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11. 24. 00:24

성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Lawrence Huong Van Nguyen)과 베트남의 동료 순교자들(Martyrs of Vietnam) 

 

 

 축      일

 11월 24일 

 신      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베트남(Vietnam)

 활동연도

 1802-1856년 

 같은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흐엉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 베트남 교회의 역사는 오랜 박해의 역사였다.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트남의 중부지역에 선교기반을 마련하면서 베트남의 복음화는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왕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명령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이로 인해 1833년부터 약 50년 동안 30여만 명의 신자들이 모진 박해를 받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했다.

 

베트남 북부 통킹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티우스 후옹 반 응우옌(Laurentius Huong Van Nguyen, 또는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은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방인사제로서 복음을 전하며 베트남 교회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사목하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시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56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1988년 6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안드레아 둥락(Andreas Dung-Lac) 사제와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시성하면서 그들의 축일을 11월 24일에 기념하도록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안남(Annam) 또는 통킹(Tongkin)의 순교자들로도 불리는 117위의 베트남 순교자들은 출신별로 보면 96위의 베트남 순교자, 11위의 에스파냐 도미니코회 선교사, 10위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이뤄져 있다. 신분별로는 8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주교, 50위의 사제(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13위와 베트남 출신 37위), 59위의 베트남 출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에서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신앙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트남의 순교자들 (1)

모진 박해의 희생자들(1745-1862년)

 

번역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베트남 천주교회 역사는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도착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리스도교 정신에 반대하는 왕실 법령이 발효되면서 1615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트남 중부지역에 항구한 선교기반을 마련하면서 서서히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627년 예수회의 알렉산드르 드 로드(Alexander de Rhodes, 1591-1660) 신부가 북부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 약 6,700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1630년 베트남에서 추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로드 신부는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왔지만 1645년 베트남에서 재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가 세워지는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전교회에서 교육받은 사제들이 곧바로 베트남에 도착하면서 베트남의 천주교 신앙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1798년부터 1853년 사이에 베트남에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면서 내전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64명의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8세는 이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1833년 왕실은 모든 천주교인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명령하였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발로 밟고 지나가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약 30만 명의 신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행된 박해로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1847년 프랑스 전함들이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베트남에 정박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사실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비극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862년과 1874년 그리고 1884년 3차례에 걸쳐 베트남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베트남 왕국의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1883년까지 여러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주교와 사제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전부 붙잡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1841년 프랑스 정부가 전함들을 보내 개입하겠다고 위협하여 박해의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1848년 새로운 황제가 선교사들의 목을 베어 오는 사람들에게는 두둑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포하여 2명의 사제 아우구스티노 쇠플러(Augustin Schoffler)와 요한 루이스 보나르(John Louis Bonnard)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55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가혹하게 시작되면서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천에 달하는 베트남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되었고 4명의 주교와 28명의 도미니코 수도회원들이 순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7년부터 1862년 사이에 115명의 베트남 출신 사제들과 100명의 베트남 출신 수녀들 그리고 5천 명가량의 베트남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학교가 파괴되었고 약 4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고 자기 고장에서 추방당하였다. 이 시기의 순교자들 가운데 28위가 1909년 복자품에 올랐다.

 

1862년 프랑스 식민지 군대가 사이공과 여타 지방들을 점령하자 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체결된 조약에 의하여 베트남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오랜 박해도 마침내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안남 또는 통킹(Tongkin)의 순교자들이라고도 불리는 96위의 베트남 순교자들과 11위의 스페인 선교사들 그리고 10위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널리 알려진 분들을 몇 달 동안 소개하려고 한다. [교회와역사, 2010년 8월호]

 

 


베트남의 순교자들 (2)

 


안드레아 둥락 안 짠(Andreas Dung-Lac An Tran, 1785년경-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철저히 신앙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베트남에 활동하던 천주교 선교회에서 선교 사제로 일하던 도중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박해가 베트남 신자들에게 내려졌을 때 체포되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와 관련된 사제들은 박해의 특별한 표적이 되어 다른 신자들보다 더욱 혹심하게 고문당하였다. 그는 후에 성인이 된 베드로 티(Peter Thi)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그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며, 그들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으면서도 고통을 서로 나누며 위로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후에 시성된 테오판네 베나르(Theophane Venard) 신부, 토마스 티엔 짠(Thomas Thien Tran), 임마누엘 풍반 레(Emmanuel Phung Van Le), 예로니모 예르모실라(Hieronymous Hermosila) 주교,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주교, 그리고 그 밖에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839년 12월 21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안드레아 통 킴 응우옌(Andreas Thong Kim Nguyen, 1790년경-1855) 성인은 1790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성장하면서 성실하게 일하여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고 나중에는 인근 마을을 어우르는 큰 지역의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평소 지녀온 독실한 신앙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고향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리고 당시 추방되었거나 체포된 다른 신자들과 함께 미토(Mi-Tho)라는 곳으로 강제 송환되어 가던 도중 기진(氣盡)한데다가 심한 탈수현상을 일으켜 죽었다.

 

안드레아 쫑 반 짬(Andreas Trong Van Tram, 1817-1835)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가정에서 좋은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으며 장래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되자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본당 사목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834년 베트남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군인 계급장을 박탈당하고 후에(Hue)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다음 해 그는 관리들로부터 신앙을 버리도록 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동료들과 순교 대열에 동참하였다. 아들의 순교를 지켜보기 위하여 후에로 왔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참수당할 때 형집행장 안으로 들어가 잘린 목을 자신의 치마폭에 받았다.

 

안토니오 꾸인(남)(Anthonius Quynh (Nam), 1768-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8년에 태어났으며,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는 신자가 되어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838년 유럽 선교사들과 접촉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동료 수감자들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으며 많은 고통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감내하다가 1840년 감옥에서 교살(絞殺)당하였다.

 

안토니오 딕 응우옌(Anthonius Dich Nguyen, ?-1838) 성인은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던 부농(富農)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파리 외방전교회를 적극 도와주었고 교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관대하게 희사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는 관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려는 많은 사제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는데 그중에는 야고보 남(James Nam) 신부도 있었다. 관헌들에게 이러한 활동을 발각당하여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다가 1838년 참수 치명하였다.

 

아우구스티노 후이 베트 판(Augustinus Huy Viet Phan, 1795-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한때 군인으로 근무하였으며 천주교 신자가 되어 동료 군인이던 니콜라오 테(Nicholas The)와 함께 교회의 선교 활동을 도와주었다. 1839년 이 두 사람은 모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형틀에 사지를 묶인 채로 톱질을 당하여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아우구스티노 모이 반 응우옌(Augustinus Moi Van Nguyen, 1806-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날품팔이꾼이었다. 신앙에 대하여 배운 다음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 되어 뛰어난 신앙심과 자비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렬해지고 있을 때 체포되었다. 관리들로부터 신앙을 버리겠다는 표시로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명을 받은 그는 이를 거부하고 나서 교살되었다.

 

오귀스탱 쇠플러(Augustin Schoffler, 1822-1851) 성인은 프랑스 사람으로 1822년 로렌(Lorraine)의 미텔브론(Mittelbronn)에서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고자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선교 훈련을 받은 그는 1848년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한 때였기에 얼마 뒤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51년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베르나르도 두에 반 보(Bernardus Due Van Vo, 1755-1838) 성인은 1755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개종하였다. 그는 신자가 된 후에 사제가 되고자 신학을 공부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선교 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성인은 1838년 8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도미니코(니콜라오) 닷 딘(Dominicus (Nicholas) Dat Dinh, 1803-1839) 성인은 군인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앙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거부하자 군대에서 추방되었고 1839년 교살당하였다.

 

도미니코 에나레스(Dominicus Henares, 1765-1838) 성인은 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베트남에서 대목구장인 이냐시오 델가도(Ignatius Delgado) 주교의 보좌주교로서 그를 도왔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도미니코 주교는 교리교사 성 프란치스코 찌에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참수형을 받았다. 도미니코 성인은 형장에서 하느님을 찬송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훌륭하게 선포하였다.

