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태극무공훈장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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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2019. 1. 14.

 

정일권 중장 훈장 수여 촬영일 : 1951-07-15

 

정일권(丁一權, 中島一權):만주 젠다오에 있는 조선인 학교 광명중졸(35년), 일제 만주제국이 세운 육군군관학교 제5기생, 치치하얼 제3교도대 입대(34), 일본 육군사관학교졸(40년), 국경사변 종군기념장. 주국6위와 경운6위 훈장 수여(43), 젠다오성 특별설치부대(젠다오 특설대, 조선인 특수부대)헌병 소좌(45)

광복 후:미국 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 졸업, 조선국방경비대 대위, 3군 총사령관, 미국 참모대졸, 육참 총장, 합참 총장, 연참 총장, 5·16쿠데타 국가재건 최고회의 위원, 대장예편·주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 미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수료, 유엔총회 한국대표, 미국 옥스포드대서 정치학수학,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말레이지아 명예법학박사, 중앙대 명예법학박사, 부산대·아르헨티나대 명예법학박사, 월남사이공대·미국 롱아일란드대 명예법학박사, 태국 출라롱콘대 명예정치학박사,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중국 국립정치대 명예법학박사, 중화학술원 명예철학박사, 제8·9·10대 국회의원, 성우구 회장, 공화당 당무위원겸 당의장서리·총재, 국회의장, IPU·APU 한국지부 회장, 한일의원연맹 회장, 국정 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 회장, 한일협회 회장, 자유총연맹 총재, 민자당 상임고문

상:충무·을지·태극무공훈장(금성), 1등수교훈장 광화장, 미은성훈장3개(총지휘관급 및 사령관급), 미수훈십자훈장, 독일1급공로대십자훈장, 일본욱일1등훈장, 희최고십자훈장, 월남콩캄1등훈장, 중국1급명성훈장

회고록:전쟁과 휴전

이름 : 정일권최근이슈 보기 본명 : 출생 : 1917년 11월 21일 사망 : 1994년 1월 17일 출생지 : 함북 경원 신체 : 가족관계 : 취미 : 학력 : 하버드대학원, 옥스퍼드대학원 직업 : 소속 : 데뷔 : 수상 : 충무,을지,태극무공훈장, 미국공로훈장, 이디오피아왕국 대성비훈장, 그리스공화국 최고십자훈장, 프랑스공화국 명예훈장, 필리핀공화국 명예훈장, 중화민국 제1급 명성훈장, 말레이지아 최고공로훈장, 아르헨티나SANMARTIN대십자훈장 경력 : 제 22대 한국반공연맹 이사장(1989),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교환교수(1983), 제10대 국회의원(1979), 제9대 국회의장(1973), 제8대 국회의원(1971), 제13대 외무부 장관 겸임(1966), 제9대 국무총리(1964), 제11대 외무부 장관(1963) 배우 : 출연작 : 나이 : 소개 : 특이사항 :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명단에 포함 (2005)

정일권 | 丁一權 ( 1917.11.21 ~ 1994.1.17 )


한국 정치가 겸 군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주(駐)터키대사로 임명되었다. 주프랑스대사, 주미대사, 유엔총회 한국대표,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외무부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금성 및 은성 태극무공훈장, 일등수교훈장 등을 받았다.



활동분야 : 정치, 군사
출생지 : 함북 경원(慶源)
주요수상 : 금성 및 은성 태극무공훈장, 일등수교훈장




1917년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8·15광복 후 국군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3군총사령관(三軍總司令官), 1954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1956년 합동참모본부총장(合同參謀本部總長)에 취임하였다. 1957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주(駐)터키대사로 임명되었다. 1959년 주프랑스대사, 1960년 주미대사, 1961~1962년 유엔총회 한국대표,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3년 외무부장관, 1964~1970년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에 취임하고, 1971년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8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임기 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그 해 국제의원연맹(IPU), 아시아의원연맹(APU) 한국지부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국정자문위원·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9~1991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로 활동하였다. 금성 및 은성 태극무공훈장, 일등수교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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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정일권 대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8/01
요 약 정 보

