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4. 20. 23:11

성 안셀모(Saint Anselm)

 

 

 


축일 : 4월 21일 
대주교, 교회학자, 철학자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 1033-1109년 
같은이름 :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로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쿠스(Lanfrancus)로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 안셀무스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안셀무스는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고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을 갔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 역시 윌리엄의 요구를 반대하자, 윌리엄은 안셀무스를 유배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는 안셀무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98년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요청에 따라 성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100년에 윌리엄 2세 국왕이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다시 윌리엄의 후계자인 헨리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102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의회에서 안셀무스는 노예 매매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이미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리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무스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였다. 성 안셀무스의 상징은 배이다.
(가톨릭 홈)

 


 

 

성 안셀모 주교 학자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로마넬리의 마틸다 백작부인과 성 안셀모의 만남 / 좌측에 검은 옷을 입고있는 안셀모 성인)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아오스타에서 1033년에 태어났다. 프랑스 르벡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 곳에서 회원들에게 신학을 가르쳤고 영성 생활에서 신속한 진보를 이루었다. 영국에 가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거기에서 교회의 자유를 위해 힘써 투쟁했고 두 번이나 유배형을 당했다. 신비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1109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안셀모 주교의 [프로스로기온]에서
(Cap. 14. 16. 26: Opera omnia, edit. Schmitt, Secovii, 1938, 1,111-113. 121-122)

 

당신을 즐기도록 당신을 알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내 영혼아, 네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느냐? 너는 하느님을 찾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높으시고 그분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고 빛이시며 지혜이시고 선이시며 영원한 행복이시고 복된 영원이시며 어디에나 언제나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나를 형성하시고 또 변모시키신 내 주 하느님이시여, 갈망하는 내 영혼에게 당신은 내 영혼이 본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환히 보게 해주소서. 내 영혼은 보는 것 이상으로 보고파 애달아 하지만 그가 본 것 외에는 어둠밖에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그는 어둠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는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은 자신의 어둠 때문에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여, 당신이 거하시는 빛은 진정코 다다를 수 없는 빛입니다. 그 빛을 꿰뚫어 거기에 계신 당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빛은 나에게 너무도 강렬하여 나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오나, 나의 연약한 시력이 태양 자체를 직접 바라보지 못하면서 태양의 빛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나도 무엇을 보든지 당신의 그 빛으로 말미암아 보는 것입니다.

 

나의 지성은 그 빛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 빛 자체는 너무 눈부시어 내 지성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내 영혼은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의 눈은 그 빛의 광휘로써 눈부시고 그 충만성으로 압도되며 그 광대함으로 인해 당황하고 그 넓이로 말미암아 어리둥절해집니다.

 

오, 높으시고 다다를 수 없는 빛이시여! 오, 완전하고도 복된 진리이시여! 나는 당신과 이렇게도 가까이 있는데 당신은 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신지요! 나는 당신의 시야 안에 들어 있는데 당신은 내 시야에서 얼마나 멀리 계신지요! 당신은 온전히 처처에 계시오나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서 나는 움직이고 당신 안에 나는 머무르면서도, 나는 당신께 가까이 이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어도 나는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 하느님이시여, 비오니, 내가 당신을 즐기도록 당신을 알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이 현세에서 마음껏 즐길 수 없다면 그 즐거움이 충만에 이를 때까지 내가 매일매일 진보하게 하소서. 이 현세 생활 중에 당신에 대한 지식이 내 안에서 자라나 하늘 나라에서 완성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이 이승에서 내 안에 자라나 저승에서 실제로 소유함으로써 완전히 되도록 해주소서.

 

주여, 당신은 우리가 성자를 통하여 당신께 청하도록 명하시고, 아니, 오히려 권고해 주시면서 우리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우리가 청하는 바를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여 비오니, 당신께서 우리의 놀라우신 조언자를 통하여 권고해 주시는 대로 내가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의 성실하심을 통하여 받게 해주시고 내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해주소서. 성실한 하느님이시여, 간절히 비오니, 내 기쁨이 완전하게 되도록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받게 해주소서.

 

그때까지 나의 정신이 그것을 묵상하고 내 혀가 그것을 말하며 내 마음이 그것을 사랑하고 내 입이 그것을 전하게 해주소서. 내가 마침내 주님의 기쁨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 영혼이 그것을 애틋이 찾고, 내 육신이 그것을 열렬히 구하며, 내 존재 모두가 그것을 갈망하게 해주소서. 삼위 일체이신 주 하느님,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신학·철학자 -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스콜라학의 체계를 세운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이성주의를 신학에 도입했다.

