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잠만 자는 삼손

sam朴俊珪son 2020. 6. 21. 12:43

섭씨 37.5도는 열정과 사랑을 意味하지만.

지금 이때의 37.5도는 검사대상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좋은 일을 맞이한 이들과의 축복의 자리도

늘 37.5도인 나로서는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네요. 축복합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 중 종기 등, 부스럼에 시달린 왕이 많다.

그 중에 세조가 평생 부스럼을 앓았고 또, 정조도 부스럼을 앓다가 독살되었다.

이렇게 왕들이 부스럼을 앓는 이유는 울화증 때문이다.

왕들이 울화증을 앓는 이유로는 당연히 정치를 하는 중에 빚는 신하들과의 마찰에서 오는 화병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세조가 평생을 부스럼을 앓다가 죽었는데, 그가 많은 공신들(김종서, 황보인 등)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계유정란 후, 대군들도 죽이고 결국 조카 단종도 죽이면서 이룬 정치세력의 유지에서 정난공신들과 특히 그 모든 일을 주도한 한명회와의 마찰과 또 반대파들과의 갈등에서 오는 울화를 몸이 이기지 못하고 일어난 종기가 평생 낫지 않아 고생한 것이고,

정조 또한 당시 세력을 잡은 신하들과의 싸움에서 오는 울화병이 몸에 종기 상태로 나타났으나 이 치료마저 어의에게 받지 못하였는데, 그 어의가 당시 세력의 주축인 심환지의 세력 안에 있는 자이므로 치료를 가장한 독살도 가능하여 피하였으나 결국 어의의 치료를 받던 중에 죽고 마는데, 어쩌면 어의가 시술한 황을 이용한 훈증법이 오히려 몸에 독을 축적시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또 열이 많은 체질인 정조에게 인삼이 들어간 약을 먹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지도 모르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주도한 한명회와 함께 도모한 권람은 나의 중시조인 박대손선조(절도사 공파 중시조)의 처남이었고, 또 당시 도승지 박중손은 친동생이었다.

그리고 박대손선조가 다섯살 때 아버지(박절문 權知校書館正字)가 22세로 돌아가시자 아버지 같이 모셨던 삼촌 박심문이 예조정랑으로 있었으나 계유정난에 함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후에 성삼문등 성균관 육신들과 단종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였었다.

 

그러나 당시 북평절도사(절제사) 박대손선조를 곤란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이징옥의 난이었다.

당시 이징옥장군은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었으나 김종서장군의 육진개척에 참여 했던 전공을 빌미로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박대손 선조의 당숙인 박호문(평안우도 도절제사)을 보내자 박호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는 박호문을 죽일 것을 뻔히 알고 그 후임으로 보낸 것이었고, 또 박호문의 당질이 북평절도사(절제사) 박대손선조이므로 이징옥이 불복할 것은 뻔한 것이고, 난을 일으킬 경우 그 책임을 물어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음모가 엿보이는 처사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서장군을 도운 공로로 치면 당시 예조정랑인 박심문도 김종서장군이 북벌할 때 종사관으로 육진개척을 도운 공로자이지만, 예조정랑인 박심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당시 박심문의 작은 조카인 박중손이 도승지였다가 대사헌이 되어 있으며, 세조에게 협력하고 있으므로 그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박심문이 성삼문등 집현전 학사들과 단종 복위를 꾀하는 조짐이 있자, 박심문을 質政使의 임무를 부여하여 명나라로 보내고, 그 후에 성삼문등 6신의 참형과 단종까지 죽이는 일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심문이 명에서 돌아오는 중 의주에 도착하여 6신 참형과 단종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 음독,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나, 실은 사육신 사건 이후 이미 비밀리에 의주관아에 사약이 대기하게 하고 있었고, 다만 북평절도사 박대손과 대사헌 박중손의 눈치를 보아 음독 자결한 것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자 박대손선조는 아들들과 사위를 불러 모두 관직을 사임하라고 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강원도 산으로 들어가 양구, 인제등지에 은거 하였다고 한다.

