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권요셉 2015. 1. 27. 00:04

성녀 안젤라 메리치(Saint Angela Merici)

 

 

 

 

  

 축      일

 1월 27일  

 신      분

 동정녀, 3회원, 설립자

 활동지역

 브레시아(Brescia)

 활동연도

 650년-727년 

 같은이름

 앤젤라, 엔젤라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르다(Garda) 호수 남쪽 데센자노(Desenzano)에서 태어나 경건한 신앙인으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었고, 성인들의 금욕 생활에 감명을 받아 금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3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평생 동안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는데, 쌍둥이같이 자라던 15세의 언니와 브레시아 시민이라는 귀족 작위와 넓은 땅을 가진 영주였던 아버지 조반니(Giovanni Merici)와 어머니를 연달아 여의고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5년간 휴양지로 유명한 살로(Salo)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안젤라는 작은 형제회 재속회(3회)에 입회하여 기도와 가난, 극기의 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신을 이웃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부모처럼 돌보아주던 외삼촌의 사망 후 고향 데센자노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았는데, 특히 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1516년 안젤라는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브레시아의 귀족 파텐골라(Patengola) 가족을 위로하러 브레시아에 갔다가 그들의 청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성녀 안젤라는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속죄와 금욕생활을 하는 한편 고향에서와 같이 청소년들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1524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 해 로마를 순례한 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게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밝히고 허가를 받아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카알 5세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1528년 브레시아가 점령당하자 크레모나(Cremona)로 피난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 심한 병을 앓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1530년 전쟁이 끝나 브레시아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이듬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1535년 11월 25일 28명의 동정녀들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Afra) 성당에서 영성체를 하고 성녀 안젤라가 만든 규칙에 따라 청빈, 정결, 순명을 지키는 회원이 될 것을 서명함으로써 '우르술라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1537년 성녀 안젤라가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특히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하고자 하였다. 가톨릭 여성 교육을 표방한 수녀회는 우르술라회가 첫 번째이다. 초기에 그들은 가족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수도복이 아닌 단순한 복장으로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였다. 성녀 안젤라는 1540년 1월 27일 사망하여 성 아프라 성당에 묻혔고, 1768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성녀 안젤라 메리치

 

우르술라 수녀회 창립자인 안젤라 메리치는 청소년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청소년과 여성 교육에 헌신


현명하고 자비로움으로 빛을 발하며

타락한 죄인들위해 속죄와 금욕생활

 

15세기 후반 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새롭게 일기 시작한 사조에 전통적인 종교적 삶도 문을 열만큼 격변의 시기였다. 고도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였고 귀족들은 이같은 흐름에 맞춰 학문과 예술을 지원했다.


알렉산더 6세 같은 교황도 뛰어난 건축물 건립에 많은 후원을 쏟았지만 한편 그런 관심들과는 반대로 신자들에 대한 영적지도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들은 멀어져 갔고 또 시민들의 윤리와 생활 방식도 느슨해지고 문란해져 가는 양상을 보였다.

 

뜻있는 평신도들은 교회가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뻗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우르술라 수녀회 창립자인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470/1474~1540)도 당시 사회 안에 뛰어들어 청소년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1470년 1474년 사이 가르다 (Garda) 호수 서안 데센차노(Desenzano)의 지방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안젤라 메리치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5살 무렵부터 안젤라에게 성인의 삶을 들려주는 등 신앙 교육을 시켰고 그녀 역시 성인전을 즐겨 읽으며 거기서 성인들의 생활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안젤라 메리치의 복자품 심의 과정에서 나온 증언에서도 “그녀는 5살 되던 무렵에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성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을 때 벌써 그들과 같은 영적, 관상적 삶을 살고 싶어 했다”는 내용이 알려지고 있다.

 

13세 때 첫 영성체를 한 후 나름대로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서약했던 안젤라는 이후 부모님과 쌍둥이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살로(Salo)에 사는 외삼촌 집으로 보내져 5년여 동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외삼촌이 속한 비안코시 가문은 다소 하급 귀족이었고 그런 만큼 이전의 부모님 집에서와는 다른 형태의 삶이었다. 또 살로 지역은 유명한 휴양지였기 때문에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도덕적이고 향락적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안젤라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산에 올라가 조용히 기도하곤 했다. 또 프란치스코 재속회(3회)에 가입하여 기도와 가난 극기 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신을 ‘이웃을 위한 속죄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했다.

