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9. 30. 23:18

성녀 데레사(Teresa)

 

 

 

 

 

 축일

 10월 1일   

 신 분

 수녀, 교회학자    

 활동지역

 리지외(Lisieux)

 활동연도

 1873-1897년 

 같은이름

 소화 데레사, 소화데레사, 테레사, 테레시아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Basse-Normandie)의 알랑송(Alencon)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Louis Martin)과 젤리 게랭(Zelie Guerin)의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Therese Martin)이며, '소화(小花) 테레사'라고도 부른다. 그녀는 4살이 채 못 되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와 함께 오빠가 사는 리지외로 이사를 하였다.

 

 

성녀는 어릴 적부터 특히 성모 마리아 신심에 출중했다. 7살 때부터 고해성사를 즐겨 받았고, 10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심하게 알았는데, 때로는 경련과 환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그녀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테레사는 1884년에는 첫영성체를 하고 그 얼마 후에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완전한 회심’을 체험한 그녀는 자신의 영혼 안에 애덕이 넘쳐 드는 것을 체험하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고 한다.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린 상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망, 즉 다른 영혼들을 돕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머무르며 필요한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혈을 전해 주기로 결심하였다. 성탄절에 회심의 은총을 체험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았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테레사는 14세에 리지외의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를 청하였다. 이 카르멜 수녀원에는 이미 테레사의 두 언니, 마리(Marie)와 폴린느(Pauline)가 입회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녀원에서는 테레사에게 21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하였다. 테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의 주교에게 입회를 청하기도 하였고, 또 아버지와 언니 셀린느(Celine)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게 개인적으로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때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입회하겠지”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녀가 1888년 4월 9일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것은 나이 15세 때였다.

 

그 후 2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9년 반 동안 테레사의 수도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다른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은 곤자가의 마리아(Marie Gonzague) 원장수녀에 의해서 생긴 공동체의 내부 분열로 고통을 당하였다. 테레사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생활에 열중하였다.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녀가 이룬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충실성은 그녀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에는 그 어느 수녀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1893년 테레사는 수련장 서리로 임명되어 4년 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은 길’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갖고 살았다. 그녀의 ‘작은 길’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법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 앞에 서서 지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한다.

 

죽기 18개월 전에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났지만,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테레사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켰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시련을 겪었으며, 1897년 9월 30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일 년 후 카르멜 수녀회의 통상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어 여러 카르멜 수녀원에서 읽혀졌고, 이 자서전을 요구하는 부수가 점차 늘어나자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테레사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이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후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교회 관례를 무릅쓰고,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사가 선종한 지 26년만인 1923년 시복식, 곧이어 1925년 5월 17일 시성식을 갖고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선포하였다.

 

테레사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고향인 알랑송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일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와 더불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1944년 5월 3일에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프랑스의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7년 6월 10일 성녀 테레사를 보편교회의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녀가 남긴 저서로는 “성녀 소화 테레사 자서전”, “성녀 소화 테레사의 마지막 남긴 말씀”이 있다.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특히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과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심을 수련하고, 이 같은 덕행을 말과 모범으로 수련자들에게 가르쳤다.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쇄신 및 선교 지역에서의 신앙 전파를 위해 생애를 바치고, 1897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925년 성인 품에 올랐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녀의 자서전'에서
(안응렬 역, 1975년, 가톨릭 출판사 pp.229-230)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묵상할 때 이 간절한 원이 순교에 못지 않은 고통이 되어서, 무슨 대답을 찾을 양으로, 성 바울로의 서간집을 폈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13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이가 한꺼번에 사도와 예언자와 학자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없다는 것, 교회는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눈은 동시에 손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답은 분명하였지마는, 제 원이 채워진 것은 아니었고, 평화가 온 것도 못되었습니다. 성녀 막달레나가 텅빈 무덤가에 앉아 줄곧 굽어보다가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을 발견했던 것같이, 저도 제 허무의 깊은 속까지 저를 낮춤으로 몹시도 높이 올라가 제 목적에 다다르게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실망치 않고 그대로 읽어 나가다가 이 구절에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도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아무리 완전한 특은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지를 설명하시고, 천주께로 확실히 가기 위해서는 애덕이 가장 훌륭한 길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마침내 저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성교회의 신비체를 살펴보니, 성 바울로께서 설명하신 아무 지체에서도 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지체에서 저를 찾아 내고자 하였습니다. “애덕”이 제 “성소”의 열쇠를 주었습니다. 저는 만일 교회가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면, 모든 기관 중에 제일 필요하고 제일 귀한 것이 그에게는 없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지경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말로 말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미칠 듯이 기쁜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제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포교 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 대축일(10월 1일)

 

 

가장 강한 힘, 겸손

 

 

요즈음 경쟁력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다른 이들, 다른 분야와 차별화하고 두드러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것이어야 경쟁력, 곧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키우려고 애를 쓴다. 또 가장 어려운 때가 투자의 적기라며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 무슨 언어 능력이며, 자격증이며, 경쟁력이 되는 것들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힘이라고 생각한다. 힘을 가지려고 능력을 키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재물도 능력이므로 그것으로 힘을 발휘하려고 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명예도 그러하며, 무엇이든 가진 것은 다 능력이고, 그것으로 힘을 쓰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능력이다. 그것이 내 삶에서 힘이 된다. 아는 것도 힘이고 그래서 알아야 면장을 한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것이 능력이다. 감지하고 느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베풀 줄 알고, 도와줄 줄 알고, 새로운 것을 성취할 줄 알고, 남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앞서서 할 줄 아는 것, 이 모든 것이 능력이며 힘이다.

 

이런 것을 특출하게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난사람’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각계 각층에 난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능력 있는 사람들이며, 훌륭하며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사람일까? 제자들이 물었다.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라.’ 또 말씀하시기를,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는 것은 난사람이 아니라, 철부지처럼 순진한 ’어린이’이며,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 ’겸손한 사람’이다.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복음적으로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겸손한 성인들 가운데 ’소화 데레사’ 성녀가 있다. 작은 꽃이라는 뜻으로 ’소화(小花)’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마다 시월 첫날이 되면, 우리는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 대축일’을 지낸다. 이날이 주일이 되어도 이 성녀의 축일을 지낸다. 또 ’포교 사업의 수호자’라 부른다.

 

이 성녀가 어떤 분이시기에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크신 분으로 교회에서 축제를 지내는 것일까? 데레사 성녀(1873-1897년)는 프랑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리지외 지방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가르멜 수녀원은 사회에서 활동하는 수도회가 아니어서 그들의 삶을 세상이 잘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더욱 그러했다. 수도원에서 그의 삶은 길지도 않았다. 스물다섯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위대하고 크신 성인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것은 가장 작은 분이며 가장 겸손한 분이었기에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신 분이 되신 것이다. 그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오직 ’겸손’과 ’복음적 단순성’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배우고 익혔으며, 이 덕행을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후배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이분께 ’예수 아기의 성녀’, 작은 꽃 ’소화’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또 주님께 충실한 순명 정신으로 자신의 소명이 사랑임을 깨달았고, 그 사랑이 열렬한 선교 정신이었기에 ’포교 사업의 수호자’가 되신 것이다.

 

이날 축일은 우리 모두에게 ’작은 길’ 곧 겸손의 길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어머니 팔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일깨우고 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화를 누리는 것이 큰 기쁨이 된다(제1독서).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복음). 그러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하며 오로지 주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고 주님만을 섬기는 ’한마음의 동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제2독서).

 

현대 사회는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생존경쟁의 사회이다. 강한 사람, 힘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나 이 축일의 소화 데레사 성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뜻은 그 반대이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위대하고 힘있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다.

