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6. 30. 23:32

성녀 에스테르(Saint Esther)

 

 

 

  

 축일

 7월 1일 
 신 분  왕비, 구약인물
 활동지역  페르시아
 활동연도  + 5세기경BC 
 같은이름

 에스더, 에스데르, 에스델, 에스떼르, 에스터, 에스텔 


 

 

 


구약성경 에스테르기에 등장하는 에스테르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잡아 온 유다인 중 하나이다. 그녀는 벤야민 지파 출신 아비하일의 딸로 부모가 죽은 뒤 수사 성읍의 왕궁에서 봉직하는 삼촌 모르도카이의 양녀가 되었다. 에스테르는 모습이 아름답고 용모가 어여쁜 처녀였다.

 

당시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시대였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신하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는데 취흥이 돋자 와스티 왕비를 불렀다. 백성과 고관들에게 왕비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비는 임금의 분부를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임금은 왕비를 폐위시켰다. 새로운 왕비를 찾던 임금은 에스테르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자신의 왕비로 삼았다. 에스테르는 삼촌의 명대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당시 궁궐 대문에서 근무하고 있던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임금의 내시 둘이 불만을 품고 임금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에스테르 왕비를 통해 임금에게 고하여 음모를 막았다. 그런데 하만이 재상이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모르도카이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자 그의 출신이 밝혀지고 하만은 왕국 전역에 있는 유다인들을 모두 몰살하기 위해 임금에게 거금을 약속하며 허락을 받아냈다. 그래서 지정된 날에 유다인들을 모두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임금의 서신이 제국 내에 발송되었다.

 

곳곳에서 유다인들이 단식하고, 울고 탄식하며 크게 통곡하고 있을 때 에스테르는 모르도카이의 말을 전해 듣고 목숨을 걸고 임금 앞에 나아가 이 불행을 되돌리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하만은 더욱 기세등등해서 모르도카이를 매달 말뚝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모르도카이는 역적모의를 신고하고도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임금으로부터 최고의 영예를 받고, 하만은 오히려 자기가 마련해 놓은 말뚝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작성한 임금의 칙령은 취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스테르는 임금에게 청하여 반대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즉 유다인의 학살일로 정해진 그 날에 유다인들 스스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봉기해 그들에게 대적하는 무리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결정에 따라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주사위, 아카디아어로 ‘푸르’를 던져 정한 이날을 해마다 ‘푸림절’로 경축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푸림절은 원수들로부터 평안을 되찾은 날이고, 근심이 기쁨으로, 애도가 경축으로 바뀐 날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쁨의 날로 지내면서 서로 음식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축제로 지내게 되었다. 그 후 모르도카이는 왕국의 제2인자가 되어 동족인 유다인들의 평화를 지키고 그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에스테르는 ‘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 에스테르 - 불의와 억압에 맞서 과감히 말하고 행동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에스테르기의 핵심내용

 

에스테르기는 페르시아 왕국에 흩어져 생존하던 유다인 공동첵 크세르크세스(그리스 말임. 히브리 말로는 ‘아하스에로스’라 지칭됨) 임금의 총애를 얻었던 에스테르를 통해 구출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질투심에 가득 찬 고관 하만의 모함에 말려들어 모든 유다인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은 내린다. 에스테르는 목전에 다가온 자기 백성의 몰살을 막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개입한다. 마침내 그는 크세르크세스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하만은 에스테르의 양아버지인 유다인 모르도카이를 죽이려고 세웠던 그 말뚝에 도리어 매달려 죽는다.

 

히브리 말 에스테르기 원본에는 하느님이 그 어떤 장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오로지 권력과 계교로 움직인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래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칠십인역 에스테르기에서 하느님의 이름과 업적을 첨가하여 이야기 전체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말 에스테르기 원본의 이야기는 신학적 차원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우연한 사건의 이면에, 인간의 행동 이면에 존재하시고 활동하신다. 역사의 주인은 그 어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유다 백성을 선택하신 분이다. 이런 선택은 함께 살던 백성들 가운데 유다인들만을 따로 격리시키는 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제 이 유다인들은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유배를 겪고 있다. 유배지에서 멸시를 당할 뿐만 아니라 절멸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성실하게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항상 깨뜨렸어도, 그래서 유배가 계약파괴에 대한 징벌로 해석되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신다.

