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 [태극무공훈장.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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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2019. 1. 14.

 

송요찬(宋堯讚 )

육군중장 /

1918.02.13 ~ 1980.01.19

충남 청양군

미조지워싱턴대

태극무공훈장(1953.6.5), 을지무공훈장(1950.12.30/1952.11.5/1954.1.4), 충무무공훈장(1950.12.30/1951.10.20), 무공포장(1956.10.29)

1949. 9. 태백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공비토벌에 크게 기여
6·25전쟁 발발당시 제 8사단장으로 강릉-제천으로 철수하였으며 안양-풍기-영주로의 지연전을 효과적으로 수행
낙동강 방어작전시 영천을 피탈 당했으나 7사단과 함께 적의 돌파구를 패쇄하고, 영천탈환 및 적 15사단에 치명적 피해를 입힘
반격작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여건 조성
휴전선 공방시 7사단장으로 백석산, 883고지,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중동부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리고 한국군의 기세 유지

송요찬(宋堯讚)
1918∼1980. 군인·정치가. 본관은 여산(礪山). 충청남도 청양출생.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이후 국방경비대 소대장과 강릉 파견대장을 거쳐 1947년 소령으로 진급, 38도선 방어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48년 7월 경기도 수색에 있는 보병학교 초대교장을 지냈고, 1949년 1월 중령으로 진급된 이후 제주도폭동진압작전·오대산공비소탕작전·지리산공비소탕작전 등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0년 3월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재직중 북괴군의 서울점령 직전인 6월 27일 한국은행 지금(地金)을 진해로 무사히 반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50년 9월 준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원산·함흥·청진을 함락시키는 등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올렸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을 거쳐 철수하여 묵호에 상륙, 재정비한 뒤 총반격전에 나선 그는 수도사단장으로 강릉을 재탈환하고 이어 화천 북방에 위치한 수도고지에서 40일간의 혈전 끝에 중공군을 포함한 적군 2개 사단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1952년 7월 소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휴전 뒤 1953년 7월 미국방성 초청으로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 1년간 수학한 뒤 1954년 8월 제3군단장에 임명되고, 그해 10월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었다.
1956년 9월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한 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 1959년 2월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시 10만감군, 정군(整軍), 군인연금제도의 신설 등 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자유당에 의한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월의거 때에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4월의거를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사태 수습을 마무리짓고 허정(許政)의 과도정부 출범과 함께 곧 1960년 5월 참모총장직을 사퇴, 예편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수학중 1961년 5월혁명을 맞았다. 이에 즉각 5·16군사혁명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1961년 6월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귀국하고 국방장관 겸 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1962년 3월에는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관 등의 정부요직을 역임하고 1962년 6월 내각수반직을 사퇴하였다.
1963년 8월 8일 박정희(朴正熙)의 대통령출마를 반대하는 이른바 ‘최고회의 박정희의장에 보내는 공개장’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해 8월 11일 구속되었다.
10·15대통령선거에 자유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옥중출마하였으나 야당단일후보옹립을 위하여 선거 1주일 전에 자퇴하고 이어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1월초에 석방되었다.
그뒤 다시 친정부노선으로 전향하여 1970년 인천제철사장,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으나 1980년 가을 와병으로 62세에 죽었다.

송요찬(宋堯讚) 육군중장(1918.2.13 ∼ 1980.10.19)


송요찬 장군은 1918년 충남 청양 출생. 고향에서 봉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훈련소에서 복무했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육군소위로 임관.
임관 이후 6·25전쟁 전까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을 역임하면서 미군들로부터「타이거 송」이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교육훈련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건군 초기 군내 불순세력 척결에도 크게 기여하였음.
6·25전쟁 발발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1950년 9월, 그는 수도사단장으로서 7차에 걸친 북한군의 전면공세를 격파하여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음.
이후 반격과 북진 작전시에는 국군의 최선봉으로 38선을 돌파하여 신고산 일대에서 전차와 야포 등 1만여점의 적 장비를 노획, 개전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휴전 직전에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 금화·평강·철원을 잇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워 오늘날 수도사단이 맹호사단으로 불리는 전통을 수립하였음.

