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성녀

권요셉 2014. 7. 30. 23:01

성 이냐시오(Saint Ignatius)

 

 

 

 축일

 7월 31일  
 신 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로욜라(Loyola) 
 활동연도  1491-1556년 
 같은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 홈]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생애

 

팜플로나에서부상당한성이냐시오

 

 

 

16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했고 교회 역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시기에 있었다.

 

당시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로 알려졌던 성 이냐시오는 스페인의 명문 귀족 바스크 가문에서 태어난 11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26살 때까지 그는 세속적인 허영에 몰두했고, 또 허무한 열망을 가지고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당시 나바르라 태수인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1521년에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국경선을 넘어 빰쁠로나로 침입해 들어 오자, 그는 성(城)을 사수하기 위하여 공격해 오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용감함에 탄복한 프랑스 군인들은 이냐시오를 자신의 고향 로욜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냐시오의 고통스러운 상처가 차츰 회복되면서, 그는 평소에 즐겨 읽던 무협소설 대신에 당시에 많이 읽혀지던 두 권의 영성 서적, 곧 '성인열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헛된 명예와 영달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 불타 올라 그분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성실한 봉사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로욜라 성을 떠난다. 그 후 몽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중, 1522년 3월 24일 밤중에, 그는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자신의 검과 단도는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했다.

 

그 사건 이후 이냐시오는 몽세라트를 떠나 만레사에서 머물면서, 까르도넬 강가가 굽어보이는 동굴 안에서 기도와 극기로 1523년 2월까지 1년간의 세월을 보낸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 걸식을 하며 가시 돋힌 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체험해 갔다. 그는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매우 우울하게 수 개월을 보내기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때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암흑의 밤이 지나간 뒤에 그가 체험한 것은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체험한 이냐시오는 그가 말한데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도적 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작은 도시 만레사를 떠나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의 사도직의 본질적 요소로 삼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는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 33살 때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운 후, 알칼라 대학에서 힘든 과목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공부기간 동안에도 그는 만레사에서 체험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데 헌신했다. 또한 1526년 대림시기부터 1527년 6월까지 키메네스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이를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6월 그는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거기서 이냐시오는 아주 열렬한 복음주의자 였던 까닭에 종교 심문관은 그의 생활방법과 설교, 신학을 문제삼아, 여러번 그를 투옥하고 심문하였다. 살라망카에서도 그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금지되어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1528년 2월 파리로 갔다. 그가 42세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533년 3월 13일 문학 강의 자격에 합격한다.

 

그 당시 그는 파브로, 사비에르, 살메론, 라이네스, 보바딜랴, 로드리게스, 재이, 브로잇, 코르르들과 친분을 갖게 되어 그들을 영신수련을 통해 지도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이며,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고, 우리가 세상의 사도로서 살아가도록 길러준다. 이러한 기도와 사도직의 지침서인 '영신수련'으로부터,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예수회의 사도직이 등장하는 것이다.

 

1534년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가난, 정결의 첫 허원을 했다. 1535년 4월 그는 대학공부를 끝내고 파리를 떠나 1537년 46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1537년 그가 파브로와 라이네즈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환시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단체를 '예수의 동반자' (Compainions of Jesus)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1539년 3월, 이냐시오와 그의 동반자들은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예수회 첫 회헌을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6년 9월 27일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냐시오가 돌아가실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어 갔다.


[예수회 한국관구  홈페이지에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

 

 

루카조르다노_인도인에게세례를주는성프란치스코하비에르와로욜라의성이냐시오

 

 

 

1491년 스페인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궁정과 군대에서 생활하다가 하느님께 헌신했다. 파리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자기 주위에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로마에 가서 예수회를 창립했다. 저술과 제자 교육으로 훌륭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그 제자들은 교회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556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이스 곤살레스가 성 이냐시오에게 직접 듣고 쓴 행적기에서
(Cap. 1,5-9: Acta Sanctorum Iulii, 7[1868],647)

 

여러분의 영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이냐시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비상한 행적을 기록한 저속하고 공상적인 책을 즐겨 읽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느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그런 책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요양하고 있던 집에는 그런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모국어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과 [성인들의 꽃]이라는 책을 그에게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자주 읽으면서 그 책에 담긴 내용에 어떤 공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책에서 마음을 떼어 전에 늘 읽던 그런 저속한 이야기로 생각을 돌리고 또 어떤 때는 그 생각에다 마음까지 돌리곤 했다. 마음속에 이런 무절제한 생각들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가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최근에 읽은 책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들을 지금의 생각에다 굴복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자주 자신에게 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복된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가 한 것을 나도 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런 생각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른 것들이 끼어 들어와 이전의 저속하고 공상적인 생각들이 되살아나곤 하여 그것들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꽤 오랫동안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즐기는 동안 그 순간에는 큰 기쁨을 느꼈지만 그 생각에 싫증을 느껴 흘려 버리고 나면 슬픔과 공허를 느꼈다. 한편 성인들이 실천했던 고행의 생활을 생각할 때 느낀 기쁨은 생각하는 중에만이 아니라 생각을 마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냐시오는 이 차이점을 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 어느 날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이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체험에서 어떤 생각들은 슬픔을 주고 또 다른 생각들은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가 하느님의 것에 관해 도달한 첫 중요한 결론이었다. 훗날 자신이 '영신 수련'을 할 때 이 체험은 자기 제자들에게 준 '영의 식별력'이라는 가르침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회 창설자 - 성 이냐시오

 

기사의 검 성모마리아께 봉헌
부농집안서 기사의 꿈 키워
신심서적 읽고 회개의 길로

 

 
『영혼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주는 중요성은 지난 3세기 동안 증명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증거, 다시 말해서 짧은 시간에 고행의 길과 경건함의 실행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는 증거에서 증명되었습니다』(교황 레오 13세).

 

 「예수회」 창설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영신수련」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켜 주고 있는 영신수련의 수호성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그는 예수회원들과 함께 깊은 종교적 영성적 영역에 대한 갈등과 교회 지도자 구성원들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던 당시 교회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부흥에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 역할을 해왔으며 회원들은 이를 통해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니면서 세상의 사도로 살아가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예수회의 사도직은 이러한 「영신수련」의 정신과 함께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활동중 관상」이라는 그의 영성은 교회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신앙과 생활을 통합시켜 줄 수 있는 평신도 영성의 중요한 포인트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키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읍 위쪽 로욜라 성에서 벨드란 이바네즈와 마리나 사에즈의 막내로 태어났다.

 

로욜라 가문은 바스크 지역의 귀푸즈콰 지방의 부농들 중 하나로서14세기 이래로 귀족의 계급에 올라 있었다. 당시 귀족들이 카스틸리엔 왕가에서 공을 쌓아 부와 명예를 넓혀가려 힘썼던 상황에서 바스크 지역 출신이고 카스틸리엔 궁중 기사 출신이라는 그의 성장 배경은 훗날 수도회 총장으로 사는 삶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즉 예수회의 이념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고 설정한 그의 이상은 「좀 더 높고 위대한 큰 일들」을 추구했던 기사도 정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세 되던해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궁정 재무를 담당했던 친척 돈 후안 벨라즈퀘즈 드 궤라의 집으로 가게 됐던 이냐시오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 기사로서의 소양을 익혔고 또 왕가 문서국에서 일하기 위한 자질을 익혔다.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세속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극단의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프란치스코수도회 정신에 따른 전통과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후에 이때부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고백만큼 그는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과 새로운 의상을 즐겼으며 격투기 같은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궁중내 수많은 여성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이냐시오가 이러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벨라즈퀘즈 데 궤라 가문이 몰락하고 1517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다.

 

날아든 포탄 파편으로 한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던 그는 수술후 회복기를 갖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고르다 신심 깊은 형수가 지니고 있었던 루돌프 폰 삭센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접하게 됐다.

 

기사들의 영웅담이나 연애 소설에 길들여져 있던 이냐시오에게 이러한 신심 서적은 아주 낯설은 것이었으나 내용을 접할수록 그 깊이에 빠져 들었고 마침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기사로서의 공상들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며 아무런 대가도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만이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또 앞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었고 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느끼게 됐다.

