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9. 16. 20:38

성녀 힐데가르데 (Saint Hildegard)

 

 

 

 축     일

 9월 17일 

 신     분

 수녀원장,신비가,저술가

 활동지역

 빙엔(Bingen), 독일

 활동연도

 1098-1179년

 같은이름

 힐데가르다,힐데가르드,힐데가르디스,힐데가르타,

 힐데가르트

 

 

독일 남서부 알자이(Alzey) 부근 작은 마을인 베르미스하임(Bermersheim)에서 귀족인 아버지 힐데베르트(Hildebert)의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녀 힐데가르데(Hildegardis)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8세 때 병약한 관계로 디지보덴베르크(Disibodenberg)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회에 맡겨져, 스판하임의 메긴하르트(Meginhard von Spanheim) 백작의 동생인 유명한 은수자 유타(Juttta)의 보호하에 읽기와 쓰기, 찬미가 부르기, 수작업과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12세 때부터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14세 때에 수도 서약을 하였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38세의 힐데가르데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41년 그녀의 마흔 세 번째 생일날,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받았다. 그녀는 처음에 이 체험을 거부하여 내적인 갈등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이며 고해 신부에게 상담을 하였고, 마인츠(Mainz) 교구 대주교의 지시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녀가 체험한 환시가 사실임을 확인한 후 그녀의 환시를 글로 기록하는 일을 돕도록 수도승인 폴마르(Volmar)를 임명하였다. 특히 성녀가 살던 시대는 서방 교회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예언자적 소명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148년 그녀는 빙엔의 루페르츠베르크(Rupertsberg)에 새로운 수녀원을 설립하고, 1150년 다른 수녀들을 데리고 디지보텐베르크 수도원을 떠나 그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에 첫 번째 저서인 "쉬비아스"(Scivias Domini)를 완성하자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연과 치료에 관한 책, "책임 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um),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 등을 저술하였고, 1165년에는 라인 강 건너편 아이빙엔(Eibingen)에 두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 전역을 네 차례나 도는 설교 여행을 하였다. 그녀는 1179년 9월 17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에 묻혔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면의 연구를 통한 그녀의 저서는 단테(Dante)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의 시간 전례서와 미사 경본에 9월 17일을 그녀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부터 이 축일을 교황청에서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비록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순교록"에도 성녀로 수록되어 있다.
   


 

신학·철학자 - 힐데가르트

 

 

 

‘환경시대의 수호 성인’으로 부각

철학, 작곡, 명상, 자연요법, 문학, 의술…등 다양한 능력 지닌 독일의 여성 신비가

 

 

『사랑이 모든 것에 넘쳐흐른다. 저 깊은 바닥에서 샘솟아 별들의 세계 위로 덮어 흐르며 사랑은 모두에게 기꺼이 함께 한다. 우리 왕, 가장 높으신 주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기에』(빙엔의 힐데가르트).

 

 

 

 

 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O magne Pater"/ "Ave, Maria, o auctrix vitae"

 

 


중세 최초의 여성 철학자

 

 

중세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여성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힐데가르트(Hildegard 1098~1179). 그는 철학과 작곡, 명상과 자연요법, 식물학과 광물학, 문학 및 의술까지 아우르는 능력을 지녔던 독일 최초의 여성 신비가로 알려진다.

 

살아있던 시기에 이미 「라인 지역의 시빌」 「라인 지역의 데보라」로 알려졌던 힐데가르트는 여러 저술을 통해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을 살아있는 질서로 제시하며, 「하느님의 법칙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서로에 대해 응답한다」는 세계관을 펼친 바 있는데 이같은 의견은 특별히 자연 환경과 생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유럽의 녹색주의자 등으로부터 「환경시대의 수호 성인」으로 불리며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연구는 종파를 넘어 교회 밖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독일어 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신비주의 의학 정신의학 심리요법 비교종교학 자연치료 생태학 페미니즘 음악 미술치료 명상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교회에서 정식으로 선포한 성녀는 아니지만 이미 독일 권에서는 공식적이든 아니든 「국민적 성녀」로 여겨지고 있는 힐데가르트는 마치 미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 것처럼 여겨진다. 약 9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많은 청중들을 얻고 있고 그의 사상과 학설들에 대한 책들이 넘쳐 나는 현상들을 볼 때 그렇다.

