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12. 7. 00:02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 (Saint Ambrose of Milan)

 

 

 

 축      일

 12월 7일 

 신      분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지역

 밀라노(Milano)

 활동연도

 339-397년  

 같은이름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또는 암브로시오)는 갈리아(Gallia)의 지방 장관으로 재직한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339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사망 후 로마(Roma)에서 인문 교육을 받아 수사학과 법학 외에 그리스어에도 능통하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국가 관리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빨리 출세하였다.

 

시 르미움(Sirmium,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의 지방 법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가 지방 장관 프로부스 (Probus)의 고문이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370년에 에밀리아 리구리아(Aemilia-Liguria)의 수도인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그 지방을 다스리던 때 밀라노에는 서방 교회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대표자인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주교로 있었다. 아욱센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그 러나 그가 죽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집정관인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질서 회복을 위해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을 중재하면서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평화적 방법과 대화를 통해 화해를 추구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 때 뜻밖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고 그는 할 수 없이 수락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은 뒤, 8일 후인 373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교 역시 불가피하게 정치에 개입되어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개종자들, 수없이 많은 이교도들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 등 모든 문제를 새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해결해야만 했다.

 

주 교가 된 후 성 암브로시우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고,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다. 그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 신부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품을 받은 지 약 1년 만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의 고문관이 된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설득하여 니케아 신앙 고백을 따르도록 하고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자 암브로시우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 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 회의실에 승리의 여신상과 제단을 재건하려는 로마 시 집정관 심마쿠스(Symmachus) 일파의 시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5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로 아리우스주의 추종자인 황후 유스티나에 의해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내주라고 명한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 년 테살로니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군인들에게 진압을 명령했을 때, 군인들의 무차별 진압으로 7,000명이 살해당하였다. 이에 성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범죄의 중대함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참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공식 참회 행위로 보속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해 성탄 때 제복을 벗고 참회복으로 갈아입고 통회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에게 충고하는 성 암브로시오

 

393 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갈리아에서 아르보가스투스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게니우스는 우상 숭배를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성 암브로시우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성서, 신학, 신비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했으며, 387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래서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또한 그의 저서 중에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동정녀”(De Virginibus), “신앙론”(De Fide) 등이 있다. (가톨릭 홈)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340년경 이탈리아 트레비리의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시르미오(현재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직에 들어갔다. 밀라노에 있을 때인 374년 12월 7일 뜻밖에 주교로 선임되어 서품받았다. 힘을 다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신자들의 참된 목자요 스승으로서 모든 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꾸준히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 저서들을 통해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참된 신앙을 옹호했다. 397년 4월 4일 성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2,1-2. 4-5. 7; PL 16[edit. 1845], 847-881)

 

 

당신은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주교직을 맡았으나 이제 교회의 선미루 갑판에 앉아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를 조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센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방향타를 굳게 잡으십시오. 바다는 참으로 깊고 광대하지만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을 마련하시고, 강물 위에 그 물을 굳히셨기"에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온 세상의 암초 가운데서 의연히 흔들리지 않은 채 존속하며 그 견고한 기초 위에 서서 밀려 오는 바다의 성난 파도를 견디어 냅니다.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오지만 파선되지 않고 악의 세력들이 자주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밀려 왔다 물러가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수고하는 자를 받아들일 지극히 안전한 구원의 항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시달리기도 하지만 잔잔히 강들을 항해하기도 합니다. 이 강들은 "주여, 강물 소리 높삽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한 그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영적인 은총으로 흘러 넘칠 때 소리를 드높입니다.


폭우처럼 그의 성도들 안에 흘러 들어가는 강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잔잔한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성급한 물줄기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나 바울로 그리고 베드로처럼 이 강물에서 물을 충만히 받는 사람은 소리를 높입니다. 사도들이 마치 전령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로 복음의 메시지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 것과 같이, 이 물을 받는 사람 역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소리를 높이도록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여러 곳에서 비를 내리는 예언자들의 구름의 물을 받으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거두고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받는 사람 역시 구름처럼 이슬을 내립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을 물로 가득 채워 당신 지반이 내부의 가득 찬 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물로 축축하게 적셔지도록 하십시오.


많이 읽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득 채워져 넘치는 그 물로 다른 사람에게 물을 대줄 수 있습니다. "비를 싣고 오는 구름은 비를 땅에 쏟아 놓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유창하고 순수하며 명료한 말로 하고 윤리에 관한 훈계를 할 때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며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당신이 이끌어 가는 곳으로 그들이 기꺼이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말이 지혜로 가득 차도록 하십시오. 솔로몬은 "지혜 있는 자의 입술은 지혜의 무기로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네 입술이 생각과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듯이 당신의 설교가 명료하고 재빨리 이해를 주어 다른 사람의 설명이 필요 없고 설교가 그 내용의 힘으로 옹호받도록 하며, 당신 입에서 헛되고 뜻 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성 암브로시오(340-397)

윤 클레멘트 신부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보성인인 그는 독일의 트리에에서 태어나는데, 교회 역사상으로 유일하게 세례를 받기 전에 주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로마에서 공부했고, 그가 밀라노의 주교가 될 당시에 북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리구리아 지방의 주지사였고, 밀라노는 로마제국의 중심도시였다. 당시 교회는 아리아니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설)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교회에는 많은 세속적 힘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밀라노는 아리아니즘을 따르는 주교 아우센치우스가 있었는데, 그 주교가 죽고 나자, 그의 후임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와 아리아니즘을 따르는 세력간에 혼돈과 소요가 있었다. 그때 암브로시오는 밀라노 대성당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주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다. 그 연설 도중 누군가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하고 외치자, 곧 군중은 모두 그렇게 외치기 시작한다. 그는 두려움으로 숨으려다가 결국에는 군중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는 일주일 이내에 세례와 견진을 받은 후, 이어서 사제품과 주교서품을 받으니, 그날이 12월 7일이었다. 당시는 아직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때라서, 그렇게도 사제와 주교서품이 가능했던가보다. 우리 교회는 그의 축일을 그가 지상을 떠난 4월 4일이 아닌, 그의 주교서품 기념일인 12월 7일에 지낸다.