 

그리고 유다인 가운데는 에스테르와 모르도카이처럼 죽음의 위험에서도 하느님과 그분의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에 감사하는 인물들이 항상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께 충실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활동하시지 역사 안에서 기계적으로 활동하시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모르도카이는 “인간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 위에 두지 않으려고”(에스 4,17⑦) 한다. 에스테르는 먼저 자신의 민족과 혈통을 비밀에 부치고(에스 2,10. 20 참조), ‘하다싸’라는 히브리 이름을 숨기고 그 의미에 상응하는 페르시아 이름으로 지칭된다(에스 2,7 참조). 그러나 다급한 곤경의 순간에 그는 유다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크세르크세스 임금에게 자신의 민족과 혈통을 솔직하게 밝히고 자기 민족이 처한 위험을 알린다. “사실 저와 제 민족은 파멸되고 죽임을 당하고 절멸되도록 이미 팔려 나간 몸들입니다”(에스 7,4). 여기에서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에스테르가 거짓말로 자신을 기만하고 속인다고 의심할 수 있었는데도, 에스테르의 간청을 받아들여 유다인들을 다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거두어들인다.

 


감사와 기쁨의 축제인 푸림절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던 에스테르의 기도와 희망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유다인들을 모두 절멸시키라는 법령을 취소시킬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까지도 요구한다. 하만이 권좌에서 물러나 죽음을 당한 뒤에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잔인한 복수는 분명 야만적 행동이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각 도시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이 한데 모여서 자기들의 목숨을 지키도록 봉기하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민족과 각 주의 무장한 무리들을 어린이와 여자 할 것 없이 파멸시키고 죽여서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윤허하였다”(에스 8,11). 에스테르는 이런 잔인한 보복행위를 거리끼거나 방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수사 왕성에 있는 유다인을 위해 “복수의 둘째 날”을 주도한다(에스 9장 참조).

 

우리는 하느님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이런 전쟁을 오늘날의 눈으로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시간에서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친히 당신 백성의 원수들과 싸우는 전쟁이다.

 

 

원수들을 향한 소름끼치는 응징과 복수에도 불구하고 에스테르의 이야기는 기쁘고 흥겹게 끝난다. 유다인들은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를 벌이고, 모르도카이는 대량학살 후의 “안식일”을 해마다 기억과 감사의 날로 지내도록 확정한다(에스 9,21 참조). 그는 이제 페르시아에서 하만의 자리에 앉아 고관이 되고, 임금 다음가는 권력과 세력을 누린다.

 

에스테르기는 유다인의 큰 명절들을 알려주고 분류하는 ‘다섯 두루마리’에 속한다. 오늘날 성경 연구에 따르면, 에스테르기는 역사적인 실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기보다는 유다인들의 봄축제에 해당하는 푸림절을 언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유롭게 집필되었다고 한다. 파스카의 축제처럼 푸림절은 긴박한 곤경에 처한 백성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에스테르기에서 이 축제의 이름은 주사위(푸림)를 던져 선택된 날에 모든 유다인을 살해하라는 하만의 명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은 유다인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운명의 날이 되었다.

 


말하고 행동하는 시간

 

 

 에스테르기의 본질적인 핵심은 피비린내 나는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불의와 억압에 대한 항거이다. 이 이야기는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겪는 같은 운명을 다루고 있다. 유다인들은 유배지에서 주변 환경에 그대로 순응하고 적응하기보다는 율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런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수상하게 보였다(에스 3,8 참조).

 

에스테르는 자기 백성을 살려달라고 청하기 위해 임금 앞에 나아가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거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임금에게 들도록 부름을 받는 사람만이 임금에게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의 마음에 이렇게 호소한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절멸하게 될 것이오.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에스 4,14). 에스테르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왕비가 머무는 곳으로 피신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막중한 사명을 깨달았고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사건에 개입한다.

 

억압을 받고 박해를 겪는 소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항상 실존한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놓는다. 하지만 이들은 항상 소수인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통해 책임을 회피한다. ‘만일 그대가 이런 때에 나서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모르도카이의 경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른 데’라는 모르도카이의 언급은 유다인들의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장소’는 하느님을 특징짓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장소’, 그러니까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에스테르는 하느님의 도구이다. 그의 양아버지인 모르도카이의 절박한 호소는 에스테르로 하여금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닫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낯선 이주민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대우와 배척과 증오심 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섯 두루마리’에 속하는 또 다른 문헌인 코헬렛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따라서 입을 열어 말하고 행동할 때가 언제인가를 깨닫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에스테르는 그 때를 제대로 깨닫고 행동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충실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쌍백합, 제38호, 2012년 가을호]