 

 


여덟살 때 공동체에 맡겨져

 

 

 

1098년 독일 브레머스하임 성 힐데베르트 귀족 가문의 10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난 그는 힐데가르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의 가족적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형제들 중 네명이 성직 수도직에 있었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신앙적으로 매우 독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덟살 되던 해 힐데가르트는 은수자 유타의 관상 공동체에 맡겨져 유거 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십일조 개념에서 10번째 자식은 하느님께 바친다는 신앙적 요소도 작용했고 또 그 시대에는 어린 소녀들이 이같은 공동체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배경도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그곳에서 공동 생활을 통한 삶을 배우게 됐고 읽고 기도하면서 라틴어와 성서 시편 그리고 성음악을 익혔던 것 같다.

 

유타의 공동체가 베네딕토 수도회 계열 수도회로 성장하면서 14~17살 사이 힐데가르트는 베네딕토 규칙에 따라 종신 허원을 하게 된다. 이때의 수도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단지 힐데가르트가 병을 앓았고 비전을 보았다는 것만 전해진다.

 

1136년 수녀 원장에 선출된 그는 1150년 남자 수도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여성들만의 수녀원을 건립했으며 1165년에는 아이빙엔에 대수녀원을 축성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건축가 시인 희극작가 신비가 작곡가 미술가 신학자 예언자 의사 설교가 정치가 치유가 자연주의자로서의 삶을 보였는데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라인강변을 따라 수녀원 문호와 신비주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평한다.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독일 신비주의를 본격화 했다는 시각에서다.

 

 


세살 때 현시 능력 가져

 

 

힐데가르트는 세상의 빛을 보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신비적 계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셨다고 고백했는데 그 말처럼 그녀는 세 살 때부터 현시의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유타 수녀와 폴마르 수녀 등 몇몇에게만 그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1141년 나이 마흔 세 살 되던 해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쓰라」는 계시를 받고 10년에 걸쳐 그가 들은 모든 것을 말과 문자로 표현했다.

 

「쉬비아스- 길의 조명」이 바로 그것으로 이 책은 35개 그림을 통해 신의 창조와 인간 구원에 대한 역사를 보여 주고 있으며 천사의 창조와 타락, 인간의 창조와 타락 및 인간-우주-신 이라는 관계를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로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상 무학 출신이었던 힐데가르트는 쉬비아스를 쓰면서부터 생을 마치는 81세까지 3권의 신학저서와 77편의 시와 노래, 그리고 36점의 그림 및 500가지의 식물 동물 광물에 대한 자료와 보석 치료, 자연 치료에 관한 의학 관련 책을 펴냈다.

 

 


시복시성 작업 추진

 

 

또 수도원의 대명사인 성 베르나르도를 비롯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 등 성직자 정치인 평신도들에게 올바른 삶을 설명한 300통 이상의 편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창조하고 또 그 창조의 뜻을 완성하도록 이어가고 구원하는 원리와 근원을 「사랑」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사랑의 근본은 삼위일체의 신비로 규정됐다.

 

교황 그레고리 4세와 이노센트 4세가 시성을 제안했고 글레멘스 22세는 시성 작업을 추진한 바 있으나 아직 시성 승인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지역 교회 주교들 합의로 1971년 전 독일어권에서 매년 9월 17일을 힐데가르트 축일로 경축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18일, 이주연 기자]

 


바람속의 장미,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녀
정홍규(아우구스티노)|경산성당 주임신부

 

 

 

 


힐데가르트 수녀는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거의 천년 만에 우리에게 다가온 민중의 성녀이다. 민중의 성녀라는 말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아직 공식적으로 시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고 부른다. 결국 1941년 9월 17일 처음으로 전 독일 내에서 힐데가르트 축일을 경축하게 되었고, 그때에 이르러 이 축일을 로마에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한국천주교의 미사 축일표에는 힐데가르트 수녀의 축일이 기록되고 있지 않다.