휴전 이후에는 3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직위를 역임하고 1960년 5월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이후 1961년 내각 수반 겸임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10월 향년 63세로 타계.
6·25전쟁의 명장으로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북진작전시까지 16개 주요전투에 참전,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그는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2회,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십자훈장 수상 등 수많은 훈·표창을 받았음

대 표 제 목 송요찬 중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8/01
요 약 정 보

● 한문 : 宋堯讚
● 생몰연대 : 1918.2.13-1980.10.19
● 출신지역 : 충남 청양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미국 십자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약력

*1918. 2 충남 청양 출생
*1946. 5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7. 3 제 8연대 3대대장
*1949. 5 제 6사단 10연대장
*1949. 9 제 5사단 15연대장
*1950. 4 헌병사령관 및 육군헌병학교장
*1950. 9 수도사단장
*1950. 10 육군준장
*1952. 7 육군소장
*1952. 7 남부지구경비사령관
*1953. 7 제 8사단장
*1954. 7 제 3군단장
*1954. 9 육군중장
*1957. 5 제·1군사령관
*1959. 2 육군참모총장
*1960. 5 예편
*1961. 6 내각 수반 겸 국방장관
*1980. 10 타계

1. 생애(1918-1980)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출생한 송요찬(宋堯讚) 육군 중장은 해방 이후 정국이 불안하고 사설 군사단체가 난립하여 혼란을 야기하는데 실망해 고향으로 내려가 있던 중 미 군정 당국에서 국군을 창설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희망인 국군 장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46년 1월 최경록(崔慶祿)의 도움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90)로 임관과 동시에 부산의 제5연대의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중대장 박병권(朴炳權) 참위(소위)와 함께 모병에 전념하였다.
1946년 9월 10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은 제8연대의 확장계획에 따라 강릉으로 이동하여 B중대에 편입되었으며, 다음해 2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대대장 박병권 대위가 타부대로 전출되자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육군 소령으로 진급한 뒤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제11연대 부연대장에 보임되어 제주도에서 소요사태의 진압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제9연대장으로 전보되는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는 제9연대가 재편성되자 제11연대가 수행하던 제주도평정작전 임무를 인수,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인 김상겸 대령이 부임할 때까지 작전을 지휘하였다. 1949년 2월 제9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이준식(李俊植) 대령이 지휘하는 수도여단에 편입되자 그는 계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북한 유격대의 남파저지를 위해 일선부대 근무를 자원한 끝에 1949년 6월 제6사단 10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연대장으로 재직하며 인민유격대의 남침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실시한 ‘양양 돌입사건’으로 그는 7월 24일 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그에 앞서 육군본부는 그를 육군 대령으로 진급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해임 이후 9월 28일, 송요찬 대령은 육군보병학교 학생감으로 보직명령을 받은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제15연대장으로 전보되었으며, 지리산지구공비토벌작전에 임하던 1949년 4월 최영희(崔榮喜) 대령의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전보되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전까지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을 역임하면서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宋’이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교육훈련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는 한편 건군 초기 군내 불순세력의 척결 및 공비토벌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휴전이 성립된 후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정규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육군 소장으로 제3군단장에 임명되어 2년여의 기간을 재임하고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57년 1월 제1야전군사령관에 보임된 데 이어 1959년 2월에는 육군의 수장인 참모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4.19혁명으로 국가가 혼란할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그는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고 신속한 민심파악과 적절한 조치로 난국을 수습한 후 1960년 5월 23일 14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1년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을 지내며 국군발전에 공헌하였으며, 1963년에는 자민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다. 