 

1497~1498년경 안젤라는 ‘브루다초의 계시’(Vision di Brudazzo)라 불리는 놀라운 일을 겪었다. 어느날 브루다초의 들판에서 죽은 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메리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머리를 장식한 동정녀들이 나타났는데 그들 중 죽은 언니나 친구로 여겨지는 한 처녀가 ‘브레시아에 선택받은 동정녀들의 모임을 만들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했다. 이 계시는 그녀의 마음에 강하게 각인되어졌고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20살이 되어 데센차노로 귀향한 메리치는 그곳에서 1516년까지 살았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 장상들에 의해 브레시아 지방으로 보내지게 됐다. 당시 브레시아 지방은 신앙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자녀들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지냈다. 성직 수도자들조차 타락한 생활상을 보이고 있었다.


메리치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죄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한편 속죄와 금욕 생활을 하면서 청소년들에게는 종교 교육을 하였다. 또 교육만이 가정과 사회를 그리스도화 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 그는 모든 계층의 소녀들에게 교육 받을 기회를 주었다.

 

일상적인 가사 노동 중에서도 기도와 속죄 생활로 내적 깊이를 더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움, 현명함, 모성적인 자비로움을 보여 빛을 발했던 안젤라는 그곳 사람들에게 점차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됐고 ‘브레시아의 안젤라’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우르술라회’ 창설

 

 

그녀가 수도회 설립을 준비한 것은 50세가 넘어서였다. 1525년 교황 글레멘스 7세가 특별 성년을 선포하고 순례를 권장했는데 이때 로마를 방문한 안젤라는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며 교황의 허가를 청했다.

 

이후 1530년 메리치와 함께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결성했고 1532년 바랄로 산으로 성지 순례를 가서는 보리수나무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들을 봉헌했다.


1535년 28명으로 늘어난 동정녀들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며 메리치가 만든 규칙에 따라 3대 서원을 함으로써 ‘우르술라회’를 공식 창설했으며 안젤라는 초대 원장으로 선출됐다.


초창기 회원들은 각자 살던 집에서 머물며 사도직을 수행해 갔다. 평범한 모습으로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봉사했고 이웃 사랑에 헌신했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종교적인 진리를 가르치며 올바르게 이끄는 일에 몰두했다.

 

우르술라회를 비롯 안젤라 메리치의 정신을 따르는 수녀회들은 계속해서 퍼져나갔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 교회 안에서 교육 문화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안젤라 메리치는 1540년 1월 27일 사망했으며 1807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됐다. 이때 ‘우르술라회의 창립자’라는 칭호가 부여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30일, 이주연 기자]

 


 

새로운 형태의 여자 수도회

구본식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여자 수도회의 쇄신을 위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 동안 중세사회의 관습과 사회혼란으로 생성된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 폐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수녀원의 봉쇄생활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장상들이 너무 젊은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었다.
 
1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교회 역시 일치해 가면서 쇄신의 길이 열리게 된다. 공의회는 기존의 수도회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수녀들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보장할 수 없는 시골보다는 도시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봉쇄구역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마흔 살 이전이나 대서원을 한 지 팔 년이 되지 않은 수녀는 장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린 소녀가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한 주교나 그 대리인이 심사한 뒤에 첫서원을 하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만들었다. 여성 수도생활은 기존 수도회의 쇄신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탄생하면서 크게 바뀐다.
 
 


환경의 변화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이 다양해지고 여성의 소임도 필요해졌다.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중세 때처럼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문예부흥시대를 거치면서 여성관이 많이 변했고 여성의 사회지위도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경건한 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무렵이다. 여성 수도자들은 대부분 관상수도생활을 했지만 환자방문이나 병원 등에서 봉사하는 생활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사도직에 대한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교육과 선교 그리고 자선활동에 여성들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도 봉쇄구역이나 남편이라는 보호막 없이도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성의 삶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난 것이다. 시대의 새로운 요구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가 탄생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우르술라(Ursula)회
 
새로운 여자 수도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르술라(Ursula)회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우르술라회 창립자는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470-1540년)이다. 성녀 자신은 어떤 단체나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전연 가지지 않았지만 성녀의 활동으로 새로운 수도단체가 생성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메리치 성녀가 활동한 지역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로나 사이에 있는 브레시아(Brescia) 지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벌인 전쟁의 여파가 심각하게 남아있던 곳이다. 사회기강은 무너졌고 성병인 매독이 젊은 여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우르술라회는 바로 이때 소녀들을 이 병에서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
 
