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림 육군중장님 묘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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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장군2묘역

2014. 5. 8.

 

 우리의 육사생도때 교장이신 이한림 장군의 1주기 추도식이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실시함

이한림장군 유족을 대표하여 지난 1년간 있었던 일로
 해방후 3사단 22연대 대대장을 잠시하셨다고 22연대2대대는 이한림대대로
명명하는 행사가있었고 해양대학교에서는 교량의 이름을 한림교로 명명하는등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추도식 참석자에게 감사인사와 함께 전함

출쳐=  http://wwss1554.egloos.com/5181686

 

 

 

 

 

※약력

*1921. 2 함남 안변 출생
*1946. 2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7. 5 제 4연대장
*1949. 8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1950. 8 제 2군단참모장
*1950. 9 육군준장
*1951. 1 육군총참모장 보좌관 겸 청년방위고문단장
*1951. 1 육군본부 정보국장
*1951. 4 육군본부 작전국장
*1951 7 육군보병학교장
*1952. 1 국방부 제 2국장
*1953. 1 육군소장
*1953. 2 제 9사단장
*1954. 5 제 6군단장
*1954. 10 육군중장
*1957. 7 육군사관학교장
*1960. 10 제 1군 사령관
*1961. 8 예편

 

 

1. 생애(1921-

1921년 2월 10일 함경남도 남단에 위치한 안변군 석사면에서 출생한 이한림(李翰林) 육군 중장은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에 심취해 군인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하기 시작했다. 조국의 해방을 맞아 1946년 2월 서울로 돌아온 후 “군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하루 속히 조국 간성의 중추를 담당해야 한다”는 이응준, 원용덕 등의 권유를 받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56)로 임관하였다. 임관일인 2월 26일은 전라북도 이리에서 제3연대 A중대가 창설된 날이었으며, 그에게는 김백일 부위(중위), 김종오 참위(소위) 등?함께 제3연대에 배속되어 연대를 창설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래혁(丁來赫)과 함께 훈련을 담당한 그는 3월에 부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으로서 인근의 군산에 가서 모병을 하는 등 제3연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정위(대위)로 진급한 그는 11월에 제6연대 대대부관 겸 작전주임에 보임되었고, 다음해 4월 춘천의 제8연대장으로 부임한 직후 다시 광주의 제4연대장으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중 1948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년여의 교육을 마치고 이듬해 9월 귀국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된 그는 육사를 정규사관학교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일련의 계획에 의욕적으로 착수하는 등 군 발전계획에 주력하던 중 6.25전쟁을 겪게 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제2사단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국방부 정훈국장, 판문점 휴전회담 한국군 수석대표 등을 역임하고 제9사단장으로 재임하면서 휴전을 맞은 그는 1954년 2월 창설 군단인 제6군단장에 보임되어 군단편성에 주력하였고, 1957년 7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육사 교장에 다시 임명되어 3년 여의 기간을 육사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희망했던 제1군사령관에 전보됨으로써 야전군 지휘관으로 복귀하였으나, 다음해 ‘5.16 군사정변’이 발발한 뒤 8월에 정치적인 이유로 정든 군을 떠나게 되었다.
예비역에 편입된 이후에도 1963년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과 1968년 진해화학 사장 등 국영기업의 책임자로 활동하는가 하면 1969년 건설부 장관과 1974년 주터키공화국 대사 및 1977년 주호주대사 등 정부각료 및 외교관으로서 멸사봉공하였으며, 군에 대한 애정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는 군의 발전은 물론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력한 참 군인이었으며, 언제나 최일선의 전장에 있기를 원했던 명장이었다. 그가 간직했던 국가관이나 군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은 육사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교육목표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는 무릇 훌륭한 장교란 “우수하고 탁월한 군사적 기술과 기능을 구비하고 고매한 품성과 높은 학식을 겸비하여 강렬한 의지력과 강건한 체력을 갖춘 터전 위에 사(私)를 버리고 공의(公義)를 추구하며, 보상을 구하는 노력이 아니라 조국을 향한 충정에 보답됨이 없을지라도 개의치 않는 사명감을 가지고 조국에 희생적인 봉사로 자기 직무를 완수하는 인생관이 확립된 장교”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이상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닮기를 노력했던 장군이었다.