그리고 1970년에는 인천제철 사장과 새한철재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80년 10월 19일 송요찬은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6.25전쟁의 명장으로 낙동강전선으로부터 북진작전까지 16번의 주요전투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그는 2회에 걸친 태극무공훈장과 대한민국 최초의 미국 십자훈장을 수상하는가 하면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훈.포장을 수여받았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해도 반드시 실천하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를 받는 지휘방식을 견지했던 송요찬은 끊임없는 교육훈련을 통해서만 군인이 필요로 하는 필승의 신념과 책임감 그리고 인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휘관이었다. 제3군단장 시절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유재흥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했던 대로 그는 목표점령을 위해서는 희생도 마다하며, 실패했을 경우에는 책임을 묻는 강력한 지휘형태를 소유한 용장이었으며, 사적인 공명을 거부하여 ‘석두(石頭)’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청백한 품성과 강직한 기풍을 소유한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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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제8사단장 송요찬 육군 소장은 1953년 6월 17일부터 7월 18일까지의 금성 동남지구전투에서 2개 사단에 달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지형능선고지 및 690고지를 탈환.확보하였으며, 국군 제2군단 정면에 대거 재침한 적의 공세를 역습으로 분쇄하여 주저항선을 사수하는 한편 피탈된 중요 고지를 순차적으로 탈환함으로써 전면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로 인해 장군은 1954년 7월 6일 정부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89호)을 수여받았다.
헌병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6.25전쟁이 발발하자 송요찬 대령은 지휘계통이 와해된 병력을 수습하여 재편성에 나섰으나 적의 공세에 밀리자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에 합류, 헌병들을 진두지휘하며 낙오병을 수습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인계하였다. 이후 육군본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한 무렵 적이 대구 방면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대구는 일시적으로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후방지역의 민심안정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는 점을 인식한 육군본부는 헌병사령관인 송요찬 대령을 8월 10일부로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송 대령은 내무부 전국비상경비사령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며 대구지역의 민심을 진정시켰다.
1950년 9월 1일 송요찬 대령은 간절히 바라던 사단장에 취임하였다. 백인엽 대령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안강.기계 부근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던 사단 전방지휘소로 나가 개전 이후 자신의 첫 전투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사단 전방지휘소가 적으로부터 피습을 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안강-경주 가도의 서측방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곤제봉을 점령하고 고수함으로써 제1군단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공격작전의 명수’로 부각되었다. 결국 안강.기계지구에서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세를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그는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20일만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수도사단은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반격을 실시하는 한편 육군본부에서 하달된 무제한 공격에 따라 38도선을 향해 진격에 나섰다. 북진작전에 나선 수도사단은 국군의 최선봉으로 38도선을 돌파하였으며, 신고산 일대에서는 전차와 야포 등 1만여 점의 적 장비를 노획하는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원산을 목표로 진출하던 사단 예하 제1연대는 회양을 점령하고 신고산으로 진격하던 중 철령재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전을 치뤘다. 신고산 일대의 적은 아군의 원산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철원 방면에서 후퇴한 북한군 제12연대와 제15연대 병력이었다. 이들은 제1기갑연대와 합동작전을 펼친 제1연대에 의해 방어선이 무너지자 1개 사단규모의 장비를 유기한 채 도주하였다.
이어 수도사단은 군단 작전명령에 의거 10월 10일 05시 30분을 기해 원산공격을 개시,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제압하고 원산에 입성하였다.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의 명령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사단은 덕원-마전리-신암선으로 진격하여 고원에 도달한 후 함흥.흥남탈환작전에에 임하였다. 함흥과 흥남을 탈환한 사단은 잔적을 추격하여 길주를 점령하고 11월 22일 경성-나남을 목표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목전에 앞둔 시점에서 송요찬 사단장은 흥남으로 철수하라는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북진 3개월만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12월 18일 묵호항에 상륙한 사단은 1951년 1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탈환작전에 나서 이를 점령하였다. 이후 5월 5일 사단은 적의 주보급로인 동해안 간성에서 홍천에 이르는 46번 도로를 확보하라는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설악산지구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중공군의 5월 공세에서는 혈전을 거듭하며 대관령을 고수하였다.