메리치 성녀는 과부와 친구들과 함께 매독에 걸렸거나 다른 병에 걸린 여자들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드나들고 있었다. 메리치 성녀 일행은 환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가정도 방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정을 방문하고는 더 어린 소녀들이 물질적으로나 윤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사는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532년경부터 메리치 성녀는 친구와 함께 매독이 나은 아가씨들과 어린 소녀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집을 마련하기가 무섭게 초만원을 이뤄 이 수용시설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소녀들이 자기 집에 그대로 살면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방법으로, 동정녀 선생들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결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메리치 성녀가 하는 이 일을 함께하면서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처녀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1535년에 ‘성녀 우르술라의 동정녀회’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1536년에 브레시아의 주교가 인가하고 1544년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수녀회 설립을 인가하였다. 이 새로운 수녀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활동을 한다. 하나는 한 장소에서 봉사하는 일과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동정생활을 하는 형태였다.
 
메리치 성녀의 이러한 생각은, 초대 공동체의 하느님께 바쳐진 삶의 형태라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성녀가 봉쇄수도생활을 가볍게 여겨서라기보다는 바로 그 시대 그 장소가 요구하는 영적이며 사도적인 소임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다른 수도회 역시 그 당시의 사회적이며 교회의 요청에 따라 세워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르술라회 역시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여성의 소임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형식의 수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녀는 이런 사도적 삶을 살기 위해서 복음삼덕을 강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먼저 순결을 강조하는데, 동정으로 산다는 것은 그 높으신 분의 각시가 됨을 뜻한다는 것이다. 성녀는 동정성을 바로 완덕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사랑이 부족하거나 질투, 태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신랑에 대한 충성의 부족 등 어떤 결함도 다 동정성을 거스리는 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창립 초기부터 동정성은 입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본요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회하기 위해서는 동정성이 증명되어야만 하였다.
 
순명 역시 성스런 삶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다. 순명은 하느님의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영혼의 빛과 같은 덕이라고 하였다. 또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법과 그리고 수도회의 장상과 가정의 부모한테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심지어 일상사조차 하느님 뜻의 표현이므로 순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것이 바로 가난이다. 특히 정신적인 관점에서 강조되었다. 가난을 따르는 데는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재산을 전적으로 포기하도록 형식으로 요구하지도 않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이웃을 돕기 위해서는 오히려 재산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스스로 일을 하며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가난의 정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메리치 성녀의 영성과 삶의 특징은 사랑이다. 밤에는 신랑인 하느님과 일치하는 긴 시간의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낮에는 소녀들을 교육하고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생활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수도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던 소녀들이 우르술라회로 몰려들었고 나아가 이들이 가정의 소녀들을 교육함으로써 가정환경이 타락한 많은 가정들을 개선할 수 있었다.
 
우르술라회는 이렇게 가정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호하고 또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브레시아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명문가의 과부들을 각 지역의 책임자로 세웠다. 성녀는 위원회와 함께 각 지역의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남자 교육자와 보호자와 여자 교육생과는 아주 엄격한 경계선을 그어놓았다. 구역의 책임자들은 과부들이었지만 동정녀 선생들은 영적 지도를 담당했다. 처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규칙을 가르치는 일은 동정녀 선생들이 하였다. 또한 나이 지긋한 남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필요에 따른 논의를 함께하고 경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상담을 했으며 가정에서 사는 젊은 동정녀들을 보호하는 일도 하였다.
 
처음에 이들은 다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가난과 순명과 영원한 동정을 지키며 살겠다고만 하였지 어떤 서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가정에 살고 있었지만 진정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천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봉사하기 위해서 동정으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동정녀 선생들은 보름마다 소녀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더욱이 축일 때는 꼭 방문을 함으로써 올바로 살아가도록 지도를 하였다.
 
