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9. 22. 23:09

오상의  비오 신부(Saint Pius of Stigmata)

 

 

 축     일

 9월 23일   

 신     분

 신부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이태리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피오,피우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하였다. 10살 때에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 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 동안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 복귀하였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잠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오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Santa maria della Grazie 성당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
송열섭

 


1. 2002년 6월 16일,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년)이 시성되셨다. 내겐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고, 1999년 5월 2일 시복식에 이어 3년 만에 찾아온 기쁨의 날이었다. 1987년에 처음으로 "마리아"지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리 시대에 이토록 놀라운 분이 사셨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토록 놀라운 분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출신의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 23일에 81세로,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신부님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서 반세기 동안 어떠한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五傷)을 지니고 사셨다.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수많은 기적적인 병치유가 이 수도사제의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언, 신비한 향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상 등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증언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었던 소녀 젬마 양이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실명한 오른쪽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조반니 사비노의 기적적 치유는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2.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어려운 여행에도 아랑곳없이 비오 신부님을 뵙고자 산조반니 로톤도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근본적으로 영성적 동기 때문에 비오 신부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분을 찾는 첫번째 이유는 그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단순히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거하였다.

 
그러하기에 역대 교황님들도 큰 사랑으로 비오 신부님을 대하셨는데,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같은 증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3.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 명의 여자와 만 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사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적어도 편안하고 친절한 만남은 아니었다.

 
비오 신부님은 신중하지 않은 이에게는 엄격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대개는 몇 달 또는 며칠 뒤에 되돌아와 진정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영성 지도에서 그분의 모든 위대함이 드러나는데, 그는 독특한 지도 방법과 영혼들의 고뇌에 그 자신이 함께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다음의 말씀이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4. 또한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그의 영성의 절정이었다. 밤 1시부터 사람들은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도하며 기다린다. 멀리서 온 그들은 하룻밤을 설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당 문이 열리면 성당은 이내 신자들로 꽉 차고, 신부님의 열정 어린 미사는 때론 두 세 시간씩 계속되곤 하였다.

 

 


비오 신부님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여있었고, "왜요?"라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는데, 온몸으로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대 건너편에는 자주,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 제가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하며 회개하곤 했다.

 

 
5.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긴 소송은 1969년에 시작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식을 거쳐 2002년 6월 16일로 막을 내렸으나 그분의 사도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그리고 타종교인과 믿지 않는 이들이 비오 신부님을 통하여 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나는 일이 확산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하신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리라 믿는다. 성인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심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특히 북녘 땅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했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내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송열섭 가시미로/ 청주 용암동 성당 주임신부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

 


산골동네가 세계적 순례지로 각광 이탈리아 산조반니 로톤도 마을

 
[산조반니 로톤도(이탈리아)=CNS] 100년 전만 해도 번잡한 세상과는 아주 동떨어진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산조반니 로톤도'가 오상의 비오 신부의 명성에 힘입어 세계적인 순례지로 성장 변모하고 있다.

 

 

 

 

◀ 비오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Santa maria della Grazie 성당과 내부, 그리고 비오 신부의 유품

 

 
바위 투성이의 언덕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이 마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오는 6월 성인품에 오르는 비오 신부가 지난 1916년 마을 변두리의 카푸친회 수도원으로 옮겨오면서부터. 이후 비오 신부의 성덕과 그가 받은 특별한 영적 은사들(특히 오상)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 마을은 그가 1968년 세상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해마다 수십만 명의 신자들이 몰려드는 영성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늘날 로톤도는 연중 800만명 가까운 신자들이 밀려드는 유럽 최대의 순례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로톤도보다 더 많은 순례객을 맞아들이는 곳은 멕시코에 있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지가 유일하다.

 
수없이 밀려드는 순례객들을 위해 로톤도의 카푸친 수도원 측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당을 건설하고 있다. 오는 2003년 완공되는 이 성당은 약 8000석의 좌석과 6000개의 파이프로 이뤄진 대형 파이르 오르간 그리고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위해 50개의 고해실을 갖출 예정이다.

 

 새로 지은 순례자 성당

 


비오 신부는 특히 하루 10~12시간씩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해 준 사제로 유명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자신의 기도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고 자신의 손과 발에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아 그 상처를 안고 살았다. 또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수많은 자선 사업을 펼쳤다.

 
그뿐 아니라 비오 신부는 기도의 중재자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전구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비오 신부에게 기도를 요청한 인물 가운데는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들어 있다. 1962년 폴란드 크라코프의 대교구장으로 있었을 때 카롤 보이티야 대주교는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후두암을 앓고 있는 한 폴란드 여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11일 후 보이티야 대주교는 다시 편지를 써서 그 여인이 기적적으로 낳았다고 전했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치유 기적들은 주기적으로 이탈리아 신문들에 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비오 신부가 시작한 병원 양로원 등의 복지 기관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례객들의 기부로 계속 규모를 늘려 성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순례지가 너무 상업화되어간다는 부정적 견해도 적지 않다. 실제로 늘어나는 순례객들을 맞기 위해 비오 신부의 묘지가 있는 성당 주변은 숙박시설과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실정이다.

 
일례로 로톤도에서는 지난 3년 사이에 숙박시설이 배로 늘어나 180여 곳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또 다른 34개 숙박시설이 건설 중이다.

 
이곳을 찾은 한 여성 신자는 여성신자는 "아름다운 녹지와 평화스러운 마을을 기대했는데 호텔과 기념품가게만 있다"며 실망감을 토로했다.
[평화신문, 2002년 5월 5일]

 


 

이탈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


'오상의 비오 신부' 1위...회사명에 성인 이름 넣은 기업 2만 1000여곳

 

 

 

 

 

▲ 성 비오 신부

 
[바티칸시티=CNS]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에는 성인 이름이 넘쳐난다.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밀라노 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회사명에 성인 이름을 넣은 기업체는 2만1000여개나 된다. 이는 지난해보다 약 1000개가 늘어난 수치다. 특히 이 가운데 65개 회사는 '모든 성인(ognissanti)'을 쓰고 있다.


회사들뿐만 아니다. 동네 상점이나 길거리 공영 주차장, 장례식장에서도 성인 이름을 애용한다.

 
바티칸도 예외는 아니다. 스위스 근위대 성당인 '성 마르티노와 세바스티아노' 성당을 비롯해 성 비오 10세로(路), 성 베네딕토 가로수길, 성 요한 타워, 성 로제 주차장, 성 찰스 궁전 등 성인 이름이 붙여진 곳이 즐비하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은 누구일까. 이탈리아 가톨릭 잡지 '파밀리아 크리스티아나'가 최근 신자 6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1위는 성 비오 신부가 차지했다.

 
'오상의 비오 신부'로 잘 알려진 비오(1887~1968)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상처가 손과 발, 옆구리에 생겨 피를 흘린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교황청이 성무집행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2002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밖에도 이탈리아 수호성인인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해 성 안토니오, 마리아, 성녀 리타 등이 이탈리아에서 사랑받는 성인들이다.

 

[평화신문, 2006년 11월 24일]

 


 

 

충격그자체
기도와 희생(고통) 그리고 선행(자선) 이 세가지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는
가장 확실한 재산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