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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論

최영철 2021. 12. 23. 05:29

 

 

우리 시대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시_이성혁

최영철 시집 멸종 미안족』,2021. 시와사상 겨울 

 

 

  어쩌면 우리 시대는 기억상실증의 시대 아닐까. 적어도 기억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린 시대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현재를 겨우 견뎌내며 생존하는 데 급급한 시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는 무엇인가를 상실해버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지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어버렸다. 최영철 시인이 신간 시집 멸종 미안족에서 보여주듯이. 이 시집은 우리 시대에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특히 독특한 제목인 멸종 미안족이 그렇다. 생활고로 시달리다가 세 모녀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과 장례비 머리맡애 올려놓고 죽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그 시는 미안이라는 종자를 이 땅에 퍼트리기 위해 세상에 온 게 분명한 그들 가족이 죽고 미안족은 멸종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들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죽은 그 사건에서 시인은 우리 시대의 상징을 보고, 그 사건은 뻔뻔한 난장판 세상에 내린 징벌이라고 판정한다. 미안해할 줄 모르게 된 세상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게 딘 세상이며, 그럼으로써 더욱 뻔뻔해질 수 있는 난장판 세상이다.

 이에 더해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를 살벌 끔찍한 세상”(안녕 안녕)이라고 판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세상이 되어버린 건 인간의 끝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그냥 가만 땅에 등 붙이고 살면 될 걸 마구 붕붕 솟구쳐 하늘을 넘보거나 수시로 땅굴 파 밑으로 내려갔기 때문”(같은 시)이라는 것이다. ‘살벌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모르고 대지와 하늘을 파헤치고 찢어버렸다. 결국에는 파국에 다다를 인간의 살벌한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저 세 모녀가 보여준 미안의 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 “땅과 하늘은 먼저 납신 그대들 몫임을 인정하고 다신 그러지 않을 게요라고 미안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행위가 타자-하늘과 땅, 그리고 타인 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는 타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인은 그러한 사람들이 멸종되었으며 세상은 더욱 살벌 뻔뻔해졌다고 선언했지만, 한편으로 타인을 따뜻하게 배려하며 생활하는 삶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밥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양푼이 비빔밥 삼천팔백 원 엄한 규칙이라도 되는 양 밥과 찬은 얼마든지 더 갖다 먹으라는 찬모의 말에 메마른 세상 건너오며 부실해진 다리 근육에 힘이 실린다 역사는 남자의 몫이었으나 깨우고 밥 먹여 역사를 돌린 것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으니 혼자된 노인과 집 떠나온 젊은이 등 두드려 보낸 것은 오늘 역시 더운 김 피어오르는 이 조촐한 밥상이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인 양 겸상을 이룬 젊고 늙은 남자들의 분주한 젓가락질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 봉천동 밥집후반부

 