우리는 생활 가까운 곳에서부터, 일상에서, 작은 것에서부터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성녀께서 가르치신 작은 길로 나아가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이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생명으로 통하는 작은 길 - 성녀 소화 데레사

(1873. 1. 2~1897. 9. 30, 축일:10. 1)

 

정재성(요한) | 신부, 대구대교구 봉덕동성당 보좌

 

 

이번호에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 함께 ‘선교의 주보성인’으로 꼽히는 ‘소화 데레사 성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대 데레사’로 불리는 데 비해, 소화 데레사 성녀는 ‘리지외(Lisieux)의 데레사 성녀’, ‘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성녀’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뿐만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2년 반 동안의 유학생활 중 마지막 1년을 이 성녀에 대해 연구하고 석사학위논문을 썼다. 논문제목은 <리지외의 데레사에 의해 제안된 교회의 신비>인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논문내용과 다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으로 발간할 생각이다. 그러면 이 성녀에 대해 공부하게 된 동기와 함께 성녀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 말해보겠다.

 

1997년 성탄 방학 때 교구사제 모임(2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대주교님께서 함께 참여하시는 모임)이 헝가리에서 열렸다. 그 당시 나보다 먼저 유학생활을 시작하신 선배 신부님들 중 영성신학을 전공하고 계신 김준년 신부님(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전공)과 손군옥 신부님(십자가의 성 요한 전공)께 조언을 구하였고, 소화 데레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겨우 24년밖에 살지 못했고 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소화 데레사 수녀가 어떻게 성녀뿐만 아니라 교회박사까지 될 수 있었는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녀의 가족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 상처와 치유

 

시계 보석상(1850~1870)이었던 루이 마르땡(Louis Martin:1823. 8. 22~1894. 6. 29)과 레이스 제조직공이었던 젤리 게렝(Zelie Guerin:1831. 12. 23~1877. 8. 28)은 1858년 7월 13일에 결혼하여, 17년 동안 9명의 자녀(딸 7명, 아들 2명)를 낳았는데, 4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5명이 살아남았다(마리(Marie:1860. 2. 22~1940. 1. 19), 뽈린(Pauline:1861. 9. 7~1951. 7. 28), 레오니(Leonie:1863. 6. 3~1941. 6. 16), 셀린(Celine:1869. 4. 28~1959. 2. 25), 데레사(Therese:1873. 1. 2~1897. 9. 30)). 이 딸들은 단 한 명도 결혼하지 않고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셋째딸 레오니는 프랑스 북부도시 깽(Caen)의 성모방문회(Visitation)에 입회). 데레사의 가족은 하루일과를 새벽 5시 30분 미사로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부모님 모두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혼했으므로 자녀들의 종교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데레사의 생애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알랑송(Alenson)에서의 시기(1873~1877), 뷔쏘네(Buissonnets)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 리지외의 가르멜(Carmel)수녀원에서의 시기(1888~1897)이다.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알랑송에서 태어나, 이틀 후 첫째 언니 마리를 대모로 알랑송의 성모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엄마가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서말레’(Semalle에 있는 유모 ‘로즈 따이예(Rose Taille’가 1873년 3월부터 1874년 4월 2일까지 데레사를 양육하였고, 그 이후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877년 8월 28일, 엄마 젤리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시자, 데레사는 두 번째 엄마로 둘째 언니 뽈린을 선택하였는데, 그때부터 활달하고 발랄하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어 끊임없는 신경증과 눈물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간 데레사는 뷔쏘네에서 리지외까지의 시기(1877~1888)를 보냈다. 데레사는 4살 반의 나이에 엄마를 잃어버린 우울함을 간직한 채, 1881년 10월 3일부터 1885년까지 리지외에 있는 분도수녀원 소속 여학교의 반기숙생으로 생활했는데, 이는 데레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다섯 해였다.

 

1882년 10월 2일, 두 번째 엄마였던 뽈린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예수의 아녜스 수녀)했다. 뽈린의 착복식인 1883년 3월 13일, 데레사는 이별의 큰 상처 때문에 중병을 얻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지만, 5월 13일 성모 마리아의 미소로 완치되었다. 1884년 5월 8일 첫 영성체를 했고, 1886년 2월 초등학교 중퇴 후 1주에 3~4회씩 사설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0월 15일 첫째 언니이자 세 번째 엄마였던 ‘마리’마저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심의 마리아 수녀)하자, 1885년 5월부터 시작되었던 ‘세심증’이 악화되었다.

 

1886년 성탄날 밤에 치유의 은총을 경험(일명 ‘소화 데레사의 회심’)한 데레사는 어머니의 죽음 후 9년 여 동안 괴로워하며 잃었던 힘을 되찾게 되었고, 그 후로 다시는 잃지 않았다. 마침내 가르멜수녀원 입회를 결심한 데레사는 1887년 5월 29일, 아버지께 허락받았지만 성소에 대한 굳은 확신이 없었다. 마침 그때 3명의 여자를 살해한 프란지니(H. Pranzini)에 관한 기사를 <라 크롸(La Croix:가톨릭신문)>에서 읽은 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그가 회개하고 자신의 가르멜 성소가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결국 죽기 직전 프란지니는 사제를 청하여 십자가에 세 번이나 입맞추었고, 데레사는 사형수의 회개를 얻어낸 동시에 가르멜 성소를 확신하였다.

 


작은 길, 언제나 어린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데레사 수녀)한 1888년 4월 9일, 데레사는 “나는 영혼을 구하려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가르멜에 왔습니다”고 했으며, 착복식(1889. 1. 10), 허원(1890. 9. 8)과 공적 착복예식(9. 24)을 받았다. 1893년 2월 20일 예수의 아녜스 수녀(뽈린)가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1894년 6월 29일에 아버지가 운명하자, 9월 14일에 셋째딸 셀린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하였다(성면(聖面)의 즈느비에브 수녀). 이로써 한 가정 출신의 4명의 수녀가 한 수녀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데레사의 영성이 확립되는 데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건이 바로 ‘셀린의 입회’였는데, 이는 셀린의 지참물(사진기, 시편주해서 등)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데레사는 순명에 의해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은 길’(영적 어린이의 길)을 발견하였으며,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 미사에서 자비로우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하였다. 8월 15일 사촌언니 마리 게렝(Marie Guerlin:1870. 8. 22~1905. 4. 14)도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 입회(성체의 마리아 수녀)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곤자가의 마리(Marie de Gonzague)’ 수녀는 5명의 수련자들을 보조 수련장인 데레사에게 맡겼고, 데레사는 ‘작은 길’로써 그들을 지도하였다.

 

 

해 성 목요일과 성 금요일, 결핵 때문에 두 번이나 각혈했던 데레사는 1897년 9월 30일, “나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만 1년 뒤인 1898년 9월 30일, 자서전 <한 영혼의 역사>가 출판(2,000부)되었고, 데레사의 무덤을 순례(1899년부터 허가)한 사람들에게 무수한 기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데레사는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1923. 4. 29), 시성(1925. 5. 17)되었으며,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1927. 12. 14), 비오 12세에 의해 성녀 쟌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1944. 5. 3)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6월 2일 리지외를 순례하였고, 성녀 소화 데레사 서거 100주년(1997년 9월 30일)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9일에 성녀를 서른세 번째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는, 성인의 길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삶으로 증명하였으며, 사제들의 성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기꺼이 자청하였다. 데레사의 소명은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발견했던 ‘작은 길’은 모든 이를 위한 성성(聖性)의 길이기에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자들, 심지아 무신론자들까지도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우리도 데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앞에서 작은 채로 남아 있고, 점점 더 그렇게 되길 원하며,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월간 빛, 2001년 10월호]

 


 

사도들 중의 사도”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인류복음화성 장관, 이반 디아스 추기경

 

 

우리는 프랑스교회에서 거행하는 ‘선교의 해’에 맞추어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기리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모두 데레사 성녀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선교사 데레사 성녀의 박동을 느껴봅시다. 80년 전, 교황 비오 11세는 바오로 성인 후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 용기 있고 혁신적인 동양의 위대한 사도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함께 데레사 성녀를 “세계의 모든 선교사들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경신성사성 교령, 1927년 12월 14일) 이러한 예언자적인 행위로써  교황은 선교사의 두 가지 핵심적인 특성인 관상과 활동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사실상, 실제 선교사는 항상 관상 중에 활동하며, 활동 중에 관상을 합니다. 그러므로 소화 데레사는 선교사였습니다. 성녀는 15세에 입회한 가르멜 수녀원을 전혀 떠나지 않고서도 수녀원 담을 넘어 전 세계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선교 활동 10년 동안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희망봉, 인도까지 수천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했고, 그는 많은 아시아 국가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운 후 중국 초입에서 선종했습니다.