 

http://www.god-walk.pe.kr/정이산사당.jpg

http://www.god-walk.pe.kr/2-절도사공파.jpg

그러나 박대손선조의 묘가 당시 중화부사로 겸직하던 황해도 중화군에 있는 정이산에 모신 것과, 사임하신 해와 돌아가신 해가 같은 것으로 볼 때, 자결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歷史가 말해 주듯이 당시 세조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얻은 화병으로 인하여 늘 종기와 부스럼을 평생 달고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울화증은 고난의 사람인 욥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의 스토리는 사탄이 여호와에게 사주하여 재산과 자식들을 잃게 하고, 또 악창으로 시험을 당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이와 같은 사탄의 사주는 성도들 마음 안에 있는 사탄 성으로써, 늘 하나님께 자신의 악한 생각과 욕심을 관철시키셔 자기 뜻대로 이루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사탄이 하나님께 고변하는 표현으로 전개해 나간 것으로써 성도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기의 결과와 같이 재산을 잃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모든 것을 다 잃고 결국은 악창까지 나게 되어있는데, 그 악창이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께 내보인 자기본위의 삶의 이론으로 곧 악창과 같이 썩어 없어져야할 이론과 욕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론과 충돌하는 이론으로써, 하나님 그 이론대로 살도록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는 것이 욥의 이야기의 결론인 것이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잠의 意味를 알고, 그 잠을 주실 수 있는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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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굳이 비밀글로 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합니다
박대손(朴大孫) 선조가 강릉 대도호 부사(行江陵大都護府使)로 임명되었다는 글을 전에 읽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혹 동명이인이 아닌지....
또 제 생각에는 묘가 정이산에 있는 것과 돌아가신 해가 1457년으로 되어 있어서 1462년, 즉 5년 후에 강능 부사직을 받으셨다는 기록과 충돌하여 저는 우리 족보의 기록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참고하시라고 정리한 족보 파일을 본문에 수정하여 링크해 놓았습니다.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또 서로의 생각을 말할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장군은 선조로 고쳤고
절도사도 당시 체제 속에는 없는 직제였던 것 같고
중화부사겸절제사였을 것으로 보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절제사 아래 직임이 되는 "절제사공파"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후 선위별감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박대손을 이후 북평절도사로 제수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평안우도(4군)와 함길도(6진) 도절제사가 궐석이 되어(평안좌도 도절제사는 애초 없었던 것으로 보임) 이를 도절제사라는 직함을 병마절도사로 바꾸고 이 직책을 박대손에게 부여하여 이름하여 북평절도사로 불린 것으로 사료된다는 내 생각.
비밀댓글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버지가 5세 때 돌아가시므로 아마도 삼촌 심문의 보육을 받으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삼촌인 예조정랑 박심문이 가는 길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간 것이라고 볼 때, 삼촌이 반 세조의 길을 택하고 음독하신 것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보고, 또 그렇게 기록되어 전해 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 또한 제가 올려 놓은 족보를 참고하여 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밀댓글입니다
절도사는 당시 체제 속에는 없는 직제였던 것 같고
중화부사겸절제사였을 것으로 보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절제사 아래 직임이 되는 "절제사공파"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복글) 그러나 그 후 선위별감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박대손을 이후 북평절도사로 제수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평안우도(4군)와 함길도(6진) 도절제사가 궐석이 되어(평안좌도 도절제사는 애초 없었던 것으로 보임) 이를 도절제사라는 직함을 병마절도사로 바꾸고 이 직책을 박대손에게 부여하여 이름하여 북평절도사로 불린 것으로 사료된다는 내 생각.
이징옥:본관은 양산(梁山)이며, 호는 원봉(圓峰)이다. 중추원지사를 지낸 이전생(李全生)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이징석(李澄石)과 동생인 이징규(李澄珪)도 경상도와 평안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 등을 지내 3형제가 모두 무장(武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벽진 이씨(碧珍李氏)와 결혼해 이자원(李滋源), 이윤원(李潤源), 이연원(李淵源) 등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이징옥(李澄玉)은 어려서부터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무용(武勇)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왕을 호위하는 시위군(侍衛軍)인 갑사(甲士)가 되어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1416년(태종 16) 무과 친시(親試)에 제1등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이 되었다. 그리고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추천으로 경원(慶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임명된 뒤 1431년(세종 13) 세종이 특별히 귀향(歸鄕)의 명을 내릴 때까지 9년 동안 함길도(咸吉道)에 계속 머무르며 변경의 방어에 공을 세웠다. 1424년(세종 6)에는 아산(阿山)을 침공해 온 여진족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무리를 물리쳐 이듬해 경원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다. 그리고 1427년(세종 9)에는 벼슬이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31년(세종 13) 세종의 특별한 명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징옥은 그해에 가정접반사(加定接伴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 장동아(張童兒)의 접대를 맡았고, 1432년(세종 14)에는 병조 좌참판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조선에 해동청(海東靑) 등의 사냥매를 잡아 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1432년에는 장동아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함길도 지역에 머무르며 매를 사냥하기도 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과 병사들을 접대하느라 함길도 백성들의 부담이 컸는데, 접반사였던 이징옥은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경성(鏡城) 사람이 잡아온 해동청을 놓아주었다. 사냥매의 공급을 어렵게 해서 명나라가 그런 요구를 해 오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한때 세종도 신상(申商)의 건의로 함길도의 관리들에게 이러한 명을 내렸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이징옥은 이 일로 문책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에야 다시 복직되었다.

