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3. 11. 23. 10:16

복자 미구엘 어거스틴 프로(Blessed Miguel Agustin Pro)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과달루페 멕시코
활동연도 : 1925 - 1927
같은이름 : 미겔, 미카엘, 오스틴, 아오스팅, 프로

 

 

미구엘 프로의 신부의 원래 이름은 호세 라몬 미구엘 어거스틴으로 그는 1891년 1월 13일에 멕시코 자카테카스(Zacatecas)주(州)의 과달루페(Guadalupe)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별명은 '코콜(Cocol)'로 불리었고 그는 11명의 형제 중 셋째이었는데, 그 중 4 명은 태어나거나 어릴 때 죽었고 누이 2명은 후에 수녀가 되었다. 프로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꿈을 키웠고, 자라면서 성직자 삶에 대한 성소가 생겨나 1911년 8월 15일 엘 리아노(El Liano)에 있던 예수회 수도원에 입회를 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30년 이상을 장기 집권하던 폴피라오 디아즈(Porfilao Diaz) 대통령이 1910년 부터 시작된 멕시코 혁명으로 권좌에서 쫒겨나 프랑스로 망명하고, 새 사회주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이 된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의 가톨릭 탄핵 정치로 박해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새 정부는 1917년 멕시코 헌법을 수정하면서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5가지 반 가톨릭 금칙령을 선포했는데 이런 반 종교적 법안들은 1998년이 되서야 비로서 멕시코 헌법에서 제거된다.

 

1917년에 가톨릭을 분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5개의 조항에는;

 

3조  : 초,중등 교육에 종교교육이나 기타 신앙에 관련된 교육 금지.


5조  : 수도원이나 수도회 단체는 불법으로 규정. 수도원 철거허용.


24조 : 교회 건물내를 제외한 어떤 공공장소에서도 기도 금지.


27조 : 종교단체 소속 건물이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리 축소, 무효 및 박탈


130조: 성직자들의 기본권리 박탈로 수도생활에 어려움을 주고, 투표권 박탈, 신문이나 언론에 기고 금지로 표현에 대한 자유권리 박탈 및 금지.

 

 

(사진) Álvaro Obregón
   
프로가 예수회 수도회 입회한지 3년 뒤인 1914년, 본격적인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캘리포니아 로스가토스(Los Gatos)로 피신했다가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로 간다, 하지만 얼마안있어 박해를 피해 수도원을 벨지움으로 옮긴 예수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때부터 프로는 건강이 점점 않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1925년 8월 31일 예수회 사제 서품을 받는다. 당시의 서품식에 대하여 쓴 그의 일기에는;

 

"이 보잘 것없고 불쌍한 광부 아들의 마음과 생각을 온통 점령해버린 천상의 기쁨과 성령의 달디단 은총을 내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무엇보다 나는 나의 서품식날, 교회와 주교앞에서 내 이름이 불리어 질 때,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서품식이 끝나면 모든 새 사제들은 처음의 강복(Blessing)을 부모에게 준다, 하지만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나의 가족 사진들을 모두 꺼내어 책상위에 올려놓고 진심으로 강복을 주었다"     

 

사제로의 그의 처음 임무는 벨지움 칼레로이의(Charleroi,Belgium) 광부들을 위한 사목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 경향이 있는 노동자들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사제 서품을 받고 3개월 후, 그는 위괘양이 악화되어 여러번 수술을 받게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의 원천은 기도에서 온다며 항상 기쁨으로 용기있는 하루 하루를  보냈다.

 

1926년 여름, 유럽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프로신부는 멕시코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귀국길에 프랑스 루르드(Lourdes)에 들러 루르드 성모님께 봉헌 미사를 바쳤다.  1926년 7월 8일 그는 멕시코 베라쿠르즈(Veracruz)에 도착한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은 뿔르딸코 엘리아스 까예스(Plutarco Elías Calles)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전임자들 보다 더 지독한 박해자로 1917년 제정된 반 가톨릭 법안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명 '까예스 법안'이란 것을 만들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고 있었다. 1926년 부터 적용된 이 법안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신부는 5년의 징역형에, 교회밖에서 사제복을 입고있다 잡히면 500페소(Peso : 당시 환율로 대략 2,000불 정도)의 벌금 등을 물렸다. 

 

당시 많은 주의 정치인들도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있었는데.당시 타바스코(Tabasco) 같은 주에서는 악명높았던 토마스 가리도 카나발(Tomás Garrido Canabal) 같은 정치인은 주 안에 있는 모든 성당을 폐쇠하고 모든 사제들을 제거했다. 이런 영향으로 많은 신부들이 잡혀서 순교하거나 여자와 결혼하도록 강요당하여 교회를 떠났다.(사진. 까예스)

 

교회가 어려운 시기에 귀국한 프로신부는 바로 지하교회를 세웠다. 그는 비밀리에 공소들을 세우고 작은 가톨릭 소 공동체들을 돌면서 미사전례와 영성지도 사목을 했다. 그러면서 신자들에게 두려워하지말고 무조건 하느님께 의탁하라며 용기를 주었다. '코콜'이라는 이름으로 서명되어 있는 프로 신부의 편지들을 보면 그의 지하 공동체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있다.