주로 혼밥 먹는 사람들이 찾는 봉천동 밥집은 밥값이 저렴하면서도 밥과 찬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밥집이다. 이 밥집의 찬모는 이곳에 오는 가난하고 외로운 남자들에게 삶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이 밥집에서 혼밥을 먹으면서, 시인은 남자들이 살벌 뻔뻔한 세상과 역사를 만들었다면, 시인은 그나마 이 역사를 돌린 것이 여자였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미안족이었던 세 모녀 모두 여성이었다.) ‘찬모는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이산가족의 재회 때처럼 겸상하게 하여 밥을 먹인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먹는다는 행위다. 씹어 먹는 행위에는 거짓 없는 날 것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이 팥빵 두 개를 사 들고 와” “오래 혼자 씹어먹으면서 아픈 약 후의 사탕처럼 슬픈 과거가/ 재빠르게 달려나와 소화”(슬픔을 녹이는 법)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팥빵을 혼자 씹어 먹는 행위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씹어 먹는 행위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 과거를 되씹는 시 쓰기도 팥빵을 씹어 먹는 행위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때 느껴지는 단맛이란 슬픔의 맛이다. 아픔을 겪고 난 후 우러나오는 슬픔이 쓴 약을 먹는 후 사탕의 맛과 같은 시의 맛이 된다. 이 맛이 시의 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에 최영철 시인은 서른한 살에 죽은 슈베르트슬픔만이 예술이라고 했듯이 점점 그렇게/ 슬픔만이 시가 되네”(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말한다. 미안해할 줄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는 것이요, 그래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를 되씹을 수 있을 때 슬픔도 느낄 수 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면 뻔뻔해지고 살벌해진다. 반면 슬픔의 육화인 예술, 그리고 시는 살벌 뻔뻔해져 가는 세상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과거를 -처럼 씹는 행위인 시 쓰기는 삶을 재충전하는 행위이면서 시라는 새로운 밥을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은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겸상에 모이게 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되씹으며 삶의 힘을 충전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 쓰기는 여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슬픔의 맛을 내장한 밥과 같은 시는 텍스트로서의 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노래로서의 시가 이러한 시에 더욱 적합하다. 시는 노래에서 오지 않았던가. 슬픔의 시는 시의 근원으로서 노래에 다가간다. 최영철 시인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나는 뒷걸음질로 걸었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싶었네

 

그렇지만 나를 만나러 온 나는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네

 

울창 빽빽한 모래의 숲에 움푹 팬 빈 발자국만 남긴 채

 

어둠이 나의 발치까지 내려와 나의 길이 되어주었네

 

사막이라는 정글에서 따 낸 수북한 적막을 앃아 올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낭떠러지 길을 만들었네

- 김광석을 듣는 밤전문

 

  노래가 맛보게 하는 슬픔은 자신의 삶이 외롭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데서 온다. 이 외로움은 누군가에 대한 욕망으로 더욱 사무친다. 최영철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걸어오기를 욕망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 누군가는 사실 또다른 .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나를 만나러 온다. 그렇지만 그 는 노래를 들을수록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다는 것을 감지하게 해준다. 누군가이자 는 과거의 일 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합치될 수 없다. 과거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슬프게 깨닫는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은 움푹 팬 빈 발자국으로 이미지화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간은 허망하게 비어 어두움에 싸여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 시간의 빈 발자국과 어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길을 만들어준다. 그 길는 수북한 적막을 쌍아 올낭떠러지 길이다. ‘낭떠러지 질이라니? 그 길은 시간의 절벽이 만들어낸 낭떠러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저 과거의 와 현재의 사이의 결절된 시간의 길. 노래는 시인을 그 시간의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시인이 현재 사는 곳은 사막이다. 적막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사막의 현재 시간으로부터 과거의 시간으로 떨어지는 길인 것이다. 노래가 만들어낸 그 낭떠러지 길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정도로 부드럽다. 노래는 상실의 슬픔으로 시인을 인도하는 동시에 그를 부드럽게 감싸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얻은 감화에서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가 있을 시의 자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곳은 어둑한 모퉁이 길을 돌아 아릿한 무지개로”(배호 생각) 뜨는 자리이다.

 

 

 

 
 
 

시와 산문

최영철 2021. 11. 17. 11:13

 
 
 

시와 산문

최영철 2021. 11. 17. 11:10

 
 
 

시와 산문

최영철 2021. 11. 2. 20:23

 

 

 
 
 

시와 산문

최영철 2021. 9. 1. 11:13

[오늘을 여는 시] 오늘은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 최영철(1956~)

 

입력 : 2021-08-31 18:52:59수정 : 2021-08-31 18:55:15게재 : 2021-08-31 18:58:41 (22면)

 