 

 


 

 

에스테르기 입문

 

 

 

 


1. 내용

 

 

이 책은 페르샤 왕국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 중의 한 처녀인 에스델이 어떻게 왕비가 되었고, 그의 사촌 오빠이며 양부인 모르드개가 어떻게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역적 모의를 알아내었는지를, 그리고 총리 대신 하만이 어떻게 유다인들을 절멸시키려 하였고, 모르드개의 권유를 받은 에스델이 이에 맞서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개입한 끝에 하만이 어떻게 처형되었으며 유다인들은 어떻게 임금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또한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결정하기 위하여 주사위를 던진 것을 기념하는 ‘주사위 축제’ 곧 ‘부림절’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모르드개에 대한 찬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2. 저작 시기 및 장소

 

 

이러한 사건들은 에즈라, 느헤미야, 집회서(기원전 190년경)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쿰란에서는 히브리 성서의 모든 책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되었지만, 유일하게 에스델서의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에 2마카 15,36에는 “모르드개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팔레스티나에서 이 축일을 지냈음을 가리킨다.

 

에스 3,8에 따르면 페르샤 왕국의 총리 대신인 하만이 유다인들에 대해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임금님 왕국의 모든 주에는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저희들끼리만 떨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법은 다른 모든 민족들의 법과는 다를 뿐 아니라, 임금님의 법마저도 그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둠은 임금님께 합당치 못하옵니다.” 그런데 정복민들에 대한 페르샤 왕국의 정치․종교적 관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에즈라-느헤미야 참조). 그래서 위의 말은 오히려 유다인들을 강경하게 탄압한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정책에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에스델서는 2세기 말엽 곧 크세르크세스 1세(1,1과 각주 참조) 후 3세기가 지난 다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에서 저술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9,20-32에는 여타의 부분들과는 다른 문체 및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구절이 후대의 첨가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3. 그리스말 번역본

 

 

이보다 더욱 큰 첨가는 167개의 절로 된 히브리 본문에 93개의 절을 보태는 칠십인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첨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모르드개의 꿈(1,1① - ⑪), 임금에 대한 음모(1,1⑫ - ?), 아하스에로스 임금의 조서 내용(3,13① - ⑦), 모르드개가 에스델에게 한 말(4,8①), 모르드개의 기도(4,17① - ⑪), 에스델의 기도(4,17⑫ - ?), 에스델이 임금 앞에 나아간 장면에 대한 확장된 서술(5,1① - ?; 5,1의 각주 참조), 아하스에로스 임금의 두번째 조서(8,12 ① - ?), ‘부림절’(아래 참조) 날짜와 관련한 부가 설명(9,19 ①), 모르드개가 꾼 꿈의 해석(10,3 ① - ⑩), 끝으로 그리스 번역본의 기원에 관한 ‘붙임말’(10,3 ⑪)이다. 이 ‘붙임말’은, 히브리말로 된 에스델서가 이 번역본에서 문제가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임금(10,3 ⑪과 각주 참조) 이전 시대에 저술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칠십인역 에스델서의 첨가 부분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오로지 권력과 계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경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히브리 원본에 더욱 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신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지 않으며, 교회 전례에서는 그리스말 첨가 부분만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주인은 이러저러한 인간의 권능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선택한 분이심을 상기하는 데에는(적어도 유다인 청중 또는 독자에게) 4,14의 말로써도 충분하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6,13과 4,1.16도 참조).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증인들의 행동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말 번역본은 히브리 성서가 암시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표현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칠십인역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는 번역본에서 이 그리스말 첨가 부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시키느냐는 것이다. 원래 칠십인역은 첨가 부분을 히브리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시켰다. 반면에 예로니모는 라틴말 번역본에서 히브리 본문이 끝난 다음, 일종의 부록과 같이 히브리 성서에 연이어지는 장절 수에 따라 첨가 부분을 한데 모았다. 현대 번역본들은(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의 경전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를 번역하지 않는다) 칠십인역 전통이나 예로니모의 전통을 따르기도 하고, 또는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르면서 예로니모의 장절 수나 독자적인 장절 수를 이용하기도 한다.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를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글씨체를 사용함으로써 히브리 성서에만 들어 있는 부분과의 구별을 쉽게 한다. 우리의 번역본에서는 칠십인역의 전통을 따르면서 히브리 성서 번역 부분과는 다른 글씨체(이탤릭체)를 사용하며, 장절 수는 바로 직전의 히브리 성서 장절에 ①, ② 등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면 1,1①; 4,17⑤; 5,1? 등과 같다.

