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아담 2015. 4. 5. 14:1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여왕이여! 망하리라!   - 이기환 논설위원    2015-03-24 21:30   <dd> </dd> <dd>“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부윤사바하(鳧伊娑婆訶)”(<삼국유사>)

888년(진성여왕 2년)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수수께끼 같은 글이 퍼졌다. <삼국사기>는 ‘벽서(榜)가 걸렸다’고 했고, <삼국유사>는 ‘전단이 뿌려졌다(書投路上)’고 했다.

‘다라니의 은어’로 쓰여진 글은 요즘의 패러디물을 쏙 빼닮았다. <삼국유사>는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소판’은 여왕의 애인인 각간 위홍을, ‘부윤’은 여왕의 유모인 부호를 가리킨다”(사진)고 했다. ‘나무(南無)’는 절대적인 믿음을, ‘사바하’는 앞의 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벽서(혹은 전단)는 “신라는 망한다! 여왕과 (국정을 농단하는) 위홍과 부호 등 때문에 망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신라는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1547년(명종 2년) 붉은 글씨의 선동적인 벽서가 양재역에 붙었다.

“여주(女主·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나라가 망할 날을 서서 기다린다.”(<명종실록>)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오빠 윤원형과 손잡고 반대파를 숙청한 을사사화를 꼬집은 벽서였다. 하지만 윤원형 일파는 “여전히 불온한 자들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 앙앙불락했다. 오히려 벽서 사건을 ‘정적 몰이’로 악용한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적들이 모조리 색출됐다. 그 후 1559~1562년 사이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었다. <명종실록>을 쓴 사관이 핵심을 찔렀다.

“도적의 성행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백성들이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양반(여인)을 죽이고 겁탈하는 살주계와 폭력조직인 검계가 결성된 숙종 때도 벽서가 끊임없이 붙었다. 1679년(숙종 5년) 우의정 오시수는 “백성들이 몰려들어 벽서의 내용을 앞다퉈 베껴 유포하고 있다”(<비변사등록>)고 한탄했다. 숙종은 벽서를 내거는 자는 교수형에, 보고도 즉각 불태우지 않는 자는 유배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러나 벽서를 막지는 못했다. 새삼 “백성들의 비방을 막아 세상이 다 편안해졌다”는 주나라 여왕에게 재상 소공이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길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어떻습니까.”(<사기> ‘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