 

프로 신부는 1926년 10월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처음 체포되었다가, 다음 날 무혐의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분리하여 계속 감시하게 된다.   

 

1927년이 되면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많은 사제들이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지하교회도 위험에 처해지게 되었다. 11월에 그는 그의 형제인 로베르토(Roberto)와 움베르또(Humberto)함께 악의 근원인 전임 대통령인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을 제거하기로 하고 폭탄을 설치, 폭파하였지만 부상만 입히고 잡혀 투옥된다. 프로 신부는 모든 계획이 자기가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여 두 형제들은 풀려나게 된다.

 

1927년 11월 23일 아침, 프로 신부는 전 국가원수 살해기도 미수 및 반정부 종교지도자, 불법공동체 운영등의 죄목으로 재판도 없이 바로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 집행장에서 소총수들 앞에 선 프로 신부는 군인들을 행해 강복을 준 후, 잠시 무릎을 꿇고 짧게 기도를 했다. 그는 눈가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한 손엔 십자가와 다른 손엔 묵주를 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모습처럼 양팔을 벌리고 서서 큰 소리로 "당신들에게 주님의 자비가 있기를!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라고 부르짖고 "주님, 저는 무고하오나 진정으로 저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외쳤다.

 

      

 

 

소총수에게 발포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다시 예수님처럼 두 팔을 벌리고 "비바 크리스토 레이!"(¡Viva Cristo Rey! 그리스도 왕 만세)라고 외치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처음 쏜 탄환에 프로신부가 죽지 않자 군인들은 그에 몸에 직접 총구를 대고 근접사살 했다.

 

 

 

프로 신부의 장례식에는 40,000명의 군중이 그의 관을 따라 행진했고, 묘지에는 이미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미리와서 도열하고 있었다고 한다.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총살형 당시의 사진이 담겨있는 신문들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례적으로 프로 신부의 사형 당일 날 사진과 기록들은 아직까지 자세하게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대통령 카예스가 국민에게 반정부 주의자로 종교활동을 하던 사제의 말로를 보여주기 위해 홍보용으로 기록을 남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의 의도는 그 것으로 가톨릭 교회를 부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역효과로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카예스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고 많은 사람들의 신앙 쇄신의 계기가 되었다. 
    
전기작가 그라함 그린(Graham Greene)은 그의 회고록에서 프로 신부가 순교할 당시, 멕시코를 통치하던 까예스(Plutarco Elías Calles)는 반 신앙적,반 가톨릭 사상이 극에 달하는 적 그리스도 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 가장 극렬했던 박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7년 11월 23일 미구엘 프로 신부가 총살형으로 순교한 후, 아무도 52년 뒤인 1979년 로마의 주교였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멕시코를 방문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때 요한 바오로 2세는 멕시코 대통령의 환대로 수 천명이 모인 야외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그동안 교회를 갈망하던 많은 신자들의 염원으로 눈물의 미사였다고 한다.  후에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1990년, 1993년, 1999년, 2002년에 멕시코를 추가 방문했다. 가톨릭 교회를 분해하려고 노력했던 정치인과 집권자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프로신부와 같은 순교자들과 멕시코 민족안에 이미 깊게 뿌리내리 고 있는 그들의 신앙과 의지를 꺽을 수가 없었다.      

 

 


"프로신부는 그가 사랑하던 멕시코와 예수회의 새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의 용맹하면서도 희생적 사도직의 삶은 지칠줄 모르는 복음전파의 노력에서 그 영감을  받았습니다. 병에서 오는 고통이나 힘든 사목일정, 어렵고도 위험한 상황 그 어느것도 그리스도를 향한 삶의 기쁨과 찬란한 영광을 뺏어갈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뜨겁고도 불타는 열정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히 부터 자신을 겸손하게 희생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 미사 강론 중에서

 

복자 미구엘 프로 신부는 로마에서 1988년 9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요한복음 16.22절 :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글, - 권요셉

 

[참고] Dominic M.I.C.M Tert의  2004년 판, 현대의 순교자, 프로신부(Padre Pro, A Modern Martyr) 인용

 

내용 중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미구엘 신부님은 폭탄을 설치한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진범이 미구엘 신부님이 잡힌 것을 알고 자수했으나, 정부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그냥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해 죽인 겁니다. 신부님의 형제분도 한명은 풀려났지만 나머지 한명은 진범과 함께 처형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