 
세례를 받고 주교가 된 후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변한다. 땅은 교회에, 돈은 가난한 이들에게 다 준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교부들과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는데, 그는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심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다. 또한 그는 그를 만나거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최대의 시간을 내주지만, 그 어떤 외적인 일도 그의 내적인 시간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다. 로마제국의 전 행정가로서 그는 그 도시의 정치적인 일들에도 영향들을 주게 되는데, 그는 황제 그라치안에게 아리아니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주기를 요청하기도 한다. 한편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아우구스티노에게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387년 부활절 이브에 세례를 준다.

 
그와 그의 교구는 한때 아리아니즘을 신봉하는 황제 발레티안 치세에 어려움을 겪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과 설교는 굳세고 한결같았다.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테살로니카에서 약 7천명의 군중을 학살한 사건 이후, 그가 회개와 고백성사와 보속을 하기 전에는 성체도 모실 수 없다고 강력하게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탁월하였다.


그는 많은 책들을 쓰고 남겼는데,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것들보다도 어려웠던 시대에 거룩한 교회와 그 가르침에 대하여, 부지런히 돌보았던 사람으로 더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는 그가 평생 믿고 가르치며 지키려던 하늘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57세가 되던 해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성 금요일 날, 이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복된 영원의 길을 향해 떠났다.

[2009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교부들의 가르침
성 암브로시우스

 

 


 

이단에 대항, 정통신앙 보호 앞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장인산 신부

 

 

 

■ 생 애

 
암브로시오는 성인이며, 주교, 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더불어 라틴(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교부로 꼽히는 인물로서 339년 현재 독일 서쪽 도시인 트리어에서 출생하였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 모습이 비쳐질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聖 암브로시오의 생애 : Vita S. Ambr osii)덕분에 잘 알려져 온다. 갈리아의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별세 후 어머니는 암브로시오를 포함한 삼남매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누나 마르첼리나는 수녀가 되어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머리수건을 받았고, 형 사티로와 함께 암브로시오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수사학, 철학, 법학 등을 배운 암브로시오는 일찍 관직생활에 들어가서 황궁이 있던 도시 밀라노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도시는 에밀리아-리구리아지역의 수도로서 암브로시오는 그 지역의 주지방장관이 되었다.

 
당시 밀라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추종하던 아욱센시오 주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후임주교를 뽑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용하시어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교회 - 국가간 문제 다뤄


암브로시오 주교는 주교품을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교리를 옹호하는 주교로부터 받은 후 단호하게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의 정통신앙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서방교회에서 니체아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부이다.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까지 인식케 하였다. 국가의 권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교회의 권리와 가르침에 대하여 황제의 간섭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교회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회학자였다. 또한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실에서도 인식케 하였다.

 

 

 

탁월한 강론가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직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그는 열심히 성서공부에 몰입하였다. 바쁜 사목활동 중에서도 그는 늘 성서를 읽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노가 증언한다(고백록 6, 3, 3).

 
암브로시오 주교는 특히 동방교부들의 저서를 심취하여 읽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전해 받았다. 필로와 오리게네스와 같이 성서의 3중(重)적인 의미(자연적, 신비적, 윤리적)를 받아들였다. 특히 윤리적, 유비적 해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성서의 각 사건 안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필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암브로시오 교부는 ’Philo Christianus’(그리스도교적 필로)라고 불리운다.

 
암브로시오 주교가 성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준비한 강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아우구스티노도 그의 강론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받은 사실은 유명하다(고백록 6, 4, 6). 그는 이단으로 갈라진 신자들을 화해시키고, 성직자들과 신자와 비신자 군중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동방신학을 서방교회에 소개하고 자신의 교구 사제들이 주교관에서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교구참사수도회의 시조가 된 사목자들의 아버지였다고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의 모범이 된 목자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곧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였고, 자신은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주교관을 개방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줄을 서서 그를 찾았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우는 사람이었다. 죄인들에게 항상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였던 그는 교회 사목자들의좋은 모범이 되었다. "매번 죄를 고해하러 사람들이 그에게 올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이 울곤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자신도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죄의 고해를 들은 그는 항상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후대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자세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전기 39).

 
암브로시오는 주님께 베드로의 눈물을 자신에게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눈물의 죄를 씻는 효력과 사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영적 효과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이런 종류의 눈물을 ’좋은 눈물’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지대하였다.

 

 

 

저술활동

 
암브로시오는 주교로서 사목활동에 여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위해 실천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라틴교부 문헌 총서인 PL전집 14~17권에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 CSEL, CCL과 SC 전집에 들어 있다. 성서에 대한 많은 주해서와 윤리-수덕에 관한 저서들과 교의신학적 저서들, 그리고 연설문, 서간과 찬미가들을 남겼다. 특히 치체로가 아들을 위해 쓴 저서 ’직무론’의 틀 안에 자신의 영적 아들들인 교구 사제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직자의 직무를 담아서 완성한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은 라틴교회의 첫 윤리신학 총서로 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찬미가’들을 지어서 신자들에게 부르게 한 공로로 암브로시오 주교는 서방교회의 성가작곡의 창시자로 불린다.

