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4. 29. 11:07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aint Catherine of Sienna)

 

 

 

 


축일 : 4월 29일 
수녀, 교회학자, 신비가 
활동지역 : 시에나(Siena)
활동연도 : 1347-1380년 
같은이름 : 가타리나, 까따리나, 캐서린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아가씨였으므로,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하여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레이몬드 성인이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그녀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그 도시와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았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을 대항하려는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에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오상이 생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플로렌스와 그레고리우스 교황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Roma)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녀 카타리나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서거에 즈음하여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는 사건으로 큰 분열이 발단되어 여간 혼란스럽지 않을 때, 그녀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교황을 지지하여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중풍 증세로 고생하다가 며칠 후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인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1461년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 CATHARINA DE SIENA)의 생애와   사상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교회 박사 칭호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교회 박사가 된 이는 교회 역사 안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 하느님의 신비를 깊게 파고든 그녀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일이다.

 

카타리나는 당시의 교황과 귀족들, 수도자, 상인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또, 교황과 피렌체 시민들 사이의 논쟁을 중재했을 때 암살 위기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던 33살의 그녀에게 신비가, 중재자, 신학자, 설교자, 간호사, 교회 박사 등의 모든 호칭이 거룩한 월계관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헤지오그라피라고 불리는 일종의 성인전으로서, 모범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인물에 대한 본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경하기 위한 전기다. 이들은 많이 윤색되긴 했지만, 정열적이고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여 다소 어색하긴 해도 그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타리나에 대하여 전해진 그리고 기록된 전승들은, 모두 함께 영향력 있는 14세기 여인의 모습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1. 연혁

 

♣ 1347년 3월 25일 염색업자 베닌까사 야고보와 아내 라빠 사이에 23번째 쌍둥이 자매로 태어남.
1348년 1세 25번째 동생 난나 태어남. 시에나에 처음으로 흑사병 유행.
1353년 6세 첫 환시 경험.
1354년 7세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정결서원). 10살때까지 고행, 사색, 관상을 통한 영적생활.
1362년 15-16세 언니 보나벤투라 사망. 첫 고해신부이며 지도자인 폰테의 토마스 O. P.의 충고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결혼 계획을 거부. 참회의 수녀회 입회. 서원. 몬테 풀치아노의 성녀 이녜스와의 기적. 탈혼.
1365년 18세 만텔라테들의 도미니꼬회 수도복을 받고 3년간 고독의 시기 시작. 그동안에 읽는 법을 배움.
1368년 3년 동안의 유혹 끝남. 예수와 약혼.
 * 8월 12일 아버지 야고보 사망. 옆구리 고통 받음.
 * 혁명으로 가족들 시에나에서 추방됨. 폰테의 토마스 수사. 가파리니 신부(신학과 성서 설명). 두번째 고백신부가 된 도미니치 신부를 알게 됨. 카푸아의 라이문도 (두번째 고해신부. 후에 도미니꼬 수도회 총장.).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장. 아우구스티노 수사들. 참회의 수녀회 수녀들과 교류 시작.
 * 정치가. 예술가. 일반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과의 사제 관계 형성.
1370년? 23세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지키기 위해 미사, 기도, 희생을 함. 영성체 후에 탈혼. 예수의 물과 피를 마심.
1372년 25세 염문에 대한 환청.
1373년 사순절부터 예수 승천 때까지 55일간 절식.
1374년 27세 때 처음으로 피렌체로 여행. 카푸아의 라이문도 O.P.가 그녀의 고해신부와 지도자가 됨. 시에나에서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봉사. 페스트 퍼짐. 조카 8명 죽음.
1374-1376년 권력가. 상류층 인사들, 학자들에게 십자군 전쟁 추진서한 보냄.
1375년 피사 성당 미사 중 공중부양과 오상의 기적을 받음. 피사로 여행하여, 피사와 루까 시가 교황을 반대한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설득. 그해의 대부분을 피사에서 보내며,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설교에 새 힘을 얻음.
1375-1377년 고행 관상 생활 시작.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적
1376년 3월 26일 아비뇽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피렌체 평화협정 실패. 중재자로 나섬.
 * 6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알현. 설득.
 * 9월 13일 교황, 로마 귀환 중 제노바에서 카타리나 접견.
1377년 1월 16일 교황 로마 환궁. 벨카로 성을 입수하여 수녀원 세움.
 * 9월 라이문도 신부 미네르바 수도원 원장이 됨.
 * 그녀의 편지 272통은 「대화」의 원본이 됨.
 * 12월? 도시간 평화정착 시도.
1378년 3월 27-28 교황 서거.
 * 6월 18일 구에프 일당에게 암살 위기.
 * 7월 8일 바르톨로메오(우르바노 6세) 교황 선출
* 9월 20일 로베르또(클레멘스 7세) 교황 선출.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지지.
 * 10월 ? 「대화」 완성.
1380년 2월 탈진.
 * 3월 26일 병자성사(바로톨똘로메오 도미니치 신부).
 * 4월 29일 선종.
1461년 6월 28일 시성(교황 비오 2세).
1866년 4월 13일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 (교황 비오 9세).
1940년 5월 15일 이탈리아 첫 수호자 공포 (교황 비오 12세).
1943년 9월 15일 간호사의 수호자.
1970년 4월 4일 교회학자.


