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 [태극무공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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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2019. 1. 14.

 

대 표 제 목 김용배 대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7/31
요 약 정 보

● 한문 : 金容培
● 생몰연대 : 1923.4.21-
● 출신지역 : 서울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1. 생애(1923- )

1923년 4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한 김용배(金容培) 육군 대장은 1942년 당시 전국의 수재들만 모였다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늘날 서울 법대의 전신인 서울법전에 입학, 2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44년 9월에 졸업하였다. 조국의 광복 이후 국군창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의도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1946년 3월 23일 졸업과 동시에 군번 10077의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1연대 C중대의 편성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제1연대 C중대는 3월 중순에 편성되어 이병주 참위(소위)가 3월 15일부로 부위(중위)로 진급하여 중대장 대리에 임명된 시점이었다.
이후 제7연대와 제13연대에 재임하며 중령까지 진급했던 그는 1950년 1월 육군참모학교의 교육과정에 입교하여 교육을 마치고 6.25전쟁을 불과 보름 앞둔 1950년 6월 10일에 제8사단 21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6.25전쟁이 종료된 후, 육군 소장으로 부대정비 및 전후복구에 주력하던 그는 미 지휘참모학교에 교육파견이 결정되어 1954년 6월 육군본부로 전속명령이 내려졌다. 6월 25일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5월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 부임하였고, 약 3개월의 재임기간을 거쳐 9월말에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육군본부에 재임하는 동안 각종 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였는데, 1956년 1월에 발생한 ‘김창룡(金昌龍) 중장 살해사건’의 조사위원, 장교진급심사위원, 외국교육기관 파견자선발 판정관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9년 7월 제1군단장에 임명된 데 이어 5개월 만에 제5군단장으로 전보된 그는 1960년 10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으로 발령되어 근무하던 중 1961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초급장교 육성에 전력을 다한 그는 약 4년간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1965년 4월 1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제17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66년 9월 1일 예비역으로 편입될 때까지 육군의 수장으로 육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후 1967년 충주비료 사장, 1968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되어 국가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그는 1970년 향군회 자문위원과 1973년 한독맥주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군 내외에서의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1등 보국훈장 등 수많은 훈.포장을 수여받았다.

[부고]김용배 前육참총장 별세
[동아일보] 2006-03-14 03:24



[동아일보]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용배(사진) 예비역 대장이 1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1946년 임관한 김 전 총장은 7사단장과 1, 5군단장, 육군사관학교장, 2군사령관 등을 거쳐 1965년 4월부터 1966년 9월까지 참모총장을 지냈다. 예편한 뒤에는 대한중석 사장, 선주협회 이사장, 재향군인회 고문 등을 지냈다.

고인은 태극무공훈장과 1등보국훈장, 미국 공로훈장, 자유중국 보정훈장, 태국 1등왕관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종한(현대·기아자동차 수입구매실장) 씨와 딸 무원, 문옥 씨가 있다. 영결식은 15일 오전 9시 반 국군수도병원에서 육군장으로 치러진다. 유해는 대전국립묘지 장군 묘역에 안장된다. 031-725-6061∼2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 공적