 


아주 다르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두 가지 모습으로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두 분의 공통성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지녔습니다.

 


사실, 데레사 성녀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한 교황 비오 11세가 강조한 성녀의 두 가지  생활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인 불타는 사랑, 둘째,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그를 괴롭혔던 많은 고통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한 자비입니다.” 데레사 성녀 자신이 말했듯이 “저는 온 세상을 다니고 싶습니다. …… 저는 가장 먼 섬에도 복음을 선포하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에 대해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이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온 나라에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의 하느님께 그들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한 학자이며 사도이고 순교자까지 되기를 바라게 한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데레사의 삶은 온전히 “예수님을 사랑받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고, 그 삶의 여정은 이러한 길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대양으로 맹렬하게 흐르는 급류는 지나가는 길에서 그와 부닥친 모든 것을 가져옵니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 사랑의 끝없는 바다 속으로 자신을 던진 영혼은 거기 소유된 모든 보물에 이끌려갑니다. 주님, 제가 알고 있듯이 제가 가진 보물은 오직 저의 영혼과 함께 당신을 기쁘게 하는 영혼들뿐입니다. ……” 이것은 데레사 성녀의 선교 의식을 반영하고, 그 전 생애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을 때, 데레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선교사로서 자신의 성소를 깨달았습니다. “저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가르멜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영혼들을 주시려 하였던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저에게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들을 돕는 것은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사도가 되기 원하지 않는 가르멜인은 그 성소의 목적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제가 활동 선교사가 아니기에 저는 사랑과 고행으로써 선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은총이 절실한 인류를 바라보고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사랑의 희생으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화해할 것이며, 사랑에 개종하고 구원될 것입니다.” 그는 가르멜수녀원에서 살았지만 복음화되어야 할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데레사 성녀의 축일은 전 세계에서 봉헌된 사람들의 선교 영성에 바쳤습니다. 모든 여성 수도자들, 특히 관상 수도회에 속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들의 소명이 선교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해야 할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해야 합니다. 더욱이 “사실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전 생애가 그러하였듯이, 모든 소명과 은사의 근원인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그 자체가 선교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봉헌생활」, 72항)

 

데레사 성녀는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위한 그 사랑으로 자신의 성소를 채웠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구원을 확신한 그는 기도에서 그분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기도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합니까! 기도 안에서 매순간 임금에게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왕비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데레사는 모든 인간을 위한, 특히 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자비는 수천 명의 영혼들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이 구원될 수 있도록 세상 종말까지 끊임없이 간구하기 위해 죽은 뒤에도 선교사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그의 마지막 병환 중에 그는 “저는 영원한 휴식처로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 그러나 무엇보다 저는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좋으신 그분이 사랑 받게 하려는 저의 선교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의 낙원은 세상 종말까지는 땅에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존재하는 한 휴식을 바라지 않으며, 저 혼자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러한 그의 열정적인 선교 정신으로 선교의 세계 수호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성녀는 선교가 하느님의 사업이며 본질적으로 기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였습니다. “가르멜의 성소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기도와 희생의 목적이 선교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로써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 그리스도의 희생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킨 그는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소중한 피의 값으로 영혼들을 구원하신 그분 편에 우리가 서기를 바라고 계심을 확신하였습니다. 비 그리스도인과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복음화 하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그 후손들이 될 수천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복음 협력자들과의 동참은 본질적으로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성소는 다 익은 밀밭에 추수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의 눈을 낮추고 들판을 보아라. 추수하러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더 고상합니다. ‘너의 눈을 들고 보아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천국에 얼마나 많은 빈 공간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곳을 채우기 위해 어서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산에서 기도하는 나의 모세들입니다. 나에게 일꾼들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을 보내겠습니다. 가르멜인으로서 우리의 선교는 수천 영혼들의 어머니가 되고 그들을 구원하는 복음적 일꾼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선교사에는 두 개의 범주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피데이 도눔 선교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먼 나라로 가는 이들이 있고, 데레사 성녀처럼 기도와 희생으로써 선교사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데레사는 우리에게 선교란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그는 먼 나라에 있는 벨리에르 신부와 라울랜드 신부를 동반하면서 한편으로 그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프란치니에게도 가까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을 만들어내었고, 많은 불쌍한 죄인들과 부닥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기도와 희생으로써 회개로 이끌어야 할 이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합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우리는 수확할 땅의 주인님께 구원이 가장 필요하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할 수많은 복음 봉사자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께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수천 수백의 본당들과, 주교, 사제, 남녀 수도자, 신자들과 피데이 도눔 선교사들과 함께 인류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 단체들을 바칩시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거나 또는 바오로 성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말하였듯이 ‘알지 못하는 신’을 찬양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죄악으로 그분을 잃어버린 불행한 수천 수백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또한 전 세계에서 사제들, 남녀 수도자들, 교리교사들의 양성과 어린이 선교사 활성화를 위한 일,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적극성을 후원하고 활성화시키는 교황청 전교기구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천국에서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기도로써 온 세상에 나가있는 복음의 일꾼들을 동반하며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의 선교사다운 심장에서 솟아오른 기도하는 이가 됩시다. “자비하신 아버지, 우리의 다정하신 예수님, 동정녀 마리아와 성인들의 이름으로 당신 사랑의 영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아멘.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 홈페이지에서]

 



 “작은 이여, 나에게로 오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윤주현

 

 

 

 

불운했던 어린 시절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첫 영성체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소화 데레사)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송에서 아버지 루이 마르탱과 어머니 젤리 게랭 사이에서 태어났다. 9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데레사는 부모님과 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다음,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성녀는, 그 이전과 달리 수줍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고 말았다.

 

열 살이 될 무렵, 당시 엄마처럼 따르던 둘째 언니 폴리나가 리지외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했는데, 이 역시 소화(小花) 데레사에게는 더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이때 성녀는 심리적 충격으로 ‘이상한 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나 1883년 5월 13일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성녀는 기적적으로 낫게 되고 이듬해 첫영성체를 했다.

 

 


열다섯 살에 가르멜회 수녀가 되다

 

 

1886년 성탄절에 성녀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성녀는 「자서전」에서 이를 “완전한 회개의 은혜”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 성녀의 마음에는 애덕이 더욱 깊이 깃들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자신을 잊을 줄 아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낀 소화 데레사는 열다섯 살임에도 여러 기회를 통해 바이유의 주교와 당시 레오 13세 교황에게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는 허락을 청한다.

 

 

결국 두 분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소화 데레사는 1888년 4월 9일, 리지외 가르멜수녀원에 입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9년 1월 10일 착복과 동시에 수련을 받아 1890년 9월 8일 수도서원을 했다.

 

1893년부터 성녀는 부수련장으로서 수련장을 도와 임종 전까지 수련자들을 동반하는 소임을 맡게 된다. 이 소임을 하면서 성녀는 자신의 독창적 영성을 담고 있는 “작은 길”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쳤다.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에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자신을 제물로 봉헌했으며 바로 그날 “예수께서 얼마나 사랑받기 원하시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깨닫는 은혜”(「자서전」 A)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닷새 뒤에 “사랑의 상처”라고 하는 신비적 은총을 받았다.

 

이듬해인 1896년 사순절에 성녀는 첫 번째로 각혈을 하게 되는데 이로써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이러한 육체적 고통에 더해 성녀를 괴롭힌 것은 신앙을 거스르는 유혹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어둔 밤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녀는 이 모든 것을 신뢰와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이 발견한 “작은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이 마지막 시기에 성녀는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도적 열성, 그리고 “좋으신 하느님”을 향한 자녀적인 의탁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서 영혼들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강한 원의를 드러냈다.

