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아담 2013. 3. 6. 15:29

1절 심정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픈 심정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2 인간을 지은 하나님은 우리 몸 마음의 주인임은 물론이요, 우리 이념이나 우리 감정세계의 주체격 주인격에 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심정의 주인이요 주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나 인정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인

3 하나님은 내 몸과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본연의 세계는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 하더라도 남편이 부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부인이 그 남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 부인이 하나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남편이 왜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내용도 초월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몸의 영원한 주인인 그 하나님의 품에, 그 동산에 있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4 참된 내적 심정의 종적인 자리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는 뭐냐? 횡적인 심정을 중심삼고 남자 여자가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서 이 수직선을 보강할 수 있는 부체가 되는 것입니다. 수직선을 구부리면 안 됩니다. 이 중앙선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이것을 보강할 수 있는 사랑의 뼈 가운데 사랑의 살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화한 뼈와 살, 사랑화한 뼈의 자리의 아버지가 종적인 하나님이고, 사랑화한 살의 부모의 자리가 참부모입니다. 이것이 핵이 되어서 부체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5 심정의 역사는 인간의 육신과 관계되어 있는 터를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천정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이 천정은 근원도 천정이요 과정도 천정이요 결과도 천정의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한 몸으로 태어난,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와 같이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자신이 되지 않고는 심정적 승리의 터전을 갖출 수 없습니다.


6 본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심정에 통하고 하나님의 희망에 약동하면서 나날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 품에 안겨 만족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을 보는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의 아픔은 그들 자신의 내적인 처참함 이상이었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몰랐습니다.


7 오늘날 나는 어떤 심정으로 방황하고 있으며, 어떤 시선과 어떤 오관을 갖고 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하늘이여! 제가 그러한 감각을 갖고 생애를 살아가고 있으니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대하던 심정과 타락하던 심정,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쫓아내던 심정, 이 인류를 붙들고 노아를 세울 때까지 1600년 동안 수고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노아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면서 무한한 천대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수고해 나오던 그 심정, 우여곡절과 천태만상의 역사과정을 거쳐 온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한번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8 생활감정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감정과 공감된 감정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혼자 있으면 ‘아버님!’ 하고 나도 모르게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냐!’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누가 나를 주관하고 지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권 내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부딪히면 반드시 나를 옹호해 주고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9 하나님도 정·지·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정·지·의가 있는데 하나님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이 땅 위의 인류가 타락의 후손이지만 본래 하나님 자신의 혈족이요 직계 아들딸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는 그 이상의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을 대하여 눈물을 흘리고 죽음과 고통으로 쓰러지고 비애에 사무쳐 서러워하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의 슬픔과 서러움이 반영된 장면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선한 사람을 핍박하고, 선한 사람을 죽인 개인·가정·민족은 오래 못 갑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대하여 분하고 절통한 마음이 우러날 때마다 하나님은 용서의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고 나서도 ‘야, 이놈 너 잘 죽었구나.’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을 원수로 여겨 치는 것이 아닙니다.


10 먼저 주고 맞고 빼앗아 오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참한 경륜도 우리 때문입니다. ‘너와 같이 말하고 너와 같이 일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싶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나는 언제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동참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생활무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11 하나님은 온 천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참아버지입니다. 그 참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여!’ 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인간은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끝날에 인류 가운데에서 그러한 길을 달려가서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가 나오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은 시작될 것입니다.


12 우리가 더 좋은 선을 지향하고, 더 아름다운 미를 찾아 나가고, 더 정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창조주의 천적인 심정과 인연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정,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을 살펴볼 때, 이 심정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의 인륜과 섭리의 법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천륜이 방향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창조주의 심정과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이 상충되어 있는 서글픈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부활한 피조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창조주의 심정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사회의 실상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자기 마음과 몸을 다시 주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러지 않고는 새로운 이념의 세계, 새로운 정적인 세계는 인류역사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13 하늘의 용사가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나라의 충신이 되려면 군왕의 심정을 알아야 되고, 부모 앞에 효자가 되려면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을 알아야 되듯이, 하늘의 용사가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전의 심정과 창조 당시의 심정, 또한 창조 이후 인간이 타락할 때의 슬픈 심정과 그 슬픈 심정을 품고 복귀역사를 엮어 나오시는 복귀의 심정, 그리고 복귀된 이후의 세계를 소망하시는 그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14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길고 크고 깊습니다. 창세전의 하나님의 심정, 창세 당시의 하나님의 심정, 창세 이후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가슴에 얼마나 큰 못을 박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또 복귀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얼마나 애절한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당신의 아들딸들을 처참한 죽음의 고비로 몰아넣으시면서, 참고 가라고 권고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절했겠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하나의 중심존재를 통하여 이 죄악세계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심정적인 한을 해원해 드려야만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 복귀섭리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세계적인 운세를 몰고 나오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광대한 우주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중심으로 아담과 해와를 세우셨습니다. 아담 해와를 만들 때 만물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만드시고 많은 것을 부여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심정입니다. 심정은 사위기대의 중심이고, 사위기대의 핵은 사랑입니다. 모든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기점은 심정입니다.


