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대 육군참모총장 최영희 중장[태극무공훈장]

댓글 0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2019. 1. 14.

 

(崔榮喜) / 생년월일 : 1921년 3월 1일

본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77-56

주소
서울특별시 광진구

▶ 학 력

1940
휘문중학교 졸업(32회)
1944,1
일본 동경전수대학 법학부 졸업
1961,4
미국 죠지와싱톤 대학원 정치경제학부 수료
1976,2
명예철학박사(중화민국학술원)학위 취득

▶ 경 력

1946,1
조선경비대 소위임관
1948,7
육군본부 초대인사국장
1950,10
육군 보병 제1,8,15 사단장
1953,9
육군 제5군단장
1956,10
육군 제2군 사령관
1959,2
교육 총본부 총장
1960,5
육군 참모총장
1960,8
연합참모부 총장
1962,4
주 토이기공화국 특병전권대사(겸임:이란,졸단,사우디아라비아)
1967,7
제7대 국회의원 당선
1968,2
국방부 장관
1971,5
제8대 국회의원 당선(평택 지역구)
1971,7
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피선
1973,3
제9대 국회의원 당선
1973,3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피선
1976,3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피선
1979,3
제10대 국회의원 당선
1979,3
유신정우회 원내총무
1979,11
유신정우회 의장 피선
1984,1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복리회 회장
1990,10~00,10
사회복지법인 한국지역사회복리회 회장

▶ 상 훈

1950,12
금성 충무무공훈장
1951,2
은성 충무무공훈장
1952,5
금성 을지무공훈장
1952,12
동성 충무무공훈장
1953,6
태극무공훈장
1953,9
은성 을지무공훈장


▶ 외국의 훈장

1951,3
미국 은성무공훈장
1952,9
미국 동성무공훈장
1953,5
미국 근무공로훈장
1968,5
일등성장 명예훈장(이디오피아)

前육군 참모총장 최영희장군 별세
[대전일보] 2006-01-12 20:02


제12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최영희 장군이 11일 새벽 1시45분 순천향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故 최 장군은 서울 출생으로 1946년 임관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보병 1사단장과 8사단장으로 많은 전투에 참가, 전공을 세웠다.

육군 작전참모부장, 5군단장, 2군 사령관을 거쳐 참모총장 재임시에는 장병 인사근무 제도 확립과 전투병과 교육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육군의 내실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연합 참모부 총장을 거쳐 지난 60년 중장으로 예편한 이후 68년 국방부 장관, 제7, 8, 9, 10대 국회의원과 79년 유정회 의장, 성우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훈·포상으로는 금성 충무무공훈장·금성 을지무공훈장, 무성 태극무공훈장, 은성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6녀(원남, 원정, 원희, 원자, 민재, 재경)가 있다.

영결식은 13일 오전 10시 서울 국립 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엄수되며 이날 오후 4시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된다.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 <郭相勳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대 표 제 목 최영희 중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8/01
요 약 정 보

● 한문 : 崔榮喜
● 생몰연대 : 1921.3.1-
● 출신지역 : 서울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21. 3 서울출생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7. 4 제 6연대 2대대장
*1950. 4 제 5사단 15연대장
*1950. 7 제 1사단 15연대장
*1950. 10 육군준장
*1950. 10 제 1사단장
*1950. 12 제 8사단장
*1951. 6 국방장관 보좌관
*1952. 5 육군소장
*1952. 6 국방부 제 2국장
*1952. 7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
*1953. 6 제 15사단장
*1953. 9 제 5군단장
*1954. 5 육군중장
*1956. 9 제 2군사령관
*1959. 2 교육총본부 총장
*1960. 5 육군참모총장
*1960. 8 연합참모본부 총장
*1960. 10 예편

1. 생애(1921- )