 

이런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했으며 지난 날의 생활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에 커다란 위안을 얻은 이냐시오는 마침내 성인들이 살아간 것처럼 채소만 먹고 엄격한 고행을 하면서 맨발로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결정했다.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냐시오의 내면 세계는 점차 변해갔다.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해나갔고 기도 독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삶을 따라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해 나갔다.

 

1522년 로욜라 성을 떠난 이냐시오는 당시 중요 성지 순례지중 하나였던 「몽세라」에서 총 고해성사를 했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기사의 갑옷과 무장을 거지에게 주고 대신 포대로 짠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성모마리아께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16일, 이주연 기자]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라고 불렀으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해 1539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잠정 인가를 받았다.

 


영혼 돕기 위한 영적활동 펼쳐
뜻맞는 이들과 예수회 설립
‘영신수련’ 저술해 영성심화

 


1522년 3월 25일 몽세라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긴 이냐시오는 이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한다.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미사와 성무일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하루에 7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했고 그러한 경험들은 「영신수련」을 저술하는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이듬해 2월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여러 차례의 폭풍을 만나야 했고 전쟁과 페스트가 난무한 지역들을 통과해야 하는 등 1년여 이상의 노력을 들이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로 여겨졌던 당시 상황에서 이를 감행한 내적 동기에 대해 이냐시오는 『나를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를 알아 그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위험한 상황 때문에 성지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교회 장상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가해오자 이냐시오는 팔레스티나에 영원히 머물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던 뜻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루살렘을 떠나며 이냐시오가 결심한 것은 「영혼들을 돕기 위해 일정 기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으로 연학(硏學)에 돌입한 이냐시오는 이후 알칼라 대학, 살라망카 대학을 거쳐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등 11년 동안의 공부 기간을 가졌다.

 

공부에 대한 열망과 함께 가난한 사도로서 사는 삶을 동경했던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영적 상담을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시도였다.

 

이냐시오의 그러한 활동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종교 재판관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살라망카 파리 베네치아 로마 등에서 수차례 구속 심문 재판을 받는 과정이 이어졌다.

 

알칼라에서는 두달간 감옥 생활을 했고 또 동료와 함께 사슬로 발이 묶인채 감옥에 갖히는 일도 있었다.

 

파리에서는 성 바르나바 대학의 학장에게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오히려 이냐시오를 더욱 굳건히 단련시켜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이냐시오는 공부를 하는 동안 여러 동료들과 함께 단체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뜻이 맞는 동료들끼리 서로 도우며 활동하게 되면 영혼들을 돕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동료가 된 사람은 사보옌 출신의 페테르 파베르와 나바라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리고 포르투칼 출신의 시몬 로드리게즈와 스페인 출신의 디에고 라이네츠 등이 합류했다.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은 이냐시오는 그해 겨울 동료들과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이때 로마 근교 라 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 경당에서 환시를 체험했다. 성부께서 이냐시오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고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자신들을 「예수회」(Compania de Jesus, 예수의 동반자)로 부르는 가운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한 이냐시오는 1539년 9월 3일 교황으로부터 잠정 허가를 받는 한편 1540년 9월 27일에는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 교서가 발표됐다.

 

그 이듬해 4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이냐시오는 4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로마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했다.

 

1541년부터 이냐시오가 선종하던 해인 1566년까지 예수회는 사도적 활동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고, 회원수는 이미 1000명에 육박하는 왕성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냐시오는 총장 선출후 많은 편지를 썼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6000여통의 편지들은 수도회내의 내 외적 성장과 관련된 사항들을 비롯 교회 쇄신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수신자들은 당시 시대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 추기경들 그리고 주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각지에 흩어져 사도적 활동과 영적 생활에 전념하고 있던 동료들이 주 대상이었다.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냐시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됐고 1622년 3월 12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는 현재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서 2만여명 회원들이 127개국에서 활동중이다. 회원들중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도 많아 2005년 현재 복자가 146명, 성인이 48명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23일, 이주연 기자]

 


 

 

호세데파에스_예수성심을흠숭하는로욜라의성이냐시오와성알로이시오곤자가

 


영성의 대가들 - 로욜라의 이냐시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16세기 중엽, 심각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었으며 마르틴 루터의 저항과 개혁운동으로 큰 위기에 처해있던 교회에, 이냐시오와 그가 창설한 「예수회」는 새로운 영적 활기를 불어넣으며 쇄신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후 그의 영성은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가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영적 통찰력을 기록한 「영성 수련」은 근 500년 동안 지역과 신분 및 생활상태에 구애됨 없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쇄신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하느님께서 교회의 쇄신과 영적 성장을 위하여 활용하실 도구로 그를 어떠한 과정으로 부르셨으며 어떠한 카리스마를 허락하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시키셨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이냐시오는 카스틸야 왕국의 바스크 지방 로욜라 성에서 1491년 벨트란 데 로욜라와 마리나 사엔스 사이에서 열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 세례명은 「이니고」였으나 뒷날 파리에서 지낼 때 「이냐시오」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교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에 대한 그의 각별한 공경심과 애정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냐시오는 1507년부터 스페인 왕실의 재상 후안 벨라스케스가 죽자 이냐시오는 나바라의 태수 안토니오 데만리케 공작을 새 주인으로 섬겼다. 1521년에 그는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가 프랑스의 에피파로스의 군대의 공격을 받게되자 그는 선봉에 서서 용감히 대항하여 싸웠다. 그 싸움에서 이냐시오는 양쪽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가 부상을 당하자 팜플로나 성을 방어하던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 군인들에게 항복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이냐시오에게 두 주간의 치료를 받게 한 후 로욜라 성으로 돌려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몇 차례의 재수술로 인해 혹독한 고통을 겪었으며 힘든 회복기를 보내야 했다.

 

한편 수개월의 회복기간은 그에게 인생여정을 바꾸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도록 하였다.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지루한 시간을 메우려고 평소에 즐겨 읽던 기사 무협 소설을 찾았지만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대신 몇 권의 종교 서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엔 작센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자코보 데 보라진이 쓴 「성인들의 꽃」이라는 성인들의 행적집이 있었는데 그는 그 두툼한 책자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있음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그의 이상이었으며 그의 삶을 이끌어왔던 영예롭고 영웅적인 기사로서의 모험에 대한 매력이 사그라지면서 그에 대해 침울한 기분과 함께 무미 건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책을 통해 알게된 성인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는 상상을 할 때엔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그러한 발견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수행해야 할 이냐시오적 영성의 시발점인 「영성 식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 안에서 체험하면서 발견하게 된 느낌 즉 「황량」과 「위로」는 앞으로 그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식별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성인들이 이루었던 그 놀라운 행업을 자신도 이루고자 속세의 야심과 욕망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1552년 2월 말 이냐시오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로욜라 성을 떠나 카탈로니아에 있는 모세라트 성모 성지로 갔고 그 근처 만레사에서 몇 달 속죄를 위한 고행의 기간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에게 어려웠던 것은 극심하게 자신을 짓눌러대는 내면의 깊은 절망감이었다. 속죄의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자살의 유혹까지 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신앙의 신비(삼위일체, 창조, 그리스도의 인성 등)에 관한 깊은 체험을 했다. 이 영적 체험은 만레사 가까이에 있는 카르도네르 강변의 한 동굴에서 일어났던 「조명(照明)의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때 영적인 삶, 신앙과 신학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받았는데 그의 온 생애의 직관을 전부 합쳐도 여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체험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 전연 새 사람이 되게 했다.

 

그는 이 때 자신이 새로운 지성을 받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후 그의 기도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내면적 역동성을 지녔다. 그는 그리스도의 기사로서 그분의 협력자가 되도록 불렸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신비로운 은총의 체험들을 그의 책 「영성 수련」에 기록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귀국하면서 「영혼」을 돕기 위하여 정규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524년 바르셀로나에서 초급 라틴어 공부부터 시작하면서 1534년 파리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얻기까지 장기간의 면학 생활을 하였다.