이징옥은 1433년(세종 15)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임명되어 다시 함길도로 파견되었으며, 1438년(세종 20)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 함길도에 머무르며 6진의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1434년(세종 16)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都護府使)가 된 이징옥은 이듬해에는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었다. 그리고 김종서(金宗瑞)가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되어 오자 다시 판회령도호부사가 되어 최전선에서 여진족과 대치하였다.

1437년(세종 19) 경원 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에는 모친상을 당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상중임에도 100일 뒤에 그를 다시 경원 절제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 동안은 함길도 도절제사인 김종서가 경원까지 겸해서 다스리도록 했는데, 이징옥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으면 형편에 따라 방어에만 전념하라는 명이 특별히 내려졌던 것을 보면 당시 북방의 방어에서 이징옥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은 그가 상중이고 늙은 부친이 있다는 것을 배려해 1439년(세종 21) 경상도(慶尙道)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해 고향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게 했다. 이징옥은 경상도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왜적(倭賊)을 방어하기 위한 비변책(備邊策)을 마련해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1442년(세종 24) 이징옥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겸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지역의 방어체계를 정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겸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당시 이징옥은 늙은 부친을 봉양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1444년(세종 26)부터 1449년(세종 31)까지는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 등 내직이나 경상도 지역에서 근무했다.

1450년(세종 32) 부친상을 당한 이징옥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그해 새로 왕위에 오른 문종은 상중인 그를 도절제사로 삼아 다시 함길도로 파견했다. 그리고 1452년(문종 2) 그에게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주었다. 1453년(단종 1)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도 명을 내려 이징옥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유임시켰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장수이자 김종서와도 가까운 관계였던 이징옥은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 제7대 세조) 일파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그해 음력 5월 한명회(韓明澮)와 홍달손(洪達孫)은 수양대군에게 이징옥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과 공모해 경성(鏡城)의 병기들을 한양으로 옮겼다며 그의 문책을 주장했고,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뒤에는 곧바로 함길도에 주둔하던 이징옥을 불러들여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징옥은 박호문(朴好問)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함길도로 오자 그에게 병부(兵符)를 넘겨주고 길주(吉州)에 있던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죽고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그의 아들 박평손(朴平孫)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도진무(都鎭撫) 이행검(李行儉)과 함께 도절제사영에 주둔하던 병력을 이끌고 종성절제사(種城節制使) 정종(鄭種)이 지키고 있던 종성(鍾城)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진의 여러 부족에 군사를 요청하고, 각지에 군사를 일으키라는 통문을 보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당시 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금나라를 계승한 대금(大金)의 황제(皇帝)임을 자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토벌군이 출정하기도 전에 종성에 주둔하던 이징옥은 이행검과 정종의 계책에 넘어가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징옥의 시신은 거열(車裂)로 찢겨졌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다. 1908년(순종 2)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의 건의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징옥 [李澄玉] (두산백과)
대단한 분량의 내용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보관하고 배우겠습니다.
절도사 관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 백과 사전을 통해서 지식을 얻었습니다마는 올려 주신 내용을 보니 또 다르군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여인잔혹사" 출판사 현문미디어 / 이수광
이 책에 보면 우리 조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침-강생-절문-대손 (그러니까 대손 할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와 첫째 아들인 저생(지생) 할아버지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교 사회인 조선이 발칵 뒤비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까지 기록됩니다.)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아버지(침)가 아들(저생) 첩을 취(간음)하고 그 아비(침)가 죽은 후 다시 아들(저생) 취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한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첩을 아비가 취하고 아비가 죽자 아들이 다시 첩으로 삼은 참 더러운 사대부들의 이야기가 있었지요. 조선시대는 유교를 중시하여 성(性)에 대한 금제를 엄중하게 실시했고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부부간에도 방을 따로 쓰는 등 성행위를 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디 사내놈들이 그런가요? 그러면서도 남자들이 여종이나 기생을 취하거나 첩을 얻는 것에는 관대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초 태종 때에 박저생이라는 종자는 아들의 첩을 아비가 취하고 아비가 죽자 아들이 다시 첩으로 삼은 파렴치한 짓거리를 했답니다.



