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3. 11. 22. 00:51

성녀 체칠리아(Saint Cecilia)

 

 

 축      일

 11월 22일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이태리 씨실리(Sicily of Italy)

 활동연도

 +230년경

 같은이름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여러 필사본으로 전래된 성녀 체칠리아(Caecilia)의 순교록은 5세기 중엽에 기록되었다. 그 전승들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면서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성녀 체칠리아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교도인 성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4월 14일)라는 귀족 청년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식이 끝난 후 그에게 자신은 동정 서약을 하였으며 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말하였다. 성 발레리아누스는 그 천사를 보게 해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체칠리아는 그를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 5월 25일)에게 보내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는 백합으로 장식된 관을 쓴 두 천사가 성녀 체칠리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결국 그녀의 동정서약에 동의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인 성 티부르티우스(Tibrutius, 4월 14일)도 후에 천사를 보고 세례를 받았다.

 

성 발레리아누스와 성 티부르티우스 형제는 그때부터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에 전념하다가 행정관인 알마키우스(Almachius)의 미움을 사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신전에 제사를 바치라는 행정관의 강요를 거절하여 심한 매질을 당한 후 로마 근교 파구스 트리피오에서 성 막시무스(Maximus, 4월 14일)와 함께 참수되었다. 성 막시무스는 성 발레리아누스와 성 티부르티우스가 보여준 그리스도께 대한 굳은 신앙을 보고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순교하였다.

 

 

 

성녀 체칠리아(Caecilia)는 이 세 명의 순교자들을 장례지낸 다음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녀는 용감하게 알마키우스와 논쟁하였으며, 행정관은 도저히 그녀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방법은 그 당시 흔히 사형수에게 적용된 것으로 욕실에 가두어 쪄서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목욕실에 가둔 지 24시간이 경과하였어도 성녀 체칠리아가 죽지 않자 목을 베어 죽이기로 다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형리의 서툰 솜씨로 목을 베인 후에도 성녀는 3일 동안이나 숨이 붙어 있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성녀 체칠리아에 대한 공경은 수세기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었고, 그녀의 행적들이 수많은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순교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성 티부르티우스를 비롯한 다른 성인들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25-235년 재위)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고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녀의 순교 연대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녀 체칠리아는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이다. 그 이유는 원치 않았던 결혼식 때 성녀 체칠리아는 결혼 음악과 환호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오히려 내심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행적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전해졌다. 1584년 로마에 음악원이 세워졌을 때 성녀는 이 학원의 수호자로 지칭되었고, 이후 성녀 체칠리아를 교회 음악의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성녀의 문장은 오르간이다.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

 

 

 

-로마 성 체칠리아 성당

 

 

5세기에 로마에서 체칠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녀의 수난기에 기초하는 그에 대한 공경심이 널리 전파되었다. 이 수난기에서 성녀는 동정성을 보존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한 그리스도인 여성의 완전한 본보기로 나온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32, sermo 1,7-8: CCL 38,253-254)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비파로 주님께 감사 드리며, 십현금 맞추어 읊조리어라.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여라." 새 노래를 알게 되었으니 낡은 것을 벗어 버리십시오. 새 사람, 새 계약, 새 노래. 새 노래는 낡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람들만 즉 은총을 통해 낡은 것에서 새로워져 하늘 나라의 새 계약에 속하는 사람들만 배웁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이 하늘 나라를 갈망하고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입으로써가 아니라 생활로 부르도록 합시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어떻게 하느님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부르십시오. 그러나 음에 맞지 않게 부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당신 귀에 거슬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형제들이여, 멋진 가락을 읊으십시오. 누가 당신보고 음악 전문가 앞에서 그이 마음에 들도록 노래하라고 한다면 음악 기교에 대해 별 준비가 없는 당신은 그 전문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노래할 때 벌벌 떨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음악 전문가는 잘 인식하고 비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음악 평론가이시고 만사를 일일이 살펴보시며 만사를 잘 들으시는 하느님 앞에 가서 훌륭히 노래부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도 완전한, 귀에 거슬리지 않는 멋진 노래를 부를 기교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다음 노래의 기교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가사 즉 당신의 내적인 정감을 알려 주는 듯한 그런 말들을 찾는 데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있어 훌륭히 노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언어로써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추수할 때나 포도를 거둘 때나 어떤 일을 열심히 할 때 노래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즐거움을 어떤 가사로써 표현하지만, 그 다음에는 감흥이 고조되면 말로써는 그 즐거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사 없는 가락으로 감흥을 털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쁨의 노랫가락은 마음이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출하게 하는 가락입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께가 아니라면 이 기쁨의 노랫가락은 누구에게 더 마땅히 읊을 수 있겠습니까? 실상 당신이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은 표현 불가능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로써 표현은 못해도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면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때 마음은 말의 도움 없이 기쁨으로 펼쳐져 그 기쁨의 광대함은 말의 한계를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멋진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노랫가락을 읊으십시오."