● 한문 : 丁一權
● 생몰연대 : 1917.11.21-1994.1
● 출신지역 : 함북 경원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전쟁과 휴전-6.25 비록
상 세 설 명

※약력

*1917. 11 함북 경원 출생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정위(대위)임관
*1946. 5 제 4연대장
*1947. 1 국방경비사관학교장
*1948. 7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1949. 2 육군준장
*1950. 7 3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1950. 7 육군소장
*1951. 2 육군중장
*1952. 7 제 2사단장
*1952. 11 미 제 9군단 부군단장
*1953. 2 제 2군단장
*1954. 2 육군총참모장
*1954. 2 육군대장
*1956. 6 연합참모본부 의장
*1957. 5 예편
*1994. 1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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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17년 11월 21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정일권(丁一權)은 1930년 경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로 건너가 1935년 북간도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하였다. 28세가 되던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자 동북지구의 한교보안대(韓僑保安隊) 편성을 주도한 그는 교민보호에 진력하다가 소련군에 연행되었으나,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해방된 조국의 국군창설 대열에 참여하여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한 그는 육군 정위(대위, 군번 10005)로 임관하여 제1연대의 창설 중대장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제4연대장에 疸玆퓸駭? 1947년 조선경비대 참모총장과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을 거친 다음해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수행하게 되어 맥아더 장군과의 친분을 쌓게 되었다.
마침내 32세가 되던 1949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육군참모학교장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여.순 10.19사건의 진압작전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다음해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시찰하고 귀국하던 도중 6.25전쟁의 발발소식을 접하였다. 귀국 직후인 1950년 7월 1일 삼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된 그는 낙동강전선까지의 지연작전과 북진 반격작전을 지도하여 대한민국 충무무공훈장과 미합중국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한 그는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하는 한편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2년 귀국과 동시에 제2사단장에 보임되어 저격능선전투를 지휘하였으며, 1953년에는 제2군단장으로 중공군의 7.13공세를 막아내고 화천방어에 성공,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다시 한번 수여받았다.
전쟁이 끝난 1954년 2월 37세의 나이로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그는 동시에 제8대 육군참모총장에 보임되어 휴전 후 육군 전력증강의 중책을 담당하는가 하면, 군사외교에 진력하여 대통령 특사로 자유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56년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거쳐 1957년 5월 18일 예비역에 편입된 그는 터키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중동지역의 외교개척에 나섰다. 이후 그는 주미 대한민국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64년에는 47세의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헌신적으로 국무를 수행하였다. 1970년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72년 공화당 의장, 다음해에는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제9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79년 국회의장직의 임기가 만료된 뒤에는 공화당 총재상임고문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군인으로서 정일권은 생활방식과 태도 면에서도 많은 후배 장교들의 모범이었다. 언제나 단정한 복장에 의연한 걸음걸이로 후배들로 하여금 가장 본받고 싶은 육군지휘관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누구든지 항상 미소로 맞으며 한번도 높은 언성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신사였으며, 남의 장점은 공개적으로 높이 칭찬하지만 단점은 덮어주는 아량의 소유자였다. 