16 사랑과 심정은 어떻게 다른가? 보통 사랑이라 하면 마음이 들떠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심정이라 하면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심정은 사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정이 사랑보다 더 전체의 중심입니다. 심정은 사랑의 과정을 거친 결과적인 입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심정은 입체적인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사랑의 세계보다 심정의 세계를 창건하자고 주장해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의 중심은 심정인데, 이 심정은 반드시 가정을 중심삼고 우러납니다. 그러한 심정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되는 심정은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민족·국가·세계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 완성이란 심정을 빼놓고서는 될 수 없습니다. 중심의 위치를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정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하나님

17 역사적인 심정의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서러워했습니다. 불신한 우리 선조들을 대하여 억울해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억울하고 서러우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지금 세계에 널려 있는 제2 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서글픕니다. 그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아버지, 어찌하여 당신의 심정이 이렇게 딱하고 억울하옵니까?’ 할 때 그 손을 붙들고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18 오늘날 신랑이 신부를 찾아 나오기 위한 편지체로 쓰인 성경 말씀에는 암호가 많습니다. 왜 암호로 말씀했겠습니까? 심정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누구나 다 풀지 못합니다. 신랑 신부만이 풀 수 있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한 사람만이 풀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풀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암호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랑이 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비결인데, 그 비결은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어린아이를 품고 젖을 먹일 때나 그 자식이 머리카락이 세어서 백발이 되었을 때나 같습니다. 그 심정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19 기독교인들은 ‘아하, 주님은 구름을 타고 와야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도 고생을 안 합니다. 그런 식으로 믿으려면 목사 장로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믿었을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에 있어서도 누구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셔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해부해 보면 영적인 면으로만 나왔기 때문에 학살당하고 피살당하면서 나왔습니다. 땅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국가의 주권자들한테 학살당하고 희생당해야 했는데, 그것만 해도 분하고 원통한데 재림주까지 또 영적으로 와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래 가지고 기독교인만 살짝 빼돌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여 버리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탕자의 비유처럼, 하나님은 자기 맏아들보다도 탕자인 차자를 더 사랑하는 심정의 하나님이십니다.


20 6천년 동안 심정에 굶주린 대주재요 대왕으로서 지금까지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한꺼번에 다 심판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당신의 목적이 있고 당신의 소원과 소망이 이 땅 위에 있는 까닭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참고 또 참고 또 참아 나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름만의 하나님이 아닌 심정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혈족 아닌 혈족, 부모 아닌 부모, 형제 아닌 형제들이 세계적으로 동원되어 하늘의 절개를 세울 수 있고, 하늘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 동서고금을 넘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 천상의 심정을 중심삼고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주의가 이 땅 위에 나와야 됩니다. 그것이 안 나오면 세계는 깨져 나갑니다.


21 이제 인간은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하겠기에 절망 속에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는 참다운 진리를 가지고 새로운 천지에 들어갈 수 있는 진리의 개방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낙망과 절망에 부딪혀 있는 환경을 정비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기준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면서 진리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가 나올 때에 비로소 세계는 완전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하고 나서는 인격을 완성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심정을 완성해야 됩니다.


22 우리는 심정을 통해서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창조 당시의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으며, 역사 과정을 거쳐 오면서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역사적인 심정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시대적인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23 애달픈 심정을 갖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무한히 애썼지만,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만민을 대신하여, 온 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서러움을 풀어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사명이 있었지만, 불신하는 무리에게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 결국에는 골고다산상에서 십자가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을 중심하고 약속되었던 모든 뜻이 파괴되어 버리고 자신의 일생이 결국은 십자가의 형틀에 귀결된다는 것을 느낀 예수님이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늘을 배반하지 않고 하늘에 대한 충성의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불신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 상관하지 않고 천륜을 향한 그 길을 일생의 목표로 삼아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일생이 인간에게 역사적으로 소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24 타락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참부모가 없고 참부부, 참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이 양자의 모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양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계의 자녀가 변하여 양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직계 자녀를 회복하기 위한 서글픔의 역사노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서글픈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 본연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이 땅 위에 나타나면 우리에게는 선에 대한 이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나 자체가 선의 본체이면서도 오늘날 나 자신은 그 중심에 의한 상대적인 생활관밖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치의 중심, 생명의 중심, 이념의 중심,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참부모·참스승·참주인의 주체이신 하나님

25 하나님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을 중심삼은 아담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람을 완성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신인일체이상입니다. 그래서 군사부(君師父)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하고 스승하고 아버지입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3대 주체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도 위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는 보다 투입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3대 주체사상, 군사부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스승 중의 스승이요, 왕 중의 왕입니다.


26 하나님은 부모 중의 참부모요, 스승 중의 참스승이요, 왕 중의 참왕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참부모이고, 영원한 참스승이고, 영원한 참주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면 우선 하나님과 같은 참부모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참스승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참주인이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3대 주체사상입니다. 궁극적인 모델은 하나님입니다.