 

 

성녀 체칠리아 성녀

 

음악의 수호자인 동정 순교자 - 축일은 11월 22일

 

 

귀도레니 - 성녀 체칠리아

 


성녀 체칠리아의 생애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나 옛 전설에 의하면 체칠리아는 「로마」의 유서깊은 명문 귀족의 딸로 태어나 행복한 가정과 인연을 끊고 하느님께 몸을 바쳐 신앙과 동정을 지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찌기 발레리아노라는 귀족 청년과 체칠리아를 결혼시킬 생각을 가졌었다.성대한 결혼식날. 결혼축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체칠리아는 발레리아노에게 자기는 하느님에게 종신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에게는 천사의 특별한 보호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교도인 발레리아노는 그 천사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싶어했으므로 체칠리아는 그를 울바노 교황에게 보내 교리를 연구케 하고 마침내 영세를 받게 했다.

 

그후 발레리아노는 놀랍게도 체칠리아의 수호천사를 뚜렷이 목격하게 되어 한층더 그녀를 존경하여 그녀의 종신서원을 쾌히 동의하는 한편 그의 동생 띠불띠노까지도 신앙에로 인도했다. 가난한 이에게 막대한 재산을 나누어 주는 한편 체칠리아를 도와 복음전파에 주력했던 발레리아노는 마침내 알마키오의 미움을 사게돼 사형을 당했다.

 

동시에 체칠리아도 체포돼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을 배격, 신앙을 위해 희생할 결의를 굳혔다.

 

카를로 사라체니 - 성녀 체칠리아의 순교

 

 

마침내 체칠리아는 목욕탕에 가두어 죽이는 가혹한 형을 받았으나 24시간이 지난후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자 목을 베어 죽이기로 결정됐다. 군인들이 칼로 체칠리아의 목을 세 차례나 쳤으나, 목이 잘리지 않은 채 3일간 살아 있은 체칠리아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오른쪽 손가락 세 개와 왼쪽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3위 1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을 표했다.

 

117년 체칠리아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고 마지막 성체를 영한 후 숨을 거두었다. 그후 817년 빠스가리스 교황에 의해 체칠리아의 성해는 「로마」성 체칠리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599년 그녀의 묘를 열어보니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의 수호자인 동정순교자 성녀 체칠리아의 축일은 11월 22일이다.

[가톨릭신문, 1981년 11월 22일]

 


 

성 체칠리아가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이 된 사연

 

 

 

 

신데렐라는 왜 유리 구두를 신었을까? 어느 학자가 세계 여러 나라의 말로 된 각기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를 연구하는데, 유독 프랑스어 판에서만 신데렐라의 구두가 유리 구두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한 작가가 털가죽(vair)이라는 단어를 유리(verre)로 잘못 번역했음을 밝혀냈다. 이 실수로 말미암아 신데렐라는 결코 신을 수 없을 것 같은 유리 구두를 신게 되었다. 그 뒤로 다른 나라들에서도 신데렐라는 유리 구두를 신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철자가 비슷한 단어나 문맥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 엉뚱한 오해나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교회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도 이런 사례를 볼 수 있다. 성 체칠리아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체칠리아는 로마 제국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랐고 일찍이 어렸을 때 동정을 서약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권세 있는 이교도 집안의 청년 발레리아노와 결혼하게 되었다.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체칠리아는 결혼식장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하객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서도 마음속으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동정 서원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에 몰입하였다.

 

결혼식이 끝난 후, 체칠리아는 남편에게 자신이 예전에 동정을 서약했음을 밝히고 자신의 결심을 존중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노라는 말을 했다. 이교도였던 발레리아노는 체칠리아에게 천사를 보여 주면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체칠리아는 그를 우르바노 주교(우르바노 1세 교황)에게 보냈다. 결국 체칠리아는 자신의 동정 유지를 승인받았고, 나아가 남편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다. 발레리아노는 신기하게도 체칠리아의 수호천사를 확실히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천사에게서 발레리아노는 장미관을, 체칠리아는 백합관을 받았다.