1921년 3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한 최영희(崔榮喜) 육군 중장은 1941년 휘문중하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동경의 센슈(專修)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군대의 창설이 절대적이라는 데 뜻을 같이하고 창군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경제대 법대 출신인 왕익권(王益權)이 제국주의 타도, 신조선의 건설, 치안유지의 협력 등을 내세우고 학병 출신들로 결성한 ‘조선학병동맹(朝鮮學兵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왕익권 일파의 선동적이며 노골적인 공산주의적 편향에 회의를 갖게 된 학병 출신 3,000여 명은 학병동맹의 탈퇴를 선언하고, 이 중 일부는 ‘학병단(學兵團)’을 결성하여 학병동맹에 대항하였다. 학병단원 중 최영희를 비롯한 김종갑(金鍾甲), 민기식(閔機植), 강영훈(姜英勳), 이치업(李致業) 등은 열성적으로 좌파와 대립했던 단원들로서 이후 창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은 물론 6.25전쟁 당시 공산군을 격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미 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통역장교요원을 모집하자 최영희는 학병단원 일부와 함께 입교하여 1946년 2월 21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군번 10051)로 임관하였다. 제6연대에 배속된 그는 심언봉(沈彦俸), 장도영 등과 함께 B중대와 C중대를 모병하여 대대편성을 완료하는 한편 1947년 4월에는 제6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5월 총사령부 인사참모를 거쳐 7월에는 육군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그 직후 육군사관학교 후보생대대장으로 전보되어 헌병사령관 겸 헌병학교장으로 복무하게 된 1949년 11월까지 재임하였다.
6.25전쟁을 두 달 여 앞둔 1950년 4월 18일, 헌병사령관으로 전보된 송요찬 대령에 이어 제15연대장으로 보임된 최영희 대령은 보병학교 교육과정에 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전장에 나서게 되었다.
제15사단장으로 351고지와 339고지전투를 마지막으로 종료한 그는 9월 25일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군단 창설과 발전에 전력을 다하던 중 육군 중장으로 진급, 1956년 9월 제2군사령관에 보임되었다. 이어 교육총본부 총장을 거쳐 1960년 5월 23일 마침내 육군의 수장인 참모총장에 오른 뒤 연합참모본부 총장을 끝으로 1960년 10월 7일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예편 후 그는 1962년 터키주재 대사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하였고, 1967년에는 제7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968년에는 국방장관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국회 국방위원장, 외교국방연구소 이사장 등 국방관련 업무에 종사하였다.
훤칠한 체격에 운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휘문중학 재학시절에는 전국 규모의 중학 유도대회와 역도대회에서 1등에 입상할 정도로 심신이 올바른 침착하고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하들이 그에게 신뢰를 보냈던 만큼 부하에 대한 그의 사랑도 끔찍한 것으로 호평이 나있다. 일례로 신녕전투 당시 적이 화산을 점령하여 제6사단의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제2군단장인 유재흥 장군은 연대장인 그에게 즉각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는 “빨리 가나 늦게 가나 1시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책임은 완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답변하였는데, 실제로 그는 공격 5시간만에 목표를 점령하여 군단장을 놀라게 하였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친 병사들에게 충분한 수면과 식사를 하게 한 후 새벽에 기습을 실시한 것이 주효한 것이었다.
아몬드 장군의 미 제10군단 예하의 제8사단장으로 재임하던 그는 너무 깊숙이 북진하였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사단병력 전체를 잃어버렸다. 그는 적진의 동정이 불확실하고 예비병력도 이어지지 않아 전진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사단을 방문한 아몬드 군단장의 “내가 있으니 염려말고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고 사단병력 전체를 적진 깊숙이 전진시켰던 것이다. 그는 하우스만에게 헬기를 제공해 줄 것을 부탁하여, 그 헬기를 타고 부대 상공을 돌면서 종이쪽지에 후퇴로를 적어 돌멩이 달아 던지고 다녀 4천명의 사단병력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는 상하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그 결과 여러 전장을 누비면서 수많은 전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53년 6월 5일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 외에도 을지, 충무, 화랑무공훈장을 비롯해 미 은성훈장, 미 동성무공훈장, 미 근무유공훈장 등을 수여받는 영예를 누렸다.