 

도미니코 짝(도아이)(Dominicus Trach (Doai), 1792-1842) 성인은 1792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신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후에 사제가 된 후에는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1842년 체포되어 베트남 사람이 휘두르는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도미니코 위 반 부이(Dominicus Uy Van Bui, 1813-1839) 성인은 1813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지역 공동체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매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을 때 체포되었다. 관헌들이 그에게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1839년 교살되었으며,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도미니코 한 반 응우옌(Dominicus Hanh Van Nguyen, 1772-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된 그는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수십 년 동안 헌신하였다.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매우 심해질 무렵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도미니코 쑤옌 반 응우옌(Dominicus Xuyen Van Nguyen, 1787-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기 나라 백성의 신앙심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성 토마스 두(Thomas Du)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두 사람 모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엠마누엘 찌에우 반 응우옌(Emmanuel Trieu Van Nguyen, 1756-1798) 성인 175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군인이 되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가 되기 위하여 프랑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사제로 서품된 다음 베트남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체포당하였다. 그는 감옥으로 이송되어 온갖 형벌을 받은 다음 정부 관리들에 의하여 참수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짠 응우옌(Franciscus Xavier Can Nguyen, 1803-1837)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03년 소우 미엥(Sou Mieng)에서 태어나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 지역에서 펼치던 선교 활동을 도와주다가 관헌에 체포되었다.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거부하자 교살당하였다.

 

프란치스코 찌에우 반 도(Franciscus Chieu Van Do, 1796-1838) 성인은 중국 사람으로 1796년에 태어났다.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사제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베트남에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이 모시고 있던 성 도미니코 에나레스 주교와 함께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38년 이 두 사람은 모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길 데 프레데리치(Franciscus Gil de Frederich, 1702-1745) 성인은 스페인 사람으로 1702년 스페인의 토르토사(Tortosa)에서 출생하였다.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선교 사제로 훈련을 받은 뒤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732년 그는 필리핀에서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옮겨 1742(또는 1743) 체포되기 전까지 선교 사제로 온 힘을 다해 활동하였으며 체포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교회와역사, 2010년 10월호]

 

 


베트남의 순교자들 (3)

 


프랑수아 이지도르 가즐랭(Francois Isidore Gagelin, 1799-1833) 성인은 1799년 프랑스의 몽페로(Montperreux)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22년 베트남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베트남 정부가 교회에 대한 박해를 다시 시작하였을 때 그는 봉손(Bong-son)에서 관헌들에게 자신이 사제임을 당당하게 밝히며 자수하였다.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그는 1833년 감옥에서 교살(絞殺)되었다.

 

프랑수아 자카르(Francois Jaccard, 1799-1838) 성인은 1799년 프랑스 사부아(Savoy)의 오니온(Onion)에서 태어났다. 자카르 성인은 청년 시절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사제로 서품되었고 1826년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선교 사제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중 1838년 관헌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도 신앙을 꿋꿋이 증거하다가 1838년 교살(絞殺)되었다.

 

프란치스코 쭝 본 쩐(Franciscus Trung Von Tran, 1825-185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25년 판싸(Phan-xa)에서 태어났다. 어려움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지켜나갔던 그는 군대에서 상등병을 근무하다가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그 부대의 대장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종용하였지만 성인은 이를 거부하였고, 1858년 안호아(An-hoa)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히야친토 카스테네다(Hyacinthus Casteneda, 1743-1773) 성인은 스페인 세타보(Setavo)에서 태어났다.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로 서품된 후 첫 선교임지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선교 사제로 활동하다가 다시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선교 활동을 하던 중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773년 빈첸시오 리엠(Vincentius Liem) 신부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델가도 이 세브리안(Ignatius Delgado y Cebrian, 1761-1838) 성인은 1761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고 늘 기도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장성한 뒤에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그리고 참신앙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 베트남으로 갔다. 그곳에서 성인은 약 50년 동안 선교 사제로서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강론과 유능한 교회행정으로 이름을 날려 베트남 동부지역을 관장하는 대목구 주교가 되어 주교로 서품되었다. 베트남에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정부 관리들은 성인을 체포하여 쇠창살로 만든 우리에 가두어 놓고 뭇사람들의 조롱을 받게 하였다. 성인은 음식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뜨거운 태양 아래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아사(餓死)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는 이냐시오 델가도 성인을 시복하였다.

 

야고보 남(Jacobus Nam, 1781-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사제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가입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베트남에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야고보 남 성인은 1838년 안토니오 딕(Anthonius Dich) 그리고 미카엘 미(Michael My)와 함께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베트남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잔혹한 박해가 일어나 암울했던 시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예로니모 예르모실라(Hieronymus Hermosila, 1780-1861) 성인은 그처럼 어려웠던 한 시기에 베트남 교회를 이끈 중요한 지도자였다. 성인은 스페인의 라 칼파다(La Calfada)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다. 그 후 필리핀 마닐라(Manil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곳에서 1828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후 베트남의 동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도미니코 수도회를 돕기 위하여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성인은 박해가 일어나던 초기에 순교한 이냐시오 델가도 주교의 뒤를 이어 대목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중요한 직위에 있었기에 주교로 서품받자마자 곧 베트남 관헌들이 체포할 제일 우선순위의 인물이 되었다. 관헌들에게 체포된 후 감옥에 갇혀 참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1861년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주교와 함께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요한 닷(Joannes Dat, 1764-179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4년에 태어났다. 장성하여 신학교육을 받고 179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복음을 전하던 중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1798년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장 루이즈 보나르(Joannes Louis Bonnard, 1824-1852) 성인은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전심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 활동을 펴나갔다. 성인은 선교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베트남 관헌들의 눈에 드러나 체포되었음며 185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요한 밥티스트 꼰(Joannes Bapistae Con, 1805-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805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온 마음을 다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준행하였다. 결혼한 후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평신도 교리교사로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베트남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자행되던 무렵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40년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장 샤를 코르네(Jean Charles Cornay, 1809-1837) 성인은 1809년 프랑스의 루동(Loudun)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선교회에서 사제로 서품 받은 다음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성인은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로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끌려나와 모진 매를 맞고 1837년 9월 20일 참수형을 받았다.

 

요한 호안 찐 도안(Joannes Hoan Trinh Doan, 1789-1861)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89년 베트남의 킴롱(Kim-long)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고 깊은 신앙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확신하는 신앙을 자기 민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베트남 임금 뜨 득(Tu-Duc)이 보낸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처형되었다.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요한 타인 반 딘(Joannes Thanh Van Dinh, 1796-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교리교사로 활동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을 도와주었다. 성인은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요셉 까인 루앙 호앙(Joseph Canh Luang Hoang, 1765-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65년에 태어났다. 성인은 의술을 공부하여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뛰어난 신앙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기에 박해시기에 정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1838년 참수형을 받았다.

 

요셉 페르난데즈(Ioseph Fernandez, 1775-1838) 성인은 1775년 스페인에서 출생하여 청년 시절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805년 베트남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신학교육을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인은 사제가 되면서 선교에 전적으로 투신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그 후 도미니코 수도회 베트남 관구장 대리(Provincial vicar)가 되었는데 그러자마자 안타깝게도 관헌들의 주목대상이 되어 바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장렬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요셉 히엔 꽝 도(Ioseph Hien Quang Do, 1775-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였고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로서 선교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러한 행적들이 현저하여 1840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는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체포된 그해에 남딘(Nam-Dinh)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캉 두이 응우옌(Ioseph Khang Duy Nguyen, 1832-1861)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예로니모 예르모실라 주교의 복사로서 주교를 성심성의껏 모셨다. 1861년 주교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성인은 주교를 비밀리에 탈출시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발각되어 자신도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온갖 고문을 다 받은 다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루 반 응우옌(Ioseph Luu Van Nguyen, 1790-1854)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1790년에 태어났다. 요셉 성인은 열심한 신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자기 나라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채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다가 1854년 빈롱(Vinh-long)에서 옥사하였다. [교회와역사, 2010년 11월호]

 

 


베트남의 순교자들 (4)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 1803-1835) 성인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프랑스의 파사방(Passavant)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간 후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선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1835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집게로 살을 찢는 고문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를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셉 비엔 딘 당(Ioseph Vien Dinh Dang, 1786-1838) 성인은 178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후 사제가 되어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에 적극 투신하였다. 성인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응이(킴) (Ioseph Nghi (Kim), 1771-1840) 성인은 베트남 출신의 사제로, 파리 외방 전교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에 적극 투신하였다. 박해가 심해지던 무렵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1840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티 당 레(Ioseph Thi Dang Le, 1825-186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그 당시 베트남 임금이던 뜨 득(Tu-Duc)을 가까이서 모시던 근위병이었다. 독실한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으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하자 끝까지 이를 거부하다가 1860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셉 우옌 딘 응우옌(Ioseph Uyen Dinh Nguyen, 1778-1838) 성인은 1778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베트남교회가 펼치던 선교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활동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성인은 1838년 옥중에서 모진 모욕과 천대를 받고 심한 고문을 다하여 순교하였다.