 

2. 시대적 배경

 

카타리나가 살았던 당시, 1347년부터 1380년 사이에 교회사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사회, 그녀가 몸담았던 도미니꼬 수도회 모두가 혼돈의 상태이자 신비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고, 터키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피렌체와 교황의 알력, 그리고 서방대분열로 인한 그리스도교의 불일치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을 맡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양편에 모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교황의 시도에 대응하여 필립은 프랑스 주교 관구들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 분담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했고, 보니파시오는 필립을 파문했다. 1305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로 선출된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그 이후 70년간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이 따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카타리나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특히 심하게 이러한 외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해 있었던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불화와 유혈혁명을 통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를 얻었으며, 13세기 끝무렵에는 아홉 명의 대의원들 그룹이 선출하여 시에나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고보 베닌까사는 이러한 포폴라니(통치자가 되도록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에 속한 사람이었다.

 


3. 사상(신비주의)

 

짧으면서도 열성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삶을 볼 때, 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온은, 카타리나 같은 성인의 생애에서 신비를 배제하는 것은 인격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라이문도도, 그녀와 가까이서 알고 지내다보니 그녀가 영혼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곧바로 더 없이 자연스럽게 천상의 일들로 마음을 들어올리는 흐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그녀를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활동하면서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 일체는 바로 기도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상은 활동생활 한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고, 그녀가 기도하고 심지어는 탈혼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던 사실들이 많은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녀의 글들을 기도와 활동 사목의 상호작용이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에 필요적절한 것이 되고 있다. 진리와 사랑 - 카타리나에게 하느님은 온유하신 최초의 진리요, 사람에 미치신 자의 그 자체이셨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지식과 사랑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기리고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더 없이 간절한 욕구로 들뜬 채로 일어선다. 영혼은 일정 시간 덕을 실천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선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자기 인식의 독방에 기거하는 데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지식에 뒤이어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은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로 자신을 감싸는 것이다. 「대화」첫 단락

 

카타리나의 사랑은 언제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진리의 빛 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거침없이 ‘사회적인 신비가’로 이상화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느님 안에서 체험한 ‘진리’를 절대로 수정하려 들지 않던 가타리나의 철저한 타협 거부와, 눈으로 목격한 잘못들을 모조리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인간적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가타리나는 진실로 신비적인 활동가였다. 가난과 질병,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불의의 고통은 그녀에게는 단순한 악도, 체계적인 악도 아니었다. 그것이 악이라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과정에서 메말라지면서 역으로 자신의 육체까지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정서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초월하여 훨씬 더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형태의 활약은 비록 기쁜 것은 못 되었지만 그녀의 신비적 체험이 요구했던 것이었고, 그녀의 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활약인 것이다. 

 

 

4. 카타리나의 신학

 

그녀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라 부를만한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녀의 글은 체계도 없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답답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녀의 가르침은 토마스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노 계열에 속한다. 그녀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우베르티노 다 카살레다(그리온)이며, 도미니코회 수도자 자코포 다 보라지네와 카발카의 저서들에서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이 모두를 자기 안에 흡수하고 통합시켜서 자신의 전체적인 지식을 형성하였다. 신학적으로 보면 새롭거나 창의적인 것은 없다. 가톨릭 가르침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어지는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까지도 틀림없는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카타리나의 독창적인 부분은 이같은 전승을 신선하고 생동감있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카타리나가 쓰고 구술한 글들은 모두가 시에나의 방언인 넬 수오 볼가레였다. 파산반티와 카발카가 본고장 말을 사용하여 종교적인 문제들을 기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항상 가능한 모든 부류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으며 질서정연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주제를 아주 밀도있게 전개했으며, 은유가 산재하고, 늘 새로운 연결관게가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카타리나의 초기 편지들 일부에서 어느 정도 부차적인 성격을 지니는 까닭에 「대화」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비적 체험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다.

