔다. 샛디는 초량(草梁)이라는 말이다. 당시 보수천 일대의 샛디는 해정리(海汀里, 지금의 초량)까지도 샛디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의 초량을 신초량이라고 부르자 원래의 초량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구초량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명은 개항 당시까지도 그대로 존속하였다.
부평동의 부(富)는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같은 뜻에서 사용한 것이라 하며, 평(平)은「터」라는 뜻으로 샛디의「디」와 통하는 글자로서, 일제시대에는 부평정(富平町)이라고 불렀으며, 광복 이후에 마찌(町)만 동(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의 장(場)은 5일장 형태였으나, 1910년 설립된 부평시장은 1915년 부산부에서 관리하였다. 이 시장은 인근 70리까지 세력이 미쳐 조선의 최대 공설시장이었다. 이 시장 왼쪽을 백풍가(白風街)라 불렀다. 이곳을 내왕하는 통상문(通常門)이 있어 항상 백의(白衣)를 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수 운집하여 일상용품을 구입하였는데 백의인의 집합장소라 하여 백풍가라 불렀다.

<신창동>
신창동(新昌洞)은 숙종 4년(1678) 두모포 왜관에서 이설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중요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東館)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西館)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의 3대청이 있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 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초량왜관은 일본거류지로 일본인 단독조계가 설치되었다. 1914년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서정(西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졌다. 이곳은 일본인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광복 이후인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칭 때 서정(西町)을 신창동(新昌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년 7월 시조례로 법정동인 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편입시켜 관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주동>
영주동(瀛州洞)의 옛이름을 임소(任所)라 하였다. 이 임소의 유래는 감리서(監理署) 설치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후 외교통상의 업무량이 늘어나자, 고종 27년(1890)부터 업무처리를 위하여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그 관아는 지금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취는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감리서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또 관원이 근무하는 직소(職所)라는 뜻에서 임소라 불렀다. 그리고 영선고개는 영선산(瀛仙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선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선(瀛仙)이 아니고 용선(容膳)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선이라는 설로 이 산에서 왜관안의 일본인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 고개 밑에 동관문이 있어 상방(相方)이 선물을 보낼 때에는 감리에게 허가를 받으면 역관이 이곳까지 와서 입회한 상태에서 용인(容認) 선물(膳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지만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느낌이 든다.
다른 한 설은 영선산이 두 개의 봉우리로 양산(兩山) 또는 쌍악(雙岳)이라고 했는데 숙종 때 두모포왜관을 초량왜관으로 이설 할 때, 초량왜관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재목이 이 고개를 통해 운반되었고, 또 일부의 부재는 이 산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에 영선산이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이 설치되고 그 초량왜관의 수문 밖에는 초량왜관을 관리하는 조선측의 관위건물이 지금의 영주동의 봉래초등학교 자리를 중심으로 지어졌다. 그때는 지금의 영선고개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영선산이 두 봉우리로 솟아 바다 저 멀리 바라보는 경관이 아주 좋았다. 그런 자리에 지금의 외교관이자 통역관격인 훈도가 집무하는 성신당(誠信堂)과 별차(別差)가 집무하는 빈일헌(賓日軒)들이 있었다. 그 훈도와 별차들이 자기들이 있는 곳을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빗댄 말에서 영주란 마을 이름이 형성되었다.