우르술라회는 소녀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사도적 사업과 동정으로 봉헌된 삶을 사는 두 가지 형태를 가졌는데, 창립자가 죽고 난 후에 봉헌된 동정의 삶에 대해서는 큰 반대가 따랐고 심지어 이단으로 의심받기까지 하였다. 본당신부들의 불신이 있었고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반대였다. 이러한 주변의 편견에 대해서 옹호하는 책자를 내는 한편, 새 총장 로드로네(Lodrone) 수녀는 아무런 표시 없이 평상복으로 사는 회원에게 가죽띠라도 매게 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자 메리치 성녀의 이상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과 변화해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바깥에서는 공격을 받고 안에서는 분열이 일었다. 1544년에 수도회 인가칙령이 났지만 혼란이 계속되자 새 총장 수녀가 반대자들을 몰아내고 가죽띠를 착용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수도원의 형태를 띠게 된다.
 
1566년, 밀라노에 부임한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우르술라회를 창설하고 ‘밀라노 우르술라회의 규칙’을 만들었다. 우르술라회가 세워지던 당시의 밀라노는 우르술라회가 창립될 당시의 브레시아와 상황이 비슷하였다. 성 가롤로는 동정녀들의 우르술라회와 과부들의 안나회 두 회를 창설하여 사회에서 사도적인 일을 하게 하였다. 1580년에 성 가롤로가 사목감사 일로 브레시아에 갔을 때, 어렸던 동정녀들이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으로써 장상의 일이 과부들한테서 이들 동정녀들한테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의 재속수도회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15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여성들의 사도적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자적인 모임은 메리치 성녀가 활동한 초기의 활동정신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한 집에 모여 살기도 하였고 처음엔 모여 사는 사람이 적었지만 해가 거듭하면서 숫자가 불어났다. 결국 이제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수도생활이, 복음삼덕을 따르고 회개와 기도의 삶을 살지만 장엄한 서원을 하지 않고 간단한 서원만 하고 여러 가지 사도직 활동을 위해서는 쉽게 봉쇄구역을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수도형태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우르술라회는 세 가지 형태의 수도생활을 확산시켰다. 즉 재속단체나 교구소속 단체로서 재속회 같은 것이 그 하나이고, 수도회로 분류되는 단체생활을 하며 간단한 서원을 하는 형태가 그 두 번째이며, 세 번째 형태로서 아주 전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장엄서원을 하는 수도형태였다.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 ‧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7년 1월호]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1470년경 브레시아 근처의 데센차노에서 태어났다. 성 프란치스코의 제3회에 입회하고, 처녀들을 모아 그들에게 자선 사업에 대해 가르쳤다. 1535년 브레시아에서 성녀 우르술라의 이름을 지닌 수녀회를 창립했는데, 그 회의 목적은 가난한 소녀들을 교육시켜 그리스도인 생활로 이끄는 데에 있었다. 1540년 세상을 떠났다.

 

 피에트로 리지에르 칼치나르디 - 브레시아의 안젤라의 환시

 

 

 

성녀 안젤라 메리치의 유언에서

 

"그분은 만사를 은혜로이 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원장님들과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자매들은 보살피고 다스릴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열성으로 이끌려지는 저항과 마음 상태를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이중의 사랑에다 기초를 두어야만 여러분의 보살핌과 다스림은 선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복음서에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 즉 좋은 마음과 사랑으로 불타는 영혼은 선하고 좋은 일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즉, 사랑과 애덕을 지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이 말은 분명히 "사랑은 죄를 범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또 권합니다. 여러분의 각 자매들이 지닌 특성을 참작하여 그들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격과 마음 상태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들은 참된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들은 천 명의 자녀들을 갖고 있다 해도 그 자녀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새겨 그 중에 한 사람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참된 사랑의 열매입니다. 또 자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 각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커집니다. 이보다 더 풍부한 모성을 지닌 영신의 어머니들은 이와 똑같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은 혈육에서 솟아 나오는 사랑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원장님들이여,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매들을 참되고도 생동적인 애덕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자매들 하나하나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오만과 거친 태도가 아닌 사랑과 겸손과 자비로 자매들을 이끌어 주어, 모든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기쁘게 대하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서 배워라." 또 지혜서에 나오는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은혜로이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러분은 또 모든 이들을 가능한 한 온유하게 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특히 강제력을 사용하여 목적을 이루려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시며 오직 암시를 주시고 부르시고 권고하실 뿐입니다. 때로는 한층 더 엄격한 권위를 행사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상황의 중요성과 개개인의 필요와 성격을 고려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다만 영혼에 대해 사랑과 열정으로 이끌려져야 합니다.

 

피에트로 리지에르 칼치나르디 - 성녀 안젤라메리치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