내용)

제14화 아들의 첩을 아버지가 취하고 아비가 죽자 아들이 다시 첩으로 삼다.

파독-박저생의 여종



-첩들 중에 가장 비천한 대우를 받는 여자들이 비첩이었다. 비첩은 여종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여자들을 말하는데, 조선초 아버지와 아들 두 부자의 첩이 된 여종 파독의 사건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아들 박저생은 잦은 송사와 탈주 그리고 파렴치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다 자살한 특이한 인물이다. 파독은 두 부자에게 유린당한 희생자인데도 오히려 형장을 맞아야했다. 여자가 형장을 맞을때는 홑옷만을 걸친 채 맞았다. 장이 수 세대에 이르면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장이 10대를 넘겨 20대에 이르면 살점이 너덜너덜해진다. 장사를 한다는 것은 매를 맞다가 죽는일이다. 헌대도 불구하고 파독에겐 장 100대 이르는 형장이 내려졌다. [승인 대기중]
한때 절도사공파 홈피에도 글을 많이 남기고 종회 회장님과도 통화한적도 있습니다.
절도사공파 홈피가 운영될 때 글을 올렸다는 분이시군요. 홈피가 없어지고 카페로 운영될 때 그 카페에서 내가 본 글이 바로 님의 글이였군요
그 때 그 카페에 보관되어있는 사진(아버지가 회장이셨을 때 손수 찍으신 사진)을 찾아온 적이 있고 지금 내 카페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북평절도사 라는 관직을 네이버 다음등 포털에서 검색하면 나오곳은 우리 절도사공파 관련 홈피 또는 내용에서만 볼수 있는것과 북평 이라는 지명?
북평[ 北坪 ] 정의
강원도 동해시에 있었던 옛 지명.

내용
북평의 지명유래는 1631년(인조 9) 이곳에 있는 전천(箭川)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평, 남쪽을 박곡(璞谷)으로 나눈 데서 나왔다. 따라서 북평은 전천 북쪽의 넓은 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1738년(영조 14) 북평을 둘로 나누어 북상면(北上面)ㆍ북하면(北下面)으로 하였고, 박곡면은 견하면(見下面)으로 고쳤다. 뒤에 견하면을 견박면(見朴面)으로 고쳤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들 3개 면을 합쳐 북삼면(北三面)으로 통폐합시켰고 삼척의 관할에 두었다. 1945년북평읍으로 승격하였고, 1980년동해시가 생기면서 묵호읍과 합쳤다.

북평은 부근의 풍부한 무연탄과 석회석을 이용하여 일찍부터 카바이트 제철공업이 일어나 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더욱이 1961년 영동선이 개통되어 강릉과 삼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지역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80년 북평항 1단계사업이 완공되고, 1986년 달방(達芳)댐이 준공되어 공업용수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어 앞으로 공업도시로서 발전될 것이다.

중앙선과 태백선의 전철화사업이 북평까지 이어져 이 지역의 풍부한 수산물과 지하자원 등을 수송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86년 북평항을 동해항으로 개칭하였고, 일본의 동해안 지역에 대한 문호로서의 구실을 할 것이다. 1979년 지방공업개발장려지구로 지정된 뒤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역점을 두고 개발해나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평 [北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북평 절도사의 북평이란 글자가 北坪이 아니고 北平이므로 지명이 아니고 조선의 북방의 방어를 의미하는 北平으로서 절도사의 직함 앞에 붙은 북방 경계의 임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겸임으로 받은 임지가 평양 아래 지역인 중화부사를 겸임하고 또 묘가 중화군에 있는 정이산에 있으므로 님의 설명의 北坪 지방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평사
[ 北評事 ]