그후 동부전선의 924고지와 월비산전투를 승리로 이끈 수도사단은 제8사단과 함께 11월 15일 백 야전전투사령부에 편입되어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 임하였으며, 다음해 3월 작전임무를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공비토벌작전을 마치고 춘천 북방의 전선으로 이동한 수도사단은 새로 창설된 백선엽 중장의 제2군단에 배속되어 군단방어선의 중앙을 담당하게 되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든 6월로 접어들자 군단장은 적정 수집 및 적 진지파괴와 교란을 위해 제한공격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의해 송요찬 사단장은 7월 8일 지형능선 동북부의 A, B, C고지에 대한 공격을 각 연대에 하달하였다. 화력지원과 치열한 공반전 끝에 목표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사단은 결국 목표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물러나게 되었다.
1952년 7월 8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송요찬은 이용문 준장에게 사단지휘권을 넘겨주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사령관으로 전보되어 지리산지구의 공비토벌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10월 8일 수도사단장으로 다시 부임한 그는 전임 사단장 이용문 준장과 함께 지형능선탈환작전에 참여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가 바뀌고 소련 수상 스탈린의 사망에 따른 공산측의 평화공세로 휴전이 임박하자 적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도미 유학을 대기하고 있던 송요찬 소장은 금성 동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8사단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도사단장 당시 이 지역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경험으로 지역내 지형을 훤히 알고 있던 그는 임박한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612-690-765고지를 연하는 주저항선 및 예비진지의 축성공사를 실시하였다.
7월 13일 22시를 기해 사단 주저항선 일대에 적의 포화가 집중되고, 1개 사단 규모의 적이 제8사단 정면을 공격해왔다. 사단 예하 전 포병대의 포격으로 적은 막대한 병력이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6연대와 제10연대 정면을 공격, 23시경에는 일부 진지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인접 제3사단이 돌파될 경우 사단의 우측방이 일거에 충격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 송요찬 사단장은 군단장의 승인하에 아이슬랜드선으로 철수를 결정하고 다음날 낮에 이를 완료하였다.
7월 15일 제8사단에는 별우지역을 포함한 금성천 남안에 대한 반격명령이 군단장으로부터 하달되었다. 사단장 송요찬 소장은 제21연대에 19시를 기해 흑운토령과 461고지를 점령하라는 작명을 하달하고 적의 박격포탄이 작렬하는 대대지휘소에 나가 진두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흑운토령을 공격중인 제3대대가 중대 규모의 적을 격파하고 8부 능선을 점령하였으며, 461고지를 공격한 제1대대도 목표를 점령하였다. 순조롭게 공격이 진행되자 사단장은 공격을 강화하여 제16연대는 760고지를 그리고 제21연대는 625고지 및 596고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음날 제16연대는 760고지를 공격했으나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8부 능선에서 일단 공격을 멈추었고, 전날 흑운토령을 공격했던 제3대대는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를 점령하였다. 또한 625고지를 공격한 제2대대도 백병전을 전개한 끝에 목표고지를 탈취하였다.
이날 대대적인 반격으로 군단은 금성천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정일권 군단장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금성천을 초월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송요찬 사단장은 7월 17일 20시까지 연대별로 부여된 목표를 탈취하도록 명령하였다. 각 연대에 부여된 공격목표는 금성천변 2~2.5㎞ 지점에 위치해 있는 연봉으로서, 제21연대의 목표는 집실리 동쪽에 연립하여 여문리를 감제하는 요부이며, 제10연대의 공격목표는 집실리 서남쪽에서 별우지역을 감싸고 있고, 제16연대의 공격목표인 479고지는 죽동의 제17번 도로를 감제하는 요소였다.
제21연대는 사단의 우일선이 되어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강력한 포화로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는 등 진출이 어렵게 되자 연대는 근접항공지원을 통해 이를 제압하면서 목표를 탈환하였다. 마찬가지로 제10연대도 목표 탈취를 위해 혈전을 거듭한 끝에 적을 격파하고 목표를 탈취하였으며, 제16연대 또한 1개 중대규모의 적을 물리치고 목표를 탈취하였다.
각 연대에게 부여된 목표를 달성한 제8사단은 금성천을 초월하여 7월 18일 08시 집실리-죽동선을 확보함으로써, 적이 마지막으로 전개했던 7.13공세를 수포로 만드는 동시에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게 하였다.
이 전투를 진두에서 지휘한 제8사단장 송요찬 소장은 탁월한 작전지휘 능력을 과시하였다. 전투 초기에 사단예비로 두었던 제21연대를 반격의 주력으로 운용함은 물론 반격에 앞서 적의 종심이 신장되고 병력손실이 큰 적의 능력을 판단, 사단의 주력을 일제히 투입함으로써 반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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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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