 
암브로시오의 정직하고 헌신적인 삶은 고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후대를 위해서는 정신세계에 기반을 닦아놓은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던 암브로시오는 397년 4월 4일, 성주간 성토요일에 선종하여 그의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12월 7일에 지낸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엘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제왕들과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지 않은’ 모범적인 주교였다(전기 47, 3).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27일]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유해

 


 

 

암브로시우스의 ‘나봇 이야기’에서


“금술동이의 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

 

 

 

[본문]

 
그대의 식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대가로 치른 것입니다. 그 식탁에 차려 놓은 잔들에서는 그대가 처참하게 죽인 사람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쾌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어가야 합니까! 그대들의 단식은 헛된 것이고, 그대들의 영화도 부질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대들의 곡식을 쌓아둘 곳간을 넓히기 위해서 일하다가 지붕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은 포도 가운데 어떤 것은 식탁에 가져가고, 어떤 것은 그대 식탁에 어울리는 포도주로 만들기 위해서 고르다가 나무 높은 곳에서 떨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개와 생선이 그대 식탁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토끼 발자국을 따라다니거나 새 잡는 덫을 찾아다니다가 한겨울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언가 잘못하여 그대 마음에 들지 못한 까닭에 그대 눈앞에서 죽도록 채찍질을 당하고 호사스럽게 차려진 식탁 위를 그 피로써 적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잠언 3, 28)고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내일 주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나는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사람의 것을 되돌려주는 것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을 그대 홀로 도둑질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부유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나봇 이야기」 19~20. 53장

 


[해설]

 

“교회, 가진 자들만의 집단인가?”

 
1600여 년 전, 가난한 민중들의 벗이 되어 부자들의 탐욕과 불의를 고발하고 분배정의를 외쳤던 아름다운 교부 암브로시우스! 그는 빼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말미암아 이미 서른 살에 밀라노 지방장관이 되었지만, 교회를 위하여 세상 부귀와 영화를 미련 없이 버렸다. 세례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죽기까지 하느님 백성을 섬기며 살았다(339~397년).


암브로시우스가 설교 형식으로 저술한 「나봇 이야기」(1열왕 21장 참조)에는 분배정의에 관한 감동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듣기 좋은 윤리설교 나부랭이나 늘어놓기보다, 민중을 착취하고 공동의 재화를 독점하는 부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가난의 근본원인은 세상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부자들의 탐욕에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자본주의와 뒤엉켜있다. 돈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기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고 하셨거늘, 자본주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주인을 섬기며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복음의 논리는 결코 세속의 논리와 타협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눔의 책무를 저버린 부자들이 당당하게 활동하는 반면,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은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는 그런 교회에서는 복음이 질식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전을 화려하게 지어올리고 갖가지 교회 사업을 벌이면서도 정작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할 뿐 아니라, 소수의 부자가 재화를 독점하고 있는 죄스런 현실과 타협하며 그 죄악 앞에 비굴하게 침묵하는 교회라면, 하느님을 팔아 장사하다 채찍을 맞은 「강도의 소굴」(요한 2, 13~22)과 다를 게 무엇이랴!


예수님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주님의 성전을 대리석으로 뒤덮느라 애쓰면서도 예수님의 현존인 가난한 사람들을 헐벗고 굶주린 채 내버려 둔다면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더 소중한 법,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의 돌들도 언젠가는 어느 하나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마태 21, 5~6).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는 배고프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떠돌이신세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외롭게 갇혀있다』(마태 25, 31~46)라고 울부짖고 계시는 주님이야말로 우리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예배를 드려야 할 참된 성전이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킬 때,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만다.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 교회」가 아니다. 자기 「보편성」(catholicitas)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과 아무런 차별도 지니지 못한 채, 가진 자들만의 배타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뿐 아니라,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꾸짖으며 분배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에서 비로소 주님의 복음은 참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무명의 이탈리아 출신 마스터 - 두 이단자를 질책하는 주교좌에 앉은 성 암브로시오

 

 

[최원오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부산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2일]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활동하고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지상 장막의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도는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권고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죽음의 복됨’(De bono mortis) 3장 9절

 


[해설]

 

 

암브로시우스(339∼397)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에 속한다. 그의 생애에 관해 좀 더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죽음의 복됨’은 죽음에 관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강론이다. 불행하게도 이 강론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암브로시우스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가톨릭 신학에 정통함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의 복됨’에서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을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죽음. 둘째, 신비적인 죽음. 셋째,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은 죄이며 육적인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앙인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우리 인간 세계에 들어옴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죽음의 복됨’ 3, 9)


암브로시우스 교부에 의하면,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려면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을 본받는 것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깨뜨리는 것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본받는 삶을 죽음이 작용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삶에 작용하는 죽음을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비적인 죽음으로 간주하며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죽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은 삶의 가치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지혜를 찾고 있다. 현실 속의 불의를 외면하고 삶을 압박하는 멍에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부활의 희망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죽음을 본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외면한고 있다면, 먼저 신비적인 죽음이 작용할 영적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비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원히 남게 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참조: ‘죽음의 복됨’ 3, 9) 결국 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 아직도 사순시기가 그저 습관적인 전례의 일부분으로만 다가온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신비적인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 부활에로 다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을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 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에서 평온에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죽음의 복됨’ 3, 9)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해보자!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2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교)]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본문]

일반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 윤리적인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이 신비를 전할 때, 동정 마리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음으로써 그 믿음이 북돋아지도록, 한 나이 많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잉태한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전갈을 불신했거나, 천사의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거나, 증거로 든 예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에 대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하려는 경건한 마음에 차서, 그리고 그 기쁨에 이끌려 급히 유다 산골마을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마리아가 높은 곳 말고 어디로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겠습니까? 성령의 은총은 느린 노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부녀들이여! 여러분도 임신한 친척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할 근면함을 배우십시오. 전에는 가장 깊은 내면의 방에서 머물던 마리아를, 동정녀의 부끄러워함도 군중 앞에 나타나는 일에서 붙잡지 못했고, 산악의 험난함도 마리아의 열정을 저지하지 못했고, 여행의 먼 길도 마리아의 의무수행을 지연시키지 못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본분을 생각하면서, 손해는 생각지 않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성별을 생각지 않고, 급히 집을 떠나서 산골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 2장 19∼20절

 

 

베노초 고촐리 - 성 아우구스티노의 세례

 

 


[해설]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주님은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당신의 구원사업의 계획을 알려주신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믿음을 도와주시고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친척 엘리사벳이 주님이 베푸신 기적의 은혜로 아기,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신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갖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신 것을 언급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은혜를 간직하도록 도움을 베푸는 주님이시다.