 

라우렌시오 후옹 반 응우옌(Laurentius Huong Van Nguyen, 1802?-1856) 성인은 1802년경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교회를 위하여 다가오는 온갖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사제로서 수십 년을 성실하게 사목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1856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루카 로안 바 부(Lucas Loan Ba Vu, 1756-1840) 성인은 175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를 깨닫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훌륭한 사제로 표양을 보이면서 살았기에 사람들이 존경하는 원로사제가 되었다. 박해시기에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840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르티노 토(Martinus Tho, 1787-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직업은 세금 징수원이었지만 신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박해시기에 체포된 그는 신앙을 버리도록 관헌들에게 강요당하자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문을 받다가 1840년 원로사제인 마르티노 띤 죽 따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르티노 띤 죽 따(Martinus Thinh Duc Ta, 1760-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사제가 되어 복음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었다. 수십 년 동안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1840년 80세의 나이로 마르티노 토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태오 감 반 레(Matthew Gam Van Le, 1812-1847) 성인은 1812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에 가입하여 자기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파리 외방전교회를 돕는 일에 적극 투신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어선(漁船)을 이용하여 싱가포르에서 베트남으로 선교 사제를 모셔오는 일을 맡아 하였다. 1846년 그런 일을 한 이유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태오 알론소 레지니아나(Matthew Alonso Leziniana, 1702-1745) 성인은 스페인의 나바스 델 레이(Navas Del Rey)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거기서 다시 신학공부를 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필리핀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던 도미니코 수도회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었다. 그 후 그는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바꾸어 베트남의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던 중 체포되어 1745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교회와역사, 2010년 12월호]

 

 


베트남의 순교자들 (5)

 

 


마태오 닥 (프엉) 응우옌(Matthaeus Dac (Phuong) Nguyen, 1801-1861) 성인은 180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오랫동안 교리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다가 박해시기에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1861년 동하이(Dong-Hai)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미카엘 하이딘 호(Michael HyDinh-Ho, 1808-1857) 성인은 1808년경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베트남 귀족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족들과 함께 자라면서 왕립행정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베트남의 비단 제조업을 총괄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부(富)와 막강한 권한을 행사는 위치에 올랐다. 미카엘 하이딘 호 성인은 처음에는 교회가 받던 박해와 별로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깊이 관여하였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일로 체포되어 후에(Hue)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미카엘 미 후이 응우옌(Michael My Huy Nguyen, 1804-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안토니오 딕(Anthonius Dich) 성인의 장인이다. 성인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농부였으며, 신앙심이 돈독하여 교회를 돕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고 박해시기에 사위 안토니오 딕 성인이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자 이를 측면에서 잘 도와주었다. 1838년 야고보 남(Jacobus Nam) 신부를 숨겨주려다가 안토니오 성인은 물론이고 신부와 함께 미카엘 성인도 체포되어 세 분 모두 순교하였다.

 

니콜라오 테(둑 부이)(Nicolaus The(Duc Bui), 1792-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큰 지역의 행정 책임자를 호위하는 군인이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그는 박해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일에 추호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관헌들로부터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말도 못할 고문을 받았다. 그러한 형벌에도 그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자 형리들은 그를 산 채로 톱질하여 몸을 두 동강 내 죽였다.

 

바오로 똥 부옹(Paulus Tong Buong, ?-1833) 성인은 베트남 민 망(Minh Mang) 황제의 근위경비대 고위 장교였다. 성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복음 전하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를 적극 도와주었다. 그의 이런 활동이 적발되면서 1832년 마침내 체포되어 계급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여러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33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한(Paulus Hanh, 1826-1859) 성인은 베트남 순교자 중에서 특별히 유별난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분은 무뢰배였지만 남몰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도와주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이 발각되어 관헌들에게 체포되자 그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형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이를 견뎌내다가 1859년 사이공(Saigon, 현 호치민 시) 인근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코안 칸 팜(Paulus Khoan Khan Pham, 1771-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후원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었다. 사제가 된 후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40년 가까이 사목하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약 2년 동안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이를 끝까지 잘 감내하였다. 1840년 마침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록 반 레(Paulus Loc Van Le, 1831-1859) 성인은 183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군인이었다. 성소를 느낀 성인은 군인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였으며, 사제 서품을 받은 얼마 후에 체포되어 1859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오로 띤 바오 레(Paulus Tinh Bao Le, 1793-1857)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복음화에 동참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사제로서 복음 선포를 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 신앙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간내하다가 1857년 손타이(Sontay)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두옹 반 쪼웅(Petrus Duong Van Troung, 1808-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베드로 쭈앗(Petrus Truat, 1816-1838) 성인과 함께 교리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들은 모두 자기 나라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 사제와 본국 사제들을 돕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박해시기에 이 두 사람 모두 체포되어 1838년 순교하였다.

 

베드로 히에우 반 응우옌(Petrus Hieu Van Nguyen, 1783-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리교사로서 선교사들을 도왔다. 박해시기에 체포되어 관헌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라고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으며, 1840년 동료 신자 두 사람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피에르 프랑수아 네롱(Pierre Francois Neron, 1818-1861) 성인은 1818년 프랑스의 쥐라(Jura)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고 184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된 후 처음 선교사로 파견된 곳을 홍콩이었다. 그리고 홍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트남으로 다시 선교지가 바뀌었다. 성인은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베트남 정부가 재차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을 때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이를 감내하다가 1861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꾸이 꽁 도안(Petrus Quy Cong Doan, 1826-1859) 성인은 베트남의 붕(Bung)에서 태어났으며, 열심한 신자로서 장성하여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노력하다가 박해시기에 체포되었다.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를 끝까지 감내하다가 1859년 차우독(Chaudoc)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티 반 쭈옹(팜)(Petrus Thi Van Truong(Pham), 1763-1839) 성인은 1763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는 사제로서 사목생활에 수십 년을 봉직하다 보니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노사제가 되었다. 76세 되던 해인 1839년 체포되어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뚜안 바 응우옌(Petrus Tuan Ba Nguyen, 1766-1838) 성인은 176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그는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사제로서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 속에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신앙을 고수하자 관리들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동안 형리들에게서 받은 온갖 고문으로 온몸이 많이 상하였기 때문에 1838년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베드로 뚜이 레(Petrus Tuy Le, 1773-1833)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장성하여 신학교에 입학한 뒤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신자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는 사제로서 사목하다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인 1833년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베드로 반 반 도안(Petrus Van Van Doan, 1780?-1857) 성인은 1780년경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한평생을 봉헌하면서 많은 일을 기쁘게 수행하였는데, 그중 성인이 주력한 일은 교리교사였다. 77세가 되던 해인 1857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관헌들로부터 그리스도를 배반하라고 강요당하였지만 이를 끝내 거부하면서 신앙에 충실함을 영웅적으로 드러내었다. 1857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필립보 민 반 판(Philippus Minh Van Phan, 1815-1853) 성인은 1815년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이 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를 프랑스로 유학 보내어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사제가 된 후 베트남으로 돌아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인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1853년 빈홍(Vinh-hong)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교회와역사, 2011년 1월호]

 

 


베트남의 순교자들 (6)

 


시몬 호아 닥 판(Simon Hoa Dac Phan, 1778-1840)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의사이면서 자기가 사는 읍의 읍장으로 일하였다. 1840년 체포되어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신앙에 충실하였다. 의사이고 읍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혹독하게 고문을 받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스테판 에티엔 테오도르 케노(Stephen (Etienne-Theodore) Cuenot, 1802-1861) 성인은 1802년 프랑스의 보리우(Beaulieu)에서 태어났으며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파견되어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던 중 1833년 베트남 선교지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싱가포르(Singapore)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주교가 된 후 현지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861년 체포되어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1월 14일에 옥사하였는데, 원인은 독액(毒液)에 의한 사망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생을 바친 선교사 주교로 추앙받고 있다.