 

 


4. 에스델서와 역사

 

 

 

 

에스델서가 페르샤 왕국 도성들 중의 하나인 수사 왕성의 지리, 연대, 행정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도 연대와 장소 및 등장 인물들을 명시함으로써 일종의 ‘역사화’를 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전하는 바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보고가 아니다. 사실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 인물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왕국의 왕비는 항상 페르샤 사람이었다. 1,1의 아하스에로스 임금이 그리스식의 이름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10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와스디가 아니라 후타오사(또는 그리스식으로 아토싸;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메스트리스)라는 여인이었다. 자신들에 대한 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유다인들의 조직적 반격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에스델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소망을 소설의 형태로 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에(비록 에스델서의 배경보다 후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유다인들의 실제적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여러 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에스델서에 담긴 말살 시도는 그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사육제적인 경향을 보존하고 있는 부림절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9,24-26이 설명하고 있듯이, “주사위”를 뜻하는 외래어 “부림”은 유다인들의 이 축제가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자기네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이교 축제를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 또는 원초적 혼돈에 대한 승리자로서 운명의 신들을 통괄하는 마르둑 신의 축제라 생각하였다. 또는 바빌로니아의 신인 마르둑 및 이쉬타르와 엘람의 신인 후만 및 마스티 사이의 투쟁, 또는 다리우스 임금에 의한 제관들의 학살 등을 이 축제의 배경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가설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영향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화론적 요소들을 지닌 이교도들의 축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은 이러한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자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다른 축제들에서처럼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신화를 받아들여 이를 역사 속으로 삽입시켰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들을 바로 그 속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 성탄 대축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역사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수용하여 탈신화화함으로써 자기네 전설을 정당화한 것이다.

 


5. 에스델서의 의의

 

 

역사와 일상 체험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권리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롭게 지적해 준다(에스 3,8 참조). 유다 백성이 여러 나라에 퍼져 살게 된 이후, 이들은 여타의 소수 민족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로써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14세기 유럽의 ‘대흑사병’을 계기로 한 유다인 학살(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참조) 또는 독일의 나치당과 그 공범자들이 채택한 ‘최종적 해결’은 이에 대한 비극적인 실례들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보이기 위하여 이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만에 의해서 모의된 유다인 말살도, 모르드개에 의해서 조직된 ‘반-말살’ 활동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맹목적 폭력은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유다인들의 원수들이 유다인들을 매단 십자가나 또는 유다인들이 비유다인들을 매단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이 하나 되어 못박았지만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만이 화해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두 편을 하나로 만들고 자신의 몸으로 장벽 곧 적개심을 없애셨으며, … 자신 안에서 적개심을 죽이셨습니다”(에페 2,14-16).

 

[CBCK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중에서]

 

 


 



에스테르기 - 내용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상대방에 예의와 존중 갖출 때 주체적 삶에 대한 구현 가능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관심을 쏟는 부분은 무엇일까? 각 세대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심은 「주체적 삶에 대한 구현」이 아닐까 한다. 여성,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별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타인이나 외부적 제도에 의해 억압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 삶의 주체에 대한 질서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제 곧 25주년을 맞이하는 5,18사건 역시, 인간 본연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 저항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델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박탈당한 피지배인 으로서의 여성과 식민지 여성이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하고 불평등한 삶을 전달해주고 있다.

 

특별히 오늘 살펴보게 될 에스델 1장의 사건(와스디 왕비의 폐위)은 남성위주의 고대 관료사회가 저지르는 병폐와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진열장의 인형처럼 박제되는 것, 남편의 능력을 과시하기위한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 입이 있어도 슬프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모든 아내와 여성들이 경험해보았을 가장 두려운 현실이요 비극은 아닐까.

 


구성에 대한 문제

 

지난번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에스델서는 제1경전(히브리어 부분)과 제2경전(희랍어 부분)이 합성되어 있어서 본문접근에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찰은 「히브리어 성서」의 「성문서」 연구이기에 여기서는 희랍어 부분에 대한 접근은 생략하고자 한다. 에스델서의 히브리어 부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2장: 에스델이 왕비가 되기까지→ 3장~9, 19: 하만의 음모와 운명의 극복→9, 20~9, 32: 부림절 →10, 1~3: 맺음말.