파리 체류 기간은 그의 면학에 있어서나 예수회의 장래에 있어서 매우 의미 깊은 시기였다. 후에 수도회를 함께 발족시킬 하비에르의 프란치스코 등 동료들을 만난 것도 파리에서였던 것이다. 그들의 영성생활의 결속, 공감적 지향, 특히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 소성당에서 행산 서원 등은 예수회 창립의 서곡이었으며 그 길을 닦은 것이다.

 

1537년 6월 24일 세례자 요한 축일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들은 비첸자 근처에서 함께 며칠 지내면서 그들의 그룹을 「예수회」(Societas, Jesu)라 명칭하기로 합의했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스승으로 삼거나 섬기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그분이 이 세상에 사셨던 모범을 따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걱정을 함께 나누면서 자신들이 온전히 소모되길 원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진들을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협의를 끝낸 후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로마로 떠났다.

 

1537년 11월 이냐시오가 로마에 인접한 카시아의 라스토르타 소 성당에서 기도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레사에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신비적 조명의 은총을 받았다. 그의 영혼과 마음을 하느님께서 아드님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이제는 더이상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의 은총을 받았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1539년 봄 수도회 창설 문제에 관해 여러 날 오랜 시간 기도와 협의를 거쳐 4월 15일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5월 3일엔 구체적인 회칙이 수도회 명을 「예수회」라 하기로 하고 그들 중 한 사람을 장상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5월 3일엔 구체적인 회칙이 11개의 장으로 요약되어 발표되었다. 같은 해 6월 말 이냐시오는 예수회 회헌 첫 번째 초안을 작성하여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구두 승인을 받았다.

 

1541년 3월 4일부터 로마에 있던 모든 회원들이 회헌의 본문을 만드는 세부 작업을 시작하면서 우선 총장을 종신제로 선출하는데 합의한 후 만장일치로 이냐시오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수락을 사양했으나 회원들의 집요한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548년 7월 31일에 이냐시오는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 그 유명한 「영성 수련」이란 책자를 출간했다. 1550년 7월 21일에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수도회는 최종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회헌은 1558년 제1차 총회 때에 승인되었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65세의 나이로 임종했다. 그 때 이미 수도회엔 1천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있었으며 13개의 관구로 나뉘어 110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잇었다. 1609년 이냐시오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가 되었고 1622년 3월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0년 3월 19일]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와 역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동료들과 함께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가톨릭 교회에 영적 쇄신의 계기와 발전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과연 그가 받은 카리스마는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성령의 표지를 읽었고 어떠한 사명을 수행하였는가?

 

1) 이냐시오는 시대와 상황을 대면하며 적극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 역동적 수도생활의 개념을 도입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실로 이냐시오와 그가 창설한 예수회는 여러 면에서 곤경과 위기에 처해있던 중세말기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쇄신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 도미니코와 성 프란치스코가 그들의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시대적 사명을 제시하시는 성령의 표지를 주의 깊게 읽고 구현한 독창적 수도회 설립자였다. 도미니코와 프란치스코가 새로운 카리스마로 그들의 형제들을 수도원의 은둔생활에서 불러내고, 육체노동에서 벗어나게 하여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해보내었다면, 이냐시오는 그의 고유한 카리스마로 수도자의 제복,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 수도원의 공동전례 및 수도 관례에서 벗어나게 하여 교회에 새로운 유형의 수도생활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이냐시오와 예수회원들은 어떤 고유한 제복이나 소재지 사제의 복장을 착용하도록 의무화하지 않았으며 성무일도를 중요한 기도의 실천으로 인식했지만 개인적으로 바쳤다. 전통적 수도원 전례에 매이진 않았지만 전례가 영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천임을 이해하고 실천하였고 영적지도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그 후 새로이 태어난 수도단체들 중 다수가 은연 중 혹은 드러나게 예수회를 모범으로 삼으며 그 영성에서 많은 것을 취하여 적용하고자 하였다.

 

2) 이냐시오의 영성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몇 분의 영성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교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등장했던 인물들로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바실리오, 베네딕도, 아우구스티노, 시에나의 가타리나 등이었다.

 

이냐시오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위기의 교회 속에 살고있던 자신의 처지가 영지주의의 위험에 대처했던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영성적 원리들을 자신의 「영성수련」에 참고하여 적용하기도 했다. 성바실리오와 성 베네딕도 또한 이냐시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냐시오의 회헌에는 이 두 성인의 수도규칙서의 자취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사람」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는 그의 삶의 귀감이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서 뿐 아니라 그의 저서들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정독했다. 성인의 신학은 「영성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이는 교회와 그 우두머리 교황을 열렬히 사랑했고, 교회의 권위에 대한 승복의 여하에 따라 영의 진위가 식별된다는 신념을 고수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자세 또한 이냐시오에게 두드러진 영향을 주었다.

 

3) 이냐시오가 겪은 신비 체험에 대해 기록한 「영성수련」은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지상 생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관상하도록 한다., 이것은 단순한 복음 묵상이 아니고 그 안에 현존하는 특별한 힘이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끌며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고 왕이신 그리스도를 받들어 섬기고 성부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영성수련은 대외적으로 르네상스의 이교 사상과 루터 교회의 정점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되었다. 한편 교회 안에서는 그것을 통해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생활 개선을 하게 되었다. 이 영성수련은 카를로 브르메오, 빈첸시오 아 바오로 등 성인들로부터 영성생활의 발전을 위해 훌륭한 방법으로 인정 받았다. 「영성수련」이란 책자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실행에 옮기는 정신은 그후 수세기에 걸쳐 큰 위업을 이룬 영적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4) 이냐시오의 쇄신적 영성은 16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회원이나 다른 수도회원들 뿐 아니라 교구사제들 그리고 평신도의 영성 등 교회 생활 전반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영성수련을 통한 쇄신 외에도 효율적이고 활용하기 쉬운 묵상기도 방법을 보급했으며, 일반적 및 특별 성찰의 실천을 폭넓게 확신시켰다. 개인의 조건과 능력에 적합한 극기를 조절, 적용해야할 필요성을 주지 시켰으며 영적 지도자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 그리고 신학의 요청에 따른 수도생활의 쇄신과 적응의 과감성 등은 교회의 영성에 그가 크게 기여한 유산이다.

 

5)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떠나 저항하며 개혁 운동을 전개했던 데 반해 이냐시오는 내적 쇄신을 통한 영적 개혁에 헌신하였다.

 

이냐시오가 살던 시대의 사회는 격동과 흥분의 시대였다. 콜롬부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으며 강대국 사이엔 긴장과 마찰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한편 교회는 심각할 정도로 세속화 되어 부패한 도덕 관습이 젖어 있엇으며 르네상스의 막이 열림과 함께 휴머니즘의 도전과 영향을 받아야 했다. 또한 베텐베르그에서 시작한 루터의 저항과 개혁 운동으로 인해 교회의 위기가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고조되던 시대였다.

 

마치 교황 바오로 3세는 가톨릭 교회가 부딪치고 잇는 중대 문제 해결에 관해 고심한 끝에 유능하고 헌신적인 개혁의 기수들을 초대하여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공의회는 이단단절, 부패종식으로 교회생활을 쇄신하며 부흥시키고자 많은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이 방대한 작업에 이냐시오와 예수회원들은 뛰어난 역할을 했으며 그 시련의 시대에 교회의 쇄신을 추진하던 요원들이었다.