 

 

 

 

2. 공적

휴전을 눈앞에 둔 시점인 1953년 6월 11일부터 14일까지 제9사단장 이한림 육군소장은 오성산 주변의 각 주요 고지에서 중공군 제24군 예하 제70사단, 제72사단, 제74사단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섵듟냫¡??? 혈전을 전개한 끝에 적 사살 2,092명과 포로 18명의 대전과를 거두고, 적의 진출을 저지하여 주저항선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는 전공을 수립함으로써 1953년 10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38호)을 수여 받았다.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국군의 저지선이 와해되고 수도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육군본부의 명에 의거 육사 생도대대 약 600명을 이끌고 의정부전선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 저지에 나섰으나, 강력한 적의 공격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였다. 이어 1950년 7월 1일 제2사단장으로 발령을 받고 축차적인 방어전을 펼치면서 회인 단발령까지 철수하여 그곳에서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육군본부는 제2사단을 해체하여 그 주력으로 대구지구 방위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 이한림 대령을 임명하여 대구지역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하양에 위치한 제2군단 부군단장 겸 참모장으로 취임, 낙동강 교두보 상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방어하는데 참여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의 총 반격이 개시됨에 따라 제2군단도 도화동-함창-충주 축선을 따라 진격에 임하였고, 10월 3일 서울에 입성해 군단지휘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북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제2군단은 평양에 입성하고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출하였으나 11월 27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군단의 방어선이 무너짐에 따라 군단 병력을 이끌고 철수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한림 준장은 1951년 1월 7일 제2군단의 해체로 육군본부 정보국장에 임명된 데 이어 짧은 기간이나마 작전교육국장을 역임하고 육군보병학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여기에서 그는 일선에서의 대량손실로 인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장교교육과 후보생 교육에 정성을 다하였다.
1952년 1월 국방부 정훈국장, 5월 판문점 휴전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장군은 1953년 2월 15일 김화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9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휴전회담 대표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고참병의 80%를 잃고 신병으로 충원되어 있어 장병들의 심리적인 약세를 만회하고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저격능선 상의 B고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감행하기로 계획하고 유사지형에서 작전연습까지 실시하였다. 3월 3일 제28연대 2대대는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연습한 대로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고지를 점령하고 계속된 적의 반격을 격퇴하였다.
그 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휴전회담이 1953년 4월 6일 공산측의 요구로 재개되고, 스탈린의 사망으로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휴전이 성립될 기미가 보이자 적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할 목적으로 중동부전선에 병력을 집결시켜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였다.
적은 6월 10일부터 중동부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는데, 막대한 양의 포탄을 아군 진지에 퍼부으며 인해전술로 공격을 감행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적은 김화지구의 중요성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및 북진능선 등 주요 지점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관계로 제9사단을 공격목표 중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었다. 특히 북진능선은 적의 거점인 오성산에서 700고지와 900고지를 거쳐 뻗어가다 K고지를 매듭짓고 있는데, 동쪽과 서남쪽으로 개활지를 감제하고 있어 피아간에 중요한 지형이었다.
6월 11일 사단장은 제29연대 2대대와 제3대대, 제30연대 3대대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제30연대 관측소에 위치하여 작전지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자정 무렵 중공군 제24군 예하 주공부대는 북진능선으로 공격을 가해왔지만 근접전투를 통한 장병들의 분전으로 이를 격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자 사단장은 지원포격으로 적의 공격 강도를 줄여주는 한편 전장조명으로 아군의 활동을 돕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자 적은 인해전술로 축차투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되었다.
이틀에 걸친 전투로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사단장은 포로심문을 통한 첩보를 바탕으로 적의 주공에 대한 역습계획을 수립하였다. 사단장 이한림 소장은 중공군 제70사단 주력의 대공세에??섵듟냫¡???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연대 규모의 역습뿐임을 인식하고 제28연대에 04시를 기해 역습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단내 가용 화력의 최우선권을 역습부대 정면에 부여하였다.
지원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공격개시선을 출발한 제28연대는 적을 향해 전진을 계속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더 많은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침내 역습에 성공하여 K고지를 완전 탈환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반면에 중공군 제24군 예하 제70사단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재편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휴전을 목전에 둔 1953년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전개된 북진능선방어작전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교훈적인 요소의 복합작용에 의해 가능하였다. 즉 역습부대인 제28연대의 전 장병이 투철한
감투정신을 발휘한 결과였다는 점, 포로심문 내용의 분석을 통해 적정을 파악하여 상황판단의 기초자료로 활용했다는 점, 역습이라는 과감한 조치를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적중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사단장 이한림 소장은 최전방까지 출두하여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고취시키는가 하 면 적 포탄이 작렬하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솔선하여 철야로 진두지휘하였으며, 급변하는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히 판단하는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저항선이 돌파되었을 때, 전혀 동요됨이 없이 예비연대를 민활하게 운용하고 역습부대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운영함으로써 아군의 주저항선 일대의 확보를 가능하게 하여 K고지를 끝까지 사수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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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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