 

스테파노 빈(Stephanus Vinh, 1814-1839) 성인은 신앙심이 깊은 농부로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관헌들이 강요하는 배교를 거부하자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닌타이(Ninh-Tai)에서 교살당하였다.

 

프랑스인 사제이자 베트남의 순교자인 테오판 베나르(Theophane Venard, 1829-1861) 성인은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 분으로, 그리고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 분으로 유명하다. 성인은 프랑스의 픽-생루(Pic-St. Loup)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점차 선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성인은 신학교 과정을 마친 후 1852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해 9월 15일에 홍콩으로 파견되어 15개월 동안 선교에 전념하였고 그 후 당시 통킹(Tonkin)이라 불리던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성인이 베트남으로 파견될 무렵은 베트남 국왕이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하고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베트남에서 수행한 선교는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테오판 베나르 성인은 낮에는 교우들이 사는 촌락에서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걸린 심한 역병(疫病)으로 신체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여 더 이상 베트남 신자들을 위해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약 4년 동안 불굴의 의지로 사목활동에 전념하다가 1860년 11월 30일 체포되었다. 성인은 관리들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난 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즉시 순교하는 은총을 받지 못하였다. 감옥에 갇혀 심한 모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성인은 이에 대하여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주님의 정원에 핀 꽃에 배유하면서 이렇게 썼다. “저는 주님께서 가꾸시는 정원에서 자라나는 봄꽃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 정원에서 이 꽃을 꺾으시면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기병대들이 사용하는 날카롭고 가벼운 칼이 제 목을 치면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겠지요.”

 

1861년 2월 2일 심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베트남 관리들은 그를 교수형에 처한 다음 잘린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놓고 베트남 왕국이 천주교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물처럼 전시하였다. 베트남 신자들은 이분의 유해를 수습하여 프랑스로 보내드렸고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그분의 유해를 파리에 있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성당에 안치하였다. 1909년 5월 2일 복자로 시복되었다.

 

토마스 데 반 응우옌(Thomas De Van Vguyen, 1810-1839) 성인은 베트남의 평신도로서 직업은 재단사(裁斷師)였다. 토마스 성인은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으로 박해시기에 선교 사제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레 눈에 띄어 1839년 체포되었고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충실히 지키다가 교살당하였다.

 

토마스 티엔 짠(Thomas Thien Tran, 혹은 Thomas Dien, 1820-1838)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신학생으로서 사제 수품을 준비하고 있던 중 1838년 체포되었다. 베트남 관리들은 그에게 모진 매질을 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였는데 당시 성인의 나이는 18세였다.

 

토마스 두 비엣 딘(Thomas Du Viet Dinh, 1774-1839) 성인은 베트남 사람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 회원이었다가 그 후 사제로 서품되어 남딩(Nam-Dingh)에서 선교사제로 활동하였다. 1839년 체포되었을 당시 성인의 나이는 65세였다. 성인은 참혹할 정도로 많은 고문을 받은 다음 참수형에 처해져 순교하였다.

 

토마스 토안(Thomas Toan, 1767-1840) 성인은 교리교사로 활동하다가 1840년 체포되었는데 당시 73세의 고령(高齡)이었다. 처음에는 관리들의 무서운 협박이 두려워 배교할 의향을 비쳤지만 곧바로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확고한 신앙심으로 배교를 거부하자 많은 매질을 당하였고 12일 동안 뜨거운 뙤약볕에 그대로 방치되어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노령에다가 심한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순교하였다.

 

발렌티노 베리오초아(Valentinus Berriochoa, 1827-1861) 성인은 베트남의 주교이자 같은 스페인 출신인 예로니모 에르모실라(Hieronymus Hermosila, 1780-1861) 주교의 동료였다. 두 분은 박해시기를 맞이하여 사목활동이 매우 어려웠던 베트남에서 주교로서 활동하였다. 엘로리아(Elloria)에서 태어난 발렌티노 베리오초아 성인은 성장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모든 수도회원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수도생활에 뛰어난 모범을 보였다. 스페인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사제로 서품된 다음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성인은 뛰어난 수도사제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1858년 발렌티노 성인은 주교로 서품되고 도미니코 수도회가 선교하고 있던 베트남 지역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베트남은 당시 천주교를 몹시 박해하던 시기였으므로 사목활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하고 험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61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도미니코 수도회원인 예로니모 에르모실라 주교와 함께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두 분은 같은 날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발렌티노 베리오초아 성인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빈첸시오 리엠(Vincentius Liem, 1732-1773) 성인은 베트남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분으로 베트남에서 순교한 최초의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이다. 성인은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자라 장성한 다음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딘 후 그는 곧바로 히아친토 카스테네다(Hyacinthus Castaneda, 1743-1773) 주교를 보좌하는 신부로 임명되어 온 정성을 다하여 직무에 충실하였다. 1773년 체포되어 카스테네다 주교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빈첸시오 옌 도(Vincentius Yen Do, 1764-1838) 성인은 180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832년 박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비밀리에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1838년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88년 6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베트남에서 순교한 분들을 모두 시성하면서 끔찍한 박해시기에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신앙심으로 베트남의 신자들에게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충직한 신앙심을 상찬(賞讚)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96명의 베트남 순교자들과 11명의 스페인 순교자들 그리고 10명의 프랑스 순교자들을 바티칸에서 시성하면서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눈물로 씨 뿌리던’ 베트남의 순교자들은 베트남 사람들과 그리고 베트남 문화와 참된 의미에서 심오한 대화를 시작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억압 속에서도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고 하느님에 대한 진리와 보편적인 신앙을 선포하면서 전 동양 세계의 종교적 문화에 잘 어울리는 신앙 체계와 신자들이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제안하였습니다.

 

베트남 신자들은 그들의 모국어로 쓰인 첫 번째 교리서를 그 당시에 이미 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서에서 가르치는 것대로 그들은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단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을 흠숭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협적으로 억누르려고 하자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그러나 용기 있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베트남 국민으로서 국가의 권위에 충실하게 따르기를 원하였고 정당하고 올바른 법질서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지키고 싶다는 자신들의 소망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대대로 지켜온 조상에 대한 효경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져온 부활의 신비라는 빛 안에서 다시 보면서 조상에 대한 효경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베트남 교회는 순교자들이 보인 모범과 그들이 목숨을 걸고 증언한 것을 토대로 이 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정당한 제도, 관습에 대하여 교회는 이를 배척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문화적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를 구현해 나감으로써 이 나라의 진정한 발전에 충실하게 기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바로 베트남에 살고 계시는 신자 여러분들을 위한 것으로 이 은총의 샘에서 솟은 물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신앙이 여러분 안에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세대 안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선조들이 물려준 이 신앙이, 진정한 베트남 사람으로 그리고 조국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려는 시민으로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인내의 큰 토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와역사, 2011년 2월호]

 


 

베트남 사회와 종교

“순진 소박 미소…착한 사람들의 나라”



- 마치 60~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보는 듯하는 베트남은 오토바이 천국이다.

 


-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학생들.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아오자이(베트남 전통의상)와 오토바이의 나라 베트남.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참전을 통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나라다. 변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약동하는 나라. 베트남의 사회와 종교, 베트남 교회의 모든 것을 5주에 걸쳐 연재한다.