 

이냐시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사랑의 분별력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하며 교회 일치운동에 힘써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원리를 일깨워 준다. 『만일 어떤 이단자들이 박해와 그리스도교적 중용의 본보기를 보여 준다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정통 진리를 드러내는 데 깊은 배려를 해야만 한다. 그들의 잘못에 대해 어떤 종류의 경멸도 나타내서는 안되며 혹독한 말도 해서는 안된다』

 

6) 이냐시오는 미래에 유명한 대학들이 될 학원들을 많이 설립하여 수련자들의 교육, 회원들의 지적 능력 양성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뒷날 그레고리안 대학교가 되는 「로마 학원」건립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생애 중 유럽에만 46개의 학원을 세웠다. 그 후 예수회는 전 세계에 명문대학교들을 많이 세워 학문발전, 인재양성과 지역사회 발전 뿐 아니라 교회의 개혁은동에 앞장서면서 직·간접으로 백여개 국가에 진출하여 230여개의 대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서울에 잇는 서강대학교이다. 예수회는 일반대중을 위한 교육사업을 사도직 업무로 설정한 최초의 수도회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4월 2일]

 

 


3. 영성

 


이냐시오 영성 안에서 네 가지 주요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기도와 활동을 하나의 차원으로 통합하려는 삶으로서 「활동 중의 관상」, 「오관(五官)과 영혼의 능력들의 활용을 중요시하는 기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명」의 자세 그리고 「영적 식별」이다.

 

■ 3-1 활동 중의 관상

 

이냐시오는 고유한 카리스마로 예수회를 설립하여 기존 수도회들과 다른 생활의 모습과 사도직 수행 자세를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예수회 회원들이 세상 속에 적극 투신하여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활동을 수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간사가 펼쳐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보다 오히려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어두움에 맞서 승리해야 하낟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회원들에게 세상 안에서 이웃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했으며 평상복을 입고 눈높이를 맞추어 대중이 쓰는 말로 이야기하고 그 지역의 풍습을 따르도록 했다. 또한 그들이 사회의 지성인들 못지 않게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기를 바랬다.

 

그는 가톨릭 사상의 주류와 대립되는 르네상스와 과학의 새로운 발견 등으로 인해 변화되어 가는 사회 상황에 대응해야 할 교회의 적극적 자세와 역동성 영성이 요청되는데, 기존 수도회는 그러한 준비 태세와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시대의 문제와 요청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생활 양식으로 새로운 영성을 시급히 형성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톨릭 교회에 헌신과 충실을 재다짐 하면서 모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장려하여 하느님의 인류 구원계획 안에 보다 깊고 넓은 인문주의를 정립하고자 하는 영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새 영성의 형성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두 본질적 차원인 기도와 활동을 이상적으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전망 중에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대적해야 할 상대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현존하는 악의 세력과 세속주의라고 보았다. .수도적 봉헌 생활과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시키고자 했던 당시의 일반적 사고 및 행동의 문제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는 기도와 일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보다 큰 봉사를 위한 상호 보완적 수단으로 여겼다. 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관상적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활동 중의 관상가였다.

 

3-2 오관과 영혼의 능력 중시

 

이냐시오 영혼의 능력들(지성, 감성, 의지, 기억, 상상령)과 오관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한 기능들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현재에서 예수님 시대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각 사건들 안에 상상으로 참여하여 보고 듣고 만지며 냄새 맡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영성 수련의 둘째 주부터 기억력과 상상력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활의 사건 현장으로 수련자의 영혼을 인도하고 묵상과 관상의 훈련을 하도록 한다. 묵상은 영혼 안에 영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며 관상의 세계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셨기에 그분이 신비를 우리가 감각적 세계를 통해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시닙에 대한 감성적 경험을 위해 인간이 지닌 기능들을 사용하길 권장했는데 그중 상상력의 가치가 무엇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오관을 성서의 말씀에 집중시킴으로써 기도를 생동감 있게 하길 권했다. 예수께서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시키고자 하셨으니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청중의 시각, 청각, 촉각 등을 통해 깨닫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냐시오는 오관을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외적인 감각이 영적 감각으로 전이되면서 그리스도와 친밀성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3 순명

 

이냐시오의 저서엔 「하느님을 섬기다」,「그리스도를 섬기다」라는 어휘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의 주요 영성의 집약적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뜻, 그리스도의 뜻을 잘 알아듣고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그 뜻을 세상에서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섬김은 그분의 배필인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며 교회에 대한 충성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에 대한 특별한 순명과 예수회 내부 장상에 대한 순명으로 구체화된다.

 

그의 순명의 기초와 모델은 성서 안에서 찾는다. 순명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신약 성서 안에 나타나는 신앙인들의 근본적인 자세이며 그 절정적 모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필립 2,8 참조) 안에서 찾는다.

 

그는 세 종류의 순명에 대해 가르쳤다. 첫단계 「시행적」순명은 명령받은 것을 행동으로 이행함으로써 준수된다. 둘째 단계 「의지적」순명은 순명하는 이가 명령하는 이와 똑같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셋째 단계「완전한」순명은 순명하는 이의 이해, 판단을 장상의 이해 및 판단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명에서 중요한 것은 순명하는 이의 편에서 장상의 명령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한편 장상은 그 직권을 행사함에 있어 「분별력」또는 「분별하는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며 그는 다스리는 가운데 모든 이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3-4 영적 식별

 

이냐시오의 영성은 식별의 영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영적 식별의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다. 이 영성은 영혼의 내부에 일어나는 마음의 여러 움직임의 방향을 감지하고 이해하면서 하느님께 일으켜 주시는 움직임을 식별하고 거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조한다.

 

영적 식별은 악의 영향을 떨쳐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올바른 생활 양식을 찾아내고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찾아 그것을 실천에 옮겨가는 과정이다. 영적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기 때문에 그 근본 배경이 기도이다. 따라서 기도와 함께 진행되는 식별이 참다운 것이다.

 

식별의 첫 기준은 무엇보다 성서이다. 하느님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다음엔 교회의 가르침이다. 수도회의 가르침도 식별의 중요 기준이다. 또한 자기의 신분이나 처해 있는 위치, 수행해야 할 책임 등의 관계에서 식별 기준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영적 식별에 유익하다.

 

식별의 첫 기준은 무엇보다 성서이다. 하느님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다음엔 교회의 가르침이다. 수도회의 가르침도 식별의 중요 기준이다. 또한 자기의 신분이나 처해 있는 위치, 수행해야 할 책임 등의 관계에서 식별 기준이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영적 지도자의 조언이 영적 식별에 유익하다.

 

이냐시오는 개개인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내적 체험들을 깊이 성찰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그분의 뜻을 드러내 주실 것으로 믿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영적 식별이 회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즉 각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들을 이해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비추심을 청하는 식별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요구한다. 첫 단계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방향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성령의 이끄심을 청하며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에 비추어 보면서 식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피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이다. 셋째 단계에선 결정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도록 청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정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 [가톨릭신문, 2000년 4월 9일]

 

 


4. 이냐시오의 영성 수련

 


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은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찬양과 함께 장엄한 인가를 받은 이후 수세기 동안 다양한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쇄신과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Summorum pontificum」1922, 7, 22)으로 이냐시오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으며 다른 회칙 「Mensnostra」에서 교회의 영성생활의 발전을 위해 공헌해온 「영성수련」의 탁월성을 예찬하였다.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에 의한 피정은 오늘 한국 교회에서도 예수회원들이나 수도자들뿐 아니라 교구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어 가면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4-1 ‘영성 수련’ 저술 목적

 

이냐시오는 로욜라에서 병상에 있을 때와 특히 만레사에서 수련 중에 성삼위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와 신자들을 보살피는 사목활동 중에 얻은 구체적인 경험을 교회의 전통 신학적 반성을 거쳐 「회심을 위한 책」, 「사도적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책」으로 「영성수련」을 썼다.

 

「영성수련」은 단순한 이론적 연구서나 영적 독서용으로 쓴 것이 아니고 영성수련(피정)을 지도하거나 수행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고 또한 지력과 의지를 통해 생활을 쇄신 정리하려고 결심하는 이들에게 영성생활을 위한 실용적 안내서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냐시오는 「영성수련」이란 책을 다음과 같은 구체적 내용을 지닌 영성수련(피정)을 위하여 쓴 것이다. 『영성수련이라 함은 양심을 살피는 방법이나 묵상, 관상, 염경 기도, 묵도의 방식…영적 행사들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마치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산책이나 걷기, 뛰기 등의 모든 것을 체육 또는 신체의 단련이라 함과 같이 영적인 면에서도 모든 사욕편정을 깨끗이 없애고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있어서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기 위하여 영혼을 준비하고 이에 대비하는 모든 방법을 영성수련이라 한다』(1항).