 

 


5. 「대화」에 대해서

 

「대화」는 그녀가 제자들에게 베푼 모든 가르침을 담은 최고의 저서이자 유산인 셈이다. 카타리나는 이를 그저 ‘나의 책’이라고 불렀으며, 라이문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울러 부탁드리거니와 당신과, 바르톨로메오 (데 도미니치) 형제, 토마스 (델라 폰테) 형제, 그리고 대작곡가 (조반니 탄투치)는 이 책과 그 밖에 눈에 띄는 내 모든 글들을 간수하십시오. 토마소 (피에트라) 선생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데다 이용하십시오. 이들은 나의 심신에 위안을 주었던 것들입니다.”

 

전승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들은, 카타리나가 「대화」 전체를 닷새 동안 탈혼 중에 구술하였다는 비교적 공통된 믿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동시대인들 다수가 이 작품에 붙인 지극히 복합적인 참고사항들로 보면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훨씬 더 길어서 1년 가까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 책은 그녀가 두 번째로 평화를 주선하는 사명을 띠고 피렌체로 출발한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던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에서 몇 달 보내는 그 정신없는 동안에도 카타리나는 틈틈이 원고를 붙잡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책을 보면 카타리나는 교회 분열이 극도로 심화되지 않고 그 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 내부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은 많이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분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카파리니는 그녀가 1378년 11월에 로마로 불려가기 이전에 이 책을 끝마쳤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서 구술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화」의 문체는 ‘탈혼 상태에서의 구술’과는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늘이거나 줄이느라 굉장히 고심한 흔적까지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스테파노 마코니가 전한 카파리니의 기록 또한 그녀가 “본향 사투리로 손수 작성한 책 가운데서 여러 페이지를” 친히 쓰고 있는 광경을 직접 똑똑히 목격했었노라고 쓰고 있다. 아무튼 편지들과 「대화」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특정한 주제와 심상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반드시 발견하기 마련이다.

 


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기도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참 하느님이신 당신께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저를 모든 악한 생각에서 보호하시며,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시고 불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7. 참고자료

 

* 시에나의 가타리나, “대화”, 바오로딸출판사, 1997.
 * 매리 앤 파툴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가르침”, 분도출판사, 1997.
 * 빈제,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함께하는 기도”, 성바오로출판사, 1996.
 * 폴리, “매일의 성인”, 성바오로출판사, 1987.

 
8. 성녀 가타리나에 관한 링크

www.op.org/DomCentral/trad.domlinks.htm

[도미니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

 

 

1347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완덕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여 아직 소녀 시절에 도미니코회의 제3회에 입회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도시들 간에 평화와 화목의 씨를 뿌렸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끊임없이 방어했고 수도 생활의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 건전한 교리와 깊은 영성에 찬 글을 남겼다. 1380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녀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집]에서
(Cap. 167, Gratiarum actio ad Trinitatem: ed. lat., Ingolstadii, 1583, f. 290-291)

 

나는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오, 영원한 하느님이시여,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신성의 일치를 통하여 당신은 독생 성자의 피를 한없이 보배롭게 만드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내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당신은 영혼을 채워 주시지만 그것으로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 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 하고 또 목말라 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나는 내 지성의 빛으로 당신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심연과 당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바로 당신의 모상임을 알았습니다. 영원한 아버지시여, 이것은 당신의 힘과 당신 외아드님의 속성인 지혜를 나에게 주심으로 된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자께로부터 발출하시는 성령께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의지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창조자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성자의 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이루신 새 창조를 보고 당신이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심취하여 계신지를 당신 빛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오 심연이시여,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오 하느님이시여, 오 깊은 바다이시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타오르는 불이시며 꺼지지 않는 불이십니다. 당신의 열기 속에 영혼의 온갖 자아 사랑이 삼켜지고 모든 차가움이 없어집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진리를 알게 하시는 빛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십니다.