 

 


《1장. 왕비 와스디의 폐위》

 

 

1절은 이 이야기가 아하스에로스(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5~465년)는 에스델서와 에즈 4, 6에서 「아하스에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시대의 사건이었음을 제시한다.

 

에스델서에 의하면 그는 재위 3년, 「수사」라는 도시의 궁궐에서 모든 장군들과 귀족들을 위한 잔치를 무려 180일 동안 베푼다.

 

이는 자신의 영화와 경제력,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였다(3~4절). 이렇게 귀족들만의 축제가 끝나자 수사성에 사는 모든 백성을 위한 잔치가 7일간 이어지는데(5~8절), 이때 왕비 와스디는 여자들만을 위한 잔치를 주관한다(9절). 입문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와스디라는 이름의 왕비는 페르시아의 실록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내를 아메스트리스라고 호칭하고 있기에, 와스디라는 인물의 역사성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어쨌든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사건」은 그 화려했던 잔치 마지막 날 발생한다.

 

『술로 기분이 좋아진』(10절) 왕은 왕비의 미모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녀를 단장시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동의 없이 내려진 꽃단장(?) 명령에 마음이 상한 왕비는 왕의 명령에 불복한다. 이에 격분한 왕은 그 잔치에 모여 있던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의논한다.

13~22절은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이 여성에게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제시하는데,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와스디의 행위는 왕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무시한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16절).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페르시아의 여인들에게 퍼져 남편들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한 남성 귀족들은(17절)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여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는 극적인 처방을 쓴 셈이었다.

 


모욕과 상처가 되는 말

 

 

여성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폭력들이 있다. 인형도 아니고, 장식물도 아니건만 아무 때나 남성들에게 소유물이나 상품취급을 받을 때이다. 치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오라는, 도무지 분별력 없는 남편의 명령이 와스디에게 얼마나 치명적 사건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서 본문은 그 명령이 갈등의 시발이었음을 명시한다.

 

남성들이 여성과의 성별적 차이를 상하 계급성의 도식으로 이해하려드는 한, 그리고 자신들의 어머니 역시 여성이었음을 반복적으로 망각하는 한, 진정한 남녀관계의 재구성은 묘연한 관념이자 허구적 환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관계」라는 까다로운 시스템은 상대방의 주체적 삶에 대한 예의 있고 진심어린 존중을 통해서만 다가설 수 있는, 일종의 초월이자 희생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15일]

 

 


우리 삶에 정작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예의와 하느님 향한 열정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열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게 될 때, 나 역시 그럴 수 있고 내가 사랑해온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될 때, 그래서 삶에 짙은 그늘과 상처, 그림자가 어쩔 수 없이 드리워지게 될 때, 유일한 희망과 자존심의 보루로 마음 안에 꼭꼭 챙겨두는 것은 힘겹지만 거짓 없는 「진실」이다.

 

난관을 마주할 때 마다, 이미 적이 된 상대와 보이지 않는 지능싸움은 시작되고 머리를 싸매 최대한 영리하고 야무진 대안을 모색해 보지만, 그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할 뿐, 보다 명료한 진실을 위해 필요한건 그저 단순하게 정돈된 마음, 성모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에스델이 왕비로 간택된 것은 화려한 치장 혹은 이목을 끄는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 주에 읽게 될 성서 본문은 「가장 소박한 치장」을 한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었음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단순한 예의와 하느님을 향한 열정임을 가르쳐준다.

 

 


2장, 새로운 왕비 에스델

 

 

 

2장은,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왕비에 오른 에스델과(전반부: 1~18), 왕에 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드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후반부: 21~23절).

 

와스디가 폐위되자 왕의 시종들은 나라에 있는 모든 아가씨들 중, 용모가 어여쁜 젊은 처녀들을 수소문하여 새 왕비로 삼고자 한다(2절). 이러한 풍습은 고대 궁궐내부 사회가 그곳에서 일할 여성들을 선택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뿐 아니라 유럽의 오래된 동화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역사실록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간택 과정 중, 수사 성에 살고 있던 유다사람 모르드개(5절)와 「하다사」라고 불리던 에스델이 등장한다(7절). 「하다사」란 일종의 나무이름으로, 「향기 나는 상록수」를 지칭하는 히브리이름이었고, 「에스델」은 바빌론의 여신이었던 이쉬타르(Ishtar)에서 파생된 바빌론-페르시아식 이름이었다. 교포들이 일반적으로 한국이름과 외국이름을 공유하고 있듯이 에스델은 히브리이름과 페르시아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델과 사촌지간이었지만, 부모 없는 고아였던 그녀를 자기 수양딸로 삼아 길러왔다(7절).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간 에스델은 거기서 궁녀들의 총관리인이었던 해개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10절은 그녀가 자신의 「국적」을 밝히지 않았음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유다인이었던 그녀의 국적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무려 12달 동안의 「몸만들기」 과정 후(12~13절), 그녀는 왕을 만나게 되고, 소박한 치장에도 불구하고 왕의 간택을 받게 된다. 왕의 재위 7년 10째 달이었고, 와스디가 폐위된 지 4년만의 일이었다(17절).