 

따라서 「영성수련」의 목적은 영성수련(피정)을 통해 성령 안에서 인간이 자기중심적 악습에서 벗어나고 인간적인 나약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올바르게 정리하여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여 그분과 합일에 이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영성수련 수행자가 하느님을 향해 내적으로 회심하도록 인도하며 그것을 통해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4-2 ‘영성수련’의 구조

 

「영성수련」(21~312항) 그리고 여러가지 부칙(313~370항)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머리말은 20개 조목의 해설, 권고, 주의사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성수련의 지도자와 그 수행자들이 보다 효율적인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이냐시오는 먼저 영성수련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있어 지도자와 수행자가 알아둘 것, 주의사항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어서 영성수련의 계획 및 방법을 되도록 엄격히 지켜야 하지만 수행자의 연령, 건강 상태, 교육 수준과 능력에 따라 그것들을 조정하길 권한다. 그리고 지도자가 수행자의 선택이나 결심에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끝으로 수행자가 영성수련 기간 중에 그것에 전념할 수 있기 위하여 일상의 모든 업무에서 떠나길 요구한다.

 

이어서 본론이 시작되는데 전체적으로 네주간의 피정 단계로 분류되어 있다.

 

첫째 주간은 인간이 창조된 근본 목적을 제시하면서(23항) 시작된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봉사하기 위해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받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 달성을 위해 도움되도록 조성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만사를 그 목적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낟. 이것은 나중에 예수회의 모토가 되며 이냐시오 영성의 특징이 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라는 사상을 잘 드러낸다.

 

이어서 첫 주간의 주제인 죄와 지옥을 묵상하도록 안내한다. 죄에 대한 묵상(24~64항)은 가능한 한 장소를 구상하고 문제의 죄를 상기한 후 그것을 지성으로 반성하고 의지와 함께 감정을 움직이길 요구한다. 그리하여 죄의 크기가 나쁘기 그리고 혐오스러움을 인식하고 아파하며 피하기로 결심하도록 한다. 그리고 죄 중에 현세생활을 마친 사람들의 종착점인 지옥에 대해 묵상하도록 한다(65~71항). 이 같이 죄와 지옥에 대해 묵상하는 사이에 특별양심성찰의 방법과 총고해의 유익성을 제시하여 영성 수련의 수행자가 죄의 상태에서 정화되어 기쁨게 하느님게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이루어준다. 마지막 부분에 영성수련을 하면서 지켜야 할 10가지의 부칙(73~89항)을 나열하고 있다.

 

둘째 주간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하며 강생으로부터 성지주일까지의 그분의 생애와 사적(事蹟)을 묵상하도록 한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해 묵상하게 하는 것이다(91~189항). 이 주간의 목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생활 양식을 잘 선택하도록 한다. 그것을 잘 선택하기 위하여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형태의 사람들의 자세 그리고 겸손의 세 단계를 묵상하도록 한다.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은 대립적인 두 진영의 우두머리들인 그리스도와 사탄의 상반된 의도와 작전을 상상하여 깨닫게 함으로써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도록 한다(136~148항). 「세 형태의 사람들」에 대한 묵상은 평화 중에 하느님을 뵙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게 한 후, 보다 완전한 형태의 삶을 본받도록 하는 것이다(149~155항). 첫 형태의 사람은 그러한 목적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죽을 때까지 마우런 방법도 쓰지 않는다. 둘째 형태의 사람은 방법을 쓰고 노력하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 셋째 형태의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온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 한다. 「겸손의 세 단계」에 대한 묵상(165~168항)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섬기는 데 핵심이 되는 것으로서, 겸손의 셋째 단계는 이냐시오의 수덕론에서 인간적 노력의 자세의 최고봉이다.

 

셋째 주간의 묵상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베타니아를 떠나시는 장면부터 수난의 마지막 순간까지 구성되어 있다(190~209항). 영성수련 수행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그분과 함께 아파하면서 진정한 눈물과 슬픔을 간구한다.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참아 받아야 할지를 묵상한다. 끝 부분엔 절도있는 음식섭취에 대한 상세한 규범을 나열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분을 본받기를 권고한다(210~217항).

 

넷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에 관한 묵상으로 이루어 진다. 부록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적 사건들(216~312항) 중에서, 넷째 주간의 묵상에 해당디는 것들은 부활 후 발현하신 13 사적들(299~311항)과 승천(312항)에 관한 것이다. 구해야할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기쁨에 대하여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세이다 이어서 이냐시오는 영을 분별하는 규범들을 열거하며 상세히 설명하고 자선에 관한 몇 가지 규칙과 예수회 특유의 자세인 교회의 정신에 일치하는 사고방식의 규범들을 제시한다(313~370항). [가톨릭신문, 2000년 4월 16일]

 


 


성 이냐시오의 생애와 영신 수련

 

 

예수회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탄생 500주년과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회칙(Regimini Militantis Ecclesiae)에 의해 인준된 예수회 창설 450주년을 계기로 하여 작년 9월 27일(창립일)부터 올해 7월 31일(성 이냐시오 축일)까지를 ‘이냐시오 주년’(Ignatian Year)으로 결정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예수회에서는 대외적 행사를 지양하고 수도 생활의 내적 쇄신을 기하기로 하였다.

 

 
이냐시오 주년의 의의

 

 
각 수도회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생활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존과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보여 준다. 성인이나 수도회를 통해 보여지는 하느님 나라의 단편적인 모습들은 장차 우리가 살 영원한 나라의 일부분이며 이로써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신비로 초대하며 사랑의 일치로 품는다. 이 일치와 사랑의 한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이냐시오 주년’의 의의는 성인과 수도회의 업적을 회고하고 그 영성 생활을 열거함으로써 평범한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신비를 뜨겁게 체험하게 하는데 있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이 주년을 마감하면서 현대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는 자신들의 사도적 열성에 대해 성찰하고 이 시대의 요청에 적절히 응답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며,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예수회의 창설 정신과 의의 그리고 활동 전망을 고찰하여 성인의 정신과 수도회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 총합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생애

 

 

성 이냐시오는 신대륙의 발견과 인문 사회주의의 융성,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분열(프로테스탄트) 운동 등 대사건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치던 16세기 대격변기의 사람이다. 그는 1491년 스페인 기푸즈코아 지방에 있는 바스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회심 이전의 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26세까지는 세속적인 허영에 몰두했고, 또 거대하고도 허무한 열망을 가지고 세속적인 명예를 얻으려 무술 연마로 자신을 단련시키며 지냈다.”고 한다. 스페인 국왕을 섬기는 기사가 된 그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다가 포격을 받아 증상을 입었다. 그의 용기에 감동된 프랑스군은 비록 적군이지만 이냐시오를 로욜라에 있는 가족에게 후송해 주었다.
 
로욜라의 성에서 힘겹게 회복기를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책을 읽고 싶었다. 그때 그가 구할 수 있는 책이라곤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 열전”뿐이었는데 그는 그 책에서 처음으로 고귀한 인물들을 접하였고 그들을 닮고 싶어졌다. 거룩한 경쟁심에 불탄 그는 “성 도미니코가 이것을 행했으니 나도 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꼬는 이런저런 일을 했다. 그러므로 나도 하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계속 느꼈다. 이와 함께 세속적인 업적에 대한 공상도 계속되었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만족보다는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성지 예루살렘에 가는 일, “성인 열전”에서 본 고행들을 모조리 실행한다고 상상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 생각에 몰두하면서 따져 보는 이런 과정에서 그는 영의 세계에 눈을 댔고 영들의 차이를 분별하는 법을 차츰 알게 되었다.