요약 조선 초기의 정6품의 외직 문관.
외관직(外官職)으로서, 영안도(永安道:함경도)와 평안도에 각 1명씩 총 2명을 파견하였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밑에 있었다. 원이름은 병마평사(兵馬評事)이고 약칭으로 북평사, 평사이다. 북평사는 우후와 더불어 각 도의 주장인 절도사의 막료로서 주장을 보필하였다. 즉 병마절도사 밑에서 문부(文簿)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또 병마절도사를 도와 도내 순행과 군사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 점검, 군사시설 수축 등의 임무를 대신하였으며 병마절도사 유고(有故) 때 그 임무를 대행하였고 임기는 2년이었다. 이는 변방에 무신 수령이 많이 임명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이 막중하여 문신관료가 보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평사 [北評事] (두산백과)

평안도절도사 그리고 함길도절도사 였다면 왜 있지도 않은 북평절도사라고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최경창(1539~1583)의 본관은 해주,자는 가운,호는 고죽이다.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이 송익필등과 더불어 조선중기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퉁소도 잘 불어 을묘왜란 당시 구슬픈 퉁소소리로 왜구들을 향수에 빠트려 물리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서른살 때인 1568년(선조1년) 문과에 급제했고 북평사(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를 거쳐 1575년 12월 사간원 정언(정6품)에 임명됐으나 다음해 5월 파직됐다.

선조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의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참고가 많이 되고 또 북평절도사로 알고 있는 내용을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한때 동생분인 공효공 중손할아버는 세조때 승승장구하여 종1품 좌찬성 까지 가죠. 중손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많은데 대손 할아버지 관련 자료 부족하여 찾아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종회까지 대손 할아버지 자결하였다라고 결론을 짖죠. 다들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만 남습니다.
공효공 자손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조선조 문과 과거급
제자 문과방목에 보면
박강생(朴剛生)
박절문(朴切問)
[문과] 태종(太宗) 11년(14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2위(32/33)

박심문(朴審問
)
[문과] 세종(世宗) 18년(1436) 병진(丙辰) 친시(親試) 병과(丙科) 3위(5/9)
그리고 대손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고려 왕족 영복군 왕격입니다.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2)] 고려 중흥을 위한 최후의 노력 월간중앙 2019.11.05.
2월 20일, 사은사로 영복군(永福君) 왕격, 찬성사 권중화를 중국에 파견했다.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은 이렇다. “천자께서 지극한 관심을 먼 지방의 사람에게도 밝게 보여주시고 번병에 하사해주신 것이 전례를 뛰어넘으니...


1392(고려 이성계 즉위)년 8월 26일 고려의 사은사(謝恩使)였던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과 정당 문학(政堂 文學) 권중화(權仲和)가 명국 도읍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명국 황태자가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나는 훙(薨)하니 황제가 황태자의 아들 윤문(允炆)을 세워 황태손(皇太孫)으로 삼았습니다.”하였다.





​9월 3일 시중(侍中) 배극염(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가만히 보건대 한양(漢陽)에 새 도읍지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가(民家)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들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配置)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하니 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1392-1393)가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전 대호군(大護軍) 이부(李扶)와 봉상 소경(奉常 少卿) 허해(許晐)를 감옥인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고려국(高麗國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1392-1393)가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을 화녕부(和寧府)에 안치(安置)하였다.
방대한 내용들을 올려 주셔서 배우는 기회가 되어 감사합니다.
저도 대손 할아버지 자손입니다. 과거 급제자 짤렸군요
박강생(朴剛生)
[고려문과] 공양왕(恭讓王) 2년(139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병과(丙科) 3위(6/33)
박절문(朴切問)
[문과] 태종(太宗) 11년(14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2위(32/33)
박심문(朴審問)
[문과] 세종(世宗) 18년(1436) 병진(丙辰) 친시(親試) 병과(丙科) 3위(5/9)
박중손(朴仲孫)
[문과] 세종(世宗) 17년(143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5/33)

전분 문과죠 조선초기만 해도 무신 즉 무과를 경시해서 사대부나 좋은 가문은 응시를 안했다고 합니다.
절문 할아버지께서 22세에 과거급제하고 몇달만에 돌아가셨다고 하죠. 할아버지만 더 오래 계셨다면 정말 명문 가문에 올라섰을텐데 아쉬움만 남네요,,, 다음에도 글 남기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이 사진 속에 아는 얼굴 있는거 아닙니까?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97C0B4BE76BC64D

오른쪽 맨 끝에 안경쓰신 분이 당시 절도사공파 화수회 회장이셨던 제 아버지 입니다.
친동생 중손 할아버지의 사위 화의군 이영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년 ~ 1489년 이후[1])은 조선 전기의 왕족, 문신으로, 세종과 영빈 강씨의 아들이다.