<중앙동>
영선산 아래 골짜기의 맞은편 산봉우리가 해면(海面)에 돌출해 있었다. 이 두 개의 봉우리는 용두산의 좌청룡등(左靑龍嶝)에 해당된다고 한다. 두 봉우리의 사이에는 논이 있었는데 그 곳을 논치라고 불렀으며, 산 아래의 좌우에는 논치어장이 있었다. 이 논치어장은 현재의 중부경찰서 남쪽에 있는 중앙동 지역내의 유일한 고유지명으로 알려진 것이다. 개항 이후 중앙동 거리 바로 아래지역은 바닷가였으므로 당시에는 시가지의 발전은 어려웠다.
당시 초량왜관은 11만평이라 하지만 그 중앙에 용두산(龍頭山)이 자리하고 있어 실제 사용 가능한 면적은 7만평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안을 매축하여 시가지를 형성할 목적으로 1902년에 부산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북빈매축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매축하여 생긴 지역의 이름이 이른바 새마당이며, 새로생긴 넓은 땅이란 뜻이다. 이곳을 일제시기에는 매축허가를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딴 좌등정과 고도정, 부두에서 하역관계로 큰 창고가 생겼다 하여 붙여진 대창정,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라는 데서 경부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광복이후 부산역(지금의 본부세관 맞은편 소화물 취급소)을 가진 중앙부에 위치하여 있다는 뜻에서 1947년 동명개정 때 중앙동으로 개칭하였다. 1982년 5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대교1,2,3가를 중앙동 5,6,7가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선동>
창신동(昌新洞) 역시 신창동과 마찬가지로 숙종 4년(1678) 두모포 왜관에서 이설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 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중요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있었고,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의 3대청이 있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 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초량왜관은 일본거류지로 일본인 단독조계가 설치되었다. 1914년 4월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행정(幸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 졌다. 이곳은 일본인들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1884년에는 부산전신국을 개설하여 업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철수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돗떼기, 깡통시장이라 하는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생겨 부산과 경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정 때 행정을 창선동(昌善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년 7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창신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병합하여 행정관련 업무를 관장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운대구

<반송동>
반송동(盤松洞)에 대한 기록은『동래부읍지(1740)』에는 동래부 동면 지경리(地境里)로,『동래부읍지(1871)』의 방리조에는 반송리로 나타나고 있다. 반송의 지명이 사용된 시기는 1871년 이전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경리란 현재의 반송이 당시 기장현과 동래부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란 뜻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반송동의 곳곳에 있는 소나무 형상이 소반처럼 펑퍼짐해서 붙여진 동명인 까닭에서인지 이곳에는 반송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운봉초등학교 앞에는 수령이 200여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데, 동네사람들은 이를 반송나무굴이라 칭한다. 이 마을에 울창했던 소나무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지금은 모두가 없어졌다. 1950년대 초기에는 부산지방의 땔감나무 시장의 나무공급을 거의 반송에서 도맡다시피 했다. 자연마을로는 운봉·본동·신리의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운봉은 반송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로 뒷산인 운봉산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운봉산과 절터산·진들개산·무지산 등이 담처럼 싸고 있어 '담안골'이라 부르기도 하며 멀리 북쪽에 개좌산이 솟아 있다.
운봉산 중턱에 운봉사라는 고려시대의 옛 절터가 있었는데, 축대와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고 토기 등의 파편이 채집되기도 한다. 이곳은 1968년 부산시 정책 이주지역으로 시내의 수재민과 철도연변 철거민들이 이주하면서 동세가 신장되기 시작하여 1975년 반송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8년 반송3동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여동>
반여동(盤如洞)은 조선 초기에는 동래부의 동면에, 말기에는 동상면에 속하였다가 일제시대 때는 동래읍 반여리로 되었다. 반여동이란 지명은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지형이 소반처럼 동그랗다는 뜻에서 풍수설의 영향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는 반여동이 장산 아래 마을로 주변의 낮은 산이 군량대(軍糧臺)와 석대동 서쪽의 추마산(趨馬山), 그 북쪽의 시치산(視幟山) 등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반여동은 원래 상리·중리·무정리(舞亭里)·삼어리(三魚里) 등 네 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상리는 가장 윗마을을 뜻하는데 지금의 풍산금속 입구지역이고, 중리는 가운데 마을로 남평문씨, 청도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삼어리는 봄·여름·가을의 세 계절 동안 원동천에서 고기가 뛰어 논다는 풍류적인 뜻으로 지어졌다. 무정리는 왕자아파트 주변으로 해림사라는 절이 있던 산을 오지봉(五指峰)이라 하였는데, 이 오지봉은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타고 춤을 춘다는 무정(舞亭, 춤추는 정자)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반여동고분은 유적 대부분이 이미 훼손되었으나, 고대 부산지역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주거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연마을은 임진왜란 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반여동의 일부는 1972년 부산시의 정책이주지역으로 시내 고지대 철거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곳으로 1973년 반여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9년 반여2동에서 반여3동으로 분동되었다.