 

<성이냐시오와동료들의첫서원>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주님과 똑같이 살려는 소망을 실현하고자 집을 떠났다. 이것은 속죄와 새로운 삶을 위한 결정의 표시였다. 그는 몽세라트에 가서 총고백을 하고, 자기 옷을 가난한 사람에게 벗어준 다음 허름한 순례자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체험을 종합하고 싶어서 만레사의 동굴을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은둔자로 지내는 동안 수많은 유혹과 영혼의 변화들을 겪으면서 하느님의 신비에 접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삼위께 대한 신심과 창조의 손길에 대한 믿음, 성체성사 안의 하느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얻는 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성인은 그때까지 실천해 온 금욕과 지나치게 세심한 방법들이 영성 생활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오직 사도적 투쟁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복음의 진정한 목적에 따른 평범한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실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내적 준비가 갖추어지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많은 간난신고 끝에 성지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면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성지 관리자들이 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는 이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는 비록 이교도 국가에서 선교하려는 계획은 실패하였지만 “영혼들을 돌보려는” 열렬한 사도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느낀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라틴어를 배우는 등 학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공부를 하는 동안에 지나친 열의와 봉사로 종교 개혁자의 혐의를 받아 갇히거나, 동료들이 자기 곁을 떠나는 시련을 당했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잘 견디었다.
 
또한 그는 당시 인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갖고 영적 나눔을 계속하는 동안 차츰 우정이 두터워졌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을 한데 모으고 일치시켜 주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영혼들의 더 큰 유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미 이루어진 일치와 동료애를 더 강화시키고 견고케 하는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이 “주님 안의 벗들”이 예수회의 창설 회원들이다.

 

 


예수회의 역사적 의의

 

 
예수회는 창설되자마자 급속히 발전하여 초대 총장인 이냐시오 생전에 이미 회원수가 1만 명을 넘었고 열두 개의 관구를 이루었다. 예수회는 유럽에서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막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생활화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아시아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설교와 교육, 사회 사업의 실행, 기타 온갖 형태의 사도직을 통하여 눈부신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포교 사업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와 “천주 실의”의 저자인 마태오 리치, 인도에서의 적응주의 선교로 알려진 데 노빌리 등은 모두 이 시대의 예수회원들이다.

 

그러나 예수회는 급격한 발전과 수도회의 특성인 교황께 대한 탁월한 충실성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적들로부터 많은 시기와 모함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1773년에는 해산되고 말았다.

 

이 해산 사건에 직접 관련되는 대표적 사건들은 파라과이 축소지 문제와 얀센파와의 논쟁 및 중국의 전례 문제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교회가 교회 본래의 정체성과 적응성을 정리 종합하는 과정에서 맞는 대표적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적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수도회 해산이라는 불운을 당하기는 했으나, 역사와 교회는 결국 예수회가 사심 없이 진리를 위해 일해 온 병사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1814년 예수회는 재건되었고, 설교와 교육을 통한 사도직 활동이 재개되고 과학적인 탐구와 사회 활동,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선교가 다시 전개되었다.

 

예수회는 16세기 가톨릭 세계의 쇄신과 부흥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중세의 봉건 질서 속에서 안주하던 낡은 신심과 성속(聖俗) 이원론의 수도원 제도를 타파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역동적인 수도회를 등장시킨 것이다. 따라서 예수회의 영성은 활동 수도회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예수회는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지역성에서 벗어나 공번된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다음으로 예수회는 교육과 학문을 통하여 교회와 근대 사회에 봉사한 바가 적지 않으며 16세기 이후 유럽의 고등 교육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 예수회는 근대 이후 전환기에 처한 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고 시대에 적응하는 교회가 되도록 조력하였다. 또한 구원에 관한 진리에 있어서조차 교회는 예수회의 방식을 이해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복음 선교와 사회 개발 및 정의의 문제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였고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지역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는 토착화 선교 방식을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성 이냐시오와 라 스토르타의 그리스도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성 이냐시오와 예수회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라 스토르타의 현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때 성부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이냐시오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종으로 삼아라.’ 하셨고 성자 예수께서는 ‘내게 봉사하시오.’ 하셨다.” 이냐시오는 이 현시를 보고 영혼의 변화를 느꼈다. 그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두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자신이 성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졌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기뻐하였으며, 이 현시 이후 자신의 작은 단체에 예수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죄인이면서도 예수님의 벗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 현시의 메시지와 회원들, 그들이 따르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닌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서는 ‘라 스토르타’의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의 벗으로 부름을 받게 된 ‘라 스토르타’의 정신은 수도회 회헌에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 때문에 그분처럼 모욕과 무고와 치욕적인 언동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탓이 아니라면 바보로 취급되는 것도 기꺼이 원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따르되 모욕과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것이 예수회 정신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벗으로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이 체험은 교회와 교황께 대한 충성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냐시오와 예수회를 특징짓는 정신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귀의하듯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귀의하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께 순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사랑이 예수회 영성의 특징이듯 회원들 역시 그리스도와 한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 자신의 전인격을 투신한다. 따라서 예수회원이 서약하는 ‘교황이 영혼의 선익과 신앙의 전파에 관하여 내리는 명령은 어떤 것이든 실행하며 어디에 파견되든지 아무런 핑계나 변명, 이의 없이 즉시 가야 하는 고유하고 특별한 서원’은 또한 회원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은총을 의미한다. 교회와 교황께 대한 이 순명 서원의 정신은 그리스도교 신비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반역의 정신이 그리스도께 이르러 비로소 순종이라는 아름다운 교회의 용어가 되고, 그리고 한 성인의 삶과 그 정신으로 이어지는 은총의 이 언어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하는 교회의 정신이다.

 

고도의 문명,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일면은 바로 이 순종을 바보 혹은 유치함으로 해석하는 왜곡에 있다. 교회의 신비는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계속>[경향잡지, 1991년 7월호]

 

 


예수회의 정신과 영신 수련

 

 

성 이냐시오는 회원들에게 예수회 영성의 특징을 이루는 이 순명에 있어서 탁월하기를 요구했다. 그가 요구한 순명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는 회헌에 명시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시체처럼 순명하라.”  “노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처럼 순명하라.”

 

그가 요구하는 이 절대적 순명은 단순히 장상에게 순명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뜻을 가진다. 이는 무엇보다 순명의 원의가 하느님의 뜻을 따름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이냐시오는 라 스토르타의 체험 이후 창조주 하느님의 무한하신 위엄 앞에 존경과 경배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절대 순명 즉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 외에는 감히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손에 의해 창조된 유한하고 비천한 인간 조건을 깊이 의식하며, 자신의 원의가 하느님의 원의와 대립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더구나 하느님의 원의 한 구석에 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미소한 원의의 가능성까지도 고려해 보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철저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자기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회의 순명의 원형이다.

 

예수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활동 안에서의 관상”이다. 활동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관상 기도의 연속이라는 낙관주의는 활동 수도자는 물론이려니와 평신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하는 순수한 지향만을 가지고 활동한다면 모든 일이 기도가 된다. 기도하기 위해서 매번 일손을 멈추거나 성당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 곧 우리가 순수한 지향과 애덕 정신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은 기도뿐 아니라 직업 활동, 가사 노동, 학생들의 공부 등 우리의 모든 활동이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상, 그러나 활동과 조금도 분리되지 않는 관상’을 의미 한다. 이러한 활동과 기도의 결합은 기도의 최종 단계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영성에 힘입어 예수회원들은 수도원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만사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 힘껏 일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도직을 우선으로 하기에 창설 초기부터 성무일도의 공동 기도와 수도복을 포기한 것은 수도회의 또 다른 특성이다. 따라서 예수회를 일컬어 ‘흩어지는 공동체’(communitas ad dispersionem)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기동성을 수도회의 특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회원들에게 각별한 분별력을 요구하는 것 역시 수도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과 계시지 않는 곳, 사태의 본질과 비본질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회원은 종선 서원을 하면 그를 인도하는 외적 규범은 완전히 없어지고 그 대신 “분별 있는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내적 규율이 주어진다.