또한 국군 창설 초기 모든 제도와 기본정책을 제정하고 확립하기 위해 미 육군의 인사행정에 관한 서적을 섭렵하여 미 육군의 인사행정원칙과 우리의 현실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합리적인 면을 보이기도 했던 그는 1994년 1월 7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으며, 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3-4]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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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1950년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귀국하던 도중 6.25전쟁 발발에 관한 급보를 받은 정일권 준장은 귀국보고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7월 1일부로 3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직을 부여받는 한편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3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유엔군과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유지하여 전국(戰局)의 열세를 낙동강방어선에서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으로 압록강변까지 선봉부대를 진출시키는 지휘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국이 급변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를 단행, 38도선에서 전선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1951년에는 중공군의 두 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물리치고 전선이 교착되기 시작하던 7월에 미 육군참모대학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미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한 그는 제2사단장으로 중동부전선의 요충인 저격능선전투를 직접 지휘, 승리로 이끌었다.
별다른 접전 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해오던 중 서부전선의 철원-김화지구에서는 1952년 가을로 접어들며 적이 아군초소에 대대적인 선제공격을 가해옴으로써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 지역에서 개시된 전투 양상의 특징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유리한 통제권 확보를 위해 철원의 백마고지에서는 적이, 그리고 김화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는 아군이 선제공격을 가하는 양상이었다.
김화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은 하감령에서 동북쪽으로 하소리에 이르는 주저항선에서 오성산을 확보하고 있는 중공군 제15군 4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적 제45사단은 오성산에서 김화로 뻗어 내린 고지상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였고, 그 중 미 제7사단 및 국군 제2사단의 전초진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삼각고지(598)와 저격능선(580)의 전초는 아군의 진지를 감제.관측할 뿐만 아니라 김화 방어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이 1952년 가을에 아군 전초진지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해오자, 미 제8군사령관은 적을 수세로 몰아넣고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기로 하고 중공군 전초 중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2개소의 탈취를 목표로 하는 ‘쇼다운(showdown)작전’의 실시를 미 제7사단과 국군 제2사단에 명령하였다. 이 작전은 군단의 화력과 근접항공지원을 최대로 집중하여 단기에 작전을 종료하는 계획이었다.
1952년 6월 29일부로 김화지역에 진출한 제2사단은 남대천 북방의 능선을 따라 편성한 주저항선에 제32연대, 제31연대, 제17연대를 배치하고 제37연대를 예비로 확보하면서 제32연대를 저격능선 남쪽에 배치하였다. 반면에 적은 중공군 제15군 예하 제44사단 및 제45사단을 저격능선, 그 전방에 제145사단 133연대를 배치하였다.
표고가 580m인 저격능선은 국군 제2사단의 정면에 위치한 약 500m 길이의 능선으로 남쪽 봉우리인 A고지와 북쪽 봉우리인 Y고지, 동으로 뻗은 돌바위능선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1952년 10월 14일 05시를 기해 군단 예하 16개 포병대대 280문의 포가 일제히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국군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정일권 중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의 좌익 제32연대의 예비인 제3대대는 제9중대 및 제10중대를 좌우 공격부대로, 제11중대를 예비로 하여 저격능선으로 향했다. 06시경 매봉과 돌바위고지까지 진출한 대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하였으나 15시 20분 저격능선상의 중심목표인 Y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반격도 예사롭지 않았다. 중공군 제45사단 133연대가 야간에 반격을 가해와 치열한 백병전을 치른 끝에 병력의 열세로 철수하게 되었다.
다음날 사단장이 제17연대 2대대에 다시 공격임무를 부여하자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를 탈환한 제17연대 2대대는 적의 역습으로 목표를 또다시 피탈당했다. 10월 16일 사단장은 제17연대 2대대와 제32연대 2대대에게 협조된 공격작전을 전개토록 지시하여 목표를 탈취하고 중공군의 역습까지 물리쳤지만, 3일간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10월 19일 저격능선을 빼앗겼다. 10월 20일 이후에도 같은 양상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제2사단은 적시적절한 부대교대를 통해 저격능선 확보에 안간힘을 썼다.
한편 10월 25일부로 제2사단은 미 제7사단의 삼각고지를 인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의 작전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제2사단은 예비인 제37연대를 주저항선 우측의 외야동에 배치하고 이 지역을 담당하던 제31연대를 삼각고지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제31연대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고지를 상실한 후 이를 탈환하기 위해 수 차례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병력의 손실만 가중되고 저격능선마저 위협받게 되자 11월 5일부로 삼각고지 탈환작전을 중지하였다.