 
2) 동정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과 그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방문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방문은 언제나 천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를 뛰놀게 만들었고, 엘리사벳의 입에서 찬미의 기도가 나오게 도와주었고, 마리아도 기쁨에 넘쳐 찬미의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처럼 은혜로운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안겨다 줌을 알 수 있다.

 
3) 성령께서는 지체함과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마리아는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분이시다.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길을 서둘렀다. 사실을 확인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마음으로 주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찬양하러 길을 서두른다.

 
산위로 이끄심은 암브로시우스의 설명을 따르자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거룩한 곳이며, 예수께서도 기도하시러 자주 산에 올라가셨다.

 
산에 오른다는 말은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설명에 의하면, 주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심을 믿는 것,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신 것을 믿는 것,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자가 되신 것을 믿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산으로 올라감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신 은혜의 어머니가 되셨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9일, 장인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청주교구 총대리)]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성 암브로시우스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① 평신도에서 주교가 된 당대의 대 신학자


초대교회 교부들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성인을 꼽으라면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 축일 12.7)를 들 수 있다.

 
340년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난 성인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다. 두 형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직으로 진출했고, 암브로시우스는 가톨릭 신자인 재판소장(프로부스) 밑에서 일을 배워 법관의 길을 걸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죄인을 대할 때, 엄한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자애로 충만한 모습으로, 정의에 입각한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곧 큰 인기를 얻고 존경을 한 몸에 받게됐다. 결국에는 총독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때, 암브로시우스에게 있어서 중대한 삶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우첸시우스가 서거하자 그 후임 선출이 매우 혼란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아리우스 이단이 성행했는데, 그 교단의 교직자들이 가톨릭 주교의 임명을 방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밀라노는 곧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암브로시우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격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시위 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군중들을 설득했다. 이때 한 아이가 외쳤다.

 
“암브로시우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마치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은 듯,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당황한 암브로시우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무리한 요구는 그만두라며 군중을 진정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세례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중들은 멈출 줄 몰랐다. 거듭 주교 취임을 요구하며, 점점 더 소란을 피웠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친구 집으로 피신해 군중들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숨어있던 암브로시우스를 직접 찾아내 다시 주교직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암브로시우스가 얼마나 군중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세는 기울어졌다. 결국 인근 지역의 주교들과 밀라노 교구의 사제들도 암브로시우스에게 주교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에 성인은 어쩔 수 없이 주교직을 수락했다.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선 자세히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신심도 남달랐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교리를 받은 그는 세례와 신품성사를 잇달아 받고, 374년 12월 7일 밀라노 주교직에 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암브로시우스다. 그는 주교직에 오르자마자, 모든 열정을 다해 직무에 임했다. 특히 기도, 교리연구,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침묵을 지키며 끊임없이 단식을 실천했으며, 기도로 날을 보냈다. 특히 순교자들을 공경했으며, 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학문에 힘썼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신학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대 신학자가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또한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북돋우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주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다. 가는 곳마다 그의 가르침을 듣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선 실천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선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었다. 당연히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넓은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인에게는 깊은 애정과 친절로 대했으며, 주어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성녀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눈물로 청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시오. 그런 눈물을 가진 어머니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적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암브로시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회개하고 훗날 위대한 가톨릭교회의 성인이 됐다.

 
하지만 영광은 고통을 전제로 한다. 암브로시우스 성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4일]

 

 


②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살아

 

서기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 이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및 황후의 초상을 흙탕물 속에 집어넣는 등 모욕한 것이다. 로마 황제는 격분했다. 그리고 곧 엄명을 내려 유죄, 무죄 분별없이 해당 지역 사람을 모두 처형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암브로시오는 크게 놀랐다. 황제의 극악한 행동을 바로잡아야 했다. 언제 또다시 백성들을 박해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성인은 황제에게 서한을 썼다. 통회와 보속과 고행을 권유했고, 통회하지 않을 경우 당분간 성당에 나올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감히 황제에게 일개 주교가 대들다니…. 주교와 황제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드디어 사고가 터진다. 황제는 예수부활대축일에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그때 주교는 성당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직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중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청컨대 이 길로 다시 궁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폐하는 성당에 올 수 없습니다. 회개하신 후 오십시오. 그리고 죄를 다시는 짓지 말아 주십시오.”

 
황제는 아직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 굴복할 마음이 없었다. 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해 성탄대축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흔들린다. 신자인 만큼 대축일 미사에 참례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성탄대축일에 다시 성당에 갔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성당 앞을 가로막고 섰다. 성인은 황제의 진정한 회개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어찌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시려 하십니까.”

 
그제서야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회개한다고 말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의 통회의 마음을 읽고 성당 안으로 모시고, 성사를 집행했다. 이로써 로마에선 한층 하느님의 법이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법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죽음을 앞두고 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은 유명하다.

 
“오!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

 
성인은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갈망했던 것이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다, 성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시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던 성인에게 주어진 은총이었다. 397년 4월 3일, 57세의 나이였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삶을 보면, 중대한 전환점이 몇 곳 있다. 사법계에서, 행정가로, 다시 사도직의 길로 들어선 것이 그것이다. 성인은 재판소장, 즉 법조계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한 것이 28~32세 때까지로 추정된다. 지금의 변호사와 비슷한 일을 했다. 이후 그는 지역 총독으로 선출돼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지역의 주교가 선종하자, 그 자리를 물려 받는다.

 
정치인 암브로시우스가 갑자기 주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사제도 아니었다. 성인이 주교직을 거부하고 친구의 집에 숨어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를 찾아내 주교직에 강제로 추대한다. 평소 성인의 덕망이 참으로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덕행도 결국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결국 성인은 374년 34세가 되던 해에 세례성사를 받고 주교품까지 일사천리로 받는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위대함은 이때부터 더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모범적인 정치인이자 행정가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영적 차원에서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다.

