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최영철 2008. 6. 2. 09:49

잇달아 신작 펴낸 부부문인 조명숙·최영철


조 - '문제적 바보' 캐릭터로 문명 비판
최 - 부산 구석구석 숨은 가치 재발견

 
 
# 아내의 장편소설 '바보 이랑'

- 김해 조차산 설화 바탕 인물의 '바보짓'이 현대문명의 허 찔러

# 남편의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 부산의 공간을 날줄로 삼고 예술의 기억을 씨줄로 한 산문집


소설가 조명숙 씨와 최영철 시인이 새 책을 잇달아 펴냈다. 조명숙 씨는 연작 장편소설 '바보 이랑'(화남)을, 최영철 시인은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박경효 그림·산지니)을 며칠 터울로 내놓은 것이다. 두 사람은 부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문단에서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한 집'에서 한 번에 지역 문학의 소출이 두 권이나 나온 것은 보기에 좋은 풍경 같다. 이들이 각각 어떤 책을 펴냈을까.

소설가 조명숙의 연작 장편소설 '바보 이랑'

 
본인은 세계관부터 행동까지 진지하고 심각한데 막상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인물, 말하자면 '문제적인' 바보 캐릭터 하나가 한국 소설가의 손에서 또 한 명 창조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조명숙의 새 연작 장편소설 '바보 이랑'의 주인공 조이랑 노인의 첫인상은 그랬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는 '가만 있자…이 인물은 설렁설렁 넘어갈 그냥 바보가 아닌데' 하는 생각에 어느새 사로잡힐 것 같다. 조이랑 씨는 존재의 근원 속에 우리 사회가 불편하기 짝이 없게 생각하는 금기의 위반을 내장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위반된 그 금기는 무시무시하게도 근친상간이다.

작가는 책머리의 '작가의 말'을 통해 백치 조이랑이 남명 조식의 아들 조차산의 현신임을 미리 밝힌다. 그런데 여기서 조차산은 역사 속에 있었던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내 소설의 본향이자 심연'이라고 밝힌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조차산 설화를 바탕 삼아 상상한 인물이다.

작가가 주목한 설화의 알짜는 이렇다. 남명 조식의 아들 조차산은 어릴 때 도술을 부려 해괴한 짓을 해 굴속에 파묻혔다. 감금 또는 생매장이다. 작가는 이 설화가 나온 배경을 상상하며 남명 조식 선생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동성동본 금기를 깨뜨리고 혼인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 때문에 '어려서 죽은 조차산'의 설화가 생겼을 것이란 가정이다. 굳이 동성동본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차산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중병에 걸렸으리는 가정도 해본다.

 
그런 조차산의 현신인 조이랑은 백치다. 매우 재미있는 점은 무시당하고 구박받는 조이랑의 '바보짓' 속에 자본주의의 뒷통수를 때리고 오만한 현대문명의 허를 찌르는 놀라운 현명함이 구현된다는 점이다. 그는 밥 한 그릇 주면 동네 일을 도맡아 할 만큼 헌신적이고, 집짐승을 기를 때도 인간과 차별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농법도 농약도 비료도 무시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게 짓는다.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 감염성폐기물소각장 건립 반대 운동에 뛰어드는 계기도 이런 그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이토록 어리석은 행위들이 소설 속 다종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행동을 당겼다 놨다, 쥐락펴락 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설적인 장관이다. 조이랑의 이런 면모만 부각시켜도 대우(大愚)가 곧 대현(大賢) 즉, 큰 어리석음이 곧 큰 밝음이라는 식의 생태적인 장편소설이 너끈히 나올만 한데 작가는 그런 길엔 관심이 없다. 근친상간이라는 원죄 같은 굴레를 조이랑에게 씌우는 것이다. 딸 승이와 손자 봉두, 사회운동가 용우 등이 여기에 어우러져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소설은 끝까지 재미와 긴장감을 이어간다.

평론가 황국명(인제대) 교수는 이를 '위반과 속죄가 맞물리듯이, 수렴하는 힘과 확산하는 힘을 서로에게 되먹임으로써, 소설은 운명의 복잡하고 풍부한 전체에 이른다'고 평했다. 영웅이 나타나 단칼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 갈망하는 것이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현실이라면, '운명의 복잡하고 풍부한 전체'를 깊이 그려냈다는 점에서 소설은 크게 뜀뛰기한다. 거기에 작가가 부려놓은 경남 사투리와 우리말이 황홀하게 결합하면서 '바보 이랑'은 '재미있게' 깊고 진지한 장편소설이 됐다.

최영철 시인의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박경효 그림·산지니)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것'을 재발견하고 그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 문화의 부흥은 올 수 없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서구인들의 옛 고향인 그리스 문명을 재발견하면서 이뤄졌다. 공자는 옛날옛적이었던 주나라의 도를 잊지 말자고 했다. 이런 사례는 숱하다.

부산도 마찬가지다. 부산 사람들이 부산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면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 공간에 새겨져 있는 사연과 역사와 가치를 재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생략하고서는 문화의 발전과 예술의 부흥은 오지 않을 것이다.

최영철 시인이 펴낸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은 부산의 공간을 날줄로 삼고 거기서 펼쳐진 예술의 기억을 씨줄로 삼아 써내려간 산문 모음이다. 이 산문집에서는 최영철 시인의 발이 바쁘다.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부산의 사계를 잡아내고, 바다를 훔쳐내, 구포둑과 자갈치와 하단에서 창조된 예술작품들을 되새김질한다.

산문집 1부 제목은 '풍경들'. 부산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에세이다. 1부의 글이 빼어난 것은 부산의 공간에 대한 진부한 상식과 표현을 조용하게 파괴하는 전복의 힘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문학성이 짙게 묻어나는 산문과 함께 인문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를 함께 실어 책의 소용을 넓혔다. 화가 박경효 씨의 그림을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함께 실어 '보는 맛'을 보탰다. 보고 나면 부산이라는 공간에 대한 사랑이 한결 진해질 만한 산문집인데 이런 책들을 통해 부산이 재인식되면 문화의 부흥도 앞당겨질 것 같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입력: 2008.06.0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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