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육군참모총장 이형근 대장 군번1번[태극무공훈장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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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2019. 1. 13.

 

우리 군의 모체가 된 국방경비대가 1946년 창설되면서 많은 인재가 모였다.2015. 01. 12

기존의 현역장교들이 많이 입대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누가 군의 상징인 군번 1번을 받을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국방경비대를 관리하고 있던 미군정청은 이형근 대위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했다. 스물여섯의 젊은 자신이 많은 선배들 앞자리에 설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미군정청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형근 대위는 승승장구했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2사단장, 3군단장, 초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한국군의 기초를 다졌다. 195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서른여덟 살 때였다.

 장군은 한국인 앞에서 오만하게 구는 일본인을 눌러주겠다는 마음으로 일본 육사에 들어갔다. 그런 까닭에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그림자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현역 시절 군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올바른 소리를 잘하고 강직해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군복을 벗게 된 것도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예편 후 정치권의 유혹도 적지 않았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2002년 오늘, “노병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며 군에 무한한 애착을 보였던 장군이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형근 李亨根 1920∼2002 행정조사위원회장 76년 반공연맹 이사장 81∼88년 국정자문위원 8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다 태극무공훈장· 대한민국 외교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민족의 활로》와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건국에 얽힌 일들을 쓴 《건군비화 建軍秘話 》 등이 있다

성명 이형근 李亨根 (별세)

영문명 LEE,HYONG-KOON

생년월일 1920/11/02 (음력)

출생지 충남 공주

본관 공주 (公州)

성별 남

학력

- 1942 일본 육군사관학교

- 1943 일본 육군야전포병학교 (졸업)

- 1946 군사영어학교 (졸업)

- 1949 미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1949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경력

1945/11 - 조선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 창군 원로

1946 - 조선국방경비대 대위 임관(軍番 1번)

1946/05/01 - 1946/09/06 초대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교장(참령)

1946/10 -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

1947 - 통위부(統衛部)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

1948 - 통위부(統衛部) 참모총장

1949/02 - 주미국대사관 초대 무관

1949 - 제8사단장

1950/06 - 제2사단 사단장

1950 - 제3군단장

1951/08 - 휴전회담 한국대표

1952/01 - 제1군단 군단장

1954/02 - 1956/06 제1대 합동참모회의 의장(육군 대장)

1956/06/27 - 1957/05/17 제9대 육군참모총장(대장)

1959 - 예편(대장)

1960/07/16 - 제8대 대한민국재향군회 회장, 고문

1961 - 주필리핀대사관 대사

1962 - 주영국대사관·주덴마크대사관·주스웨덴대사관·주노르웨이대사관 대사

1967 - 외무부 본부 대사

1969 - 행정조사위원회 위원장

1976 - 반공연맹 이사장

1980 - 입법회의 의원

1981 - 1988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1989 - 통일원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1990 - 성우회 고문

- 2002/01/13 별세(노환)

가족관계

장인 이응준(李應俊) [ 생일 : 1891/06/27 ] [별세] 초대 육군참모총장

1남 이훈(李勳) [ 생일 : 1947 ] (전) 재향군인회 회장

2남 이헌(李憲) [ 생일 : 1950 ] 가수 [본명:이현]

1녀 이미경(李美敬)

2녀 이애경(李愛敬)

3녀 이은경

4녀 이보경(李寶敬)

자부 장순천(張順玔) [ 생일 : 1952 ] 연극배우

제 이상근(李尙根) [별세] (전) 육군 7사단 3연대장

저서

민족의 활로

建軍秘話

상훈


태극무공훈장

은성태극훈장

1등수교훈장

미국 최고지휘훈장

로마 榮譽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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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이형근 대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8/01
요 약 정 보