 
암브로시우스 성인 스스로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주교직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느님은 암브로시우스를 선택하셨고, 암브로시우스는 그 선택에 응답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제 그 응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1일]

 

 


③ 순교자 공경하며 소외된 백성 위해 헌신

 

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에 오른 후, 본격적인 내면형성에 전념한다. 내면 형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의 뜻대로 형성될 수 있도록 마련하신 섭리를 깨닫고 수련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다. 성경 공부와 순교자들에 대한 공부도 여기에 속한다. 기도생활, 묵상생활은 물론이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제 이 모든 일에 전념하며 스스로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순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형성은 내면 형성 그 자체로 그쳐선 안 된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상호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면형성이 나와 이웃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형성을 시켜주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내면형성은 완벽한 상호형성으로 저절로 이어진다. 상호형성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내면 형성 또한 안됐다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제 감옥에 갇힌 죄인 등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 시점에 만난 분이 바로 모니카와 그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다. 당시 이단에 빠졌지만 뛰어난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종이 된다.

 

교만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킨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거룩한 사람이었다. 거룩함만이 교만을 물리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순교자들에게 푹 빠진 그가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그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살 때다. 거리에 보니 행복 예식장이 있다. 행복예식장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가. 아니다. 쓰러져 가는 성당이라도,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행복은 교회의 성사 안에 있다. 황제는 성사의 행복을 원했고, 결국 암브로시우스 앞에서 회개하고 행복의 성사를 받게 된다.


암브로시우스가 이처럼 거룩함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인의 삶에는 늘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식을 많이 쌓게 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고, 특히 주교가 될 때 어린아이를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렇게 하느님은 성인을 주교로 이끌었고, 더 나아가 당신과의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다. 기도와 교리공부, 성경공부 등을 바탕으로 수련을 통한 내면 형성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셨다. 합치의 성향은 본질적으로 연민의 성향을 기르는 계기가 된다. 하느님과 합치하면 이웃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결국 하느님은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마음에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어 소외된 이웃과 버림받은 이웃을 돌보는 상호형성의 길로 이끌었다. 연민은 또 더 나아가 정의로 연결된다. 이웃을 향한 연민은 이웃이 고통받는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확고함이 바로 황제와의 마찰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찰은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 사례로 기록됐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교회의 품위를 확고함과 완벽한 신앙으로 지켜낸 것이다.
 

우리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훌륭하다고 보는 것은 이래서다. 내면형성과 상호형성, 세계 형성의 완벽한 성취와 조화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의 덕, 분별의 덕, 합치의 덕, 연민의 덕, 사회정의 실현 등이 암브로시우스 성인이 이룬 위대한 모범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섭리다. 인간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신적신비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은총과 섭리를 우리 각자가 어떻게 개발하고 가꾸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8일]

 


 

 

[교부들의 명언]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안봉환

 

 

안토니오비바리니 -세폭제단화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위의 많은 신자들에게 질문해 보았다. “세례성사는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고해성사도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그렇다면 성체성사도 죄를 용서해 주는 성사인가?”


처음 두 질문에는 모두 “예.”라고 대답하였지만, 맨 나중의 질문에는 주저하고 망설였다. 과연 교부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암브로시오 성인의 삶과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 암브로시오 성인의 삶과 당시 상황

 


니케아 공의회 (325년)이후에도 밀라노에서는 니케아 정통 신앙파와 아리우스파가 서로 맞섰고, 지역 책임자였던 암브로시오는 양쪽을 차별 없이 대함으로써 치안을 평온하게 유지하였다.


어느 날 신자들을 향하여 연설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어린이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모시자.”고 외쳤는데, 정통 신앙파, 아리우스파 할 것 없이 여기에 동의하였다.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던 암브로시오는 주교직을 사양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더 이상 맞설 수 없음을 깨닫고 세례를 받은 지 여드레 만인 374년 12월 7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수도승과 같은 수행의 삶을 살았으며, 가지고 있는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한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서 소박한 삶을 엮어간 암브로시오였지만, 부당한 권력 앞에서는 타협이나 양보를 몰랐다.


그는 원로원 의사당에 빅토리아 여신의 제단을 다시 세워 이교예식을 복원하려는 로마 원로원의 야심찬 계획을 좌절시켰고(383년), 아리우스파에게 밀라노의 대성당을 넘겨주라는 황실의 끈질긴 요구와 군사적 위협에 맞서 신자들과 더불어 성당을 지켜냈다(386년).


특히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대학살이 벌어지자, 암브로시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살인죄에 대하여 교회의 규정에 따라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황제는 일정 기간 동안 교회에서 공적 참회를 하고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한 뒤에 용서를 받고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졌다.


대단한 웅변가였던 그는 강론을 통해 당시의 여러 가지 사회적 폐습, 특히 상류 계층의 퇴폐적인 생활을 신랄하게 지적하였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적절하게 설파하였다. 나아가 암브로시오는 성모 공경과 순교자 공경 신심을 드높이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는 바쁜 활동 중에도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신자들에게 한 강론이다.

 

 

 

생명의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준다 (Panis hic remissio peccatorum).”는 391년 암브로시오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마지막 축복’을 주석한 작품, 「성조」 9,39에 나오는 대목이다.


암브로시오는 창세기 49장 20절 “아세르는 양식이 넉넉하여 임금에게 진미를 올리리라.”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선물의 새로움과 절대적인 우위성을 강조한다.


영양이 가장 풍부한 음식인 그리스도 자신과 비교할 때 이전에 인간이 먹고 마신 음식은 영양이 풍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다”(2코린 8,9 참조).


정확히 이 음식은 그리스도 자신이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로마 11,33)이 감추어진 보물, 그분의 몸과 “(참된) 양식”(창세 49,20)의 성사, 곧 인간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생기를 돋우는 풍요로운 양식(요한 6,35 참조)인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 빵을 먹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어, 믿는 이들에게 이 빵을 나누어주도록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우리에게 사제가 날마다 자신의 말로 축성하는 그 빵을 주신다”(「성조」, 9,38).


또한, 암브로시오는 요한 6,48-51을 인용하면서 성체성사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라고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 받아 모실 수 있다.