27 3대 주체사상의 중심이 누구냐 하면 부모입니다. 부모 같은 스승, 부모 같은 나라님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 중의 부모, 왕부모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은 부모, 하나님 같은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3대 주체사상입니다. 지상에서도 이 3대 주체사상만 남고 천상에서도 이 3대 주체사상만 남는 것입니다.


28 주체사상이라는 말은 3대 주체사상 가운데 어떤 것을 하나만 갖다 놓더라도 다 되는 것입니다. 3대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셋이 다 주체사상이기 때문에 참부모를 갖다 놓아도 거기에는 참스승이 있고, 참주인이 있습니다. 참스승을 갖다 놓아도 거기에는 참부모가 있고, 참주인이 있습니다. 참주인을 갖다 놓아도 거기에는 참스승이 있고, 참부모가 있습니다. 3대 주체사상입니다. 이 셋은 대등합니다. 하나님은 참부모인 동시에 참스승인 동시에 참주인입니다. 어떤 스승이냐? 위하고 또 위하면서 가르쳐 주려는 스승입니다. 또 어떤 주인이냐? 전부 쥐어서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까지도 네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한마디 단어를 써서 말하게 된다면 ‘낳아서 길러 가지고 세워 주자.’입니다. 총론이 ‘낳아 길러서 세워 주인 만들어 주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창조해 길러서 천주의 주인인 하나님 대신 사랑을 가진 자로서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게끔 해서 주인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29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가정이상입니다. 가정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가정이 이루어지려면 낳아 줘야 되고 길러 줘야 되고 세워 줘야 됩니다. 그 일을 부모가 합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부모의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3대 주체사상이 나옵니다. 제1은 참부모, 제2는 참스승, 제3은 참주인입니다. 이것을 매일의 생활신조로 해야 됩니다.


30 하나님은 3대 주체사상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절대 필요하고, 참스승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혼란되어 있으니 이 셋 중에 참된 어머니 아버지만 찾아도 살 수 있습니다. 참된 스승만 붙들어도 망하지 않습니다. 참된 주인만 붙들어도 살 수 있습니다. 영생의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위하는 천리의 자리에 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니 자기 집안에서 3대 주체사상의 실체를 이루어 여러분이 부모도 되고 스승도 되고 주인도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큰 데서부터 벌려서 내 가정에 전부 이루게 되면 여기에 모든 수직의 축이 엮어지는 것입니다. 통일적 기원이기 때문에 하나님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닮아야 됩니다. 그것이 3대 주체사상입니다.


31 여러분의 몸 마음을 볼 때 마음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음은 하나님 대신입니다. 마음은 열조, 선조들을 대표합니다. 마음은 스승을 대표하고 나라님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마음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습니까? 우주의 중심으로서 참된 부모, 참된 스승, 참된 주인의 자리에 있는, 참사랑을 가진 주체로 계시는 분의 대신으로 있는 마음이 이 땅 위에서 나 하나를 수습하기 위해 얼마나 희생했습니까? 그렇게 희생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대받고 끌려 다니면서도 죽은 줄 알았는데 나쁜 생각을 가지고 새벽에 도둑질이라도 하게 되면 ‘야, 이놈의 자식아!’ 하고 또다시 살아서 충고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얼마나 농락했습니까? 마음은 부모 대신이요, 스승 대신이요, 주인 대신입니다.


32 본향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왕이요, 나라의 왕이요, 종족의 왕이요, 가정의 왕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스승이요, 나라의 스승이요, 종족의 스승이요, 가정의 스승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요, 나라의 주인이요, 종족의 주인이요, 가정의 주인입니다. 이것이 3대 주체사상입니다. 여기에는 위하는 사랑, 위하고 잊어버리는 사랑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셋 자체가 하늘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3대 사상을 전부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을 전부 못 갖추더라도 참부모의 자리에 서면 스승은 오른쪽, 주인은 왼쪽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만이라도 가지면 됩니다. 참된 부모가 되든가, 참된 스승이 되든가, 참된 주인이 되든가, 어느 한 자리에만 서게 되면 천국 입적은 문제없습니다. 이것만 하면 통일되는 것입니다.


33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와 더불어 아담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스승이 되고 주인이 됩니다. 그다음에 종족으로 올라갑니다. 가정에서 종족의 자리에 올라가서 종족의 어버이가 되고 스승이 되고 주인이 되고, 그다음에 민족의 어버이가 되고 스승이 되고 주인이 됩니다. 그런 뜻으로 볼 때 대통령은 무엇이냐? 대통령은 나라의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대통령을 부모로 모셔야 되고 스승으로 모셔야 됩니다. 그 대통령은 모든 민족정기와 전체 역사적 배경을 대표하여 행동적인 면에서 표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승이 되어서 주인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모든 국민을 관리하던 국가체제를 그냥 전수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세계로 확장되고, 하늘땅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면 거기에 반항할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낳아 준 생명의 근본 되는 부모요, 모든 지식의 근원자요, 내가 깨달아서 생활할 수 있는 자유환경을 역사를 통해서 갖추어 준 스승이요, 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갖추어 나에게 넘겨준 주인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천상세계에서는 영원불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워야 할 3대 주체사상입니다. 내가 하나님같이 참부모가 되고, 참스승이 되고, 참주인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