자는 양지(良之),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복 동생 평원대군의 기생 출신 첩 초요경과 간통한 일로 피소되었고, 이후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훈신들로부터 공격당했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여러번 탄핵의 대상이 된다.

이후 중종 때 후손의 상소로 종친의 지위를 회복하고, 1534년(중종 29) 대신들의 상언으로 유배당한 지 74년만에 복관되었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배식단에 배향된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화의군 이영은 1425년(세종 7년) 10월 16일(음력 9월 5일) 세종과 영빈 강씨 소생 서자로 태어났으며, 1433년(세종 15년) 1월에 화의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 해 10월 8일 당시 사헌부감찰이던 박중손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441년 8월에는 이복형 임영대군 구와 공모하여 민간 여인에게 남복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

1447년(세종 29) 7월 복권되었으나, 부인 밀양 박씨의 큰아버지 박대손(朴大孫)의 노비 출신 첩을 빼앗은데 이어 1449년 조관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 이듬 해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권되었다. 1451년 2월 세종의 소상이 끝나자 종신들을 학당에 보내라는 문종의 명으로 학당에 보내졌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 효령대군, 임영대군, 계양군 등과 단종비를 간택하는데 참석하였다.

1455년 (단종 3년) 금성대군의 집에 모여 활쏘기 시합을 벌인 일이 훈신들의 눈에 띄면서 이때 이복동생 평원대군의 첩 초요경과 몰래 간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초요경은 계양군과도 사통하였다 하여 계양군은 세조의 추궁을 받게된다. 같은 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계양군과 영천위 윤사로 등의 탄핵을 받기 시작, 이후 대간으로부터 금성대군·혜빈 양씨 등과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그 뒤 사육신의 거사가 발각되면서 세조가 그를 시험할 요량으로 불러들여 사육신의 처리 문제를 묻는다. 사육신 등의 왕위 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가 화의군에게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부답함으로써 전라도 금산(錦山)에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었다.

1456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했다가 정보를 입수한 관노의 밀고로 사사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단종)이 교살[2])되자 이에 연루되었다가 1460년 유배지에서 사사 되었다. 금산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3]

금방 조건(禁防條件)
1.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소서.
1.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또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혹 물품을 주는 자가 있으면, 불충(不忠)한 자에 견주어 논단하게 하소서.
1.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혹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하게 하소서.

실록에 따르면 1456년(세조 2) 6월 3일 세조는 금산 목사(錦山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영(李瓔)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 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4] 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금산 부사(錦山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금산(錦山)에 안치(安置)된 이영(李瓔)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5] 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비참하게 생활하였다. 그 뒤 1483년(성종 14년)에 화의군의 아들 이원이 생계가 곤란함을 호소하여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영(李瓔)【곧 화의군(和義君)이다.】의 아들 이원(李轅)이 상언(上言)하기를,“아비 영(瓔)이 지난 을해년에 금산관(錦山官)에 안치(安置)된 뒤 은혜를 입어 여러 차례 방면(放免)되었지만, 다만 노비(奴婢)와 전산(田産)이 적몰(籍沒)된 나머지 춥고 배고프며 괴로와서 살아갈 수 없으니, 원컨대 가엾게 살펴주소서.”하니, 호조(戶曹)에 명하여 밭을 주도록 하였다.[6]
그 뒤 《선원록》에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년) 손자 윤(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일찍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의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화의군이 여자 노비 3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건리동, 수달, 팽수 등의 서자들과 서손들은 1489년(성종 20년) 5월 성종의 특명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다.