… 그분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 사실 자신을 돌이켜본 사람은 이 빵을 먹는다(1코린 11,28 참조). 또 이 빵은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죄인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성조」, 9,39).

 

 

 


성체성사는 죄를 용서해 준다

 

 

암브로시오는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요소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내세우는 마르코 전통의 관점을 요한의 관점과 대조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생명의 증여자인 그분의 인격을 표현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님 죽음의 사건은 여전히 현존하지만, 성체성사가 생명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부활의 축제 사건으로 극복되었다. 부활 사건은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죄를 용서해 준다. 이 때문에 암브로시오는 주님의 식탁에 참석하려는 모든 이에게 정결한 마음을 요구한다.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난 뒤에 주님의 몸을 받아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기 전에 갖추어야 할 이러한 신중한 태도를 고려할 때 성체성사가 죄를 용서해 준다는 문장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의 빵을 죄의 용서로,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소개하는 문장을 그의 여러 작품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주님의 식탁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죄의 용서를 기뻐하고,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버리도록 한다.


이러한 전망에서 성체성사는 단순한 용서 행위, 치유와 성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죄가 없는 순결한 상태에 대한 확증으로 드러난다.


이때 세례성사는 그리스도인을 이러한 무죄의 상태로 이끌고, 참회성사는 세례를 받은 이후, 죄의 상태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무죄의 상태로 다시 인도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생명의 빵은 인간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을 합당하게 받아 모시며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면서 하느님과 이미 친교를 맺는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전례생활의 시작이며 정점이고 마침이다. 다른 교부들과 달리 암브로시오는 성체성사의 긍정적인 효과 가운데 하나가 곧 죄의 용서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모든 전례는 성체성사와 연결되었을 때에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만큼 성체성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체를 모시기 전, 각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전례시기에 따라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사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잘못과 실수 그리고 죄에 대해 참회할 시간도 없이 미사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자.


안봉환 스테파노 - 전주교구 신부. 교황청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성안셀모대학교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주가톨릭신학원 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전례학과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죄를 씻는 눈물은 좋은 눈물입니다

장인산

 

 

피에르쉬 블레라스 -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회심 시키는 성 암브로시오

 

“죄를 씻는 눈물은 좋은 눈물입니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 교부(339-397년)의 말씀이다. 암브로시오는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대 그레고리오와 함께 라틴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회학자로 공경을 받는 분이다 (4월호 ‘교부들의 명언’ 참조). 그의 가르침 가운데 ‘좋은 눈물’에 대해 살펴보자.

 

 

 

착한 이가 죄의 아픔을 느낀다

 


행복선언 가운데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하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여러분이 잘못했던 것을 아파하십시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로 깨끗이 목욕하십시오! …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울어야 하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루카 복음 해설」, 5,55).


인간은 나약하여 누구나 죄의 유혹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을 뉘우치며 속죄하고,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쳐나가야 한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사람은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받는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한다.


“죄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착한 영혼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은 상처의 중한 상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병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 때문에 쾌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처의 고통을 느끼면 그곳에 생명의 느낌이 있는 것이니, 느낀다는 것 자체가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다윗의 변론」, 1,9,47; 「통회」, 2,10,92).

 

 

 

통회의 눈물로 용서받은 이들

 


우리는 성경에서 통회의 눈물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다윗 임금,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사도 등을 모범 인물로 제시한다.


다윗 임금은 한때 자기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와 간통하고 그 죄를 숨기고자 우리야 장군마저 살해하는 중죄를 지었으나(2사무 11,2-17) 통회하는 눈물로 죄의 용서를 받았다.


주님을 배반했던 유다 사도도 만일 통회했더라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암브로시오 주교는 이렇게 강론하였다(「참회론」, 2,8,69).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던 베드로는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번 울고 용서를 받았다면,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겠습니까! 다윗의 눈물은 그에게 양식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재를 밥처럼 먹었으며, 그의 음료수에는 눈물이 섞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며 탄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쳐다보았을 때 베드로는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쉬지 않고 주님의 대전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다윗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께 저의 눈을 듭니다. 제 눈에서 눈물이 시내 되어 흐릅니다’”(「다윗의 변론」, 1,6,25).


그는 늘 신자들에게 성경의 표양을 따르자고 강조하였다. “눈물로 당신의 상처를 덮으십시오! 복음에 나오는 그 여인도 죄와 냄새 나는 잘못을 눈물로 덮었고,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었을 때(루카 7,36 이하) 자기 자신의 죄를 씻었던 것입니다”(「참회론」, 2,8,66).


눈물은 진정한 회개의 표시이며(「시편 118 해설」, 17,32-35)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루카 복음 해설」, 10,93). 또한 눈물은 간절한 청원의 표현이다(「참회론」, 2,8,69).


암브로시오 주교는 신자들이 눈물의 효과를 깨닫게 되기를 원했으며(「참회론」, 1,16,90), 성주간 목요일 저녁미사 때는 이렇게 강론하였다.


“이제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자신을 위해 그 귀한 눈물을 흘리셨던 것같이 부디 우리를 위해서도 울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의 얼굴도 우리를 향해 돌아서실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내려주십니다”(「창조」, 5,24,90).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니네베 주민들이 울면서 죄를 뉘우쳤을 때 하느님은 마음을 돌이켜 내리시려던 벌을 거두셨다(요나 4,10-11). “이만큼 통회의 힘은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습니다”(「참회론」, 2,6,48).


또 히즈키야 임금은 이사야로부터 죄의 벌로 죽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뒤, 하느님께 기도하며 눈물로써 간청한 결과 하느님께서 뜻을 돌이켜 그가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다(이사 38,5; 「시편 해설」, 40,20).


다윗 임금도 죄를 저질렀지만 눈물로 죄의 용서를 청했고,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던 뜻을 거두셨다(「참회론」, 2,6). 눈물은 이처럼 죄인을 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이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눈물 흘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자비심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도 과부인 어머니의 눈물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참회론」, 1,5,22).


눈물로 주님께 돌아오고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은 주님께서 저버리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해 주신다. 주님은 당신께로 다시 돌아와 회개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 성경에도 쓰여있듯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한다”(「참회론」, 1,5,26).