아찔했다.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사이공 가톨릭 신학교 총장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지나가던 오토바이에 팔을 부딪쳐 넘어진 것. “길을 가득 메운 오토바이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베트남 한인 공동체 신자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해 팔을 앞으로 안으면서 넘어진 탓에 팔꿈치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살점이 패이고 피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모두들 이방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여성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오자이가 어울리는 20대 여성이었다. 여성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더니 약국으로 향했다. 그리곤 소독약과 연고를 사더니 직접 팔꿈치와 무릎 등 상처 입은 곳에 발라주었다. 연락처를 주고 “상처가 심해지면 연락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물론 이 모든 대화에는 손짓 발짓이 크게 도움이 됐다). 여성은 다시 한번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친절했다. 마음이 밝아졌다. 팔꿈치 통증도 어느 정도 가셔지고 있었다. 거리의 한 벤치에 앉았다. 호치민시티(Ho Chi Minh City, 베트남 최대의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은 사이공이다). 도로에는 오토바이의 물결로 가득했다. ‘착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생동하는 베트남 경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우르릉’ 오토바이 소음 속에는 밝고 맑은 얼굴들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만난 한인 교포신자들은 한결같이 “과거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는데 2000년 이후에는 몰라보게 밝아졌다”고 말했다. 김인규(루카.60) 한인 천주교 공동체 회장은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많은 나라”라며 “마치 60~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베트남이 변하고 있다. 베트남은 1986년 12월 개혁 개방 정책을 의미하는 ‘도이모이’가 도입된 이후 2002년 7.04%, 2003년 7.1%, 2004년 7.7%에 이어 지난해에는 8.4%라는 경이적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산업생산율도 2000년부터 15% 이상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으며 2004년 15.6%에 이어 2005년 17.2%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마치 거대한 용이 승천을 앞두고 있는 형상이다. 특히 최근 이뤄진 세계무역기구(WTO) 150번째 회원국 가입은 승천을 앞둔 용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베트남 한인 천주교 공동체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 최저 임금이 약 45달러(한화 약 4만원)에 불과하다. 최근 임금이 급등하는 추세를 보이곤 있지만 아직도 일반적으로 노동자 한 달 임금이 75~80달러에 불과하다. 대학 졸업자의 경우도 한달 임금이 150~180달러 수준이다. 이같은 저렴한 노동력과 낮은 물가라는 매력에 해외투자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활력 가득한 베트남의 거리. 그 거리에는 순진함과 소박함,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베트남의 편안함을 베트남 한인 교포사목 이창신 신부는 이렇게 옮겼다.

“호치민은 오토바이 천국입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어디를 그렇게 달려가는지…. 이제는 그 시끄러운 소리도 소음이 아니라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길에서 늘 만나는 오토바이 부대들 속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를 위해 오토바이를 탄 친구가 한발로 자전거를 밀어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며 가는지…”


민속신앙과 여신숭배

베트남에서는 본질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 구별이 없다. ‘응옥 호앙 트응 테’ 또는 ‘옹쩌이’라고 불리는 지존무상의 최고신 이외의 다른 신은 인간이었다가 수행과 깨달음에 의해 해, 달 별,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 됐다. 신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또한 베트남 민간 신앙에는 조상 숭배적 요소가 강하다. 조상을 모시는 일이야 말로 베트남 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명절 때 마다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함께 나누고 조상을 기억한다. 조상의 기일을 지키고 제사를 잘 드리면 복이 따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상숭배와 더불어 베트남인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보편적 신앙이 바로 ‘터매’(어머니 숭배 종교)다. 베트남에서는 특히 여신숭배 사상이 강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의미하는 ‘매’와 ‘머우’와 관련된 여신을 많이 섬긴다. 매미어(사탕수수의 어머니), 매루어(쌀의 어머니), 매르어(불의 신), 브응머우(왕모), 구억머우(국모)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매년 전국 유명 여신 사당에서는 터매, 즉 여신 숭배와 관련한 축제와 행사가 성대히 개최된다.

이 여신숭배 사상은 불교 천주교 등 타종교를 수용하는 과정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 베트남의 많은 불교사원에는 불상과 함께 다양한 여신을 함께 모시고 있는데, 특히 관음보살은 여성과 어린이를 지키고 재난에서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섬겨지고 있다.

16세기 중엽 베트남에 전파된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 공경이 베트남인들에게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된 것도 바로 이 여신 숭배 사상 때문이었다.
 

베트남

▲ 국명 :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 수도 : 하노이(Hanoi)
▲ 인구 : 8000만명
▲ 면적 : 33만991㎢(한반도의 약 1.5배)
▲ 시차 : 한국보다 2시간 늦음
▲ 언어 : 베트남어(공용어)
▲ 민족 : 베트남인 88%, 중국계 3%, 기타 60여 소수민족
▲ 종교 : 불교 80%, 천주교 9%, 카오다이교, 호아하오교 등 종교자유 보장. 단 선교 자유 없음.
▲ 주요산업 : 쌀, 고무, 시멘트, 화학산업
▲ 행정 : 61개 도시 및 지역으로 구분
▲ 사회 : 강한 남녀평등의식
▲ 통화 : 동(DONG), 1달러 당 약 1만5900동(2006년 말 현재)
▲ 기후 : 북부(하노이) 아열대성 기후, 최저 13.8℃~최고 35℃
              남부(호치민) 열대몬순성기후, 최저 21℃~최고 36℃
 

 


한국 베트남 교역현황

한국 베트남 교역은 1992년 수교 이후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베트남 측에서 볼 때 미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에 이은 5위 교역 상대국이 됐다. 한국의 대 베트남 수출은 2002년 20억 달러대로 진입했으며, 2004년에는 30억 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의 베트남 투자는 2005년 190건에 5억5000만 달러로, 1996년 이후 최대 투자액을 기록했다. 한국이 베트남 연간 해외투자 3위, 누계 기준 4위의 투자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인들이 많이 왕래하다 보니 천주교 한인 공동체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7년 2월 4일, 우광호 기자]


베트남 교회 역사와 현황

신앙 열정 넘치는 ‘아시아 교회 장녀’



- 호치민 소재 노틀담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

 


- 베트남 교회는 지금 한국발 성경공부 열기가 한창이다. 사진은 성경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나뜨랑 교구 대학생들.

 



하나, 둘, 셋, 넷…. 성당이 10~20m 간격을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도로에 인접한, 눈에 보이는 성당만 20개가 넘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집집마다 대형 성모상을 모시고 있었고, 길거리 성물 파는 가게는 성업 중이었다. 가톨릭 본고장이라는 유럽의 어느 마을 모습이 아니다. 베트남 호치민(사이공)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승용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동나이 마을. 주민 수 2만여명에 불과한 이 곳에 성당이 40여개에 이른다. 소성당을 포함할 경우 그 수는 100여개로 늘어난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일이면 이 많은 성당에 자리가 부족해 성당 밖에 서서 미사에 참례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 어느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활기 넘치는 교회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베트남 교회를 ‘아시아 교회의 장녀’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법했다.

동나이 가톨릭 마을은 1954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뉠 당시 북쪽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향했고 동나이에 정착, 마을을 세웠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성전 신축. 출신지역별로 경쟁적으로 성당을 세웠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일했다. 이들의 신앙 뿌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 천주교 전파와 박해

베트남 교회 역사는 한국교회 보다 200년이 앞선다. 베트남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6세기. 프랑스 선교사인 이냐시오 신부가 베트남에 첫발을 디딘 것이 1533년이다.

베트남 교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600년대 중반으로, 베트남 첫 방인 사제 트랑 신부를 비롯해 1668년에만 4명의 베트남 사제가 탄생했다. 이후 17세기 중반, 베트남 교회 신자는 40여 만명에 달했고, 17세기 말에는 그 배인 80여만명에 이르게 된다.

한국에선 박해가 한창이던 1802년에 베트남은 이미 3명의 주교와 55명의 외국인 선교사 사제, 121명의 베트남 방인 사제가 활동하는 대규모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선교사 역할은 한국교회 이상이었다.