 

성녀는 1897년 9월 30일, 스물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 뒤 1923년 4월 29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고 1925년 5월 17일 시성되었으며, 1927년 12월 14일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함께 선교와 선교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서거한 지 100주년이던 지난 1997년 10월 19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성녀는 살아생전 3편의 자서전 원고와 266통의 편지, 그리고 54편의 시, 21편의 기도, 8편의 희곡을 남겼다. 그 가운데 특히 「자서전」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영적 어린이의 길”을 걷게 하는 데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영적 어린이의 길을 발견하다

 

 

성녀는 어려서부터 대성인이 되고자 하는 대담한 원의를 품었다. 소화 데레사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의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해 드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착복을 준비하는 피정에서 이렇게 자신의 원의를 말한 바 있다. “저는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고 싶습니다! … 이제껏 사랑받으신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해 드리고 싶습니다!”(편지 74)

 

그러나 사랑의 길이란 자기비허(自己脾虛)의 길이자 완전한 내적 가난의 길이다. 성녀는 이 여정 속에서 자신이 작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했으며 이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작은 자가 되었을 때, 성녀는 “누가 작은 자이거든 내게로 오라.”(잠언 9,4 참조)는 말씀과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같이 나도 너희를 위로하고 너희를 품에 안고 무릎에 올려놓고 흔들어주겠다.”(이사 66,12-13 참조)는 말씀을 통해 특히 작은 자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성녀 역시 사랑으로 응답해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분께 맞갖은 사랑이 없음을 깨닫고 이내 하느님의 신적인 사랑을 청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할 때, 그분께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시는 사랑이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길, 이 길이 바로 신뢰와 의탁의 “작은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영적 어린이의 길”로 불리게 된다. 이 길은 성성에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기대는 것으로, 성녀는 이를 고층건물을 곧바로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란 의미에서 “영적 엘리베이터”라 부르기도 했다.


 

 

교회의 심장이 되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소화 데레사는 그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고자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며 이 세상을 위해 군인, 사제, 사도, 학자, 순교자 그리고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성녀는 이러한 자신의 모든 원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으며, 결국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은 “순수한 사랑”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교회의 모든 지체에 영적인 힘과 빛을 주는 사랑으로서 교회의 심장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되고자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숨은 희생의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자신을 봉헌하였다. 더욱이 성녀는 선교에 대한 커다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이는 훗날 성녀를 선교의 주보성인이 되게 했다.

 

마지막으로, 임종하기 전 병중에 있을 때 성녀는 깊은 신앙의 어둔 밤을 거치게 되는데, 당시 성녀는 그 어둠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린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모든 사람과 연대하고자 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구체적인 삶의 증거를 통해 현대인들이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에 쉽게 다가서게 해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를 넘어 오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의탁으로의 초대였다. 성녀는 이를 통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일상의 “작은 것들”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누구나 일상도(日常道)를 통해 성성에 나아가도록 가르쳤다.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수도사제. 2001년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스페인에서 가르멜 영성을 전공하고 아빌라신비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은총론」, 「교회론」, 「신학적 인간학」을 비롯해 가르멜 총서 시리즈 등 다양한 저서, 역서,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서 은총론과 영성생활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소화 데레사 (1) 생애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리지외의 데레사 마르땡은 15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그 울타리에서 나온 적 없었지만 「선교지와 선교사들의 수호자」로 선언되었고, 체계적 신학 논문 한 편도 쓴 적 없엇지만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또한 데레사는 범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고한 영성이나 엄격한 수덕을 주장하지 아니했고 여느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그러나지 않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24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성 비오 10세가 담화 중 일컬음)이라 일컬어졌으며 시복, 시성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위대하게 했을까? 그 비결은 「일상적 일을 비상한 사랑으로」수행한 그녀의 「작은 길」에 있었다.
 
데레사는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1873년 1월 2일 아버지 루이 마르땡과 어머니 아젤리 게렝 사이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지 이틀만에 튼언니 마리아가 대모를 서며 세례성사를 받았다.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 데레사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유모의 도움이 필요했다. 알랑송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말레 마을에서 데레사는 유모 로즈 댈레에 의해 14개월 정도 양육된 후 집으로 돌아왔다. 22개월 된 아기 데레사는 예수님께 소리내어 기도를 하여 가족을 기쁘게 했고 네살 되었을 때엔 여덟 살 된 언니 세레나에게 하느님의 전능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데레사는 가족의 따뜻한 애정에 감싸여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풍부한 감수성을 지녓으며 나이에 비해 영리했고 놀라운 통찰력을 갖추었다.

 

이 어린 데레사에게 큰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다섯 살도 되기 전인 1877년 8월 28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후 어린 데레사는 가족들과 함께 외삼촌이 살고있는 리지외의 뷔소네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어머니를 잃고 낯선 곳으로 이사 온 데레사는 온통 달라진 새로운 세계에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1881년 10월 3일 여덟 살의 데레사는 리지외의 베네딕도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적도 뛰어났으나 생활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데레사는 네 살에서 열네 살까지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1882년 10월 2일 둘째 엄마로 선택하고 의지해오던 폴리나 언니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데레사는 그 당시 마음의 상태를 뒷날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칼에 찔려 꿰뚫리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 저는 둘째 엄마를 잃는다는 것만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슬프게 많이 울었습니다』

 

동정마리아의 미소로 치유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데레사는 한 학년 월반해서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3학년에 들어가 우등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교구의 규칙에 정해져 있던 연령에서 이틀이 모자라 첫영성체 자격에 미달되었다. 외숙부와 함께 교구장 주교에게 특별 허락을 청하러 갔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데레사는 두 엄마를 잃은 슬픔과 첫 영성체가 보류되는 아픔 등 정신적 충격으로 신경 계통의 병에 걸리게 되었다. 다음해 5월 8일 그녀는 그토록 고대해 오던 첫 영성체를 하였다. 그날의 추억을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1883년 5월 13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기도하던 중에 성모님상에서 온유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면서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되었다.

 

1886년 10월 7일에 레오니아 언니가 글라라 관상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며칠 후인 10월 15일 셋째 엄마 역할을 했던 마리아 언니가 가르멜에 입회했다. 아버지 곁에는 셀리나 언니와 자신만 남게되면서 데레사에게 집안 분위기는 삭막한 지경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인간적 실망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발전시켰다. 『언니의 결심을 알게되자 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가지지 않겠노라고 작정했습니다』.『제 마음을 언니에게 말할 수 없게 되어 저는 하늘 쪽으로 몸을 돌이켰습니다』.

 

데레사는 인간적인 낙심, 슬픔을 은총 안에서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갔지만 아직 세심증과 극도의 민감성으로 자기 폐쇄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886년 성탄 밤에 그녀는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받으며 치유의 은총을 체험했다. 9년 후에 데레사는 그때 자신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이 이루신 기적이었다고 확신했다. 『10년 동안 제 노력으로 안 되던 것을 예수님이 한 순간에 이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9년간 고통을 겪으며 잃었던 힘을 마침내 되찾게 되었고 그후로는 그 힘을 다시 잃지 않았다.

 

데레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 올랐고 그 열망은 결국 가르멜 수녀원 입회를 결심하게 하였다. 열 네살 된 데레사의 입회 지원은 연령 미달의 이유로 가르멜 지도신부로부터 허락되지 않았고 교구장 위그랭 주교를 방문하여 관면을 요청했으나 역시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교황께 호소하기로 마음먹고 로마에 가 1887년 11월 20일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였다. 교황께 소원을 간곡히 말씀드렸으나 쇄도하는 다른 알현자들의 순서에 밀려 그녀가 원하는 답을 받지 못했다. 결국 데레사는 이듬해 4월 9일 15세의 나이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9개월간 지원자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기쁘게 살면서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성격, 자라고 교육받은 상황 및 일상생활 습관의 차이로 인해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889년 1월 10일 그녀는 「예수 아기와 성면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선택하고 착의식을 햇다. 그리고 다음해 9월 24일에 서원을 했다. 그녀의 서원 예정인은 1월 11일이었으나 장상들에 의해 연기되면서 8개월 간의 시련을 겪은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데레사는 1893년 2월 20일 수련장 보조자로 발령 받았다. 둘째 언니 예수의 아녜스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데레사로 하여금 수련장을 보조하도록 했던 것이다. 데레사는 기도 중에 예수님께 직접 배운 「작은 길」로 수련자들을 인도하고자 했다.