죄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눈물은 의인들에게도 유익하다. 의인들의 마음속에도 위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해설」, 6,18). 눈물은 신자들의 마음을 신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랑을 강하게 만들어준다(「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서간」, 38).


눈물은 통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보강하며 위로를 선사한다(「형의 죽음」, 1,5). 눈물을 흘리면, 전에는 부끄러운 죄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던 사람의 양심이 가벼워지고 명랑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셔서 무서운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시편 해설」, 47,4).

 

 

 


함께 울며 슬퍼할 줄 알게 하소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신자들의 영혼 구원과 자신의 구원에 대한 염려에서 굳건한 신뢰심으로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기도했고, 특히 죄인들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러 올 때마다 같이 울던 그의 기도가, 사제인 내게 큰 울림을 준다.


“주님은 고아와 같은 저를 사제직에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사제로서 멸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무엇보다도 저에게 깊은 마음에서부터 죄인을 측은히 여기도록 깨우침의 은혜를 내려주소서. 이것이 가장 큰 덕행이 옵니다.


죄에 떨어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동정심을 가지도록 도와주시고, 절대로 교만해져서 야단치지 않게 하시며, 오히려 그와 함께 울며 슬퍼할 줄 알게 하소서. 제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울게 하시고, ‘타마르가 나보다 더 옳다.’(창세 38,26)는 성경말씀을 마음에 두며 살도록 도와주소서!”(「참회론」, 2,8,73).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강서동 주임으로 본당사목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장인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Putatis quia pacem veni dare in terram? Non, dico vobis, sed separationem).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성경본문에 관하여 암브로시오 교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이제 마음이 변하시어 이웃 사랑이고 예의고 모조리 다 파괴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분열을 명하셨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친척 사이를 파괴시키러 오셨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루카 복음 해설」, 7,135)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

 

 

성 암브로시오 주교는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 일곱 번째 행복, 곧 평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위에 언급한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의 집과 같다. 하느님을 위한 집인지 또는 마귀의 집이 되는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이 집에 식구들이 있는데, 둘은 셋을 거스르고, 셋은 둘을 거슬러 살고 있다. 둘은 영혼과 육신을 의미하고, 셋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뜻한다(「루카 복음 해설」, 7,138-139).


이와 같이 갈라져서 살고 있던 미련한 상태의 비지성적 인간을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강생 구속하시어 변하게 해주셔서 지성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39).


“전에는 우리 인간이 동물과 비슷하여 지성을 모르고, 육적, 세속적인 존재였기에 성경에서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어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을 넣어주시고 우리를 영신적인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루카 복음 해설」, 7,13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써 영혼과 육신 사이에 최종 평화를 이루어주셨다. 영육 간의 불목은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발생하였고, 그 결과 영육이 항상 분열을 일으켜, 함께 덕행의 길로 정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둘을 하나 되게 하셨고, 당신 몸을 바쳐 적개심을 없애주셨다. 평화의 주님께서는 과거의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해 주셨다. 그 결과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하나가 되고, 또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그리스도 안에서 영육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되어, 이제는 육신이 더 고귀한 영혼에게 순명하여 따르고, 죄의 허물을 깨끗이 용서받고 천상의 길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육신은 영혼을 감싸주며,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다(「루카 복음 해설」, 7,141).

 

 


육신의 죄악 없애고자 불과 칼을

 

 

그리스도 덕분에 인간의 영혼이 본래의 위치를 되찾아 돌아왔다. 바로 이 점을 들어 암브로시오 교부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 왜 그리스도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열은 그분이 주시려는 평화의 은혜와 상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분열은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먼저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에 폭력배가 숨어 살 듯이 쾌락이 기거하면 악과 혼인한 것처럼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붙어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불을 가져오셔서 육신의 죄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칼을 가지고 오셔서 예리한 칼로 우리의 뼛속 생각까지도 꿰뚫으십니다.


그리하여 영혼과 육신이 새롭게 되고 젊어지게 됩니다. 영혼은 지금까지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못했던 생활을 이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던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무성한 가지를 쳤던 그릇된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루카 복음 해설」, 7,145).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와 같이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마귀의 은신처 노릇을 하는 거처로 비유하였다. 약하고 병든 영혼은 마귀와의 잘못된 결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을 분열은 바로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루카 복음 해설」, 7,143.145-146).


암브로시오 교부는 신자들에게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주님은 돌아가시면서 이 잘못된 결합을 풀어주셨으며(「루카 복음 해설」, 10,126), 영혼과 육신의 원수지간 담을 헐어버리시고 평화를 회복시켜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영혼과 육신이 같은 것을 바라보고 느끼며, 둘이 협력하여 덕행으로 나아가게 된다(「루카 복음 해설」, 3,26).


그리스도께서는 이 평화를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어 계속 나누어주게끔 하셨다(「루카 복음 해설」, 10,172). 주님께서 제자들 마음속에 심어주신 평화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서간집」, 11,6).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강서동본당 주임으로 본당사목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성 암브로시오

 

 

고대 말 - 중세 초 특징 모두 반영된 가장 오래된 성인 이미지

 