 

나는 이 빛의 거울에서 당신을 최고선, 만선을 초월하시는 선, 복되신 선, 모든 이해를 초월하시는 선, 더없이 고귀하신 선, 모든 미를 초월하시는 미, 그리고 모든 지혜를 초월하는 지혜로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지혜 자체이시고 사랑의 불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친히 내어 주신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당신은 나의 온갖 벌거벗음을 덮어 주고 감싸 주시는 의복이십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시에나의 가타리나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아무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 읽기와 쓰기조차 뒤늦은 성년에 이르러 독학으로 터득한 그녀가 더구나 성서 주석이나 신학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토록 출중한 학자로 인정되어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겨우 33년(1347-1380)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으며 평신도로서 그리고 시대 한계 조건인 여성으로서 활동한 가타리나가 어떻게 당시 유럽의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뿐 아니라 사회의 온갖 부류의 수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일에 관여하며 영향을 미쳐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시대에 요청되던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은 성령의 도구로서 그분의 이끄심에 순응하면서 이룬 결실이 아니겠는가?

 

성녀가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면서 산 생애와 은총 안에서 가꾼 영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가타리나는 1347년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양모 염색업자였던 아버지 야고버 베닌카사와 어머니 라파 피아첸티 사이에서 스물다섯 명의 자녀 가운데 스물 네 번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이 때부터 쾌활하고 사교적이었으며 신심에 잇어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기를 지냈다. 그리고 그녀는 일찍이 하느님께서 그녀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신다는 소명의식을 가졌다. 그녀의 뒷날 지도신부에 의하면 그녀가 겨울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진 못했을 지라도 자신의 방식대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며 동정 서원을 하였다. 가타리나의 가족이 살던 집 뒷동산에 교육과 설교의 중심지인 도미니코회 수도원과 성당이 자리잡고 있어 그녀는 그곳을 자주 찾아가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가타리나가 어린시절에 그녀의 집에서 성장기를 지내고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된 사촌오빠 토마스 델라폰테의 영향도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 토마스는 나중에 그녀의 첫 번째 고해사제 겸 영적 지도자로서 영적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가타리나는 1365년 18세에 여성 평신도들로서 도미니코 3회원들의 단체인 만텔라테회에 입회하였다. 그 단체의 여인들은 수도복을 착용했지만 각기 자기 집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원장과 도미니코 수도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고아, 가난한 이들, 병자들 등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였다. 결혼하지 않고 봉사생활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가타리나가 반대하던 가족들을 설득시켜 마침내 허락을 받아 들어간 곳이 이 만켈라테회였다. 입회 후 3년간 그녀는 사회와 격리되어 엄격한 침묵과 기도 중에 관상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글읽기를 터득한 것도 고독과 침묵으로 지내던 이 시기에 이루어졋다. 그녀의 독거생활은 1368년 그리스도와의 「신비의 약혼식」을 가짐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그후 그녀는 주님의부르심에 더욱 확신적으로 응답으로 만텔라테회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에 적극 투신하였다.

 

1374년 5월부터 10월까지 시에나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흑사병으로 황폐화되었다. 대부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전염의 위험성을 피해 도시를 떠났지만 가타리나는 소수의 수도자들, 만텔라테 회원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가타리나의 그러한 놀라운 사랑과 용기 그리고 헌신적 봉사에 대한 소문은 여러 도시로 금방 퍼져나갔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가타리나의 헌신적 사회구조 활동은 점점 그녀의 명망을 높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였으며 그녀는 그들과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했고 가르치기도 했다. 배운 것은 성서주석과 신학적 논리였으며 가르친 것은 자신이 하느님과의 내적 만남을 통해 체험하고 터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그녀의 침묵과 관상생활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관생생활로부터 활동적인 사도직이 성장해 나왔고 활력을 얻었다.