 

2장의 후반부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드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반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전반부에 비해 내용이 매우 빈약하여, 학자들은 이 본문이 많은 부분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빈약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에스델서 전체의 맥을 이끌어줄 주요 주제, 「모르드개의 지혜」, 「에스델의 국적」, 「모르드개의 충고를 따르는 에스델」 등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장, 하만의 등장과 박해

 

 

3장에서는 아각 사람 하만이 등장한다.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게 되어, 모든 대신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해야할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2절). 갈등의 시작은 유독 모르드개만이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데서 발생했다(2절). 하만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결국 그는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계획한다(6절).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만이 단순히 모르드개 개인에게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저자는 에스델이 쟁취한 구원이, 비단 모르드개만을 위한 것이 아닌 유다 민족 전체를 위한 것이었음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몰살계획이 모의된 것은 아하스에로스 재위 12년째였고, 에스델이 왕비에 간택된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하만이 제기한 유다인들의 죄는 그들이 자기네 법(율법)만을 지킬 뿐, 페르시아 왕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절). 하만은 이러한 고발과 함께 그들을 멸족시키는 것을 허락한다면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왕궁으로 유입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할 것을 명하는 칙령이 내려진다(12~13절).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잔인한 몰살 명령은, 관용책을 전면에 내세웠던 페르시아의 정치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어서,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에스델의 활약이다. 그 내용은 4장에서 전개된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2일]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 믿음만이 삶의 변화·평화 가져올 수 있어

 

 

만약 그 때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만약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제 더 이상은 뒤돌아보지 말아야할 지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던지게 되는 가정들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처럼 매혹적인 위로도 없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만큼 부질없는 질문도 없다. 이번주에 살펴볼 내용 중,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 그대가 왕비자리에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난관에 봉착한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할 에스델에게 모르드개가 해준 말이었다. 모든 역사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개인의 삶까지, 그리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통의 순간까지도, 더 깊은 성숙을 위해 하느님께서 계획하고 주관하심을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1~3장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아직까지 주변의 난관을 굳은 신념과 지혜로 극복해 가는 인물은 모르드개이다. 에스델이 점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4장부터인데, 단지 착하고 예쁜 규수일 뿐이었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낼 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4장, 난관에의 봉착

 

 

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모르드개와 전국의 유다인들은 탄식과 통곡을 쏟아낸다(1~3절). 모르드개는 자루옷을 입고 궁궐대문에서 시위를 하고, 그 때까지 영문을 몰랐던 에스델은 이러한 모르드개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시급히 옷을 보낸다. 에스델이 시종을 보내 그 연유를 묻자, 모르드개는 하만의 음모와 유다인 절멸의 대가로 왕에게 내놓겠다고 한 은전의 액수를 알려준다. 이어 반포된 칙령의 사본까지 보내면서 무엇인가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7~8절). 특별히 8절의, 모르드개가 에스델에게 전하라고 한 말 중에는 『그녀의 민족을 위해』(8절)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녀가 난관 앞에서 짊어져야할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으로부터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스델은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을 만날 수 없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법규를 설명한다(11절). 이러한 비인격적인 법규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현재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데, 그 어떤 고대 법령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 혹은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에스델이 이제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모험」을 단행하게 될 것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델의 곤란한 사정을 듣게 된 모르드개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다인들이 멸절당할 상황에 혼자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일침를 가한다(14절). 이러한 모르드개의 반응도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에스델의 곤란한 처지가 뭔가 왜곡되어 이해된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3~14절에 제시된 모르드개의 날카로운 반응은 에스델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겨냥한 저자의 직접적인 경고로 이해할 할 수 있겠다. 즉,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에스델서가 최종적으로 제작될 당시의 유다인 고관들에게, 민족 전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지경 중에, 자신의 이익만을 찾으려는 이기적 계산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4절의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저자의 신학적 관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역사와 인간사를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잘 규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다시 전해들은 에스델은 모든 유다인들이 함께 삼일간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연대는 「공동기도」를 통해 심화될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민족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비장한 다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으렵니다』(16절).