● 한문 : 李亨根
● 생몰연대 : 1920.12.2-2002.1.13
● 출신지역 : 충남 공주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2회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20. 2 충남 공주 출생
*1946. 1 국방경비대 육군정위(대위) 임관
*1946. 5 국방경비사관학교장 겸 군기사령관
*1946. 10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
*1948. 2 통위부 참모총장
*1949. 2 육군준장
*1949. 2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1949. 6 제 8사단장
*1950. 6 제 2사단장
*1950. 10 제 3군단장
*1951. 4 육군소장
*1951. 8 휴전회담 한국대표
*1952. 1 제 1군단장
*1952. 5 육군중장
*1954. 2 합동참모회의 의장
*1954. 8 육군대장
*1956. 6 육군참모총장
*1958. 8 예편
*2002. 1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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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1920-2002)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대한민국 육군 ‘3大將’ 중의 한 축인 이형근(李亨根) 육군 대장은 1920년 12월 2일 충남 공주에서 미국계 상사를 운영하던 개화가정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오늘날의 경기고등학교인 경성제일고보에 입교한 후 다시 고향 인근의 청주고보를 마치고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조국광복 후 고향 인근의 대전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1945년 11월 미 군정 당국으로부터 “한국군의 모체인 조선 국방경비대에 참여하라”는 끈질긴 권유와 이응준(李應俊) 장군의 권고를 받고 국군 최초의 간부 양성기관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군번 1번의 육군 정위(대위)로 임관되었다. 1946년 2월 대전의 제2연대 창설에 전념한 그는 두 달 후 소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국방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9월에 다시 제2연대장으로 복귀했으나 채 한 달도 안되어 초대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군기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8년 2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통위부 초대 참모총장에 오른 그는 한국군 최초로 미 조지아주의 포토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그러던 중 준장으로 진급과 함께 주미 한국대사관 초대 무관에 임명되어 대미 군사원조 획득을 위한 군사외교에 나섰다. 1949년 6월 귀국 후 강릉에서 신설될 예정이었던 제8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사단창설에 주력하였으며, 6.25전쟁 발발을 5일 앞둔 1950년 6월 20일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장에 보임되었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휴전협정 조인으로 전쟁이 일단 종결되자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합동참모회의 의장에 올랐으며, 2년 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8월 16일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후 1961년 주필리핀대사를 시작으로 영국, 스웨덴,노르웨이 등 주요 국가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외교사절의 중책을 완수한 그는 1971년 향군회 고문과 197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80년 입법회의의원,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가를 위해 봉직하였다.
2002년 1월 13일 운명을 달리한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11에 안장되었으며, 생전에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태극무공훈장 2회,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 미 은성훈장과 최고지휘훈장, 프랑스 최고지휘훈장, 그리스 원정군훈장 등 국내외의 수많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국가와 군을 사랑했던 그의 그러한 정신은 그가 국군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의 “한국이 일본에게 합방을 당한 것은 국력, 특히 국방력이 약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에 감명을 받았고, 또한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전통사회에서 결과된 유약한 민족성을 개조하는 도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군이 기여할 수 있다는 소명의식에 있었다.
“군인은 절대로 정치와 정치인의 사병(私兵)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국군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토방위에만 전심전력해야 한다”고 참모총장 이임사를 통해 자신의 군인관과 애군심을 나타낸 진정한 군인이자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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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이형근 육군 대장은 1952년 1월 제1군단장에 부임한 이래 동년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동부전선 최북단 돌출고지인 351고지에서 북한군 제1군단 및 제3군단과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면서 우수한 통솔력과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고지를 사수하고 적 사살 445명, 포로 및 투항 5명과 82㎜ 박격포 2문 등 수많은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1953년 5월 18일 은성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06호)을 수여받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형근 장군은 5연대 제2대대를 이끌고 의정부전선에 투입되어 서울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이 한강 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게 되자 이형근 준장은 새로운 명령에 따라 이천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계속되는 후퇴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군.