 

1370년부터 1374년 사이에 시에나에서 가타리나의 권고를 통하여 잘못 살고 있던 이들 뿐 아니라 교만한 지식인들 등 헤아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다. 그녀의 권위있는 타이름과 사랑 담긴 조언은 적개적인 파벌들이 화해하도록 했으며 악명 높은 죄수들까지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가타리나에게 이끌리었던 이유는 단지 그녀의 호감적 소탈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또한 3년간 그녀의 작은 방에서 은수 생활을 하면서 받게된 말씀의 은총 때문이었다. 그녀의 설교 뿐 아니라 대화 중에 정겹고 신념에 찬 그녀의 말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매력을 지녔었는지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들도 친구나 제자로 함께 있고 싶어앴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려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가타리나는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조직의 주창자 및 중재자로서 폭넓은 활동을 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화해, 로마와 도시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로 두루 다니며 평화의 사절 역할을 하였다. 좌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큰 장애를 겪고 힘든 방해들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인내로이 그리고 용기 있게 극복하여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1376년 9월 13일 가타리나와의 로마 귀한 약속을 이행하면서 아비뇽을 떠났다.

 

가타리나는 교회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쇄신을위하여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과 추기경들을 만났고 편지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호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건한 사람들을 모아 로마에서 교황을 지지하고 교회의 개혁을 중재할 「교황청 평의회」를 조직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가타리나가 교황과 추기경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친구들,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오늘날 남아있는 것만도 400여 편이나 된다. 이러한 서신일체를 염두에 두고 1377년부터 두 해에 걸쳐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책」이라고도 불리는 「대화」를 썼다. 그녀의 인품과 성장과정 그리고 인간관계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그녀의 편지들이라면, 저서 「대화」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받은 내용과 제자들에게 가르친 영성을 담은 역작이며 유산이다. 그녀가 쓰기를 배우기 전에 구술하여 다른 사람드이 적도록 하였다.

 

 

 

1380년 초부터 가타리나는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통해 교회의 쇄신과 화해 등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촉구하였으며 기도와 희생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탈진되기 직전까지 1마일이나 되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서 매일 아침 미사 때부터 저녁 마지막 기도때까지 교회분열의 종식과 쇄신 그리고 일치를 위해 온종일 기도하면서 머물렀다. 가타리나는 4월 29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리스도의 성혈의 자비를 청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가타라나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주보 성인으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1970년 10월 4일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의 박사」로 선포되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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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으면서도 열정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녀에게 관상이 끼여들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 함께 있던 이들에 의하면 그녀에게 관상적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 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단언한다.

 

그들은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또한 활동하면서 만나고 겪은 것 모두는 기도 속에 현존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가타리나는 사회적 신비가 또는 신비적 활동가라고 불린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가타리나는 교회가 역사 안에서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수여한 33명 중 하나이다. 그 가운데 여성은 셋 인데, 그들은 최근에 선언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1997.10.19)와 아빌라의 데레사 그리고 가타리나 이다.

 

가타리나의 영적 증언집인 대화와 전해지는 400 여편의 편지들은 그녀가 교회의 권위 있는 영적 저술가들, 신비가들의 대열에 들어있음을 드러내 준다. 그녀의 글은 신학적으로 체계화되었거나 창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들을 자신 안에 흡수하고 소화시켜 통합적 지식과 영성을 형성하여 그것을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들이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까지 틀림없이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읽기를 깨친 때가 스무 살의 나이였으며 쓰기를 배운 것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서른 살 때의 일이었으니 그토록 수준 높은 신학과 깊은 영적 지식을 언제 어떻게 갖출 수 있었을까? 그녀는 사제, 수도자들과 대화하면서 부지런히 성서주석과 신학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그보다 하느님과의 내적인 만남과 긴밀한 사랑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 도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면서 터득했던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서 아버지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며 연구 하는 이론가 아들보다 그분을 가까이 모시고 사랑하는 효자가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시 사회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 극히 한계적 여건인 평신도로서 더구나 여성으로서 가타리 나는 설교, 쇄신의 촉구, 화해의 중재의 도구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순응 하였다.

 

그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데 있어 처음엔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망설이기도 했으나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그분께 위탁한 마리아처럼(루가 1,38 참조), 하느님의 뜻이 그녀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독단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녀를 감싸주시는 사랑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기를 배워나갔다.

 

그녀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용감히 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은 그녀를 하느님께 더욱 위탁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녀의 활동업무가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분노하였으며 실로 저항하고 방해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영적 지도신부였던 라이몬드는 하느님께서 가타리나를 부르신 것이 교회의 남자들에게 시대적 표지로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배우지 못한 사도들을 보내어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당황하게 하셨듯이 이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대수로워 보이지 않는 한 여자를 보내신 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로 채워진 이 여자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는 것이다.