 

 

사는데 필요한 믿음

 

 

쉽게 동의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각자의 인생이고 역사일 수 있지만,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사실은 가장 충실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의 발로였음을 인식하게 될 때, 아직 다 못푼 과제, 즉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질문은 더 이상의 조급한 화두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초연한 평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의탁을 통해서만 도래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평화가 내 마음에 없다면 세상은 언제 어디에서고 그저 감옥으로 느껴질 뿐임을 또한 아는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보다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믿음만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9일]

 

 

완벽을 향한 욕심과 미련 인생을 절망으로 떨어뜨려

 

 

인간은 모든 것을 갖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완벽에 이른 적은 없다. 비극은 인간이 그 자명한 진리에 도무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완벽을 향한 통제되지 않는 욕심과 도달하지 못할 목표에 대한 미련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강력한 「악」이 되어 결국 인생을 피곤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하니 말이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자신이 못 가진 한 가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기는 덫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인생의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살펴보게 될 5~6장에서 하만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모르드개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러한 과욕과 질투, 언제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망상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살육의 원인이 됨을 보여 준다.

 


5장, 에스델의 초대

 

 

 

5장은 에스델이 이제 더 이상 모르드개에 의존하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책임질 만한 큰 인물이 되었음을 드러내준다. 삼일간의 기도 끝에 자신을 하느님으로 완전무장한 에스델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의 뜰에 들어선다. 다행스럽게도 왕은 왕홀을 그녀에게 내밀어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묻는데(1~3절), 그녀는 자신의 연회에 왕과 하만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4~5절). 갑자기 등장한 하만의 이름은 이 연회가 단순히 남편(임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만을 겨냥한 자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초대에 응한 왕과 하만은, 다음 날에 있을 연회에도 기쁨으로 응하겠다고 말한다(7~8절).

 

5장의 후반부(9~14절)는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으로 주제가 전이된다. 흡족한 마음으로 왕비의 궁을 나온 하만은 우연히 모르드개를 만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자 격분하게 되고(9절), 집에 돌아온 즉시 아내와 친구들에게 모르드개를 처단할 방법을 논의한다. 막대한 재산과 자식들, 임금의 총애, 거기에 왕후의 호의까지,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장미 빛이지만(12절), 모르드개 때문에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 하는 하만에게, 아내와 친구들은 해결안을 제시한다.

 

『높이 쉰자짜리 말뚝을 만들어』 모르드개를 거기에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쉰자」는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높이로서, 자신을 대적한 모르드개의 최후를 만인에게 공포하고 다시는 아무도 하만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6장, 반전의 시작

 

 

6장에서부터 서서히 이야기의 반전은 시작된다. 우연히 옛 기록을 읽다가 모르드개의 업적을 알게 된 왕은 어떻게든 상을 줘야 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때 마침 자신이 세운 말뚝에 모르드개를 매달 것을 청하러 온 하만(4절)에게 이를 논의한다. 왕이 자신에게 상을 내리려 하는 줄로 착각한 하만은 구구절절 포상의 내용을 제안한다(6~9절).

 

10절부터는 이러한 왕과 하만의 「동상이몽」의 결과가 제시되는데 왕은 하만이 제안한 그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모르드개에게 하사하도록 지시하고, 모르드개는 그대로 왕의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10~11절).

 

열세에 몰린 하만은 『머리를 감싼 채』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제스처는 그가 얼마나 수치심과 분노, 슬픔에 빠졌었는지를 묘사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에게 하만의 아내 제레스는 『모르드개가 유다 출신이라면 이제 그에게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그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충고한다. 아내의 예견 중, 모르드개의 승리를 그의 민족 전체의 승리와 연결시킨 부분, 이미 유다인들의 승리가 계획되었음을 부각시킨 내용 등은 모두 저자의 가치관과 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저자는 유다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신적개입과 구원의지를 제레스의 입을 통해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동상이몽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장소에 있어도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랑해서 손잡고 함께 바라본 하늘과 바다지만 그가 본 것이 내가 본 것과 같은 색, 같은 이미지일 수는 없는 것이다. 6장에서 아하스에로스와 하만은 동상이몽의 실체를 보여준다. 상대와 내가 너무 밀착되어 내 생각을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때 촉발되는 것이 동상이몽이기에 그 결과는 몇 배로 극대화된 배신감과 절망,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경우 최선의 방법은 그를 내게서 분리시켜,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운이 좋으면 연민까지 느끼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하만과 모르드개, 하만과 아하스에로스의 갈등,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너무 비슷했고 같은 것을 원했기에, 그러나 불행하게도 꿈은 서로 달랐기에 발생한 역설이며 비극은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5일]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을 능동적으로 존중하자