 

1894년 7월 29일 데레사의 아버지 루이 마르땡이 세상을 떠났다. 그 해 9월 14일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던 언니 세레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언니가 입회하면서 다섯 자매 모두 수도자들이 된 것이다. 세레나는 동생 데레사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10월말 데레사는 언니인 아녜스 원장 수녀의 명으로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 그녀는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고 더욱 강렬히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절감하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싶어했다.

 

그리고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에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에 자신을 봉헌했다.

 

 

 

 

 

 

데레사는 1896년 4월 3일 성 금요일 새벽 첫 각혈을 했고 그 후 건강이 점점 안 좋아졌으며 이듬해 4월 6일 원장 수녀는 데레사의 마지막 말을 적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8일 데레사는 자신의 방에서 병실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거기서 스녀는 자신의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을 마치고 투병 중에 「작은 길」을 모든 영혼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느꼈다. 1897년 8월 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9월 30일 저녁 7시20분 데레사는 탈혼 중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며 미소를 지은 채 숨을 거두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성녀 데레사의 묘

 

데레사는 1923년 4월 29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17일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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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데레사 (2) 영성

 

 

 

 

 

데레사의 영성의 핵심은 영적 어린이의 「작은 길」에 있다. 그 길을 발견한 성녀는 일생동안 그 길을 걷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알려 주고자 했으며 풍성한 결실을 이루었다. 그녀에게 이 작은 길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인 성성(완덕")이며 그 성성에 나아가는 방법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기본적 자세는 겸손, 단순성 그리고 신뢰심이다.

 

 

작은 길의 발견

 

 

데레사는 어느 날 구약 성서 원문 일부를 기록한 노트를 언니 셀리나 수녀한테 빌려 읽다가 그녀의 「작은 길」을 발견하게 되는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그 실마리는 잠언 9장 4절이었다. 『누가 만일 아주 작은 자이거든 나에게로 오라』(공동 번역 성서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어려서부터 언제나 성녀가 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잇었으나 초라한 자신의 무력감을 체험하면서 갈등을 겪어오던 데레사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작은」이란 표현이 크게 와서 닿았고 온통 그녀를 설레게 했다. 여기서 데레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불림 받은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께 가야하고 그분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다고 느꼈다.

 

그 후 데레사의 눈의 뜨인 이사야의 다음 말씀은 그녀에게 새로운 빛을 가져다주면서 성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66, 12~13).

 

그녀는 「예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표현했다. 『저를 하늘에까지 들어 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데레사가 깨달은 주요한 진리는 성화에 있어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영적 어린이의 작은 길이 나타난다. 작은 채로 남아있으면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아무 걱정도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맟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성의 다양성과 작은 길

 

 

데레사는 로마서 9장 15~16절 말씀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제기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부 특정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어찌하여 사도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노 같은 분들은 극적인 내적 변화를 이루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 위대한 영혼으로 밝게 빛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특별한 은총의 체험이 주어지지 않아 작은 영혼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일까?』

 

데레사는 이에 대해 오랜 묵상과 숙고 끝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만일 작은 꽃들이 모두가 자미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연은 그 봄 단장을 잃어버릴 것이고 들판은 다시는 작은 꽃들로 단장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정원인 영혼의 세계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백합화나 장미꽃에 견줄 수 있는 큰 성인들을 창조하셨고 한편 작은 성인들도 창조하셨습니다』

 

데레사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향기 좋은 장미나 순결한 백합과 경쟁될 수 없는 들판의 이름모를 꽃들 속에 있다는 느낌이 둘어도 마음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이 그렇게 마련하셨으며 그분은 어떠한 모습이든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각자의 영혼에 그 나름대로 성성을 주시므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각 영혼들 사이의 차이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길의 기본 자세

 

 

데레사의 작은 길의 기초는 무엇보다 「어린이 정신」으로 표현되는 겸손이다. 그녀는 아무런 꾸밈이나 자만심,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소망도 없었으며 자신이 어떤 가치있는 존재로 보이려는 사심도 없었다. 데레사는 겸손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제게 두신 최대의 은혜는 제가 작은 자이며 모든 선에 대해 무력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고 마땅히 제 안에 그분께서 머무르시도록 언제나 아주 작고 참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어요』

 

데레사의 영적 어린이의 길은 단순성과 긴밀히 연관된다.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며 단순하게 행동하듯이 데레사도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단순성은 조금도 기교를 부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즉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의 모습니다.

 

데레사의 삶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충만해 있었다.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심을 믿었을 뿐 아니라 체험으로 깊이 깨달았다. 그녀에게 성성이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함으로써 얻는 은총이다. 그녀에게 신뢰심은 자신의 약함을 절실히 느낄수록 오히려 더 굳어졌다. 자신의 허물이나 불충실을 볼때 그것이 신뢰의 동기가 되었으며 가장 당황하게 하는 신앙의 시련, 마음의 메마름, 권태, 유혹 등 모두가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작은 길의 핵심은 ‘사랑’

 

 

데레사는 자신의 허원식 날을 기해 특별 기도문을 지어 품에 간직했었다. 그 일부 내용은 이러하다.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모든 것이 되어 주소서. 세상의 물건들이 제 마음을 조금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아무 것도 제 평화를 어지럽지 못하게 해 주소서. 제가 아니고 오직 저의 예수님, 당신인 사랑만을 구하나이다. 예수님, 저로 하여금 당신을 위한 순교자로, 마음이나 육신의 고통, 그보다도 차라리 두 가지 순교를 합쳐 당하여 죽게 하소서』

 

가르멜 수도원 안에서 데레사는 생활 전체를 사랑으로 단순화시켰다. 사랑은 그녀의 생애의 목적이었으며 모든 행위의 동기였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완덕 혹은 성성의 절정이었다. 그녀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저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사촌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완덕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고요? 저는 한 가지 방법밖에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뿐이지요』. 데레사는 하느님안에서 이웃을 사랑했고 또한 이웃을 통해 하느님께 사랑을 드렸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서 이웃에 대한 애덕의 의무는 전모를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일치하면 할수록 자매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작은 길의 핵심과 방법은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행한 지극히 미소하고 가장 감추어진 행동은 종종 위대한 업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데레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망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원의와 함께 삶에서 오는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 견대며 희생과 극기를 기꺼이 할 수 있게 하였다. 데레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사랑 담긴 조그마한 희생의 꽃다발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녀는 희생의 기회를 일상의 사소한 일 안에서 순간마다 찾았다. 『저는 아무리 작은 희생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극기는 어떤 활동에 대한 충동의 억제, 감상적 열심이라든지 지나치게 강한 소망, 호기심에 사로잡힌 욕구, 반감, 자만심 등 자기중심성에허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데레사는 계속적인 자아포기적 극기와 작은 희생 중에 언제나 미소를 띠고 기쁘고 명랑하게 생활하였다. 자신을 찾지 않을 때부터 제가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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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데레사 (3) 사도적 영성

 

 

 

『나는 지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나의 천국을 지내고 싶습니다』

 

이것은 데레사의 마지막 말씀 중의 한 부분으로서 그녀의 비문에 새겨진 문구이다.

 

데레사는 일생동안 기도와 희생을 통해 자신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도직에 기여했다. 한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세상의 구원에 유익한 존재가 될 것임을 예견하며 확신하였다. 데레사의 소망은 영혼 구원 협력을 위해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을 하느님 곁에서 영원토록 지속코자 한것이었다.

 

 

관상 수도자로서의 사도직 수행 비결 - 사랑

 

 

데레사는 사제, 사도, 순교자처럼 활동적 사도직을 수행하고 싶은 소망을 강렬히 느꼈다. 그녀의 사도적 소명은 관상 수도 생활 속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영웅적으로 모든 일을 하고싶은 열의가 그녀를 온통 사로잡았던 것이다. 데레사는 바오로 서간(1고린 12장)을 통해 교회안에서 각기 다른 성소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자신의 그러한 원의를 들어주실 것으로 확신했다.