 

 

영신 수련

 

 
예수회의 영성을 이루는 이러한 특성들은 ‘영신 수련’을 통해서인데 이는 ‘영신 수련’이 예수회원의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 되는 원체험이기 때문이다. 이 ‘영신 수련’은 보통 한 달간 완전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 피정 형식으로 진행된다. 거기에서 피정자는 경험 있는 지도자의 지도를 따라 조직적인 방법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무질서한 감정을 극복하고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다.

 
“영신 수련”은 머리말과 본론 및 여러 가지 부칙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머리말은 영신 수련의 지도자와 그 수행자들이 영혼의 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인데, 해설과 권고 및 암시 등 20개의 조목을 포함하고 있다. 그 다음은 본론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대략 4주간으로 나누어서 행하기로 되어 있다.

 
첫째 주간 서두에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인생관에 대한 고찰과 묵상으로서, 인간의 창조 목적에 대한 통찰로 시작되어 죄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구성적 원리이고, 우주의 질서이며, 하느님의 뜻이요 사랑이며 인생 철리(哲理)에 어긋나는 자기 죄를 악마의 죄와 아담의 죄에 비교하면서 묵상하고, 죄의 크기와 나쁨, 징그러움을 인식하고 아파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 죄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되어야 할 착한 사람 대신에 죄 중에서 현세 생활을 끝마친 악인들의 종착점인 지옥을 묵상케 한다. 이와 같이 죄를 묵상하는 가운데 양심 성찰의 방법과 총고백의 유익성을 제시하여 영신 수련을 수행하는 영혼이 죄에서 정화되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준다.

 

제2주간부터는 영신 수련의 몇 가지 기본적인 묵상 자료와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를 묵상하게 하는데 그리스도의 강생과 생애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묵상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묵상하고,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본받음으로써 인간성을 통해 표현되는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정신을 차례로 묵상하게 된다. 이 묵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거룩한 교회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나아가서 교회의 정신에 의하여 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성화 사업에 참여할 것을 바라본다. 이때에 복음적 완덕에로의 생활 양식을 묵상하고 선택할 기회로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 및 겸손의 세 가지 단계 등에 대한 묵상이 제시된다.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은 대립된 진영의 두목인 사탄과 그리스도의 상반된 의도와 수단을 인식케 함으로써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게 한다.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에 대한 묵상은 하느님을 뵈옵고 구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에 있을 수 있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을 고찰하고 보다 완전한 타입을 본받도록 한다(이에 의하면, 첫째 그룹은 원하기는 하나 죽을 때까지 아무런 수단도 쓰지 않는 사람들, 둘째 그룹은 수단을 쓰고 노력은 하나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셋째 그룹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 외에는 아무것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물질에 대한 애착심에서 완전히 마음을 비운 사람들이다. 즉 온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관대해진 영혼들을 가리킨다).

 

겸손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한 묵상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을 말해 주고, 또 둘째 주간에 제시된 선택에 대한 여러 가지 규칙과 더불어 예수님을 내 마음의 거울로 삼아 그분을 더욱 가까이 따르는 길을 발견케 하고, 순수한 사랑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케 한다. 이 겸손의 셋째 단계는 성 이냐시오의 수덕론에서 볼 때 능동적 의미로 최고봉이다.

 

셋째 주간과 넷째 주간에는 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는데, 이는 수난과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하고 영복에 이른 그리스도의 생활의 신비를 인식케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수고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들어가는 진실한 그리스도교 인생관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관대해진 영혼은 성 이냐시오의 봉헌기도를 자기의 기도로 바칠 수 있게 된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선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주의 사랑과 은총만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오니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나이다.

 

 

 

 


영신 수련이 교회에 끼친 혜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우선 파리 대학 재학 중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를 비롯한 수 명의 동지들이 성 이냐시오의 지도를 받으면서 영신 수련을 받은 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봉사의 열정으로 가득 차서 후일 성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했다. 그 후 모든 예수회원은 물론이고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예수 아기의 성 데레사 등 많은 성인 성녀와 목자들이 이 수련을 거쳤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9년의 회칙에서“‘영신 수련’은 구령과 완덕의 길에 있어서 영혼 지도상 가장 현명하고 보편적 법전인 동시에 가장 깊고도 견고한 경건심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서 생활 개선의 길을 가르쳐 주며 영신 생활의 높은 수준에 이르는 지름길을 밝혀 주는 엄중한 각성의 소리로서 대단히 정확한 지도서가 되었다.”고 찬탄하셨다. 아울러 회칙은 “영신 수련”의 탁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그릇된 신비주의의 위험이나 오류의 염려가 전혀 없는 교리적 우수성, 어떠한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에게도 각각 자기 생활에 맞출 수 있는 적응성, 각 부분의 상호 연관성 그리고 차례차례로 연결되어 있는 진리 묵상의 명쾌한 순서로 짜여 있다. 따라서 영신 수련은 죄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정화된 다음에 자기를 이기고 사욕 편정을 극복한 후 안전한 길에 오르게 하여 기도와 하느님 사랑의 최고봉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수많은 영신적 교훈을 준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예수회의 전망

 


예수회는 인류를 짓누르고 있는 무신론에 대해 ‘힘을 다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라는 특별 임무를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각 예수회원은 기도와 활동을 통해 무신론 퇴치에 참여해야 한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인 교회 일치 운동,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관계 심화, 교회와 제문화들과의 대화 등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공헌을 당부받았다.

 
예수회원들은 본당이나 대학의 강의뿐 아니라 난민촌과 인권이 유린되는 곳 그리고 무신론 세계까지도,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현대 세계에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복음의 정신에 입각하여 신앙의 봉사와 정의 구현을 일치시키려 하기에 체제와 사회 문제에 관여하기를 회피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해 가고 있다.

 
영신 수련의 핵심은 “인격적인 만남”인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신학이 강조하는 것도 마음 즉 인격이다. 또한 영신 수련의 기본 자세는 복음 정신과 같이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데, 현대 심리학에서도 인격의 성장은 획득과 동화의 원리가 아니라 자기 증여, 사랑과 봉사로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바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현대는 변화와 혼란과 불확실성에서 성 이냐시오의 시대와 공통된다. 현대의 도전에 맞서고 있는 우리를 성 이냐시오는 영신 수련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리와 기초에로 초대한다. 이것이 다름아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정 마음에 둔 교회의 쇄신이기도 하다. 여기에 성 이냐시오 영성의 현대적 의의가 있다. <예수회 자료 제공>

[경향잡지, 1991년 8월호]

 


 

 


영신수련의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심종혁(예수회 신부/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신비주의와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동성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이냐시오의 삶에 있어서 태양과 같은 분으로서 <영신수련>의 궁극적인 촛점이다. 이러한 이냐시오적 그리스도론의 결정적 형상과 그의 영적 체험의 절정은 라스톨타의 비전에서 잘 드러난다.

 

사제가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을 준비하고 성모께서 자기를 성자와 한 자리에 있게 해 주시기를 빌면서 일년간 미사를 지내지 않고 보내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로마를 몇 마일 남겨두고 하루는 어는 성당에서 기도하는데, 그는 자기 영혼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성부께서 자기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자리에 있게 해 주시는 환시를 보았으며 성부께서 자기를 성자와 함께 있게 해 주셨음을 추호도 의심할 바 없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피정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참가할 수 있도록” 당신 성자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구하라고 초대한다. 우리가 <영신수련>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원리와 기초>에 담긴 <영신수련>의 정신과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 왕국> 묵상과 <두개의 깃발> 묵상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명확해 진다. <영신수련>의 신학을 밝히고, 특별히 이냐시오 영성의 역동적 생동감 밑에 깔려 있는 교의적 확신을 밝히기 위해서는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야만 한다. <영신수련>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묵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 목적과 의미가 <선택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선택의 근본 내용과 동기는 바로 예수의 생애 신비로부터 파생되어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 왕국> 묵상에서 얻어지는 확신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영신수련>의 역동성을 살피기 위해, <영신수련>과 이냐시오 자신의 영적 체험과의 관계를 다루어 나갈 것이다.

