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 전 국회의장

댓글 0

☞정치인 사진

2018. 4. 6.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1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 발인식이 열리고 있다.

이 전 의장의 영결식은 이날 국회에서 국회장으로 열린다. 2015.12.18

 

 

 



이만섭(李萬燮>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가이다
정치가. 1932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1957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제6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65년
민주공화당 원내 부총무를 지냈고, 1967년 제7대 총선에서는 대구 중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8년에 열린 국제의원연맹 제5차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79년 제10대
총선에서 대구 중구·서구·북구 선거구에서 다시 당선되었고, 민주공화당의 당무위원이 되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인 1981년 1월
구(舊)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한국국민당의 창당 사업에 적극 참여했으며, 창당과 더불어 정책위의장이 되었다가
곧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제11대 총선에서 대구 중구·서구 선거구에서, 1985년의 제12대 총선에서 같은
선거구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같은 해 3월 22일 제12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물러난 김종철의 뒤를 이어 한국국민당의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한국국민당은 1987년 10~11월 소속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함에 따라 사실상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제13대 총선 직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중앙당 등록을 취소당한 이후 정계를 떠났다가 1992년 제14대 국회 민주자유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동당의 상임고문을 지냈다. 1993년 국회의장에 당선되었다. 1997년에는 국민신당의 총재를 맡았다.
저서로는 〈혈육을 만나게 하자〉·〈제2의 정치인〉·〈증언대〉 등이 있다.

[Daum백과] 이만섭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14일 별세했다. 사진은 1985년 6월 이만섭 당시 국민당총재가 기자회견하는 모습. 2015.12.14 << 연합뉴스 DB >>

 

 

(서울=연합뉴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14일 별세했다. 사진은 1985년 5월 이만섭 당시 국민당총재가 당대표 연설을 하는 모습. 2015.12.14 << 연합뉴스 DB >>

(서울=연합뉴스) 류미나 기자 = 제14대, 16대 국회에서 두 차례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 전 의원이 14일 오후 4시31분 호흡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2015.12.15

이 전 의장의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특1호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오는 18일 국회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거쳐 지난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31살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뒤 7·10·11·12·14·15·16대 의원을 지내며 8선의 관록을 기록했다. 특히 두 차례나 국회의장을 지낸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 원로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윤복 씨와 장남 승욱, 딸 승희·승인 씨 등 1남2녀가 있다.

이 전 의장은 언론인 시절의 인연으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인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남다른 '강골' 기질 탓에 정치적 굴곡도 상당했다.

7대 의원 시절인 지난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했다가 약 8년간 정치활동의 공백기를 맞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3대 때는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들기도 했으나 14대 민자당 전국구로 다시 원내로 돌아와 국회의장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 93년 4월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재산공개 파동으로 낙마하자 그 뒤를 이어 1년 2개월간 입법부 수장을 맡은 것이다. 또 그해 12월 통합선거법 등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남다른 '뚝심으로 여야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97년에는 신한국당 대표서리로 이회창 총재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치렀으나 당내 대선후보 경선 결과에 불복, 탈당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해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고 국민신당에 합류하는 정치 모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이후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 뒤 거취를 놓고 고민하다 98년 9월 6명의 국민신당 의원을 거느리고 여당인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99년 7월 특검제 도입을 둘러싼 국민회의-자민련 지도부 간 갈등수습 국면에서 총재권한대행에 임명된 뒤 새천년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 창당준비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16대 국회에서는 두 번째 국회의장을 지냈다.

5공 당시 국민당 총재와 97년 대선 이후 국민신당 총재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여당생활만 했다는 점에서 일부 비판적 평가도 있지만 `꼿꼿하고 바른말 잘하는' 원로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앞선다.

제1공화국 시절 국회 출입기자로서 의사당 기자석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중 "자유당 이 X들아"라고 고함을 질러 이름이 속기록에 오른 일화를 갖고 있다.

또 동아일보 출입기자로 최고회의에 출입하다가 당시 박정희 의장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써 필화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당시의 인연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된 남다른 사연이 있다.

이 전 의장은 지난 2009년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제하 회고록을 발간하고 서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정치적 스승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2004년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등을 맡아 정계 원로로서 후배 정치인들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대구 출신의 고인은 연세대 졸업 후 1956년 동화통신을 거쳐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 정치부 기자를 거쳐 일본·미국 특파원을 등을 지냈다.

권중태 보좌관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전 의장이 오늘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면서 "국회 측과 영결식 준비를 상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sgh@yna.co.kr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