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아담 2015. 4. 13. 14:21

 

[여적]임진나루와 ‘징비’   이기환 논설위원  2015-03-27 21:54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592년(선조 25년) 4월30일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오른다. 임진왜란 발발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무조건 피란’을 결정한 것이다. <징비록> <선조수정실록> 등을 보면 목불인견이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지나자 밭을 갈던 백성이 대성 통곡했다.

“나라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

선조가 파주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임진강변의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나루 건너의 동파역에 도착하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음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임금이고 뭐고 없었다. 하루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임금에게 바칠 수라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관 4인방(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은 피란길에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넣은 뒤 도망쳤다. 이것이 이른바 ‘사초 폐기’ 사건이다. 임금의 피란길을 끝까지 수행한 자는 어의 허준을 비롯해 17명에 불과했다.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갔는데 어떤 신하가 임금을 지키겠는가. 이후 임진나루까지 진격한 왜군은 짐짓 후퇴한 척 조선군을 유인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야전사령관(도원수) 김명원이 도강을 주저했다. 임시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면서 문신인 한응인을 급파한다. 김명원으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은 한응인은 단숨에 임진나루를 건넜다. 그러나 왜군의 유인책에 말린 조선군은 추풍낙엽처럼 패한다. <징비록>은 5월17일의 ‘임진나루 전투’를 두고 “봄날 꽃놀이 하듯 군대를 다뤘으니 대패한 것이 당연하다”고 한탄했다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서울~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유서 깊은 ‘1번국도’의 관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생태탐방로로 단장돼 44년 만에 개방된다고 한다. 필자가 군 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으면 좋겠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72049095&code=9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