<석대동>
석대동(石坮洞)의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일찍 사용되었으나 그 연원은 잘 알 수 없다. '坮'는 '臺'의 고자로 한자의 뜻대로 이 지역에는 돌로 쌓은 높은 곳이나 이에 준하는 넓은 반석 등 지명과 관련되는 사항이나 전설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마을로 내리(內里)와 상리(上里)가 있으나 이는 안마을과 윗마을이란 뜻으로 석대라는 지명과는 관계가 없다.
동천의 상류를 사천(絲川)이라 부르는데, 이 일대는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오륜대(五倫臺)·동대(東臺)·죽연대(竹淵臺) 등의 높은 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석대동 일원에도 풍류를 즐길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데서 지명이 유래된 것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이곳에는 영양 천(千)씨의 집성촌으로 일문에는 5효자 1효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마을로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석대동은 조선후기『동래부지(1740)』에 보면, 동래부 동면에 소속되었다가, 말기에는 동상면으로, 일제시기에는 동래읍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동래출장소에 속하다가 1957년 동래구에, 1978년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고 1980년 이후 해운대구의 관할이 되었다.

<송정동>
송정동(松亭洞)의 지명은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盧氏)의 선조가 완만한 백사장이 내려다보이고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亭子)를 지은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지금의 송정해수욕장 일원은 원래 가래포(加來浦)라 불렀는데, 이는 갈대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풀이하고 있다. 가래는 갈대를 가리키는 사투리이고, 이전에는 송정천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는 넓은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송정에는 일본정(一本亭) 이라는 노송이 마을의 상징처럼 서있었는데 6.25이후 병사들의 사격연습으로 고사해 버렸다. 송정이란 지명도 이 노송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까지 송정을 가라(加羅)라고 했는데, 임란 때 일본군이 파병 당시 군사들에게 '조선에 가거던 "松"자를 주의해라'고 하여 "송"자가 붙은 마을에는 접근하지 않으므로 재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명을 가라에서 송정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송정은 조선초기부터 기장현의 관할이었으나 1800년경부터 잠시 동래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1880년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자 송정일대는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동>
우동(佑洞)은 조선후기에 동래부 동면 우리(右里)였다. 말기에는 동하면(東下面) 우동리(右洞里)로, 일제 때는 남면 우리(右里)로 불리어왔다. 우동이란 명칭이 불리게 된 요인은 해운대의 중심가로 변모한 중동(中洞) 일대의 옛 온천지역인 귀남평원(龜南平原)을 가로질러 동백섬 옆 수영만으로 흐르는 춘천천이 있었는데 이의 오른쪽에 자리한 마을이란 연유로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오른쪽 마을의 우리(右里)·우동(右洞)이 일제 때에는 좋은 뜻을 가지는 한자 또는 글자로 바뀌면서 도울 '우(佑)'의 우동(佑洞)으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동에는 장지(장旨)·못안(池內)·운촌(雲村)·승당(勝堂)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지와 지내마을은 옛부터 농사가 주업이었고, 운촌과 승당마을은 바닷가로 어업을 주업으로 운촌은 해운대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해운대의 발상지로 원래는 해운대라 불리어 왔으나 언제부터 운촌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다른 선비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남촌이니 북촌이니 하자 자신도 운촌이라 하였다는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때 운촌과 승당마을의 앞바다는 멸치의 황금어장으로 손꼽혀, 4월부터 10월까지 멸치철에는 밤마다 밝히는 횃불을 따라 몰려드는 은백색의 멸치떼들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966년 인구의 증가로 인해 우1,2동으로 분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