 

어느날 데레사는 고린토 1서 13장을 읽어나가다가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은총도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데레사는 이렇게 추론하며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장이 몸의 다양한 각 부분에 피를 공급하는 것 같이 사랑만이 교회의 서로 다른 지체들을 움직이게 한다. 실로 사랑은 시공 속에 있는 온갖 소망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데레사 자신이 교회의 심장 안에 머물면서 유일한 소임, 즉 사랑하는 것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신의 소망대로 모든 소명에 응답하고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경우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사랑의 모든 때와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마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인 교회의 심장 안에서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후 데레사는 이미 알고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다음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가장 작은 행위가 다른 업적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교회에 유익하다』

(영혼의 노래 29,2 ).

 

 

사제 성화 위한 기도 · 희생 봉헌

 

 

데레사는 사제들의 성화와 그들을 통한 죄인들이 회개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싶은 열망이 그녀의 성소와 생활의 원동력이었음을 표현했다. 실로 데레사는 자신의 생애가 주님의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봉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영혼들을 구하고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목적으로 가르멜에 왔습니다』『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도매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거룩하게 됨으로써 손발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요』

 

 

데레사는 사제들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받은 사제직 때문이었다. 그러한 마음 그녀의 편지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피우는 신부님을 제가 도울 수 있도록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제 마음에 타오르게 예수님께 청해 주세요』(1896.6.23. 외방 선교회 아돌프 르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저는 신학생님이 좋은 선교사가 되실 뿐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성인이 되시도록 예수님께 기도 드립니다』(1896.10.21. 벨리에르 신학생에게 보낸 편지. 『우리 영혼은 그분 안에 하나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897.2.24. 벨리에르 신학생에게 보낸 편지).

 

 

 

죄인들 회개 위한 봉헌

 

 

데레사는 또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의 기도와 희생의 삶을 봉헌하고자 하였다.

 

데레사의 생애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데레사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와 죄인들 사이에 아무런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실로 데레사는 의당 죄인들에게 내려져야 할 징벌을 대신 받으려고 하느님의 정의 앞에 희생물로 자신들을 바치겠다는 식의 일반적 자세에 공감하지 않았다.

 

죄인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그녀의 언니들이나 사제들을 위해 드리던 기도와 매우 유사했다. 데레사는 신비체 안에서 죄인들과 오직 하나를 이룰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시을 위해 소원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그분의 사랑의 물결을 그들 위에 넘치게 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1887년 살인자 프랑지니의 사건은 영혼의 구원에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던 데레사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중한 죄를 범한 그 사람의 사건을 알고서 그의 영혼의 구원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연일 신문은 그를 경멸적 표현으로 비판했고 단죄했다. 데레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선행을 바쳤으며 그를 위한 지향으로 여러차례 미사를 봉헌했고 언니와 함께 탄원기도를 바쳤다. 『주님, 당신이 불행한 프랑지니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으오니 만일 그가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또 아무런 통회이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심치 않을 만큼 저는 예수님의 무한한 인자를 믿나이다. 그러나 저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가 통회했다는 표 하나만 보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사형 집행일에 단두대에 끌려가며 여러 차례 회개 권면을 거부했던 프랑지니가 마지막 순간에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청하여 세 차례나 입을 맞추고 지상의 삶의 막을 내렸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데레사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심에 감사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을 주님이 주신 표지라고 해석했다.

 

그후 데레사는 일생동안 죄인들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와 희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무한한 공로에 합하여 그들을 위해 봉헌했다. 데레사는 어느 날 언니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셀리나 언니, 영혼들을 잊지 맙시다. 그 대신 그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잊읍시다』

 

데레사는 임종을 앞두고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 또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표지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나라에서 지속될 구원 사도직 확신

 

 

데레사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사제들 곁에서 특별한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을 소망했고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실 것으로 확신했다. 그녀는 천국에서 더 많은 영혼구원에 협력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제게 지상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마음을 주셨으니 반드시 이를 실현해 주실 것입니다』『천국에 들어간 후에 저는 바빠질 것입니다. 그때 제 천직이 시작될 테니까요』『하느님께서 제 소망을 들어주신다면 저의 천국은 세상 마칠 때까지 지상의 사람들을 돕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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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데레사 (4)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데레사는 뒷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정립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 성성의 본질, 유일성 및 다양성 그리고 성화에 있어 하느님의 주도권 등에 관한 정통한 교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성성에의 부르심이 일부인에게 해당되는 특전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관련되는 것임을 천명했으며, 성성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그리스도인 각자가 받는 고유한 선물과 직무를 따라 산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친다(교회 헌장 39, 40, 41항 참조).

 

이러한 차이는 교회를 더욱 활기 띠고 더욱 아름답게 그리고 풍요롭게 한다. 데레사는 성서말씀 묵상을 통해 「작은 길」을 발견하는 여정에서 그러한 성성에 관한 진리를 이미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또한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반의 요지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사랑이 성성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가장 유효한 척도임을 선언한다(교회 헌장 42항 참조). 데레사는 실로 사랑이 성성 및 완덕의 진수이며 방법임을 분명히 깨달았고 삶으로 증거했다.

 

 

2) 데레사는 교회의 선교 사명수행에 활동적 측면뿐 아니라 기도의 지원이 필수적인 것임을 재확인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그분의 사명 수행을 위해 활동과 기도를 조화있게 통합시키셨다. 그분은 활동하시기 전 후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셨고 그 뜻에 일치하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활동하셨다. 교회의 선교의 비결은 바로 그분의 모범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분리될 수 없는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이 복음선포 활동이고 다른 한 측면이 기도와 희생의 지원이다. 실로 선교는 활동적 측면으로서 사목 현자이나 선교지에서 직접 봉사하는 복음 선포, 교리 강좌, 사회사업, 애덕 실천 등 뿐 아니라, 활동 봉사자 및 보조자들의 기도와 희생을 요구한다. 이러한 기도와 희생은 선교의 결실을 위해 간과할 수 없는 적극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데레사는 선교의 둘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녀는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늘 선교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강력한 기도의 지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3) 데레사는 성인의 길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에 의해 쇄신 정립된 가르멜 수도회의 영성이 제시하는 성성은 범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 정상과 같아 요원하게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에 비해 리지외의 데레사는 드높은 영성이란 극히 단순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삶을 통해 보여 주었다. 「작은길」을 통해 신비주의의 일상성을 실증해 준 것이다.

 

예를 들면 데레사는 묵상 시간에 곁에서 작은 소리를 내는 자매 때문에 무척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천상 음악으로 여겨들어 기쁘게 참았고 공동 빨래터에서 부주의한 자매가 튀기는 더러운 물로 얼굴을 흠뻑 적시면서도 그것을 보배로운 비처럼 바꾸어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작은 일상 사건을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큰 신비의 현실로 바꾸어 갈 정도로 불태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온 것이었다. 데레사의 생애는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에 견주어지곤 한다. 비단이 곱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을 짠 명주실이 가늘고 섬세한 데 있는 것처럼 그녀의 생애는 일상에서 조그마한 일 하나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정성과 사랑 그리고 기쁨으로 실행함으로써 빛나는 성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녀는 평범 속에 비범이 있고 하찮음 속에 위대함이 존재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실증하였다.

 

 

4) 데레사의 생애는 짧고 감추어진 것이었지만 사후에 자서전을 통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데레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98년 9월 30일 언니인 아녜스 수녀는 데레사의 자서전을 출판해 프랑스의 전 가르멜 수도원과 교회의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곧 많은 주교들과 각지 수도원에서 리지외 수도원으로 감탄의 편지들이 날아왔다.

 

1899년 5월에 그 책이 재판되었고 다음 해에 6천 여권이 판매되었다. 곧 이어 영어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15년에는 데레사의 자서전 21만1515부와 생략된 전기 71만부 이상이 그리고 「장미꽃의 비」1만부 가량이 읽혔다. 한국에서는 1954년에 「가르멜의 소화」(언니인 아녜스 원장 수녀에 의해서 다소 수정된 것)가 번역되어 몇 년 사이에 절판되었고, 1960년에 성녀가 직접 쓴 자서전을 번역 초판을 낸 후 2000년 5월까지 22판이 인쇄되었다. 자서전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보급되고 많이 읽히면서 회개하는 이들과 병에서 치유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때론 기적과 함께 데레사의 발현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5) 데레사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7년 10월 19일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까지 서언된 「교회박사」는 모두 33명이다. 그들 중 여성은 3명인데 1970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선포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1997년 마지막으로 선포된 리지외의 데레사가 그들인 것이다.