현재 베트남인들이 사용하는 베트남 문자를 만든 것이 선교사들이다. 또 다양한 서양문물과 과학사상을 전파, 당시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환희의 신비’도 잠시. ‘영광의 신비’를 위해선, ‘고통의 신비’가 필요했다. 박해가 닥친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조상제사 금지 방침은, 베트남인들을 자극했다. 특히 새로운 서구 사상은 당시 베트남 각 왕조에 대한 전통을 위협하는 요소도 강했다.

그 이유로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00여년에 걸친 대대적인 박해가 이어진다. 학자들은 이 시기에 순교한 베트남 신자가 약 1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이들 순교자 중 117위를 성인품에 올린다.
 


베트남 교회의 정착


박해는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끝난다. 186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식민지 시기는, 베트남 민족으로서는 굴욕적인 시기였지만 베트남 교회 입장에서는 황금기였다.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뉜 후에도 가톨릭은 남 베트남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급속히 성장했으며, 학교와 기관, 국영방송, 복지시설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1960년 11월24일은 베트남 교회의 기념비적인 날이다.

요한 23세 교황은 이날 베트남 교회에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 3개 대교구와 17개 교구(량송, 하이퐁 등)를 설정한다. 이들 교구는 이후 더 분할돼 현재 25개에 이른다.
 

베트남 교회의 한계와 과제

베트남 교회에서 ‘박해의 기억’은 오히려 ‘한계의 근거’가 된다. 베트남 신자들은 외부인들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울타리를 쳤다.

타종교인 및 일반인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신앙인들만의 ‘끼리기리’삶을 유지했다.

심지어 천주교 공동체가 ‘국가속의 작은 국가’라는 비판까지 받을 정도였다. 실제로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뉠 당시, 북 베트남 지역 신자의 50%(70여만명)가 남쪽으로 이주했지만, 같은 시기 남쪽으로 넘어온 비가톨릭 신자는 0.5%에 불과했다. 북 베트남 입장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고 오직 외국 신앙만 따른다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베트남 교회는 개인 신심 위주 신앙이 강하다. 사회주의 정부의 제약도 원인이기는 하지만, 주로 ‘나 홀로 구원’의 신심이 강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문제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세상과 단절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베트남 한인 천주교 공동체 이창신 신부는 베트남 교회의 당면 과제를 “우선 정부의 통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에 대한 제재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는 현재도 가톨릭 교회 성장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바티칸이 주교를 임명해도 그 임명을 거부하고 있으며, 사제 임명과 보직 발령에 대해 여러 규제를 가하고 있다. 정부가 허락하는 사제 수품자의 수가 부족해 베트남 사제 연령층을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은퇴사제 수도 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95년 처음으로 하노이 신학교에서 매년 신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지만 그전 까지는 2년에 한번 정부가 인정한 신학생을 받아들이게 했다. 새 신학교 설립 허가도 지연하다가 최근에야 한 곳에 신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성소자는 많지만, 사제가 부족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교회 성장률도 저조하다. 1960년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7.17%이던 것이 지난해 말 현재 7.5%에 그치고 있다. 인구성장률을 감안하면 오히려 신자수가 줄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2년간 여러 개방 조치들을 추진하고 있어 많은 사제와 신자들은 “앞으로는 달라진 베트남 교회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황

교구 수 : 3개 대교구 포함 총 25개 교구
▲ 신자 수 : 800여만명. 인구의 약 7.5%
▲ 사제 수 : 3000여명
▲ 수도자 및 선교사 수 : 수사 1500여명. 수녀 1만여명. 선교사 4만여명
▲ 신학생 수 : 1500여명
▲ 연간 세례자 및 견진자 수 : 세례자 1O만여명, 견진자 3만여명
▲ 성인 : 117위(주교 8명, 신부 50명, 선교사 16명, 신학생 1명, 평신도 42명)


 

'한국발' 성경공부 열기 - 성경보급 · 지도자 양성 매진

베트남 교회는 지금 ‘한국 발(發)’ 성경 열기가 한창이다.

나뜨랑 교구와 퀴논 교구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최근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다낭 교구에서도 성경 보급 및 성경 지도자 양성에 한창이고, 호치민 대교구도 2005년 11월 성서 백주간 봉사자 300여명을 양성하는 등 성경 공부 분위기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2005년 영문성경 매일 묵상집이 처음 발간된 것을 시작으로 2006년과 2007년에는 나·다해 성경 묵상집이 각각 2000권씩 만들어져 전국의 신학생들과 성직 수도자들에게 전해졌다.

최근에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54개 소수민족의 고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 주교회의는 또 오는 2008년 한 해동안 신학생과 젊은 성직 수도자 청년들에게 1만 여권의 ‘영어 베트남어 혼용 성경 매일 묵상집’을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베트남 성경 열기는 모두 서울대교구 이문주 신부(양재동본당 주임)까 뿌린 10년 노력의 결실이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백마부대 군종신부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 신부는 1997년부터 성경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베트남 성경 열기를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이신부 소개로 전해진 성서 백주간이 호치민대교구를 중심으로 활발히 확산되고 있다.

성서 백주간 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호치민대교구 사목센터 피터 칸 소장 신부는 “베트남은 지금 성당과 복지시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이라며 “단돈 1달러가 없어 성경을 읽지 못하는 베트남 신자들을 한국교회 신자분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베트남 성경 보내기 운동 문의 02-3462-9981 서울 양재동본당 [가톨릭신문, 2007년 2월 11일, 우광호 기자]


베트남 교회의 풍성한 성소

"남여 성소자 넘치지만 다 수용 못해"



- 수련기 수녀의 해맑은 웃음 : 베트남내 여자수도회 회원 수는 1만여명. 남자수도회 회원 수는 약 1500여명에 달한다. 6개 신학교에선 총 1500여명의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 베트남 교회의 순교성인상. 성당마다 성인상을 모시고 깊은 순교신심을 드러내고 있다.

 


- 성 요셉 신학대학의 느위엔 반 흐흥 총장신부(왼쪽)와 두 마우흐 흐흥 영성담당 신부.

 




통역 봉사자 유스티나씨가 베트남 교회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 있다”고 했다. “한번 가 봅시다.” 호치민시(市) 중심가에서 불과 10여분을 걸었을까. 유스티나씨가 작은 시장 골목 안으로 앞장서 걸어들어갔다. 다닥다닥 붙은 소형 상점들,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식당, 지나는 행인에게 손짓하는 노점상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골목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골목 끝 지점. 150년 전통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호치민 관구가 그곳에 있었다.

갓 20살을 넘겼을 법한 수련기 수녀 10여명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봤다. 다가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웬일이니~”하며 서로 등을 떠밀며 “까르르” 웃는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수련기 수녀는 모두 110여명. 종신서원을 거친 수녀를 포함하면 모두 300여명에 이른다. 베트남에 이렇게 큰 수도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베트남=사회주의 국가’라는 공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베트남은 중국이 아니었다.

베트남내 여자수도회 회원 수는 1만여명. 남자수도회 회원 수는 약 1500여명에 달한다. 유럽과 달리 베트남의 봉헌생활 성소는 아직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제 성소도 마찬가지. 베트남에서는 신학교에 가기 위해선 모두 일반 대학을 나와야 한다. 그 후에 철학 2년과 신학 4년 과정을 수료해야 서품 자격이 주어진다.

어릴때부터 사회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청년들이 선택하기에는 쉽지 않은 과정. 하지만 현재 베트남 전국 6개 신학교에선 총 1500여명의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베트남의 성소 활기는 베트남 내에서 뿐만이 아니다. 현재 미국교회에서 미국 국적을 갖고 활동하는 베트남계 사제만 500여명. 모두 전쟁 당시 미국으로 탈출한 베트남 난민 2~3세들이다. 베트남 교회는 한국과 함께 성소가 가장 활발한 나라인 셈이다. 베트남 교회를 ‘성장이 멈춘 교회’라고 생각해선 안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느위엔 반 흐흥 호치민 성 요셉 신학대 총장은 “더 많은 젊은이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라며 “정부의 종교 규제만 풀리면 베트남 교회는 더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많은 수의 성소자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조직이 체계화 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교회 조직이 교회에 활기를 주고, 그 활기가 성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베트남 교회는 한국교회처럼 크게 3개 관구로 나뉜다. 하노이, 후에, 호치민 관구가 그것. 하노이 관구는 하노이 대교구를 비롯해 10개 교구로, 후에 관구에는 6개 교구로, 호치민 관구에는 9개 교구로 구성된다. 이들 관구들은 각각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1850년에 설립된 후에 신학교가 맏형 격이다.