 

 

 

생각이 지나치면 오히려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그뿐인가, 머리를 잘못 쓰면 자기가 판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만든 말뚝에 결국 자신의 머리를 달게 된다. 자초한 죽음이었고 스스로 준비한 결과였다.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 것, 오버하지 말 것, 이기심과 잔꾀의 한계를, 그리고 그 마지막을 언제나 기억할 것, 적어도 자기가 판 구덩이에는 빠지지 말 것.

 

 
7장, 하만의 최후  

 

 

왕과 하만은 에스델의 두 번째 초대에 응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 왕은 왕비의 소원을 묻는다(1~2절). 이에 그녀는 자신과 민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3절), 감히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고(5절) 더구나 그가 하만임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밖으로 나간다. 궁지에 몰린 하만은 에스델에게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6~7절), 물론 아직까지 왕과 하만이 왕비의 국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본문의 설정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만이 이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부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돌아온 왕은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만이 왕비의 침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를 하만이 왕비를 폭행하는 것으로 알고, 격노를 터뜨린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만의 위상을 완전히 추락시켜 놓는다. 결국 하만은 『얼굴을 가리게』 되는데, 이는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행위였다. 하만은 그가 세워놓은 높이 쉰자의 말뚝에 달리는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9~10절).

 

 


8장, 새로운 칙령

 

 

이후 왕은 왕비에게 『유다인들의 적』 하만의 집을 하사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아버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1~2절).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하만에 의해 반포된 유다인 학살 칙령은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델은 왕에게 이 칙령을 취소하기를 간청하지만(3~6절), 이미 공포된 칙령은 취소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의 법이 걸림돌이 된다. 결국 왕은 유다인들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을 작성할 것을 모르드개에게 제안한다(8절).

 

이렇게 해서 작성된 두 번째 칙령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세력에 적극 대응하는 것을 윤허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의 칙령이 되는데, 하만의 처형 이후, 페르시아의 실세로 부상한 인물은 모르드개였고, 그가 유다인인 이상 유다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15~17절).

 

물론 이러한 일들이 실제 역사적으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위상은 에스델서 저자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클라인즈(D. Clines) 같은 학자들은 기쁨에 겨워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래적인 에스델서가 마무리 된다고 본다. 다음에 등장하는 9, 1~10, 3는 후대 첨가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9장~10장, 유다인들의 승리  

 

 

이제 이야기의 흐름은 완전히 반전된다. 멸절 당하게 될 바로 그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적을 무찌르는 「역전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1~2절). 에스델은 그 칙령의 시효기간을 다음날까지 연장할 것을 청하고(13~14절), 유다인들의 승리가 확실해 지자 모르드개는 해마다 이날들(아달월(2월경) 십사일과 십오일)을 축일로 지내기를 공포한다(20~21절). 물론 많은 주석가들은 이러한 보도가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한다. 부림절은 원래 바빌론의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함께 혼합함으로써, 이 축제를 자신들의 것으로 토착화 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9, 23~28은 이 부림절의 기원과 내력을 요약하고 있다. 에스델서는, 모르드개야말로 진정한 유다인이요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종결된다(10, 1~3).

 


일상의 분노와 폭력

 

 

신문지상에 연일 보도되는 연쇄살인 사건들은 일상의 작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야기 시키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르드개를 향한 하만의 분노는, 사실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편에서는 크고 작은 분노와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할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것, 그래서 그의 다름을 능동적으로 존중할 것,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그저 무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속박으로 다가올 뿐이니….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참고자료

■   안진아 그림, 슬기로운 왕비 에스테르(만화), 서울(바오로딸), 2011년. 
■   크리스티안 메로즈 저, 전유미 역, 귀양간 에스델, 서울(성서와함께), 2000년. 
■   폴 보샹 저, 이용권 역, 성경인물50 - 에스테르, 서울(생활성서), 2014년, 331-33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에스델서',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000-60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