- 작품 해설 : <성 암브로시오>, 5세기, 모자이크, 성 암브로시오 성당 내부의 성 빅토레 인 치엘 도로 경당, 밀라노.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밀라노 칙령(313년)을 꼽을 수 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수천명의 신들이 있었고, 율리우스 시저 이후 많은 황제들이 신격화될 정도로 로마제국은 다신교 국가이자 신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유독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숨어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신격화된 황제를 비롯하여 로마제국에서 인정한 다른 우상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 교인들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게다가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믿어도 좋은 종교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되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건축물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전례 의식도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바로 암브로시오 성인이 밀라노에서 주교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밀라노는 로마제국의 두 번째 수도이기도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아고스티노, 성 예로니모,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4대 교부학자 중의 한 분이다. 성인이 쓴 많은 저서와 설교집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정립에 뿌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교리가 아직 성립 단계였기 때문에 성인은 이단교리로부터 정통교리를 지켜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밀라노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당은 단연 성 암브로시오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던 성 비토레 순교자 무덤 위에 암브로시오 성인이 379년부터 386년에 걸쳐 건립한 곳이다. 바로 이 성당 안에 가장 오래된 성인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5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로 인물의 머리 위쪽에 ‘AMBROSIUS’라는 성인의 이름을 써 놓았다. 성인이 선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한 작품이기에 그의 실제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진 듯 얼굴 표현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짧은 머리에 짧은 수염을 하고 있으며 주교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이미지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으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된 시기에 제작된 귀한 작품으로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된 성인의 얼굴과 발 아래의 그림자 표현은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던 고대 로마 회화 양식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나, 단순화된 옷주름과 인체를 평면화한 모습은 중세 회화 양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5일,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http://blog.naver.com/bella4040)]

 

 

 

 

역사적 의미 깊은 성 암브로시오 성당

 

 

 

- 작품 해설 : <암브로시오의 생애가 있는 제대>(부분), 8-9세기, 금, 은, 보석, 85×220×122cm, 암브로시오 성당, 밀라노.
 


성 암브로시오는 339년 독일 트리어(Trier)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그리스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고, 부친이 사망한 후에는 가족이 로마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라틴어, 문학, 수사학, 그리스어 등을 공부했다.


365년경 제국의 공무를 맡기 시작하였으며 370년에는 당시 황제 발렌티아누스에 의해 리구리아, 에밀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이 지방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에밀리아와 리구리아는 오늘날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져 오는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한 지방이다. 이때가 암브로시오의 나이가 30이 갓 넘었으니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인물로 발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당시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극심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아리우스파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구원의 도구로 창조되었으나 신과 동일체는 아니라고 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아리우스 파였던 아욱센지우스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그를 따르던 아리우스파와 정통 교리를 따르던 신자들은 극심한 대립 상태에 빠졌다.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의 해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그러자 군중 전체가 한목소리를 냈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선출합시다!”


암브로시오로서는 당시 예비신자로서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였는데 주교를 맡으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성직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적대적이었던 아리우스 파와 정통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를 원하였고, 대중을 설득하는 타협 능력을 인정받아 그 일대의 주교들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암브로시오는 주교로 선출되었다.


밀라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자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성 암브로시오성당은 암브로시오가 주교였을 당시 직접 건립한 것으로 이후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79년에서 387년으로 이 곳은 순교자들의 무덤 터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그리스도교의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던 건물이 있었던 터였다고 하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397년 선종한 후 이곳에 묻혀 오늘날까지 유해가 보존되고 있다.


이 성당은 9세기에 들어서 교회의 제대 뒤쪽 부분을 확장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이 된 것은 10세기 경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아치와, 기둥들, 그리고 기둥 머리 조각 장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성당의 백미는 중세 미술의 보물이기도 한 9세기에 제작된 제대로서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보물이다.


신자석을 향한 부분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뒤쪽에는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가 부조로 제작된 것으로 중세 성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밀라노에는 유명한 성당들이 많이 있지만 성 암브로시오성당이 주는 고요함과 신비함, 그리고 평화로움은 그 어느 성당에 겨눌 수 없을 정도라 생각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2일,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미사 중 잠든 성인 “마르티노 장례식 다녀와”

 

- 작품 해설 : 시모네 마르티니, <성 암브로시오의 꿈>, 14세기, 프레스코 벽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 성 마르티노 경당, 아시시.
 

 

주교가 된 이후 암브로시오는 가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누이인 성녀 마르첼리아나를 위해서는 부동산을 조금 남겨두는 등 세상사를 정리했다. 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알았기에 교부들의 저서를 공부했음은 물론 사목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매일 미사를 집전하였고, 늘 방문을 열어놓고 그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했으니 신자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성인을 존경하였다.


당시에는 아리우스파가 기세를 떨쳤지만 그는 정통 교리를 지켜내는데 무엇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예로 386년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아리우스파의 승인을 법으로 선포했고, 이들의 모임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관할 구역 단 한 곳의 교회도 이단자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신자들은 황제의 법을 어긴 암브로시오 주교를 걱정하여 함께 교회에 들어가 바리게이드를 쳤고, 황제군은 교회를 포위하고는 안에 있던 자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부활절 날 문을 열어보니 이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성가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선창하면 신자들은 응답하였고, 혹은 신자들끼리 서로 응송하면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가가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암브로시오는 후에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황제는 교회 안에 존재하며 그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의 저서에서 명확히 했다.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교부로서 교회가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졌으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 인식하게 하였다.”라고 가톨릭 대사전은 소개하고 있다.


암브로시오가 주교의 직책을 맡았던 시절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있다.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7000명이 희생되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명을 내린 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로서 그는 테살로니카인들의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이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촉구하였고, 만일 응하지 않으면 그의 봉헌을 제단에서 받지 않을 것이며, 미사 집전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결국 황제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주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만 했다. 이 황제가 바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인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를 위해 애도사를 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앙 앞에서 지위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으며, 황제 역시 일반 신자와 신 앞에서 동일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황제가 사망한 2년 후인 397년 4월 4일 암브로시오 성인도 선종하였다. 사망 직전 성인은 십자가 형태로 팔을 편 채 몇 시간 동안 기도를 하다가 영면하였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지난주에 소개한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성당 제대 아래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의 꿈’이라는 이 그림은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성 마르티노 경당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용은 성인이 미사를 집전 하던 중 첫 제2독서인 서간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아 미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한 사제가 성인을 깨우자 암브로시오 성인이 말하기를 친구 성 마르티노가 선종하여 잠시 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두 성인은 같은 해인 379년 사망했다.


그림은 성인이 앉아서 잠을 자고 있는 사이 한 사제가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우고 있으며, 또 다른 성직자는 성인 앞에서 성서를 들고 있는 광경인데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듯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9일,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s/simone/3assisi/martin_2/60medit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