 

가타리나의 교회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교황에 대한 자녀다운 효심은 교회가 온통 혼란스럽고 세속화 되어있던 상황이었지만, 비판적 관망이나 절망적인 자세가 아닌 희망과 긍정적 전망 중에 기도하면서 쇄신과 화해를 위한 중재에 지칠 줄 모르게 투신하도록 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귀환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가타리나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교황은 사도좌가 있는 로마로의 귀환을 용기 부족으로 결단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가타리 나가 하느님의 뜻을 상기시키며 그를 신념있게 고무시킴으로써 용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그의 일기장 에서도 기술하고 있다.가타리나는 수도회 개혁에도 기여하였다.

 

그녀가 살았던 때는 교회와 사회 뿐 아니라 그녀가 속해 있던 도미니코회 등 모두가 혼란 상태에 있었다. 당시는 또한 신비주의가 발흥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마이스타 에카르트 등 도미니코회 동료들이 사변에 심취되었던 데 비해 가타리나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영성을 살면서 크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가타리나는 영적 지도자이던 카푸아의 라이몬드 신부에게 깊은 영향을 줌으로써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결과적으로 도미니 코회의 개혁을 지속하도록 마련하였다.

 


3. 가타리나의 영성

 

대화 와 편지들 안에 나타나는 가타리나의 영적 가르침은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녀의 영적 가르침은 매우 교의적이며 스콜라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는 성삼위의 흠숭자이고 그리스도께 대한 그녀의 신심은 특히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흘리신 성혈에 집중 되어 있다. 또한 그녀는 영적 사부인 성 도미니코처럼 사도적 관상가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영적 가르침 중 사랑의 세 단계와 신비적 일치에 대해 개관하기로 한다.

 

 

3.1 사랑의 세 단계

 

가타리나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장 과정으로 사랑의 세 단계를 서술한다.첫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이기적으로 사랑한다. 비굴한 사랑이다. 자신이 지은 죄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중에 살고 있다.

 

둘째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사람들을 이기심 없이 친구로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원한 상급에 대한 희망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아직 보상을 바라는 사랑이다. 셋째 단계 에서는 우리는 완전한 사랑의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위탁한다.

 

하느님과의 일치의 사랑으로 효경의 사랑이다.

 

 


3.2 신비적 합일

 


가타리나가 서술하는 신비적 합일은 성화 은총을 통한 하느님과의 단순한 일치가 아닌 영혼 안의 하느님 현존의 체험과 인식이다. 그녀는 신비적 합일을 표현하기 위하여 요한 복음의 표상들을 사용한다.

 

 

 

요한 14, 21∼23의 말씀은 그녀에게 신비적 합일의 핵심인 사랑, 인간의 이기심을 치유하고 하느님의 뜻을 입게 하는 친밀한 사랑의 상징을 보여준다.


가타리나는 신비적 합일에 이르는 정화과정을 용광로에 던져진 석탄에 비유한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 속에서 우리는 불타는 석탄과 같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이 붙어있기에 하느님 외에는 우리 의지에서 전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신비적 합일은 또한 물이 물고기를 둘러싸고 품어 안으면서 바로 물고기의 생명이 되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떠날 수 없는 집이 되신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수록 성령의 사랑은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치유시 키므로 처음에는 그렇게도 어렵던 이 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감미롭고 매력적인 것이 된다.

 

가타리나는 요한 15, 15의 말씀이 진리임을 직접 체험한다. 신비적 합일은 우리에게 종으로서의 사랑을 넘어 하느님께서 비밀을 남겨 두시지 않는 가까운 친구의 사랑에 이르게 한다. 신비적 합일에 대한 그녀의 가장 직접적인 상징은 부모의 품에 안겨서 그 입맞춤을 받으며 평화 속에 쉬고 있는 어린 아이로 표현된다.

 

신비적 합일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취하게 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타게 하므로 우리는 하느님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인 형제 자매들과 친밀한 일치를 체험하게 된다.