말수 적은 전화라도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한 장 남은 달력 팔랑대는 며칠,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고맙다, 다 하지 못한 말들, 이리 오래 받아주어 고맙다, 입 열면 모처럼의 꼬드김에 넘어갈까 봐 입 앙다물고 잠자코 있어주어 고맙다, 허튼 짓거리 하나 안 하나 종일 귀 곤두세우고 나만 노려보고 있어 고맙다, 저기 저 아이들처럼 외로워 괴로워 못살겠다고 쉬지 않고 보채고 소리 지르고 부르르 몸 떨지 않아 고맙다, 내가 성가실까 봐 언제인지도 모르게 은근슬쩍 용건만 쑤셔넣고 달아나버려 고맙다,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아 고맙다, 내일 또 올게, 울지 말고 내 꿈 꿔, 심심하면 이거나 먹어, 이 말만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는 못 볼지도 몰라, 주먹 쥐고 뻔한 대사 중얼거리며 허공에 하트를 그려 놓고 가지 않아 고맙다

-시집 〈멸종 미안족〉(2021) 중에서-

 

한번 사랑을 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배신을 해도 끝까지 사랑해 주는 시인이 있다. 젊고 패기만만했을 때 사랑했던 시 때문에 평생을 시만 가지고 지내온 시인이 있다. 시도 사람이 만든 것인데 어찌 시라고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시 때문에 벼랑 끝 시간들을 견디게 해주었다고 시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시인이 있다. 시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이제 삶 자체가 시가 되어가는 시인이 있다. 아무도 옆에 없어도 모두를 보듬고 가는 시인. 남들은 이 시인을 느림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시와 삶에 대한 그의 지독한 사랑 앞에 감히 그를 독한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독한 시인의 14번째 매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지독한 시인이 멸종되어가는 현실이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이규열 시인



 
 
 

시와 산문

최영철 2021. 8. 10. 10:58

“삶과 시는 이쪽과 저쪽, 숨긴 반쪽을 다 아우르는 것”

최영철 13번째 시집 ‘멸종 미안족’ 출간
“너무 큰 답안지 위에 써내려가는
슬픔·통곡·근심 등 삶이 곧 시가 돼”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입력 : 2021-08-04 14:21:59수정 : 2021-08-04 16:43:28게재 : 2021-08-04 16:33:37 (16면)

 

 

 “드디어 반백이고, 구부정해졌고, 가팔라졌고, 헉헉거리면서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며 저편 고갯길을 바라보고 있다”는 최영철 시인. 문연 제공

 

시는 무엇인가. 최영철 시인은 시를 ‘살아온’ 사람이다. ‘시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최근 출간된 그의 열세 번째 시집 <멸종 미안족>(문연)에는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스케치 같은 문장들이 있다. 그에 따르면 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팡질팡의 상념들을 밑거름으로 숙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되겠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다. ‘아흔아홉 밤의 만행’(11쪽)이다. 수많은 시간과 숱한 과정의 온갖 수행 같은 거라는 말이다. ‘수수만년 안에 끝나지 않을 (…) 부끄러운 고행’(64쪽)이라는 거다.

그의 엄살, 고행, 연륜에 따르면 시는 ‘너무 큰 답안지’다. ‘가슴 설레는 바람에 먹먹한 하늘 뚫릴 때까지 눈물 글썽이며 쓴다 한숨 자고 일어나 다시 보면 오리 궁둥이 뒤뚱뒤뚱 말더듬이 우물쭈물 기가 막혀 기가 차 저만치 내팽개치고 쓴다 아무도 닿지 못한 허허벌판 아무도 버림받은 적 없는 광야에 남아 쓴다 오리무중 우왕좌왕 머뭇머뭇 곧추 나아갈 길 하나 열리려나 쓴다’(38~39쪽). 뭔가를 쓴 줄 알았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아니어서 내팽개치고 다시 쓰는 것이, 허허벌판 광야에 혼자 서 있는 것이, 그렇게 답 없는 답을 모색하는 캄캄한 과정이 시 쓰는 일이다. 그런 시 쓰기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망각에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망각에 묻힐 것이라 (…) 오랜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함성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쓴다’(38쪽)는 것이다.