경 약 3,000명을 혼성연대로 편제한 이형근 장군은 밀려오는 적과 육박전을 전개하여 적 500여 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하였으며, 2대의 전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전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된 이천지구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가 이동해 있던 대전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형근 준장은 미국에서 숙지한 작전요령에 따라 단 한 명의 병력손실도 없이 질서정연한 철수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전남관구사령부 부사령관, 육군중앙훈련본부장을 거쳐 1950년 10월 새로 창설된 제3군단의 군단장직을 맡게 된 그는 미 제9군단과 교대하여 후방 보급로 확보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는 한국측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여한 후 1952년 1월 제1군단장에 보직되었다.
제1군단장으로서 그는 지상전선 및 동해안 해안선에 대한 공격과 국군 증강계획에 따른 3개 전투사단 창설에 나섰으며, 특히 수복지구에 대한 군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52년 7월에는 동부전선 최북단 돌출고지인 351고지에서 북한군 제1군단 및 제3군단과 맞서 싸워 고지를 사수하는 전공을 수립하였다.
제11사단 및 제5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제1군단은 전선 최동단의 방어를 위해 남강 남안의 주진지를 확보하고 북한군 제1군단 47사단 및 제9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군단 우익 554고지부터 감호까지 고성 남쪽을 담당한 제5사단의 정면에는 고성 남쪽의 월비산을 점령하고 있던 적이 351고지 등 제5사단의 전초와 주저항선을 공격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52년 7월초 군단 예하 제5사단장 장창국 준장은 제36연대를 좌전방, 제35연대를 우전방, 제27연대를 예비대로 재배치하고, 351고지 전초진지 방어를 담당한 제35연대는 주저항선에 제2대대만을 배치하고 전초진지에 제1대대와 제3대대를 배치하여 전초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반면에 북한군은 제9사단 86연대를 국군 제35연대 정면에, 제47사단 2연대를 국군 제36연대 정면에 배치하고 소규모 수색정찰활동과 보급품 수송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었다.
작전지역은 고성까지 북으로 돌출되어 있으나 남강의 방호를 받고 351고지에서 554고지까지 일련의 능선에 방어선을 형성함으로써 아군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적은 고성 남쪽에 배수진을 형성하고 월비산을 확보하고 있어 국지적으로 감제.관측의 이점이 있었다. 기상조건은 대체로 청명하였으나 아침에는 짙은 안개로 관측이 불가능하여 기습작전에 유리한 반면, 포병 및 항공지원에는 불리하였다.
북한군 제9사단 86연대는 351고지 공격에 앞서 월비산과 351고지 사이에 있는 무명고지에 수색대와 정찰대를 투입, 매설된 지뢰와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7월 10일 22시 북한군 제86연대의 대규모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후 대대 규모의 정예부대가 351고지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자 이곳에 배치된 제3대대 9중대 진지의 일부가 돌파되고 말았다.
다음날 사단수색중대와 제27연대 2대대를 제35연대에 배속시킨 사단장은 즉시 1개 대대로 역습을 가하도록 하였다. 주저항선에 투입된 제27연대 2대대가 11일 14시 15분에 동서 양측방을 우회하면서 능선을 따라 적전(敵前)으로 진출하였으나 적의 측방화력과 자동화기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였으며, 이어 제3대대의 몇 차례 공격도 좌절되었다.
7월 12일 사단장은 교대된 제27연대로 하여금 351고지를 탈환하도록 하였으나 진전이 없자 제35연대에 탈환임무를 부여하였다. 연대는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처럼 양동작전을 편 후 제2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전개하였다. 대대는 제5중대를 동측방에서 돌격하게 하고 제7중대를 서측방으로 투입하여 공격개시선에 진입시키고, 제6중대를 중앙에서 후속하게 하였다.
제5중대는 지형상 특공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동측진지를 완전 점령하고 정상을 향해 돌진하였다. 좌일선의 제7중대도 서측방 능선을 따라 전진, 반대편의 제5중대가 돌격을 감행할 때 동시에 돌격을 개시하여 주봉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351고지는 만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수 차례의 공방전으로 붉게 물들었으며, 제5사단은 이 전투에서 적 445명을 사살하고 82㎜박격포 2문을 노획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이 전투는 경계의 중요성과 지원화기의 운용에 관한 문제를 교훈으로 보여주었다. 적은 351고지를 쟁취할 목적으로 침공 4일전부터 351고지와 무명고지 사이에 매설된 지뢰와 철조망을 제거하였으며, 침공 전날도 정찰대와 공병들이 이 작업을 계속하였으나 아군은 경계 소홀로 이를 탐지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였다.
또한 아군은 목표를 구분하여 분석하고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화력운용계획이 필요했다. 적보다 우세한 지원화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보병투입으로 불필요한 인력손실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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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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