 

 

1500년이 넘었어도 유해가 부패되지 않아

 

 

그 뒤 발레리아노는 역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동생 티부르티오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멀리하였으며, 노예들을 풀어 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러다가 행정관 알마키오에게 체포되었다. 두 형제는 끝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수하다가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다른 그리스도인 막시모와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이어서 체칠리아가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알마키오의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그 믿음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여긴 알마키오는 결국 체칠리아에게도 사형을 선고했다.

 

체칠리아는 뜨거운 목욕탕에 가두고 쪄서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목욕탕에 24시간이나 갇혀 있었음에도 그가 죽지 않자, 당황한 알마키오는 참수형을 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리가 서툴렀는지 칼로 3번이나 쳤는데도 목이 잘려 나가지 않았다. 당시의 규정은 세 차례 이상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였다. 목이 완전히 잘리지 않은 채로 체칠리아는 3일 동안 모진 고통을 당했다. 그런 가운데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손가락 3개와 왼손의 검지를 펴 보임으로써 자신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굳은 뜻을 표명했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날 우르바노 주교에게 자신의 집터에 교회를 세워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선종했다(230년경). 우르바노 주교는 체칠리아의 장례를 치러 주고, 그의 집을 교회로 축복했다. 사람들은 체칠리아의 유해를 칼리스토 카타콤바에 모셨고, 그곳은 이내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다.

 

훗날 파스칼 1세 교황은 성인이 살던 집터에 성인을 기리는 성당을 건립했다. 아울러 성인의 유해를 카타콤바에서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821년). 그리고 1599년 이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성인의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관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유해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이탈리아의 한 조각가는 현장을 지켜본 추기경의 기록을 토대로 관을 열었을 당시 성인의 모습을 대리석으로 조각했다. 흰 대리석을 이용해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는 이 석상에서 목에 난 칼자국과 곧게 편 오른손의 세 손가락과 왼손의 검지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체칠리아 생애에 음악과 연관되는 대목이나 일화 없어

 

 

이상의 이야기에서 확실한 사실은 성 체칠리아가 3세기의 순교자라는 점과 1599년에 확인했을 때 무덤에는 성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세월이 1500년 넘게 지났는데도 유해가 부패되지 않고 온전한 상태였다는 점 정도다. 이를 제외하고 체칠리아 성인과 관련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전해 오는 이야기들일 뿐이다.

 

어쨌든 성인은 좋지 않은 시대에 좋지 않은 곳에서, 곧 이교도들의 박해 시대에 로마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에 걸맞게 고결한 성인의 생애는 화가와 시인 등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갖가지 신심어린 작품들을 만들어내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 중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성 체칠리아’라는 제목의 제단화가 있다. 바오로, 요한, 아우구스티노,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들 가운데 서서 오르간을 들고 하늘에서 합창하는 천사들을 바라보는 성인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사랑스럽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모방하여 성인들을 그릴 때면 하늘을 향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한편, 성인의 발아래에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악기들이 흩어져 있다. 성인과 음악의 연관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체칠리아의 생애에 특별히 음악과 연관되는 대목이나 일화는 없다. 다만 혼란을 불러옴직한 구절이 하나 있다. 성인의 결혼 장면을 전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오르간 소리가 들릴 때 ‘오, 주님, 제 마음과 제 육신을 흠 없이 하소서. 제가 당혹스러워하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주님께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자면, 체칠리아는 결혼식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 하느님께 침묵의 찬가를 바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절을 ‘성인이 오르간에 맞춰서 노래한 것’으로 이해했다(이 구절에 있는 ‘organ’이라는 라틴어 단어는 악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신체기관, 곧 장기(臟器)’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몸과 마음으로 노래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더욱 타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성 체칠리아는 오르간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심지어는 비올라나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성 체칠리아를 음악인(시인, 가수, 악기 제조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와는 다르게 체칠리아가 악기를 버리는 모습, 마음으로 동정의 찬가를 부르기 위해 외형적이고 이교적인 결혼식 음악을 거부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전승도 있기는 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1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성녀 체칠리아 (1) 

오르간 들고 천사 바라보는 성녀

 

 

- 작품 해설 : <성녀 체칠리아와 성인들>, 라파엘로 1514, 220×136 cm, 볼로냐, 국립 미술관.
 

 

성녀 체칠리아(Santa Cecilia)는 음악의 수호성인이다. 그녀가 음악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16세기부터이며 1584년에 설립된 로마의 음악 학교는 성녀 체칠리아를 수호성인으로 택했다. 정명훈 선생이 지휘했던 로마의 오케스트라 이름이 산타 체칠리아였고, 오늘날에도 교회의 성가대 중에는 체칠리아 성가대라는 이름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성녀 체칠리아와 음악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이 성녀를 음악과 연관시키게 된 것은 5세기에 전해진 한 전설의 잘못된 번역에 기인한다고 한다. ‘황금전설’은 성녀 체칠리아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체칠리아는 3세기 경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으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종신서원도 하였으나 부모님은 그녀를 결혼시켰다. 결혼식 날 오르간이 울려 퍼지자 체칠리아는 “주님, 제 몸과 영혼이 순결하도록 지켜 주소서”라며 기도를 올렸다. 체칠리아가 음악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라고 한다.

