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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호프 2017. 10. 9. 13:16

부마항쟁 참가자, 증언·자료집 오류 주장

정주신 씨 "인원·상황 오기"…"마산항쟁사, 새로 작성해야"
기념사업회 "새증언집 집필중"

김희곤 기자 hgon@idomin.com 2017년 09월 28일 목요일

 

 

부마항쟁과 관련해 세부적인 기록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주신 부마항쟁위원회 진상조사 및 보고서작성 실무위원이 27일 오전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마산항쟁사가 새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 18일 당시 경남대 재학생이던 정 위원은 항쟁에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정 위원 증언도 함께 기록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정 위원은 부마항쟁 당시 현장 참가·목격자로서 △정o권 등 5인방 역할 △항쟁에 참여한 시민과 학생 숫자 △도심 시위 상황 등을 지적했다.

정 위원은 1989년 펴낸 <부마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과 2011년 펴낸 <부마항쟁 증언집 : 마산편>을 토대로 "5인방이 주동자라고 기록돼 있지만 경찰이 사후에 만들어 낸 것"이라며 "정o권 씨는 선동 연설 후 도망갔고, 옥o애·최o순 씨는 무학초등학교 앞 파출소 인근 주택가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3m가량 끌려갔는데 500m를 끌려갔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증언자료에 경남대 옛 도서관 앞 노인정에 모인 학생이 1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100명 남짓에 불과했고, 항쟁 당일 오후 3시 30분께 경남대 학생들이 3·15의거탑으로 향했으나 경찰이 지키고 있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정 위원은 근거 자료로 자신이 직접 목격했으며 대학 동기 녹취가 있다고 했다.

27일 오전 정주신 부마항쟁위원회 진상조사 및 보고서작성 실무위원이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희곤 기자

 

허진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은 "부마항쟁은 근본적으로 시민항쟁인데 대학생 관점에서만 보려 하면 의미가 축소될 뿐이다. 기념자료집이 만들어질 당시 노태우 정권 때라 쉽게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였는데 5명은 용기 내 나선 사람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고등학생이나 공무원 등 항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아서 새로 증언집을 만들고 있는데, 정 위원 증언도 함께 기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

 

증언집을 정리한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연구원은 "정확한 주장 내용은 모르지만 증언집에 오류는 거의 없다고 본다"며 "도망과 피신의 차이처럼 관점에 따라 누구나 자기 견해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관공서 자료 위주 보고서 작성, 현장 조사를 하지 않는 점 등도 지적했다. 부마항쟁 진상규명위 진상조사는 내달 6일 끝난다. 하지만, 자료수집 부실 등 문제가 제기되면서 조사기간 연장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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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오후 4시30분경 3․15탑 주변에 학교로부터 같이 동행한 대략 6, 7명의 경대생이 무리를 지어 3․15탑 쪽으로 향해 갔으나 3․15탑 주변은 이미 2인1조 경찰조가 지키고 있었다. 당시 3․15탑 주변 무학초교 앞 주택 인근 3m 앞에서 경찰 2명이 갑자기 최와 옥 두 사람을 끌어내 체포하고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런데 『10주년 기념자료집』과『증언집 마산편』에는 최의 경우 한 500m 되는 요철 있는 도로에 질질 끌려가서 팬티 속옷이 드러나고 피가 철철 흘렀다고 했고, 옥의 경우 한 50m 정도의 지점에서 형사들한테 붙잡혀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바지를 쫙 찢은 상태에서 질질 끌려갔다고 증언하였다. 엄연히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다르게 거짓증언을 했을까 의심스럽다. 