저격능선작전에 주력하게 된 제2사단은 11일 A고지를 확보한 상황에서 제32연대를 저격능선에 투입하였으나 제1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A고지를 상실하였고 이후 수 차례의 반격도 실패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17연대에 탈환임무를 부여하고 제1대대가 즉시 공격에 나서 2시간에 걸친 과감한 돌격전으로 A고지와 돌바위고지를 탈환하였다.
11월 13일 22시경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준비사격을 집중한 후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A고지를 공격하자 제17연대 1대대는 1시간 반 동안의 혈전을 전개한 후 분산 철수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제3대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확보하였으나 돌바위고지를 탈환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7일 07시에 제2대대는 포병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하여 2시간의 접전 끝에 돌바위고지를 탈환, 제17연대는 저격능선상의 A고지와 돌바위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11월 25일까지 적의 반격은 계속되었으나 제2사단은 이를 모두 격퇴하고 제9사단에게 방어임무를 인계하였다. 군단의 작전으로 전개된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전투는 각각 1개 대대의 병력만으로 5일 내에 종결할 의도로 전개되었으나 국군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이 거의 전 병력을 투입, 42일간이나 지속한 전투로 변모하였다. 결국 군단은 중공군 제15군의 강력한 방어의지로 삼각고지의 탈환을 포기한 채 저격능선만을 확보하게 되었다.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저격능선전투의 승리는 유리한 전초진지의 확보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 전선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휴전회담에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
한편 이 전투는 신병 운용상의 문제를 노출시켰다. 6주간의 장기전으로 전개된 저격능선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축차적으로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새로 전입된 신병으로서 전투가 격화되면 고참병에게로 몰려들기 일쑤고, 지휘관들도 신병의 얼굴을 익히지 못해 애로가 많았다. 병력운용에 있어 숫자적인 개념만으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예비대를 충분히 활용하여 신병은 일정기간의 교육훈련을 마친 다음 운용해야 한다는 점을 이 전투는 보여주었다.
저격능선전투 이후 미 제9군단 부군단장으로 있던 정일권 중장은 1953년 2월 국군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제2군단장에 발탁된 가장 큰 배경은 중공군의 춘계공세에 이어 휴전을 앞두고 예상되는 최후공세를 분쇄하는데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하자 적은 전쟁에서 자신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점을 세계에 부각시키고 금성돌출부를 확보하기 위해서 중공군 4개 군 예하의 12개 사단을 동원하여 7월 13일 최후의 공세를 펼쳐왔다.
중공군 6개 사단이 돌출부 양견부를 돌파하여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국군 5개 사단은 적의 포위망 속에 놓일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제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이들 부대들로 하여금 돌출부의 기저선인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여 신방어선을 형성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신방어선 형성에 실패, 7월 15일 저녁에 제2군단은 진현리-삼현-주파리-수동령-고둔골-고비운리를 잇는 신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신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한 후 미 제8군사령관은 금성천 확보를 위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제2군단장은 전방 3개 사단을 반격으로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좌전방 제11사단은 진현리 663고지-삼현 602고지선을 점령하고, 중앙의 제8사단은 별우-성동리까지의 금성천을 확보하며, 제5사단은 7.13공세 이전의 북한강 서남지역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7월 19일 제2군단은 반격작전을 실시한 지 3일만에 금성천을 확보하고 반격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에 군단예비 제7사단을 투입하여 적의 주접근로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는 한편 제6사단으로 하여 우전방 제5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시켜 군단 우익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금성돌출부작전에서 제2군단은 와이오밍선 전방에서 적의 공세를 저지한 후 반격으로 이전하여 금성천을 확보한 채 휴전을 맞이하였다. 이 전투에서 정일권 장군은 군단급 부대를 동일 작전지역에서 방어.철수.반격 등 일련의 작전 형태를 전환해가며 지휘, 적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대반격작전을 통해 금성천을 회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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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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