 

리지외의 데레사의 전기와 글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록들에 대한 연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세계적으로 점점 확산되어 갔다. 1898년에서 1947년까지만 해도 데레사에 관해 발행된 책은 무려 865종이나 되었다. 시복식 준비 과정에서부터 많은 신학자들은 데레사가 쓴 글들을 연구했다. 그들 중 콤브 신부는 이렇게 표현했다. 『참으로 성녀 데레사는 현대에 성령에 의한 가장 커다란 혁명을 일으킨 분이다. 성녀는 고요하고 감추어진 혁명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데레사를 시복, 시성한 교황 비오 11세는 데레사를 20세기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겼으며 그 성녀를 자신의 「교황재위 기간의 별」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현재의 신학자 이브 꽁가르는 성녀 데레사를 「20세기초에 하느님 손에서 원자력으로 점화된 하나의 등대」라고 표현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우들은 데레사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예언적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말씀, 성서를 중시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향주삼덕을 우선적으로 중히 여기는 것,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 복음 선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 타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에 대한 형제적 이해와 배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역동적 사고방식,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학 등이다.

 

 

6) 데레사는 모든 이의 사랑스런 자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녀의 사상은 언제나 모든 이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데레사의 사상은 많은 철학자들과 문학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아픈 이들을 향한 힘찬 희망의 호소가 되었다. 그렇게 작은 이들도 복음적 성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정서적 불안, 신경증, 폐결핵 등 많은 병을 앓으면서도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배려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데레사는 그녀의 생애를 통해 증명해 준 것이다.

 

데레사는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은총으로 받은 대담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포를 몰아내 준다. 일상생활 그 자체가 바로 누구나 다 걸을 수 있는 성성에로의 확실한 길이 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데레사가 심한 고통을 겪으며 세상을 떠난 병실에서 기도한 후 여러 관상 수도자들에게 말했다. 『성녀 데레사는 인생의 의의를 찾고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느님 안에 숨겨진 생활의 깊이와 빛남이 소중하다는 과제를 던져주고 계십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25일]

 



영(0)이 되기 - 아기 예수의 데레사에게서 배우기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천주교 전주교구장)

 

 

 

 

♥  삶 자체가 바로 기적

 

 

[1] ‘교회학자’ 말만 들어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데다 부피까지 커서 감히 펼쳐 볼 용기가 나지 않는 책을 여러 권 쓴 근엄한 얼굴의 장년 남자를 연상하게 된다. 당연히 교회 2천 년 역사를 통틀어 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분은 33명밖에 되지 않는데, 가장 최근에 거기 합류한 이는 여러 면에서 선배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1997년 요한 바오로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된 리지외의 데레사(1873-1897)는 24세에 삶을 마친 분으로 우선 가장 나이가 어렸고, 나이가 차지 않아 교황님의 특별한 윤허까지 받아서 일찍 들어간 수도생활이었지만 수도원 안에서 산 세월은 그래봐야 고작 9년이었다. 거기에다 1970년에 나란히 교회학자로 선언된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와 함께 남자, 그것도 사실상 사제, 주교, 교황에게만 거의 유보되었던 오랜 전통을 깨고 여성으로서 교회학자의 동아리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겉에 드러나는 면면들보다, 리지외의 데레사를 선배들에 비해 더욱 크게 구별시켜 주는 것은 ‘학자’라는 말이 풍기는 의미가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데레사는 보통 의미에서 가장 학자답지 않은 인물이었다. 15세에 봉쇄 수도원에 들어갔으니 정식 공부는 그 이전으로 끝났고, 당시의 수도원 분위기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공부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눈은 어떤 학자 못지 않게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그 온 삶은 조금의 낭비나 헷갈림도 없이 과녁을 향해 올곧게 날아간 화살처럼 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데레사와 관련해서는 어떤 기적 이야기도 없다. 그 삶 자체가 바로 기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기적이 필요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자’들이 써놓은 박학하고 고답적인 책이 이 작은 영혼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죽음을 앞두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파리 외방선교회 룰랑 신부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제가 어떤 영성 서적을 읽을 때, 저는 가끔 완덕이 수많은 함정과 착각의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 책을 읽다 보면, 저의 모자라고 작은 정신은 금방 지쳐 떨어지게 되고, 저는 제 머리를 아프게 하고 마음을 삭막하게 하는 그 어려운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절대 ‘앞’에 있지 말고 ‘뒤’에 있어야

 

 

[2] 그런 데레사가 어떻게 해서 어울리지 않게 ‘학자’가 되었는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기에 그런 경지에 올랐던가? 또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어떤 진리를 확실히 가르쳐줄 수 있기에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는가?

 

룰랑 신부는 데레사에게 자신이 만일 선교지에서 강도들의 칼에 맞아 죽고 곧바로 천당 가기에는 자격이 안 될 경우를 생각해서 기도로써 자신을 연옥에서 좀 빼내달라는 요지의 편지를 써 보낸 일이 있었다. 앞에 인용한 글은 그 편지에 대한 데레사의 답장 중 한 귀절인데, 이어지는 대목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는 성서를 집어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환해집니다. 말씀 한 마디가 내 영혼 속에 무한의 지평선을 펼쳐 보이고, 완덕은 아주 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제 생각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어린 아기처럼 하느님의 가슴에 푹 안기기만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 곧 ‘허무’임을 인정하고 어린 아기처럼 하느님의 가슴에 푹 안기기. 이것이 작은 데레사의 깜찍하고도 심오한 전략이자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데레사는 결코 작은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꿰뚫어 본 위대하고 큰 정신이며 길잡이로서의 면모가 드러났고, 그 길을 따라가면 누구나 하느님께 이를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교회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데레사는 같은 편지에서 이 ‘허무’의 역할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는 해설까지 덧붙인다. 의사로부터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데레사는 룰랑 신부에게 이렇게 쓴다. “삶은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 조금 있으면 제게 펼쳐질 복된 영원의 세계를 기다리는 동안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일해요. 그런데 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저 혼자로서는 철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신부님 곁에 서 있으면 저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큰 위안을 받습니다. 영(0)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 가치도 없지요. 하지만 어떤 수 곁에 있으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요. ‘방향’을 잘 잡기만 하면 말씀이지요. 절대 ‘앞’에 있지 말고 ‘뒤’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앞에 있으면 0.1; 0.01; 0.001 하는 식으로 1을 엄청난 속도로 줄여가고, 뒤에 있으면, 10; 100; 1,000 하는 식으로 1을 기하급수적 속도로 키워가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니까 : 역자 덧붙임)! 예수님께서 저를 세워주신 곳이 바로 그 자리이고, 기도와 희생을 통해 멀리서 신부님을 따르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죽기 4개월 20일 전에 쓴 이 편지는 룰랑 신부에게 사실상 데레사의 유언이었는데, 그 선교 사제에게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 모두에게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0의 영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데레사의 깨달음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뚫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선언한 세례자 요한이 그것을 깨달았으며, 자신 안에 지진보다 더 큰 요동을 느끼며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는 사실을 체험한 바오로 사도가 깨달은 것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위대한 사도는 그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이 오히려 그 올바른 관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법을 추구하였지만 끝내 그 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로마 9,30-32).

 

 

 

♥  곧고, 짧고, 작은 새로운 길

 

 

[3] 데레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도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원장 수녀님, 아시다시피 저는 성녀가 되겠다는 열망을 늘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인들 앞에 서면 저는 그분들과 저 사이에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산과 오가는 사람들의 발 아래 짓밟히는 모래알 하나만큼이나 큰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기는커녕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실현 불가능한 원의를 내 안에 불어넣으셨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성덕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를 크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온갖 결점을 그대로 다 안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곧고, 짧고, 작은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싶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발명품들이 계속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층계를 오를 때에도 모든 계단을 하나하나 다 힘겹게 올라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부잣집에는 승강기가 있어서 계단 대신 사용된다. 나도 예수님께 올라갈 수 있는 승강기를 하나 찾아내야겠다. 완덕이라는 계단을 내 힘으로 올라가기에는 내가 너무 작고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서에서 승강기의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영원한 지혜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읽게 되었다. ‘누가 작다면 내게로 오너라.’