 

 

2010년 10월께 부마항쟁 피해자 7명은 국가를 상대로 2000만~3000만 원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창원지방법원 민사합의 6부는 2012년 4월 4일 부마항쟁 피해자 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첫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원고 전원에게 1천만~3천만 원씩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즉 “당시 경찰관들은 원고 최 씨가 입은 원피스를 머리까지 들어 올려 얼굴이 가려지고 속옷이 노출되도록 한 다음 원고 최 씨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경찰 차량이 있는 곳까지 약 300m를 끌고 갔으며...”, “당시 경찰관들은 원고 옥 씨의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지를 찢어버리고 속옷이 노출되도록 한 다음 머리채를 잡고 약 300m를 끌고 가..” 등은 앞의 자료집과 증언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79년 10월 18일 대학에서 출발 같은 일행 7명이 3.15탑 쪽으로 가다가 오후 4시30분경 무학초 근처 주택가 3m 앞에서 경찰 2인1조에 체포된 최와 옥 씨는 경찰차에 실려 곧바로 마산경찰서로 갔는데, 어찌 500m,50m 질질 끌려갔단 말인가. 이들의 증언은 부마사업회가 주관한 10주년 자료집과 증언록 마산편에 왜곡된 진술을 과장하게 진술했다. 부마사업회는 그래도 오류가 없고 대응할 가치도 없고 지엽적 일로 진실을 희석시킬려고 하는가. 그동안 부마사업회가 10주년 자료집과 증언집을 자의적으로 편집해놓고 마산항쟁에 대한 최초의 사회적 공식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자평하는 우를 범했다. 부마사업회가 이런 자료집과 증언집을 내놓고 몇몇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 작태에 대해 사죄하라.. 

 

 

부마사업회와 경남도민일보는 기자회견에 대한 대응으로 악의적인 기사로 사람을 매도하는가.. 기자회견의 본질을 진실규명보다는 행위자를 흠집내려는 언론사는 물론, 10주년 자료집과 증언집 마산편을 객관성 없이 자의적 잣대로 기술해온 부마사업회의 농단은 뻔뻔함의 극치다..더욱이 표부장과 김기자는 부마사업회가 명예훼손 지적 운운에 대해 애당초 본인을 협박하는 것이고 진실규명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지적하고 수정바랬으나 몇 차례 전화해도 수정안하고 전화도 안받고 하더니 뒤늦게 고소하겠다니까 수정하는 비열한 모습을 보이며 뒤늦게 일부 수정을 하였다. 더이상 부마사업회는 부마항쟁을 이용하지 말고 사실규명에 당당히 응해라..마산시민과 국민 앞에 떳떳하게 그동안의 잘못을 밝혀라..그것이 진실규명이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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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께 부마항쟁 피해자 7명은 국가를 상대로 2000만~3000만 원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창원지방법원 민사합의 6부는 2012년 4월 4일 부마항쟁 피해자 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첫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원고 전원에게 1천만~3천만 원씩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즉 “당시 경찰관들은 원고 최 씨가 입은 원피스를 머리까지 들어 올려 얼굴이 가려지고 속옷이 노출되도록 한 다음 원고 최 씨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경찰 차량이 있는 곳까지 약 300m를 끌고 갔으며...”, “당시 경찰관들은 원고 옥 씨의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지를 찢어버리고 속옷이 노출되도록 한 다음 머리채를 잡고 약 300m를 끌고 가..” 등은 앞의 자료집과 증언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79년 10월 18일 대학에서 출발 같은 일행 7명이 3.15탑 쪽으로 가다가 오후 4시30분경 무학초 근처 주택가 3m 앞에서 경찰 2인1조에 체포된 최와 옥 씨는 경찰차에 실려 곧바로 마산경찰서로 갔는데, 어찌 500m,50m 질질 끌려갔단 말인가. 이들의 증언은 부마사업회가 주관한 10주년 자료집과 증언록 마산편에 왜곡된 진술을 과장하게 진술했다. 부마사업회는 그래도 오류가 없고 대응할 가치도 없고 지엽적 일로 진실을 희석시킬려고 하는가. 그동안 부마사업회가 10주년 자료집과 증언집을 자의적으로 편집해놓고 마산항쟁에 대한 최초의 사회적 공식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자평하는 우를 범했다. 부마사업회가 이런 자료집과 증언집을 내놓고 몇몇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 작태에 대해 사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