 

 

 

계시와 이성으로 진리 깨달아
신앙과 이성 조화된 스콜라학 확립
‘성자의 어머니’ 마리아 공경 강조

 

 

 

『아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른 소망을 하늘에서 가질 수 없다. 한 사람의 바람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바람과 각 사람의 바람은 또한 하느님의 바람이 될 것이다』(성 안셀모,「Opera Omnis」 편지 112 중).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대표되는 「스콜라학의 아버지」 성 안셀모(1033∼1109)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며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로 꼽힌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Monologium)을 지은 그는 이를 통해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 , 그리고 헤겔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곡」의 작가 단테는 신곡 천국편(Canton XII)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한명으로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였다.

 

또 「동정 잉태와 원죄」(De conceptu virginaliet peccato originali)와 같은 저서들을 통해 「마리아는 성부와 같으신 성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있는 어떤 존재들 보다 더욱 순결하고 티없이 깨끗하며 공경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후대 마리아론에 지대한 공헌을 미쳤다. 그런 이유에서 성 알폰소와 함께 4대 마리아 박사 가운데 한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안셀모는 클뤼니 수도원과 프랑스의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059년에는 노르망디 베크(Bek)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했다.양친이 모두 사망한 이후 1060년 수도원에 정식 입회, 엄격한 수련과 병행해서 문법학과 논리학 등 정규 과정을 배웠으며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보에시우스 등 다양한 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는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1067년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된 안셀모는 많은 작품을 저술하고 윤리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학교를 명문교로 발전시켰다.


특히 1078년 수도원 원장이 된 후 수많은 청년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몰려들자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설했다. 또 영국까지 명성이 알려지면서 1093년에는 영국왕 윌리암 2세에 의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됐다.

 

안셀모는 이때부터 적잖은 정치적 분쟁들에 휘말리며 심적인 고통을 겪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는 성직자들을 직접 임명하고 교황과의 연락을 제한해 온 영국 왕의 교회 직무 간섭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따라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하느님 계명의 지배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영국 왕과의 긴장,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위한 투쟁, 세속화된 성직자들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 등에 온 힘을 기울였던 그는 이로 인해 영국 주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등 곤경에 처하면서 결국 영국 성직 서임권 논쟁 여파로 망명길에 올랐다. 두 번이나 망명을 떠났던 안셀모는 그 후 영국 왕과 교황과 한자리에서 협상을 벌였고 여기서 영국 왕에게 충성 서약은 하지만 왕으로부터 서임은 받지 않는다는데 합의했다.

 

마침내 1106년 영국으로 귀환한 안셀모는 교회의 자유 보호에 계속 힘쓰는 한편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 생활에 기초한 「수도적 삶」의 방향으로 돌리는데 노력했다.

 

만년에는 중병에 걸려 사망하기 전 한달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을 수 없었던 그는 1109년 성주간 수요일 선종했다.

 

그의 사후 캔터베리 주교좌 성당에 모셔진 그의 묘에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리데니오 수도원장은 안셀모를 두고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 그의 웅변은 유창하고도 생활은 남의 모범으로써 충분하였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모든 덕에 있어서 출중하였다』고 칭송했다.

 

안셀모는 철학계에 남긴 업적외에도 뛰어난 영성가였고 또 사목자로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애썼다. 신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400여통에 달하는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지며 자신의 명상을 기도와 시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철학 및 신학 저서들은 앞서 언급된 대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데 신학적으로 가장 유명한 저서는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이며 이 책은 육화와 구원에 관한 교리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성령의 유출론」(De Processionne Spiritus Sancti)은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에 따라 「성자에게로 부터도 성령이 유출된다」는 서방 교회 이론이 잘 설명된 저서로 알려져 있다.

 

안셀모는 1720년 교황 글레멘스 11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9일, 이주연 기자]

 

 


 


[그리스도교 철학자] 캔터베리의 대주교 성 안셀모

 

글. 허석훈 신부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셀모는 1033/4년경 이탈리아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다섯 살에 수도회 입회를 꿈꾸었지만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란프랑쿠스(1010-1088년?)라는 위대한 스승의 명성을 듣기 전까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수학합니다.