1975년 공산화 이후 학교 문을 닫았다가 1994년부터 새로 신학생을 받고 있다. 현재 재학생은 100여명. 이외에 하노이 신학교(200여명 재학), 호치민 신학교(200여명 재학)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빈탄, 탄귀이 신학교는 급증하는 성소자를 위해 1988년 새로 설립됐다.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황경옥(시메온) 수녀는 “베트남이 비록 선교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는 있지만 중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기존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활발하고, 교회의 활동도 왕성한 만큼 앞으로 선교 자유와 관련한 큰 변화가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호치민 성 요셉 신학대 총장, 영성담당 신부 - “돈없어 성경도 못읽어 한국교회 지원 큰도움”
 

베트남 호치민 성 요셉 신학대학의 느위엔 반 흐흥(Eruert Nguyen Van Huong) 총장 신부와 두 마우흐 흐흥(Joseph Do Mauh Huong) 영성담당 신부는 베트남 신학교육의 기본 틀로 4가지를 지목했다. “인간을 사랑하고, 영성을 강화하고, 지식을 축적하고, 사목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교육방침은 역설적으로 베트남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열악한 경제적 여건과, 인프라 부족으로 인본, 영성, 지식, 사목에 대한 배려가 상당부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호치민 신학교 재학생은 235명. 모두 일반 대학을 졸업한 후 성소의 뜻을 품고 신학교에 다시 입학한 베트남의 재원들이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 베트남 교회가 외국교회의 도움을 받아 학문에 재능 있는 신학생을 유학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자들도 성경을 읽고 싶어도 돈이 없어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자 재교육이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느위엔 총장신부는 “신학생들과 신자들의 신앙 열정은 그 어느 나라 교회에도 뒤지지 않지만, 재정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성경 보급 및 베트남 성경 번역에 대한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이 그나마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신부는 성당 신축이 불가능해 교세 확장은 꿈도 꾸지 못하는 베트남 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희망’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요즘 정부 입장이 많이 희망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에 대한 규제도 많이 풀릴 것입니다. 베트남 교회의 저력이 이제 꽃을 필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며 준비하겠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우리의 희망과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50년 박해에 순교자 1만명 - 베트남 교회 신앙의 뿌리 117위 성인
 
호치민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붕따우는 또 다른 ‘피의 역사’가 있다.

1862년 1월 7일. 당시 베트남 왕의 박해정책에 따라 붕따우 바리야의 한 감옥에 298명의 신자가 갇힌다. 그리고 “배교를 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불을 지르겠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298명 중 단 한명도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298명은 모두 산화했다. 순교자들은 뜨거운 불길속에서도 신음소리,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며 죽어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베트남 교회에 대한 박해는 17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180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150여년에 걸친 박해에서 순교자만 1만 여명. 1800년대 신자 실종자만 5만여명이라고 한다. 이들 중 성인품에 올려진 순교자는 모두 117위. 주교가 8명, 신부가 50명, 수도자가 16명, 신학생이 1명, 평신도가 42명이다.

베트남 신자들은 이들에 대해 각별한 신심을 드러내고 있다. 베트남 성인상이 각 성당마다 모셔져 있으며, 몇몇 교구는 공동체 차원에서 베트남 순교 성직자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청원기도를 바칠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호치민 봉수아이 본당 람 탄 반(Lam Thanh Van)씨는 “베트남 신자들은 순교 성인들에게 어려운 점을 청원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강하다”며 “베트남 순교성인들의 영성이 아시아 각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07년 2월 25일, 우광호 기자]


교회의 사회복지 노력

“교회 도움 없으면 하루도 못살아”
 

- 호치민시 봉수아이 본당 복지시설에 있는 장애 아이들. 베트남은 최근 경제 발전의 여파로 버려지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 사이공강에서 한 노인이 강물에 밀려 떠내려온 쓰레기를 모으고 있다. 이들은 폐품을 모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악몽같은 1년이었다. 행복의 기억은 까마득하다. 1년 동안 가정도, 희망도 모두 사라졌다. 마이 트이 탄 트랑(Mai Thi Thanh Trang 31 여)씨. 에이즈에 감염된 남편은 2살 아기를 남겨 놓고 지난해 6월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탄 트랑씨도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남편을 따라 가야 한다. 남편으로부터 에이즈가 전염된 것. 병원에서는 길어야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탄 트랑씨는 요즘 기도에만 매달리고 있다. “내가 죽으면 이 아기는 어떻게 하나요…” 아기를 바라보는 탄 트랑씨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도나 트이 가이(Dona Thi Gai 48 여)씨는 호치민시 봉수아이(Vuonxoai) 본당이 오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한 쉼터에서 탄 트랑씨와 함께 살고 있다. 간암 말기 환자. 얼마전만 해도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팔을 올리는 것 조차 힘들 정도다. “성당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 길거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앙을 알았으니까요. 매일 하느님과 천주교 교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트이 가이씨 손에는 묵주가 들려 있었다.

쉼터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위치한 람 탐 반(Lam Thanh Van 48 여)씨 가정. 남동생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76세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아버지는 오랜기간 심장병을 앓다 3년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남동생 병간호를 위해 결혼도 못한 탐 반씨는 “하느님께 매일 기도하고 있으니까, 우리 집에도 언젠가는 웃음 꽃이 필 날이 있겠지요”라며 웃었다. 람 탐 반씨는 “성당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 가족은 하루도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베트남 교회는 희망의 다른 말이다. 오랜 기간 박해를 받아온 베트남 교회는 내세 지향적인 신앙이 특징. 특히 타 사회 기관 및 종교에 대한 폐쇄성과, 신자 ‘끼리’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그동안 사회복지나 정의, 생명, 환경 운동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가 성장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교회는 이 땅의 소금과 누룩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베트남 교회는 최근 정부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사각지대 복지 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특히 노숙자와 장애인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호치민시 봉수아이 본당 판 깍 뜨으(Phan Khac Tu 68) 주임신부가 가볼 곳이 있다고 했다. 호치민에서 차로 1시간 30여분 거리에 위치한 ‘팅 풋’(Thien Phuoc). 우리말로 ‘천국 어린이’라는 의미다. 팅 풋에는 천사들이 있었다. 뇌성마비와 정신지체 어린이 5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10여년전 봉수아이 본당이 자체적으로 설립, 버려진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는 상황. 베트남은 최근 경제 발전의 여파로 이혼과 마약 복용이 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을 수용할 복지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이다. 장애인 보호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것도 걸림돌이다. 교회가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열악한 재정으로 실질적 도움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호치민 대교구 캄 느웨인 영성사목센터 소장 신부는 “과거에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이제는 빈부격차가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지고 있다”고 말했다. 캄 느웨인 신부는 또 “아직 베트남에서는 교회가 사회구조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상을 정립하는 것이 베트남 교회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심화되는 빈부격차 - 백화점엔 최고급 브랜드 즐비

호치민 중심지의 한 백화점. 여성 화장품 코너에 세계 유수의 브랜드들이 들어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정장 코너에도 버버리, 피에르카르뎅 등의 옷들이 걸려 있다. 전자제품 매장에도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선진국 시장에서도 고가품으로 분류되는 LCD, PDP 텔레비전이 진열되어 있다. 삼성, LG 등은 물론이고 소니 필립스 파나소닉 등 세계적 메이커들이 경쟁하고 있다.
불과 10년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베트남은 최근 4년간 7%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1995년에는 8.4%성장률을 기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대략 640달러 수준으로 2000년 국민소득의 370달러에 비해 70% 넘게 성장했다.

