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1야전군 사령관 송요찬(宋堯讚)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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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1군사령관

2019. 1. 10.

 

                   송요찬 1군사령관(右)과 부관이었던 김운용국기원장

대한민국 국군이 발족되자 국방경비대에서 국군으로 전환한다.

강릉대대장으로 1948년 6월까지 3·8선 주변 지역 전선 방어를 맡았다. 이후 경기도 시흥군에 주둔중인 보병학교 학생연대장을 거쳐 제8연대 대대장으로 보임되었다가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이 되었다. 9연대장 당시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의 진압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 4.3 사건 진압후에는 지리산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로당 파르티잔들의 추적과 토벌에 가담하였다.

1948년 7월 경기도 수색에 주둔 중인 육군보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1949년 1월 육군 중령으로 진급, 다시 4·3 사태 진압작전에 참가하고 오대산 파르티잔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고, 6월 국군 제1연대장에 임명되고, 오대산지구 파르티잔 공비 1천명을 사살하고 파르티잔을 소탕하였다.

 

1950년 4월 헌병대 사령관에 특별 임명되었다. 6월 헌병대사령관 재직 중 한국 전쟁을 만났고 6월 27일 서울 한국은행에 있던 지금(地金)을 반출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준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경비 사단장이 되었다. 그 뒤 원산, 함흥, 청진을 폭격하여 함락시키는 공을 세우고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하자 그의 사열을 주관하였으며, 제8보병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8보병사단장으로 재직 중 1953년 7월 미국 유학, 미국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였다. 1954년 8월 귀국하고,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그 뒤 다시 제8사단장, 제3군단장, 1956년 7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개월간 현지 시찰을 하고 8월 귀국하였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 등을 거쳐 1959년 2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이후 참모총장까지 지낸 창군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창군 당시 제5연대의 소·중대장, 제8연대의 대대장을 거쳐 1948년 7월 제주에서 재편된 제9연대의 연대장(소령)이 되었다. 이때 제주도에서 발생한 '4·3제주사태'를 진압했으며, 이외에도 지리산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데 주력했다. 1950년 4월 헌병대 사령관, 9월 수도경비 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제8사단장, 제3군단장, 제1군사령관 등을 거쳐 1959년 2월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또한 1960년 4·19혁명 때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을 지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7월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송요찬(宋堯讚,1918년 2월 13일 ~ 1980년 10월 18일 오후 9시 (미국 시카고 현지 시간)은 일제 강점기군인이며 대한민국군인, 정치가이다.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주요 지휘관의 한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해방 후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1948년 4·3 사태의 진압군 지휘관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으나, 동료 장군 최경록의 만류로 발포를 중단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하고 이후 내각에 입각했다가 1963년 박정희에 반대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이후 참모총장까지 지냈으며 한국군 육군 부문 창군인사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충청남도 출신이다.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송영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육군 상사까지 진급했다.

 

1945년 8월 부사관 상사로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광복직후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로 졸업한뒤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군내의 일본군 출신 인맥이었는데, 학병동맹, 광복군, 중국군, 만주파(만주군 인맥) 등을 부정적으로 봤다. 소위 임관 직후 바로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제5연대의 소대장을 거쳐 1947년 2월 육군 중위로 진급, 제5연대 중대장이 되었다가 강릉 파견중대장이 되어 중대병력 2백명을 지휘하고 강원도 강릉에 주둔하며 대구사태 관련자 및 잔당, 무장공비 진압 및 민심수습, 치안유지에 주력했다. 1947년 3월 빨리 육군대위로 진급하였다. 강릉파견중대가 대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1948년 2월 육군 소령으로 승진했다.

국방경비대 강릉대대장 재직 중 연대참모로부터 석두라는 질책을 들었는데, 이는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별명으로 굳어졌다.

 

육군 참모총장 재직 중 한국군 10만 감군, 정군에 대응하여 감군, 정군으로 예편된 군인들의 처우 개선 및 군인연금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구하여 성사시켰다. 또한 1960년 3월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을 지냈으며, 3·15 부정 선거에 항의한 학생시위대의 시위가 4·19혁명으로 확대되자 1960년 4월 20일 대통령 이승만의 호출로 경무대를 방문하여 사태수습을 계획하였다.

4·19혁명 진행 중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학생시위대를 만나 발포를 하려다가 최경록의 만류로 발포금지명령을 내렸다. 이후 군의 중립 의사를 언론에 밝히고 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유혈사태 방지 및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하였다.

1960년 5월 육군 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1961년 5월 워싱턴 D.C 방문 당시에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였다.

그 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7월 외무부장관을 거쳐 내각수반에 임명되었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수정에 참여하였다. 1962년 3월경제기획원 원장에 임명되었다.1962년 증권파동이 발생하자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갈등하다가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에 반대하여 6월 17일 내각수반직과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사퇴하고 정당 창당운동에 참여했다.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을 사퇴하면서 군정에 혁명공약 중 사태수습 뒤 정권을 민간 정치인에게 이양하고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조항을 이양하라고 촉구하였다가, 김현철의 비난을 듣고 싸우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신장염으로 일시적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8월 8일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대통령출마를 반대, 사퇴를 촉구하는 글을 발표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그 뒤 12월에 실시되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야당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대통령후보직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출감 후 인천제철사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66년 역대 야당정치인들의 신변잡기를 기술한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에 10월 18일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62세였다.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 산 아버지 송영달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 충청남도 대전고등보통학교 졸업
  • 군사영어학교 1기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졸업
  •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졸업 (정치학 석사)
    • 일본군 부사관 육군상사로 재직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서 임관.
    • 1948년 6월 21일, 제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 4.3사건의 진압에 참여하였다.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다. 사건의 희생자 중 대다수가 그의 재직 기간에 발생하였다.
    • 1948년 7월 15일, 부활된 제9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 "석두(石頭)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 5·16 군사 정변에는 지지하였고 군사혁명이라 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제도를 역행하면서까지 일어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화성초 총동문회, 화성면사무소 앞에 공적비 건립

     

    청양군 화성초등학교동문회, 청양군 화성면사무소 옆…연화대 5척 크기로 다시 만들어

     

    [아시아경제 왕성상 기자] 1960년대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 장군의 공적비가 제막됐다.

    충남 청양군 화성초등학교동문회(회장 이경집)는 16일 청양군 화성면에서 전 내각수반 송요찬 장군 공적비 제막식을 가졌다고 17일 밝혔다.

    비는 역사 속에 묻혀있던 내각수반의 공적을 기리고 후배들의 선배존경을 위한 정성을 모아 준비한 것이다.

    화성초동문회는 1973년 교정에 그의 공적비를 세웠으나 오래되고 학교가 문을 닫아 관리가 소홀해져 연화대 5척의 공적비를 새로 만들어 화성면사무소 옆에 다시 세웠다.

     

    1918년 청양군 화성면 매산리에서 태어난 송 장군은 무인의 기질을 타고나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내각수반으로 국정을 총괄했다.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고 이후 내각에 입각했다가 당시 1963년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48년 '4·3사태'의 진압군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80년 10월18일 오후 9시 미국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사랑은 화성초등학교 교사 및 도서관 증축, 소방차량과 청양군 구청사 증축지원 등 군내에 흔적들이 많다. 화성면을 가로지르는 무한천에 제1장군교와 제2장군교를 놨다. 2011.05.17

    왕성상 기자 wss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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