시 쓰는 일을 폼 나는 일로 여기면 오산 중의 오산이다. ‘멀리서 볼 때 참 온화했으나 가까이 보니 계속 제 오장육부를 쥐어짜’거나 ‘쉬지 않고 제 따귀를 철썩철썩 후려치’(39쪽)는 것이 시 쓰기다. ‘슬픔만이 시가 되네 / (…) / 온데 긁히고 조각날 피멍투성이 / 벌벌벌 떨고 있지만 어디서도 불러주지 않아 / 시리고 차가워진 절망만이 통곡만이 / 어두컴컴 헛웃음만이 시가 되네 / (…) /오래 씹고 깨물어야 진액이 우러나는 / 억하심정 근심만이 시가 되네’(‘시는 어디서 오는가’ 중에서).

 

정말 그러한가. 시와 삶에는 이쪽과 저쪽, 명암이 있다. 이를테면 달의 상현과 하현 같은 거다. 시 ‘상현달이 하현달에게’는 그것을 포착한다. ‘내 허방을 그대 어스름이 품고 / 그대 날선 비수를 내 은둔이 거머쥐었습니다 / 그렇게 먼 먼 다음 생에 또 만나 / 내가 이리 기우뚱하면 그대가 저리 기우뚱해 / 이윽고 안에 숨긴 반쪽끼리 얼싸안고 / 수수만년 바퀴를 돌고 돌아 / 우리 하나의 둥근 달이 되어 있을 겁니다’(54쪽). 이쪽과 저쪽, 빛과 그림자, 상현과 하현은 아주 나중에 하나의 둥근 달로 만나게 되는 거란다. 이런 데 시와 삶의 비밀이 깃들어 있을 거다. 광야에 서 있어야 한 줄을 쓸 수 있지만 그 한 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다. 그런 허허로운 자세를 견지해야 허방이 어스름을 품듯이 나중에 ‘숨긴 반쪽’끼리 서로 얼싸안을 수 있다는 거다.

그는 ‘1956년’에 태어났다. 그해는 시인 박인환과 화가 이중섭이 죽었던 해이며, ‘정신은 모더니티였고 몸은 리얼리티였던 한 시절’(19쪽)이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교차하던 그해에 태어난 것처럼 ‘서정적 리얼리즘 시’라는 그의 시에도 모더니즘의 기미들, 숨긴 반쪽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의 시가 크게 배우는 것은 ‘자연’이다. ‘귀 씨들이 몰려와 말줄임표로 / 뚜라미 뚜라미 운다 / 뚜라미는 바다 건너 집 나간 귀 씨 집 자식 / 비뚤어진 자식새끼 두들겨 패고 / 돌아서서 내쉬는 구성진 한숨 / 뚜라미 뚜라미 밤바다 흰 잇몸 / 열렸다 닫히는 소리’(‘귀뚜라미 노래’ 중에서). 귀가 뚫려야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자연에 눈을 떠야 모던 시도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닐까. 숨긴 반쪽, 생각과 얼의 그림자가 서로 얼싸안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삶을 긍정하는 성숙한 유머·웃음의 시들이 많은데 그러니까 그 웃음의 숨긴 반쪽은 슬픔이고 아픔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드디어, 마침내, 반백이고, 구부정해졌고, 가팔라졌고, 헉헉거리고 있고, (…)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며 저편 고갯길을 바라보고 있고’(‘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 중에서). 그리고 ‘죽음이란 고단한 삶을 덮어주는 솜이불 같은 것 (…) 너무 버거운 걸 지고 왔으니 (…) 침침한 길을 히죽이 웃으며 지나간 우둔한 사내였으니 망각에 들어 비로소 자유를 얻을 것이네 (…) 모처럼 볕살 따스하거든 (…) 끝내 하지 못한 몇 마디 중얼거림이라 여겨 주시게’.(‘ 밤에 쓰는 사전장례의향서’ 중에서). 삶과 시는 별것 아니지만 이쪽과 저 너머를 다 아우르는 것이다. 히죽이 웃으며 지나가는 우둔한 사내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출처: 부산일보]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108041421591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