하지만 통코이 중심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사이공강에 가면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강 어귀 한 귀퉁이에서 한 노인이 강물에 밀려 떠내려온 쓰레기를 모으고 있다. 옆에서는 10살도 안돼 보이는 한 소년이 자맥질을 하며 강 바닥에 버려진 철근 등 쓰레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호치민에서 폐품을 모아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베트남 절대빈곤층비율은 2005년 말 현재 20%대. 절대 빈곤층 기준도 월 1만5000원 이하 수입으로 정하고 있어, 실제 빈곤층은 50%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맹률도 6%대. 베트남 교회가 최근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열악한 재정 형편 때문에 큰 성과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경제성장에만 치중하고 있어, 복지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인터뷰] 호치민 ‘사회복지의 대부’ 판 깍 뜨으 신부



3선 국회의원, 호치민시 인민위원회 산하 사회복지회 전담위원, 국영 호치민 TV 자문위원….

호치민 대교구 봉수아이본당 판 깍 뜨으(Phan Khac Tu 68) 주임신부는 명함이 많다. 일부 동료 신부 중에는 이런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판 신부는 이런 시선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제 명함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판 신부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직함들은 선교와 각종 종교 활동, 복지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판 신부는 30여년 전부터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목에 주력하고 있다. 교회 재정이 열악한 만큼 대부분 운영비는 국가로부터 이끌어 낸다.

판 신부가 국회의원직을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도 100만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형 복지시설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래서 호치민에서 판 신부는 ‘사회복지의 대부’로 통한다.

“교회가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보고도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 신부가 ‘밖’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봉수아이본당 신자 수는 7000여명. 이들을 위해 성경 보급 및 성서 세미나, 피정 등 타 본당에서 실시하지 않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교육에도 열심이다. “신앙인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본당 신자들에게 무엇을 가장 강조하느냐고 물었다.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십계명을 철저히 지켜 진정한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희생하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은 바로 사랑과 십계명, 희생 속에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7년 3월 4일, 우광호 기자]


호치민 한인 가톨릭 공동체

‘기도하는 공동체’ 건설에 최선



 

호치민 한인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열정은 한국교회 못지 않게 적극적이다. 사진은 유아세례식 장면.

 



지난 연말 방영된 베트남 국영 호치민 TV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 프로그램. 사회자가 한 한국인을 단상으로 불러 올린다. “호치민에 거주하시는 한국 가톨릭 신자 분들이 장애인들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인 가톨릭 신자들은 베트남의 어려움과 늘 함께 하겠습니다.” 베트남 호치민 한인 가톨릭 공동체 김인규(루카.60) 사목회장의 이날 인사말은 베트남 전역에 생중계 됐다.

한국에서 3572.646㎞ 떨어진 곳. 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이 베트남 호치민에서 화려한 ‘신앙 꽃’을 피우고 있다. 호치민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아시아 교포 사목 중 활성화된 공동체로 유명하다. 교적 신자 500여명에, 주일 미사 참례자 수만 300여명에 이른다.

한국내 본당 주일미사 참례율이 30%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호치민 한인 공동체 미사 참례율 60%는 꿈의 숫자. 게다가 최근 미사 참례자 수가 급증, 주일 미사를 2회로 늘렸다. 연 2회 개설되는 예비신자 교리반에도 매회 20여명 이상 몰리고 있다.

전 신자들이 신구약 성경 필사에 적극 나서고 있고, 서울대교구 이문주 신부 권유로 시작한 성서 백주간에 참여하는 인원도 30여명이나 된다. 신구약 전체를 필사, ‘나만의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8명이고, 신약 성경 완필자도 10여명이다. 30대 젊은 부부들의 모임인 가브리엘회도 묵주기도와 성경공부에 열심이다. 이뿐 아니다. 2003년 4명, 2004년 10명, 2005년 11명이 싱가포르까지 원정,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밖’도 소홀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호치민 중심가에서 자선 바자를 개최해 1만불을 모금, 베트남 본당 및 복지시설, 에이즈 환자 병원 설립 등에 지원했다. 여성 신자들은 소그룹별로 아동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고, 50대 이상 신자 모임인 베드로회는 3개월 마다 복지시설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소정의 운영비를 지원한다.

이같은 ‘열심한 신앙’을 두고 한인 공동체 신자들은 “베트남판 탈출기”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미사 참례만 간신히 하거나 혹은 냉담하며 지냈는데, 어려운 타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신앙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10여년 전에는 사제가 없어 미사 참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한 베트남 사제의 도움으로 주일 미사는 봉헌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공수해온 강론 집을 강론으로 대독하는 등 반쪽 짜리 미사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2002년 4월, 당시 유학생이던 부산교구 이창신 신부가 미사를 정기적으로 주례하면서 도약 발판을 마련한 한인 공동체는 2003년 12월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가 이창신 신부를 호치민 한인 공동체 본당 주임 신부로 정식 발령함으로써 ‘돛’을 달게 됐다.

이병직 사목회 총무는“우리는 소공동체에서 오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며 “매일 모이고, 기도하고, 함께 일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인규 회장도 “늘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앞으로 성전 건립이 절실하다”며 “앞으로 공동체 친교를 바탕으로 아시아 최고의 한인 신앙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화요일 저녁 7시. 베트남에서 태어난 생후 4개월 최윤서(엘리사벳) 아기 등 3명에 대한 유아 세례식이 열렸다. 대모 중 한명이 말했다. “베트남에서 우리 뒤를 이을 이 아기들을 위해서라도 신앙 안에서 열심히 삽시다.”

’아시아 교회가 간다’ 베트남편 취재를 도와주신 호치민 한인 가톨릭 공동체 신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호치민 한인본당 주임 이창신 신부

 


“한인 신자들의 신앙 열정이 정말 대단합니다. 공동체 의식도 매우 강합니다.”

2004년 1월부터 호치민 한인성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는 이창신 신부(부산교구)는 ‘그래서’ 바쁘다.

교포 교회로는 드물게 평일 미사 및 주일학교 미사를 집전해야 한다. 또 요일별로 성서 백주간 강의와, 신자 재교육 강의, 신앙 강좌, 예비신자 교리 등을 진행해야 한다.

구역미사는 물론이고 수시로 신자들의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축복도 해 주어야 한다. 남성 신자 및 30대 젊은 부부들의 신앙이 활성화 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배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모두 “신자들이 원해서”다.

이신부는 이들을 위해 앞으로 가정방문 및 쉬는 신자 회두 활동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 성전 건립의 발판 마련에도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이곳 신자들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앙만큼은 한국교회 신자와 하나입니다. 우리 공동체 모든 신자들은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하느님을 따르려는 이곳 신앙인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호치민 한인 가톨릭 공동체 약사

- 1995년 7월, 남성 신자 주축으로 레지오 마리애 시작, 여성 신자들은 성경공부 시작
- 1996년 1월, 봉수아이본당 소성당에서 첫 공동체 미사 시작. 호치민 종교인민위원회에  미사봉헌 집회신고서 제출
- 1996년 5월, 봉수아이본당 주임 판 깍 뜨으 신부 한국어 미사전례 시작
- 1996년 6월, 이주사목위원회에 평신도 사목 협의회 등록
- 1997년 5월, 묵주기도 및 성경 토론모임을 위한 남성 신자모임 바오로회 결성
- 1997년 7월, 봉수아이본당 별관 3층에 한인성당 입주
- 2003년 1월,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 방문, 호치민 한인성당 첫 견진성사
- 2003년 2월, 평신도사목협의회 구성
- 2003년 3월, 장년부 모임인 베드로회 결성
- 2003년 8월, 서울대교구 이문주 신부 추천으로 성서 100주간 시작
- 2003년 12월,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 교구 소속 이창신 신부를 호치민 한인 공동체 주임 신부로 발령.
- 2004년 1월, 이창신 신부 호치민 한인 교포사목 시작

 

[가톨릭신문, 2007년 3월 11일,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