 

저는 찾으려 했던 것을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작은 영혼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저는 계속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아 낸 것이 이것입니다.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야 66장12-13).

 

 

오, 이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이 내 영혼을 기쁨에 넘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를 하늘까지 올려다 줄 승강기는 예수님, 당신의 품입니다. 거기 올라가기 위해서 제가 커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저는 작은 그대로 이렇게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작아질 일이었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의 기대보다 훨씬 넘치게 저의 원을 채워주셨으니, 저는 당신의 한없는 자비를 노래하겠습니다.”

 

 


♥  중요한 성서대목 줄줄 외워

 

 

 

[4]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길은 무엇이었던가?

 

앞에서도 이미 나타나듯이 성서, 하느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고쉐 주교의 말마따나, 데레사는 “하느님 말씀을 읽고, 쓰고, 비교하고, 반복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살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서 말씀을 외웠다. 말하자면 성서를 먹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 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키엘 3,3) 한 말씀이 데레사에게서도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데레사가 중요한 성서 대목들을 다 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원장 수녀가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단히 심하게 앓고 있는 데레사를 문병갔을 때, 환자는 그 주일의 복음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의 장면을 원장수녀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 때 그 방에는 미사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읽어주지 못하고 다만 그 내용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라고만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데레사 수녀는 마태오 복음 6장 24절부터 33절까지를 모두 외우는 것이었다.” 또 다른 동료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데레사가 대화할 때마다 입에서는 그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성서 말씀이 샘솟듯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많은 성서 대목들을 암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서 말씀은 데레사의 영혼 속에 늘 살아 있었고, 성령의 비추심 속에서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나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연구도 별로 없었고, 성서 공부를 도와줄 만한 책이나 다른 도구도 없었던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성서에 대한 데레사의 이해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폰 발따사르는 이렇게 말한다. “데레사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젊은 나이에 신약뿐 아니라 구약 성서에 관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데레사는 복음성서를 작은 글씨로 써서 손 안에 들어갈 크기로 만들어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래서 상징적 의미로나 물리적으로나 주님의 말씀이 늘 그 가슴에 있었으며, 그것을 외움으로써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대로 그분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쌍백합 제11호, 2005년 겨울호]

 


 

교회박사의 의미와 소화데레사 교회박사 선포 의의

단순함ㆍ신뢰의 삶 통해 많은 공감 불러

 

 

10월 19일 전교주일을 기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한다. 소화데레사 성녀의 교회박사 칭호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등 두 분의 교회박사에 이어 여성으로는 세 번째 갖는 칭호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은 자 하찮은 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소화데레사 성녀에게 부여되는 박사 칭호. 왜 교회는 데레사 성녀에게 교회박사, 학자의 칭호를 부여하는지 그리고 교회박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외신을 통해 알아본다. 내용은 알기 쉽게 문답식으로 풀었다.

 

 

 

 

 

 

- 교회학자란 어떤 것인가? 연구하는 사람이나 논문 등으로 박사 자격을 얻듯이 무슨 특별한 자격을 얻는 것인가?

 

▲ 시성된 성인 가운데서 그가 남긴 글이나 저서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성인에게 교황이나 공의회가 교회학자로 공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교회학자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교회학자는 거의 남성이었는데 요즘에 와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성녀 가타리나 두 분의 여성이 교회학자로 선정됐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여성으로는 세 번째가 된다. 교회학자가 돼서 얻게 되는 자격은 미사나 성무일도 등 전례에서 교회학자로 기림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교회학자 선언에서 겨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가르침, 메시지를 보편적 권위로써 인정했다는 무게를 주는 것이다.

 

 

-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경우 「자서전」을 읽어도 특별히 어려운데는 없다. 가르멜회에 열여섯 살에 들어갔고 별로 공부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학자라는 칭호가 데레사 성녀의 경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학자로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

 

 

▲ 그것은 「학자」라는 칭호에 대한 이미지의 문제라고 본다. 옛사람들은 영리한 어린이들의 장래를 「학자」나 「장관」으로 기대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학자」라는 말에는 우수한 두뇌나 고학력 입신출세에 성공한 자라는 인상이 짙다. 이러한 이미지로 본다면 데레사에게 교회학자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성녀는 자신을 「작은 자」 「하찮은 자」라고 온 생애 동안 계속 말해왔다.

 

『나는 들녘의 아침이슬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사람들에게도 보여지지 않고 곧장 사라지고 맙니다. 이슬을 보는 이는 하느님뿐, 하느님께만 보여지는 아침이슬처럼 되고 싶습니다.』고 한 성녀의 말도 있지 않은가. 『끝까지 작은 자이고 싶습니다.』 이것이 성녀 데레사의 영성의 특징인데 모든 이에게 우러러 보이는 교회학자라는 이는 성녀 자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황이 데레사를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것은 성녀 데레사의 메시지와 영성에 뛰어난 빛이 있음을 모든 이에게 보증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 본다. 겸손한 데레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칭송받는다 하더라도 무력한 어린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성녀 데레사의 메시지와 영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빛과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 성녀 데레사의 메시지는 학문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학력이 없다. 훌륭한 학문적 논문도 남기지 않았다. 가르멜 수녀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 앞에서 이야기 한 적도 물론 없었다. 그가 남긴 것은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쓴 공책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것

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성녀 데레사가 사용했던 공책의 매력은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나약함, 무력함을 신앙의 빛으로 하나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데레사는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를 대신해 주던 둘째 언니에 이어 맏언니마저 가르멜에 들어갔다. 계속되는 이별을 체험해 마음의 동요를 느낀 데레사는 균형을 잃고 무너져가고 있었다. 데레사는 이별을 자신을 부축해주는 사랑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만 받아 들였다. 이런 유년기의 체험에서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했고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나약함은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낫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그 사랑을 찾는데 인생의 삶을 집중시켰다.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사랑으로만 평온해지고, 풍요로워지고, 사랑 없이는 빛나지 못하는 인간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데레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찾았고 오로지 그분 안에서 자신을 벌거벗고 위탁하려고 했다. 그리고 사랑 받고 싶으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에만 온 삶을 바친 데레사의 생애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데레사의 과제가 모든 인간에서 공통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데레사 메시지의 보편적 울림이 있다.

 

 

- 21세기를 몇 년 뒤에 맞이하려는 이때 데레사가 교회학자로 선포되는데 시대적 의미가 있는가?

 

 

▲ 시대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데레사의 메시지를 본다면 이미 그가 살아온 시대에서도 데레사의 신앙생활은 매우 특유한 것이었다. 19세기 말의 프랑스 교회에는 아직도 얀세니즘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었다. 얀세니즘이란 당시의 부패된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선 각자가 거룩하게 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엄한 억제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열심한 수녀들은 솔선하여 엄한 고행과 희생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데레사는 작은 존재에게는 고행도 희생도 맞갖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버리는 신뢰야말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확실한 길이라 단언했다. 『이층에 간 어머니를 찾아 우는 애기처럼 행동하면 된다.』고 데레사는 대담하게 잘라 말했다. 어머니를 찾아 우는 애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내려와서 아기를 안고 이층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작은 존재가 드리는 신뢰로 가득찬 필사적인 기도에 달려오시어 천상으로 데려가신다. 자비하심에 대한 신뢰에 철저해야 된다고 하시며 단순한 신뢰를 중심에 둔 데레사의 신앙생활은 그 당시에 행하던 복잡하고 엄한 신앙생활에 얽혀 있던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데레사의 단순한 신뢰의 길은 수험, 진학경쟁으로 그리고 엄한 관리 교육의 무게 속에서, 또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숨넘어가게 되고 질식하게 된 현대인에게 회복의 길을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가톨릭신문, 1997년 10월 12일, 외신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