2. 공적

개전과 함께 원대인 제15연대로 복귀한 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고랑포-청단간의 서부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제1사단에 배속되었다. 육군본부로부터 문산지구에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선발대인 최병순 소령의 제3대대를 지휘, 제1사단에 도착한 그는 백선엽 사단장으로부터 금촌 북쪽의 고지군을 점령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격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7일 오전 적의 주력을 맞아 접전을 펼친 끝에 봉일천으로 철수하였다.
후퇴하는 제1사단과 함께 행주나루를 건너 김포반도로 철수한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6월 30일 김포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오류동-소사간의 경인가도 고수와 김포비행장 탈환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적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중 7월 6일 증평에서 제1사단 13연대에 통합되었다.
화령장 부근에서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하며 문경-낙동강으로 철수한 최영희 대령의 제13연대는 8월 3일부터 다부동전투를 전개하며 낙동강선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9월 25일 반격에 나섰다. 보은-청주-안성을 거쳐 고랑포로 진격한 제1사단은 10월 1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평양탈환작전에 돌입하였다. 10월 19일 적도 평양에 입성한 제1사단은 순천-개천을 거쳐 11월 2일 운산으로 북진하였으며, 운산에서 청천강으로 철수한 후 재진격을 실시하였다.
북진중인 10월 10일 육군준장으로 진급한 후 10월 24일부로 제1사단장에 임명되어 철수작전을 지휘하였다. 5일간의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직을 거친 후 1950년 12월 25일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제8사단장에 전보된 최영희 준장은 춘천-홍천으로 사단을 철수시켰다. 1951년 1월 20일 미 제10군단으로 배속변경된 제8사단은 충주-함창-제천-횡성으로 이동하여 2월 5일부터 횡성전투를 전개하고, 군단의 라운드업 작전에 좌익사단으로서 홍천으로 진격하던 중 중공군에 포위되어 부대가 분산되었다.
전선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주포리로 이동한 사단은 제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하여 부대 재편에 들어갔다. 4월 중반에 접어들어 금산과 부안 등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펼친 후 제천-홍천-현리-인제-원통리로 이동하면서 원통리 북방 노전평지구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였다.
8월 9일 제1차 노전평지구전투를 전개한 제8사단은 노전평-서화리 계곡 우측방의 785고지를 점령하는 개가를 올린 뒤, 18일부터는 제2차 노전평지구전투를 실시하여 사단에 부여된 미 제8군의 작전목표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어 9월 10일부터 제3차 노전평지구전투를 실시, 서화리 북방의 854고지를 점령한 후 작전지역을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하였다.
백석산지구를 제7사단으로부터 인계받은 사단은 9월 30일 이틀에 걸쳐 백석산전투를 전개하여 이를 점령한 후 10월 6일부터는 크리스마스고지(1090고지)로 진격하였다. 이후 작전지역을 제7사단에 인계한 제8사단은 미 제10군단으로부터 백 야전사령부로 배속이 변경되어 춘천-서울-전주-남원으로 이동하였고, 1952년 1월말부터 호남지구에서 공비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국방장관 보좌관과 국방부 제2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한 후 1952년 8월 16일 미 육군참모학교에 파견되었던 최영희 소장은 다음해 6월 원대복귀한 후 제15사단장에 임명되어 전선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제15사단은 동부전선 351고지 및 339고지에서 적 제7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7사단의 공격을 받고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6월 2일부터 시작된 이 전투는 6일에 제1차전이, 15일에 제2차전이 종료된 상태였다.
부임 이래 사단 전투방어진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단장은 후일의 공방전에 대한 대비로써 사단방어진의 확보와 공병대대는 물론 사단 전 병력을 동원하여 주저항선의 방어진지 구축, 주보급로의 교량신설 및 보수, 지뢰매설, 철조망 가설 등 적의 신예화력과 기습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관계참모 및 예하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매일 연대 OP는 물론 대대, 중대 OP까지 돌면서 적정을 파악하였으며, 때로는 포단 사격지휘소(FDC)에 지시하여 적진을 파괴.분산시켰다.
한편 휴전협정의 조인시기가 다가오자 적은 병력증강 및 보급강화를 기도하고 전 전선에 걸쳐 진지탈환전을 전개하였다. 사단장 최영희 소장은 적의 기도를 사전에 분쇄할 목적으로 소규모의 수색전과 주저항선 확보.보강에 만전을 기하였다. 1953년 7월 16일 22시 30분을 기해 적은 제3사단 9연대 및 제7사단 53연대를 동원하여 야포 및 박격포의 맹렬한 지원아래 351고지, 339고지, 345고지, 208고지 방면의 진출로로 부분적인 파상 공격전술을 사용하여 아군 제15사단 38연대의 방어진을 공격해왔다.
최영희 사단장은 필승의 신념으로 전 장병에게 결사수호의 엄명을 시달함과 동시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전방의 연대 OP에 출진하여 적정에 따른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일대 격전을 감행하였다.
계획된 아군의 강력한 화력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적의 포탄은 아군의 통신망을 절단하고 화력대비로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상황을 파악한 사단장은 지원포병대로 하여금 적 화력진을 포격토록 함으로써 적의 화력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통신망의 신속한 연결.보선에 전력을 다하고, 쉴새없이 관계참모와 숙의하는 한편 탁월한 작전지휘와 강력한 포 지원사격을 가하여 04시에 적을 완전 격퇴시켰다.
결과적으로 두 고지를 적에게 넘겨준 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 전투는 사단이 창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병들의 전투경험이 일천하고 지형적으로도 불리하며 휴전협정 조인에 따른 작전상의 제약 등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단장 이하 전 장병의 혼연일체로 적의 강력한 공격을 저지한 전투였다.
제8사단장 최영희 육군 준장은 6.25전쟁 개전초기부터 전쟁 전 기간을 통해 음성.미원.봉화산지구 등의 전투에서 위기에 봉착한 전국(戰局)을 유리하게 전환하고, 지리산지구공비토벌작전과 강원 김화지구 및 351고지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수립함으로써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09호)을 수여받았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국방일보 > 군사소식 > 육군
육군

故 최영희 前 국방부장관 영결식

13일 서울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된 고 최영희 전 국방부장관의 영결식에서 장병들이 고인을 운구하고 있다.

고 최 전 장관은 이날 영결식을 마친 뒤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2006.01.16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