생모 : 영빈 강씨
정부인 : 군부인 밀양 박씨(郡夫人 密陽朴氏) - 참판(參判) 증찬성(贈贊成) 박중손(朴仲孫)의 딸
장남 : 여흥군(驪興君) 이원(李轅)
손자 : 재양군(載陽君) 이급(李級)
손자 : 대곡부령(大谷副令) 이신(李紳)
손자 : 회인부령(懷仁副令) 이수(李綬)
차남 : 여성군(驪城君) 이번(李?)
3남 : 금란수(金蘭守) 이식(李軾)
첩부인 : 아난(阿難)
서자 : 이건리동(李件理同)
서자부 : 명가(命加), 금산(錦山)의 관비 출신
서손녀 : 진금(眞金)
서손녀 : 유금(有金)
첩부인 : 내은금(內隱今)
서자 : 이수달(李修撻)
서자부 : 제석(弟石), 봉상시(奉常寺)의 여종
서손자 : 이억년(李億年)
서손자 : 이억만(李億萬)
첩부인 : 감지(甘之, 금산(錦山)의 관비(官婢) 출신)
서자 : 이팽수(李彭守)
첩부인 : 이름 미상, 정비 군부인 밀양박씨의 큰아버지 박대손(朴大孫)의 노비 출신 첩[7]
서자 : 이름 미상

*얼마전 채널A 천일야사에서 전설의 기녀 초요갱 제목으로 방송 했는데 화의군이 중손 할아버지 사위입니다. 그리고 중손 할아버지도 사위 이영 때문에 힘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초요갱/박지영 지음/ 네오픽션 펴냄

조선 초기 기녀 초요갱은 조선왕조실록에 16번이나 이름이 기록된 여인으로 재예(才藝)가 뛰어났다. 조선 기생으로 황진이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실록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은 반면 초요갱은 역사적인 순간, 극적인 순간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만큼 잘나갔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기구한 운명이었던 셈이다. 세종 임금의 세 아들이 그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초요갱은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였고, 궁중악의 전승자였다. 당시 기준에 따라 기녀로 구분됐으나 사실 예인에 가까웠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천민 신분에서 벗어났으며, 고위 관리의 정실부인을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하기도 했다.

초요갱은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을 만나 왕실과 연을 맺었고, 세종부터 문종, 단종을 거쳐 세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조선 역사에 휘말려 든다.

조선왕조실록에 초요갱은 이렇게 등장한다.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 화의군 이영과, 세종과 소헌왕비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평원대군 이임은 초요갱을 두고 다퉜다. 결국 화의군 이영은 평원대군의 기첩과 간통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떠나고, 초요갱은 장(杖) 80대의 중형을 받았다.

궁궐에서 쫓겨난 초요갱은 세종 말년에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막내아들 신자형의 눈에 든다. 결국 초요갱은 신자형의 정실부인을 밀어내고 안방을 꿰차기에 이른다.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신자형은 관직에서 쫓겨난다.

얼마 뒤에는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덮치기 위해 신자형의 안방에 들이닥친다. 그러나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은 화가 나서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초요갱 주변의 남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파멸의 길을 걷는다.

얼마 뒤 초요갱은 재예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다시 악적(樂籍)에 이름이 오르고 궁궐로 들어가게 된다.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동생인 계양군 이증이 초요갱을 범한다. 세조 9년이었다. 세조는 이복동생인 이증을 불러 “기생이 그 여자 하나밖에 없더냐. 어째서 형제끼리 서로 간음을 하느냐”며 호통을 친다.

초요갱에 푹 빠져 살면서 허구한 날 술을 마시던 그는 나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남자들에게 횡액을 가져다주는 요부였던 것이다. 그처럼 기구한 운명은 초요갱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재예가 뛰어났던 그녀는 다사다난한 운명을 견디고, 모든 은원을 정리하고 궁중악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역사와 남자들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세조의 측근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이때 고위 관리의 첩이었던 초요갱도 함께 축출된다. 이후 평양의 관기로 있다가 또다시 간통사건에 휘말린다. 세조의 국상(國喪) 중이었고, 초요갱과 간통한 관리는 국법에 따라 무거운 벌을 받았다. 초요갱은 조선 역사의 대표적인 팜므파탈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초요갱을 팜므파탈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에 스러져간 예인으로 바라본다. 예악과 사랑,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었던 여인. 당당하게 사랑했으며, 치열하게 예인의 길을 걸었던 여인으로 재평가하는 것이다. 지은이 박지영은 제1회 오산문학상 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