 
힐데가르트는 단순히 에코 스타이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녀는 1112년 베네딕도 수녀원에 입회해서 철저하게 베네딕도 전통 속에서 살았던 수녀이며, 1136년부터 1179년 9월 17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녀원장으로서 살았다. 특히 힐데가르트는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 안에 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베네딕도 전통을 조명하여 전수하였기에 베네딕도와 힐데가르트는 같은 급수라고 본다.

 
힐데가르트가 살던 시기로부터 600년 전 오랜 경험을 거쳐 수도자를 위한 삶의 계율을 집필한 서양 수도자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인  베네딕도가 하느님의 ‘남성성 아니무스’를 우리에게 제시하였다면, 힐데가르트 수녀는 하느님의 ‘여성성 아니마’를 우리에게 소피아, 즉 지혜로서 밝혀주었다. 오늘날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갈망하는 충만한 삶으로 이끌어줄 지혜를 힐데가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에 우리는 라인의 진주인 그녀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부들 가운데 왜 하필 21세기에 이르러 12세기의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적형 성녀 로마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는 그 지역 시에나에서조차 잊혀져 가는데, 겨우 1979년 800주년 기일로부터 탄생 900년 사이에 비로소 부활한 “힐데가르트 르네상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여성신비주의자들보다도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아시시의 클라라(1194-1253), 리지외의 테레사(1873-1897), 노리쉬의 쥴리앙(1343-1416), 막데부르거의 맥히틸드(약 1207-1282 혹은 1210-1294) 등등 힐데가르트(1098-1179) 수녀를 특징짓는 것은 그녀의 비전이다. 그녀는 서양의 여성신비주의자의 원조이다.

 


1. 비전


힐데가르트가 본 비전의 방식에 대해 <쉬비아스>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후 1141년이 되던 해, 내가 마흔 두 살하고도 일곱 달이 더 지났을 때, 번개가 번쩍이면서 불덩이 같은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것은 하나의 불꽃처럼 나의 뇌와 심장 그리고 가슴을 뚫고 흘러갔으나,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않고 태양이 제 빛을 퍼뜨려 한 사물을 따뜻하게 해 주듯 온화하게 불타올랐다.

 
내가 보았던 비전은 꿈속에서나 잠을 자면서 얻은 것도 아니며, 정신적인 혼란 상태에서 얻은 것도 아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았거나 외적 인간의 귀로 들은 것도 아니며, 외진 곳에서 본 것도 아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맑은 정신으로, 인간 내면의 귀로써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듯이 보통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비전을 얻었다.”

 
그녀의 비전은 어쩌다가 일생의 한번 내린 비전이 아니다. 수녀가 되기로 맹세를 하기 훨씬 전에 70세 겜블로의 위베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놀랄 만큼 정확하게 빛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뼈와 신경과 혈관이 충분히 성장되기 전인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항상 나의 영혼 속에서 이 비전을 보았습니다. 70세를 넘긴 지금에도 그것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환상 속에 나의 영혼은 신이 생각하신 대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창공 위로 높이 올라가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펼쳐 보입니다. 그 사람들은 저와는 멀리 떨어진 나라나 장소에 있지만,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처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 등의 다른 피조물의 변화에 따라 그들을 관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다섯 감각을 동원하여 그들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적인 눈이 열려 있는 동안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그들을 인식합니다. 따라서 환상을 경험하는 동안 도취상태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낮이건 밤이건 나는 맑게 깨어있는 정신 상태에서 그들을 경험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끊임없이 병에 시달리고, 너무나 심한 통증에 죽지 않을까 걱정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느님은 저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힐데가르트가 세 살 때 그녀의 눈이 캄캄해질 만큼 큰 경련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하지만 너무 어려서 그것이 어떠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임신한 소를 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송아지 색을 예측하여 유모를 놀라게 하였다. 그녀는 미래를 예언했다. 하지만 10대에 들어서면서 내성적이고 나약한 소녀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비전 체험을 가슴 속에 묻어두다가 1106년 슈폰하임의 유타스승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유타는 그것을 후에 힐데가르트의 속기사인 폴마르 수사에게 전했다.