 

가타리나는 세상의 구원에 대한 열정과 분리된 신비적 합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께는 되돌려드릴 수 없는 그 무상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도록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 하느님과의 친교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신문, 2000년 2월 13일]


 

[그리스도교 영성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원으로서 신비가이며 아비뇽의 교황청을 원래대로 로마로 옮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염색업을 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가타리나는 가정에서 좋은 신앙 교육을 받았다. 7세때 영광에 싸인 예수님을 환시로 보고 동정을 서원하였으며 모친의 반대가 심했어도 서원을 충실히 지키고 도미니코 회원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영성생활에 전력하였다. 10대 말기에 특별한 기도와 고행을 3년간 한 후 21세에 환시를 보게되었는데 그 환시를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정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 가지 특기할만한 일을 하게 되는데, 첫째 단계는 21세부터 27세까지의 활동이다. 두 번째 단계는 28세부터 31세까지, 마지막 단계는 1년 남짓한 기간이다.

 

가타리나는 27세까지 시에나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녀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남녀 그리스도인들, 재속 신부와 수사신부들, 평신도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부분 성녀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타리나를 『어머니』(원장)로 불렀다.

 

이렇게 영적 가족을 이루게 되자 이들을 위한 영적 어록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성녀의 비서들이 받아 쓴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반대와 중상 모략도 없지 않았다. 젊은 여성이었고 사회적 신분도 없는 약한 여성으로 보였으나 두려움 없이 열심히 일하였다. 피렌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성령의 인도로 까다롭고 엄한 재판관들을 모두 설득시키고 안심시켰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후 가타리나는 교회의 공무와 정치에 개입하였다. 이를 우리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할 것은 아니다. 사실 가타리나는 현실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개입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에서 로마로 옮기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영성적으로 가타리나는 신비가들과 교회의 문필가들 대열에 든다. 그녀의 영성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열성 그리고 사랑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강생하신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께 어린 나이에 동정 서원을 발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였다. 특히 죽을 때가지 비밀리에 간직한 거룩한 흔적(聖痕, stigma)과 신비적 일치의 반지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통을 주실 때가 많다. 이는 성인들의 생애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가타리나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랑은 그분이 세우신 교회와 교회를 지도하는 이들의 열성과 생활 개선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가타리나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은 하느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사랑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으셨고 당신 사랑의 표시로 교회에 남기신 성체성사에 집중하게 된다. 가타리나의 생애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헌신적인 사랑을 배웠고 하느님께 사랑은 물론이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였다.

 

또한 건전한 교리와 영성의 가르침을 받았다. 마지막 지도신부는 도미니코회 수사신부이자 복자가 된 카푸아의 라이문도였다. 또한 가타리나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베르나르도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을 이어 받았으므로 건전한 신비가였다.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는 전적으로 하느님 사랑,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대한 사랑, 인류의 구원과 평화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 개선과 개인의 성화를 다루고 있다. 그만큼 교회의 사람으로서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구원의 표징인 교회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영성의 극치는 사랑의 완성이다. 가타리나는 사랑의 단계를 세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두려운 사랑이자 비굴한 사랑이다. 이는 각자가 지은 죄로 인해 받을 벌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그 다음 단계는 영원한 상급을 받으리라는 보상에 대한 사랑으로 진보된 사랑이긴 하나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한 사랑의 단계는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자신의 의지나 사랑(自愛)을 버리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된다.

 

가타리나의 신비적 일치는 복잡하지 않다.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체험하고 인식할 때 언제나 마음을 그분께 들어올릴 수 있다. 성 아우그스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안에 깊숙이 들어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발견된 하느님을 더 원하는 영혼은 완덕의 극치를 향해 늘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다.

 

가타리나는 1380년 4월 29일 귀천하고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16일]

 


참고자료 


■  고종희 저, 명화로 읽는 성인전(알고 싶고 닮고 싶은 가톨릭성인 63인) - '가타리나', 서울(한길사), 2014년, 372-379쪽. 
■  김영수 저, 김이중 그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0년.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60-64쪽. 
■  메리 앤 파툴라 저, 도미니꼬 선교수녀회 역,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가르침, 왜관(분도출판사), 2000년.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가타리나', 서울(으뜸사랑), 2014년, 133-138쪽.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58-170쪽. 
■  편집부 편, 교회사를 빛낸 10인의 성녀 - '성녀 가타리나', 서울(가톨릭출판사), 2000년, 165-188쪽. 
■  편집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서울(가톨릭출판사), 2000년.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 - '가타리나, 시에나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4년, 73-74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서울(성바오로), 2002년, 101-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