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5. 2. 9. 23:46

성녀 스콜라스티카(Saint Scholastica)

 

 

 축      일

 2월 10일   

 신      분

 수녀원장 

 활동지역

 피우마롤라(Piumarola)

 활동연도

 480년 경  - 555/560년 경 

 같은이름

 스꼴라스띠까, 스콜라스띠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에 그녀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성 베네딕투스를 만난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투스 성인과 수사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몬테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Fleury)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세계의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가톨릭 홈)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

 

 

 

 

성 베네딕토의 여동생으로서 480년경 움브리아(이탈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자기 오빠와 같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그를 따라 몬테 카시노에 갔다가 그 곳에서 547년경 세상을 떠났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화집]에서
(Lib. 2, 33: PL 66, 194-196)

 

그는 더 많이 사랑했기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전능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던 성 베네딕토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는 매년 한 번씩 자기 오빠를 방문했다. 서로 만나는 때이면 베네딕토는 그를 만나려고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수도원 소유지로 내려가곤 했다.

 

한 번은 매년 해오던 대로 스콜라스티카가 찾아오자 공경하올 오빠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내려가서 여동생을 만났다. 그들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온종일을 보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함께 식사를 했다. 식탁에서 거룩한 대화를 계속하던 중 밤이 깊어지자 이 경건한 여인은 오빠에게 청했다. "오늘 밤은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아침이 될 때까지 천상 기쁨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오빠가 대답했다. "스콜라스티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내가 수도원에서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않니?"

 

오빠의 거절을 들었을 때 스콜라스티카는 식탁 위에 자기 손을 모아 그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전능하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윽고 식탁에서 머리를 들었을 째 갑자기 번갯불과 우레가 일어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베네딕토와 그의 동료들은 문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베네딕토는 마음이 괴로워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콜라스티카,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너는 무슨 일을 했니?" 스콜라스티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뿐이었다. "제가 오빠에게 청했을 때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더니 하느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떠나실 수 있다면 떠나십시오. 여기에 저를 남겨 두시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십시오."

 

베네딕토는 자원하여 거기에 머무르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온 밤을 함께 지내면서 영적 생활에 대해 거룩한 대화를 마음껏 나눌 수 있었다.

 

이 여동생은 오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요한의 말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흘 후 베네딕토가 방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여동생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비둘기의 형상을 지니고 천상 앞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동생의 그렇게도 큰 영광을 바라보고 넘치는 기쁨으로 찬미의 송가를 불러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그리고 나서 형제 몇 사람을 보내어 여동생의 유해를 수도원으로 모셔 오게 하여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묘지에 안장하였다.

 

생시에 항상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일치되었던 이들 오누이는 그 육신도 함께 묻히게 되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

 

성 베네딕투스(7월 11일, Benedictus)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2권 33장에 의하면 480년에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오빠와 같이 아주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성녀가 그리스도교 신심이 깊고 돈독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빠 성 베네딕투스가 공부를 위해 로마로 떠났을 때,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아버지와 함께 줄곧 집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베네딕투스 성인이 수비아코 동굴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에는 근처의 어느 수녀원에 있었다고 한다. 성 베네딕투스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베네딕도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에게 이곳을 맡겼다. 이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이들 남매는 매년 한 차례씩 만나 영적 담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주로 스콜라스티카가 베네딕투스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서로에게 수도생활에 있어서 지혜롭고 활기찬 지도자와 협력자가 되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갑작스런 폭풍우로 인해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일화는 베네딕도 수도회 규칙에 대한 엄격한 준수 못지않게 사랑의 힘과 덕의 승리가 중요함을 증명하는 좋은 일례이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비둘기 모양으로 승천하는 환시를 보고 누이동생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마음 깊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면서, 지체없이 몇몇 수사들을 보내 동생의 시신을 거두어 오도록 명령하고, 전부터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동생을 안장하였다.

 

몬테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 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교회는 성녀의 축일을 2월 10일에 지낸다.

 

[2013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3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문화동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