1146년 당시 수도 및 교회 개혁을 주도하던 교회학자이며 신비주의자인 클레르보의 베른하르트와 비전에 대해서 서신을 교환하였고, 1147년 트리어 시노드에서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가 힐데가르트 비전을 예언자적 비전으로 인정하고 앞으로 저술 자격을 계속하도록 인정함으로써 힐데가르트는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비전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따른다. 힐데가르트를 히스테리 환자, 자아도취증 환자, 편두통환자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무학, 즉 못 배운 여자라고 말한다. 그 당시 아카데미 신학은 성경이나 다른 신학적 저서들에 대한 연구를 근거로 인간의 지적 능력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논증적으로 파악하려 했지만,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언표가 순전히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여성은 교회 안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입고 자신의 체험을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2. 비전 삼부작

 


힐데가르트는 비전에 대해 모두 3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 중 첫 번째 저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인<쉬비아스(1141-1150)> 이고, 두 번째 저서는 그녀의 윤리학인 덕의 이론인 <책임 있는 인간(1158-1163)>이며 마지막 저서는 과학인 <세계와 인간>이다. <쉬비아스>와 <세계와 인간> 책에서 특별한 점은 서른다섯 개의 그림과 열 개의 그림을 통해 힐데가르트의 신학과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들은 무엇보다도 힐데가르트의 세계관과 우주론을 단적으로 제시해 준다. 이 그림들이 만다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만다라는 내면세계로 향하는 상징의 길이다. 그녀의 중심테마는 ‘육화’이며 그녀의 우주관은 ‘신 중심적’이다. 힐데가르트의 비전 양식과 자기이해는 구약성서의 예언자에 유래한다. 특히 그녀가 지혜나 사랑으로 부르는 여성적이고 신적인 것에 대한 비전은 무엇보다도 지혜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교부의 시대마저도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론이 우선하고, 소피아 지혜가 여성이란 점은 억압되어 왔다.


오늘날 ‘힐데가르트 르네상스’ 여기에 있다고 본다. 힐데가르트 역시 중세 12세기의 세계관에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차별화되는 것은 지혜신학, 구체적인 인간, 민중의 지혜, 여성들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약의 신학적 모티브 그리고 그리스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자연 치료학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학은 비전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수도원의 치료뿐만이 아니라 민간의학의 요소들도 수용했다. 이미 알려져 있던 지식들을 자신의 신학적 신앙에 따라 치료법을 규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저술에 있어서 가장 논쟁이 심한 부분이 이 책 <원인과 치료> 그리고 <자연학>이다. 1150년부터 1160년 사이에 정리한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치료법은 전체적인 치료법으로 그 범위는 광범위하다. 치료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임신, 분만, 심리적 질병증상에 대해서 그리고 예방과 습생에 대해서 체계화 했다. 힐데가르트 의학의 특징은 균형, 절제, 생명력이다. 그녀의 <자연학>은 자연을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293종의 식물, 63종의 나무, 8종의 금속, 72종의 새, 18종의 파충류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보석치료는 유명하다. 힐데가르트는 평생 몸이 안 좋았기에 때문에 몸을 편태고행하기 보다는 몸을 잘 치료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12세기나 21세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시기”이다. 위기의 시대이다. 낡은 가치관이 먹히지 않고 새로운 가치관이 떠오르는 전환기이다. 한자의 危機(위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는 위험경계, 기는 기회이다. 새로운 어떤 것이 출현할 기회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위기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이며 과거의 방식이 이제 효과가 없다는 신호이다.


이처럼 위기는 도전이고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관점을 선택하라는 도전이다. 현재 우리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경제적 위기나 환경위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의식의 위기 우리 자신을 보는 관점의 위기이다. 우리가 힐데가르트의 지혜를 찾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월간 빛, 2007년 9월호]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힐데가르다 동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526-528쪽. 
존 키르반 저, 이현주 역, 빙겐의 힐데가르다와 함께하는 30일 묵상, 서울(바오로딸), 2001년.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힐데가르트', 서울(으뜸사랑), 2014년, 93-97쪽.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빙겐의 힐데가르트 성녀',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78-83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 '힐데가르트, 빙엔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 9938-99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