동해안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8사단은 전쟁발발 당시 2개 연대밖에 갖추지 못한 상태로서 38도선에 제10연대를 배치하고 제21연대는 예비로 삼척에 집결 보유 중이었다. 제21연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삼척으로 부임한 김용배 중령은 북한군 제5사단이 6월 25일 04시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38도선을 돌파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자 연대 병력을 북평-백봉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이동시켜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는 한편 일부는 본대와 합류하여 강릉지구전투를 실시하였다.
6월 28일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을 받은 제8사단은 차량행군으로 평창을 거쳐 제천, 단양, 안동으로 철수하였다. 7월 6일 육본직할에서 제2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된 제8사단은 7월 8일부터 단양전투를 전개, 북한군 제8사단의 진출을 일주일간 지연시킨 후 죽령에서 철수를 단행하고 풍기.영주지역에서도 적의 진출을 10일간 저지하였다.
이어 영주-웅천-안동으로 철수한 제8사단은 수도사단 제1연대와 함께 적 제12사단과 제8사단 소속 일부 병력의 침공을 4일간 방어하고 안동교를 폭파한 후 의성지역으로 철수하여 낙동강방어선에 참여하였다. 8월 3일부터 전개된 의성전투에서 제8사단은 앞서 안동 전투시와 동일한 적 부대를 맞아 11일이나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국군이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의성지구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제8사단은 영천으로 철수하여 9월 5일부터 영천전투를 전개하였다. 당시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기 위해 8월 20일 다부동 정면에서 의성을 거쳐 영천 동북방 입암리로 이동하여 최후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용배 중령의 제8사단 21연대는 좌일선으로 노고재-보현산에, 제16연대는 우일선으로 입암 남쪽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9월 2일 야간에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받은 제16연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져 영천 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 4일 오후 좌일선에 제21연대, 중앙일선에 제16연대와 제3연대 1대대, 우일선에 제7사단 5연대가 배치되었다. 자정 무렵 각종 포 지원과 전차를 선두로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한 적 제15사단에 중앙의 제16연대와 제3연대 1대대가 돌파당하자 좌우측의 제21연대와 제5연대도 적의 공격을 저지하던 도중 부득이 영천 북방 선천동과 상리동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적의 주력이 9월 6일 미명,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영천을 점령하였을 때, 양측방의 제21연대와 제5연대는 통신두절로 영천의 전황을 알지 못한 채 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제21연대를 공격하던 적은 영천의 돌파구확대를 기도하였다. 9월 7일 미명 김용배 대령이 지휘하는 제21연대는 적 제103연대의 수회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다음날에는 적 제73독립연대의 공격을 강력한 화력을 집중하여 저지하였다.
9월 8일과 9일 적의 돌파구 봉쇄를 위한 방어선이 영천에 형성되자 제2군단은 10일부터 총반격에 돌입하였다. 10일 미명 제21연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영천-자천 도로를 따라 후퇴중인 적 전차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작전에 돌입한 제2대대 5중대 2소대는 자천동 남쪽에서 적 전차 1대를 파괴하고 포로 5명과 적 제15사단의 작전문서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영천전투는 낙동강방어선이 돌파되느냐 사수하느냐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제8사단 21연대장 김용배 대령은 승리를 가져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즉 연대 진지를 영천 북방에 계속 유지시켜 적 2개 연대를 견제, 이들 연대가 증원병력으로 차출될 수 없게 하여 주력의 전진을 지연시켰다. 이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9월 20일 영천전투를 계기로 반격에 들어간 제8사단은 의성-안동-영주를 거쳐 단양-양평-동두천으로 진격하여 10월 8일 마침내 38도선을 돌파하였다. 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연천-철원-곡산 등 북진을 계속하고 있던 10월 24일 제21연대장 김용배 대령은 제3사단 부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당시의 제3사단은 원산을 탈환한 후 원산과 함흥지구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3사단은 11월 17일 제22연대가 혜산진, 제23연대가 나남으로 각각 진출했으나 12월 1일 군단의 철수명령에 따라 백암 및 나남에서 길주, 성진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 구룡포와 부산으로 각각 해상철수하였다. 12월 15일 제2군단으로 예속이 변경된 사단은 원주로 이동하여 홍천 북방 소양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10사단과 제2사단의 유격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1951년 1월 7일 김용배 대령은 중공군의 남진으로 원주 및 영월까지 후퇴해 있던 제7사단의 부사단장으로 보임되어 중공군의 2월 공세와 킬러작전,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 등에서 사단장을 보좌한 후 4월 27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요원으로 발령되었다.
한달 여의 육본 생활을 마치고 5월 28일 다시 제7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진급한 김용배 준장은 6월 8일 백석산 남방 벳저선에 위치한 917고지 진격전을 전개하였다. 8월로 접어들어 김용배 사단장은 618고지, 901고지, 883고지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양갈래고지(732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서남지구전투사령관과 진주지구위수사령관, 육군보병학교 부교장,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지낸 후 1953년 2월 미 제25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일선에 복귀한 제7사단의 사단장으로 되돌아왔다. 5월 4일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직후 백석산지역을 제20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던 중 중공군의 6월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좌측방지역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6월 25일부터 선우고지(938고지) 전초진지쟁탈전을 펼친 끝에 전초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제7사단은 작전지역을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한 후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되어 다시 화천으로 투입되었다.
그 후 김용배 소장은 별우지구의 425고지 및 406고지 전초진지쟁탈전을 전개하던 중 휴전을 맞았다. 휴전협정의 조인으로 6.25전쟁이 일단락된 1953년 8월 27일 제7사단장 김용배 육군 소장은 제8사단 21연대장으로 재임 중 수행했던 영천지구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탁월한 작전능력과 통솔력을 발휘함은 물론 뛰어난 전과를 수립함으로써 1953년 8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1호)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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