 

결혼식 날 그녀는 아름다운 금사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다. 신랑과 첫날밤을 치를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랑의 이름은 발레리아노였다. 첫날 밤 둘만이 있을 때 체칠리아는 남편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나에게는 내 몸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만일 내게 손을 댄다면 당신은 꽃다운 청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천사가 나를 돌보듯 당신을 돌볼 것이며, 그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자 발레리아노가 말했다.

“나에게 그 수호천사를 보여주시오.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내게 요구한 대로 하겠소. 그러나 만일 그가 남자라면 그와 당신 두 사람 다 내 손에 죽게 될 것이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주님의 천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체칠리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아피아 가두에 가서 우르바노라 불리는 노인을 만나거든 체칠리아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고 세례를 받으세요. 그분은 당신을 깨끗이 해줄 것이고 돌아오는 길에 천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녀 체칠리아를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림은 라파엘로의 이 제단화일 것이다. 모두 다섯 명의 성인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성 바오로, 요한, 중앙에 체칠리아, 아고스티노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성녀 체칠리아는 결혼식날 입은 복장인 듯 비단에 수를 놓은 귀한 옷을 입고 오르간을 들고 천상에서 합창하고 있는 천사들을 바라보고 있다.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성녀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사랑스워 보인다. 이 장면은 이후 몇 세기 동안 화가들이 모방하여 그린 명화 속의 명장면에 속한다. 특히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 원형이 바로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성녀 체칠리아의 모습을 고귀한 종교적 엑스타시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성녀의 발 아래에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각종 악기가 흩어져 있어서 체칠리아가 음악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체칠리아가 음악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라파엘로의 이 그림이 그려진 이후라고 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9일,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r/raphael/5roma/2/06cecil.jpg)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성녀 체칠리아 (2)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이여…

 

 

- 작품 해설 : 스테파노 마데르나 (복제작), 1599, 대리석, 실물 크기, 로마, 칼리스토 카타콤바.
 

 

체칠리아의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들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는 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이교신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했다.

 

한편 체칠리아 역시 우상숭배를 거절하자 알라마키오라는 재판관이 그녀를 밤새 목욕탕에 넣고 쪄 죽이라는 끔찍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그러자 재판관은 체칠리아에게 참수형을 명했는데 사형 집행자가 서툰 탓이었는지 체칠리아의 목을 세 번 내리쳤으나 몸에서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법은 세 번 이상 목을 내리치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성녀는 목이 반만 붙은 채 3일을 더 살았으며 그 사이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남편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던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3일을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이 말을 끝으로 체칠리아는 영면했다. 우르바노 주교는 그녀의 장례를 치러주고, 그녀의 집을 교회로 축성했다. 그때가 200년 경이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229년 경이라고도 하니 200년에서 230년 사이로 보면 될 것 같다.

 

로마에는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 때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묘지인 카타콤바가 여러 곳 있는데 이들 카타콤바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칼리스토 카타콤바이다. 성녀 체칠리아의 유해는 바로 이곳에 모셔졌다. 성녀의 무덤은 그것이 만들어진 직후부터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다. 그곳은 대리석으로 바닥과 벽이 단장되었고 천장도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황 파스칼레 1세(817-824)는 그녀가 살았던 집 터에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라는 성당을 건립하여 820년 카타콤바에 모셔져 있던 성녀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녀 체칠리아를 조각한 생생한 조각이 한 점 전해진다. 이 조각은 1599년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를 재건축할 당시 성녀의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관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시신이 급속히 부패한 것은 관을 열면서 시신이 공기와 접촉하면서부터였다.

 

이 조각은 관 속에 있던 성녀의 생생한 모습을 지켜 본 파올로 스폰드라티라는 추기경이 기록한 글을 토대로 바로 그 해인 1599년 조각가 마데르나가 관을 열었을 당시의 성녀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본 칼럼에 소개한 이 작품은 마데르나의 원작을 복제한 것으로 칼리스토 카타콤바에 있는 산타 체칠리아 성지에서 볼 수 있으며 원작은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모셔져 있다.

 

 

 

 

이 조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이다.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인다. 참수 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은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이심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준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16일,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aderno/cecili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