 

1060년 그는 란프랑쿠스가 가르치는 수도원학교가 있던 노르망디 지방의 벡 수도원(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수가 되고, 란프랑쿠스의 후계자로 수도원학교 학장으로 일합니다.

 

 

그 뒤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고, 다시 란프랑쿠스를 이어 영국의 남부도시 캔터베리의 대주교(재임기간 1093-1109년)가 되어 일하다 1109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성 안셀모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철학적, 신학적 작품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모노로기온(Monologion)」과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을 비롯하여, 「프로슬로기온」의 존재론적 신(神) 존재 증명에 대한 변론과 더불어 내용을 보충하고 있는 「가우닐로에 대한 변론(Liber apologeticus contra Gaunilonem)」, 「문법에 대하여(de grammatico)」,「악의 원천에 대하여(de casu diaboli)」, 그리고 「삼위일체 신앙과 말씀의 육화에 대하여(de fide trinitatis et incarnatione verbi)」 등 다수가 있습니다.

 


신앙과 이 

 

당시 신앙보다는 이성을 강조하는 사조가 일부 있었는데, 베렌가리우스(1000-1088년?) 같은 학자들이 그런 부류였습니다. 그는 변증법을 통한 진리 추구에서 인간의 이성은 최상의 지침이자 위대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 안셀모는 변증법적인 유용성을 거부하기보다는, 변증법의 단면적이고 분별없는 사용을 거부하면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 입각하여, 변증법의 본래 용도에 따르는 사용과 더불어 신앙과의 균형감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곧 이성보다는 신앙에 우선성을 두고 신앙과 이성의 두 가지 지식의 원천을 진리 추구에서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신학자였습니다.

 

성 안셀모는 「프로슬로기온」의 서문에서 후대에 아주 빈번히 인용되어 스콜라철학의 근간이 되어버린, “이성에 따라 추구하는 신앙”과 “나는 이해하려고 믿는다.”라는 중요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성 안셀모가 이 두 문장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신앙은, 모든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세에서 늘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는 신앙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에 따르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정신의 힘을 확신했습니다. 곧 ‘삼위일체’나 ‘육화’ 신앙의 신비 앞에 우리의 이성은 그 필연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그는 계시된 진리 앞에 겸손한 태도와 더불어 그 계시된 진리를 증명하는 이성의 능력에 드러나는 무제한적 낙관론을 잘 결합하려 했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하여

 

 성 안셀모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입니다. 그가 「프로슬로기온」 2-3장에서 제안하고 있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오늘날에도 분석철학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 안셀모가 전개하는 증명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무엇인가 반드시 생각하고 있다는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단어로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의 지성 안에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사유전개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의 증명에 사용된 전제는, ① 우리가 하느님을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엇”으로 믿어왔다는 것에 놓입니다.

 

그리고 성 안셀모는 이제 ② 심지어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도 만일 그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라는 ‘정의’를 들으면, 그 개념을 이해한다는 사실에서 ③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지성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까지 세 번의 단계를 거쳐 성 안셀모는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인 하느님이 우리의 이성에 존재한다는 근거를 지우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이 실재로도 존재해야만 한다고 논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곧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실재가 아닌 이성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이는 더 이상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에만 있는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에 실재적인 존재를 덧붙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앞선 전제(하느님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다.)에 위배되기에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인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에만이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의의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그러실지 모르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역시 성 안셀모의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논거를 철학적 말장난 같다고 느꼈습니다. 성 안셀모 역시 자신의 논거를 흥미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논증이라고까지 본 것은 아니었기에, 여기서는 이러한 반대 논의들은 차치하고, 이 논증이 중세에 아주 잘 알려졌었다는 사실과 하나의 논증으로 분명 상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성 안셀모의 논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물론 후에 중세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성 안셀모의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하느님에 대한 논증을 단순히 ‘사유’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이끌어내려 했다고 반박하지만, 세간의 비판과 달리, 성 안셀모가 자신의 증명을 단순한 사유의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성 안셀모는 하느님의 실재의 체험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토대로 출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 안셀모가 ‘실재하는 사물들의 존재’가 단순한 ‘가능성이나 사유된 것’보다는 더 크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성 안셀모는 스스로 자신의 정의에서 이미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온전히 그분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무한한 하느님의 존재를 개념화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쩌면 그의 신 존재에 대한 논증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신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석훈 루카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품을 받고,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지내고 지금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안셀모 대주교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04-10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안셀모, 캔터베리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809-5812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안셀모 주교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93-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