 


<영신수련>의 내적 영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하느님 체험

 
살라망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인 1527년에 이미 이냐시오는 자신이 지닌 영적지식을 어디에서 얻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이냐시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후에 기록된 [자서전]에서 “하느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라고 언급한 것을 본다면, 그가 영적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배워나간 것이 <영신수련> 안에 방법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냐시오와 같은 시대에 살고 활동한 그의 동지들 역시 <영신수련>이 어떠한 과정과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에 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면 예로니모 나달(Jeronimo Nadal) 신부는 <영신수련>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도록 교육시키는 가장 훌륭한 도구라고 설명하면서, 사부 이냐시오가 만레사에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시작하셨을 때 하느님의 은총과 이끄심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냐시오의 비서였던 후안 폴랑코(Juan Polanco) 신부는 만레사에서의 신비적 조명 체험 안에 <영신수련>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영신수련>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자서전]을 기록한 곤살베스 데 까마라(Goncalves de Camara) 신부는 <영신수련>의 기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금까지 수록한 이야기를 사부께 듣고 난 뒤 10월 20일 필자는 어떻게 <영신수련>과 [회헌]을 초안했는지 알고 싶다고 순례자[이냐시오]께 문의를 했다. 그는 <영신수련>은 단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 틈틈이 적어 두었노라고 대답하셨다. 예를 들자면 <양심성찰>을 크기가 다른 선(線)으로 표시한 것과 그밖의 예들도 그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사부께서는 <생활방식의 선택을 위한 길잡이> 등은 로욜라에서 다리를 앓고 있을 때 경험했던 다양한 정신과 사상에 그 유래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이냐시오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은혜에 의해 자신에게 베풀어진 특수한 영적 체험을 성찰하며 다른 영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틈틈이 적어 두었고, 결국 이것이 <영신수련>이라는 조그마한 책자의 골격이 되었다. 즉 <영신수련> 안에는 이냐시오의 하느님 체험이 네 주간으로 구성된 영적 수련의 방법론이라는 특수한 모양으로 담겨져 있다. 우리는 특별히 성서적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인간이 걷게되는 영적인 여정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살펴보면서 <영신수련>의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을 살펴보겠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영신수련>의 역동성이 드러날 것이다.

 


<영신수련>과 이냐시오의 체험들

 

 
일반적으로 <영신수련>의 내적 구조는 세 단계에 걸친 이냐시오의 영성적 여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시기는 로욜라城에서의 체험으로, 개인적 고행의 삶을 통해 영신식별에 관한 기본적 경험들을 얻게 되는 시기를 말한다. 둘째 시기는 만레사에서의 체험으로, 여러 신비적인 체험들이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형성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영신수련> 고유의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겸손의 세 가지 단계> 등의 묵상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엮어진 둘째 주간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시기는 알카라, 살라망카, 그리고 빠리에서의 연학시기로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세세히 성찰하면서 <영신수련>의 기본 골격을 구체적으로 형성시킨 시기이다. 이 시기에 특별히 이냐시오는 <원리와 기초>, 첫째 주간의 묵상들, <교회와 더불어 생각하는 방식> 등을 심화된 신학과 성서적 지식을 바탕으로 완성시켰다.

 

이러한 세 단계의 구분을 바탕으로 우리는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체험을 살펴보면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구원의 개관적 지평과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체험되는 구원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주관적 지평 사이에 어떤 차이점, 어떤 연관성, 그리고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피게 될 것이다.

 


로욜라城에서의 체험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에 대해 연구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만레사에서의 내적 체험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만레사 시기에 앞서 있다는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만레사에서의 체험이 가능하도록 밑바침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로욜라에서의 회복기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521년 8월 말(혹은 9월 초)부터 다음해 2월 말까지, 로욜라에서의 여섯 달 동안 특별히 [그리스도의 생애](Vita Jesu Christi)와 [성인들의 꽃](Flos Sanctorum)이라는 두 권의 책이 이냐시오의 삶에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는 평소 세속적인 소설책 기사(騎士)들의 무용담이 담긴 책들을 매우 즐겼다. 건강이 좋아지자 그는 소일도 할 겸, 그런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즐겨 읽던 소설책들이 집에는 마침 한권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스페인말로 된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聖人列傳)>을 가져다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여러번 거듭 읽는 동안 그는 그 내용에 진지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때로는 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금방 읽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전부터 생각해 오던 세상사를 공상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진지한 흥미와 열정으로 이 책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냐시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요점들을 베껴 썼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깨달음들은 이냐시오에게 회심의 객관적인 시발점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는 세상에 대한 봉사와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검토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영신수련>과 이 두 문헌 사이에 어떤 문맥상의 연관이 있는지를 밝혔다.

 

로욜라에서 일어난 이냐시오의 회심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선택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보다 더 원천적인 차원에서의 선택으로서, 세상에 대한 봉사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자 하는 선택이었다. 둘째 단계는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서, 카르투시오적인 은수자의 삶과 [성인들의 꽃]에서 발견되는 보속 순례자의 삶 사이에서 보속 순례자의 삶을 택하는 선택이었다. [성인들의 꽃]에서 읽은 성인들의 삶이 이냐시오의 둘째 단계의 선택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첫째 단계의 회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떠한 아무런 외적인 매개 없이 자유롭게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을 이끄셨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냐시오는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자신의 삶을 개선해야겠다고 마음을 작정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책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어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꽃]보다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냐시오의 일차적 회심에 더 중요한 원천적 역할을 담당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

 
<영신수련>의 다양한 원천들에 대한 연구가 이미 밝혔듯이, <영신수련>은 그 표현에서 뿐 아니라, 복음서의 이야기를 설정하는 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생애]와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설사 근본적으로 <영신수련>에 대한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지라도, 이냐시오 자신이 얼마나 친밀하게 이 작품을 읽고 묵상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수 개월간 읽고 묵상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구성과 신학적 관점 등을 살펴 본다면, 이 책에 의하여 이냐시오에게 성서적 구원의 관점이 어떻게 객관적 지평으로 제시되었던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냐시오의 영성의 골격이 되는 성삼위께 대한 신심,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 그리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의 인간의 실존 등은 로욜라에서의 영적독서와 묵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통합적 기본 개념을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간결하게 제시하고, 이들을 실천에 옮기도록 격려하는 훈화를 덧붙인다. 이냐시오는 이 서장을 오랫동안 묵상했을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신수련>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기초’(salutis fundamentum Christus)로 제시되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비참한 인간 실존에 결정적인 해답으로 제시된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어서 저자 루돌프는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의 두 차원의 응답이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죄인인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용서받아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길은 정화의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의 삶을 따르기로 투신하는 봉사의 단계로 넘어가는, 두 차원의 응답의 통일된 과정이다. 물론 정화의 단계가 죄를 깊이 뉘우치고 선행을 하도록 권고하는 등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묘사되지만, 회심의 깊은 내적 과정이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자비로우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존된 과정임이 여기에서 강조된다. 루돌프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투신하는 둘째 단계를 더 인격적이고 지성적인 응답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심화되고 조명된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서의 묵상을 전개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성 요한 금구와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등의 성독서(lectio divina)의 가르침을 이용해서, 복음서의 묵상 내용이 하루의 삶과 행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격려한다.

 

루돌프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7가지의 묵상 동기,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영적 열매들을 설명하고,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에서 한 것처럼, 예수의 생애를 차례로 관상하도록 그 목록을 제시한다. 그가 묵상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점은 독자로 하여금 복음서의 장면 속으로 자신을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고, 그런 방법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러한 묵상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한 복판에서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임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루돌프는 묵상 중에 멈추어 깊이 숙고함으로써 영적 신익을 거두라고 조언한다. 그는 성인들, 특별히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예를 들면서, 성서를 통한 묵상에서 영적 신익을 풍부히 얻는 것이 영성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이렇게 루돌프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서장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기초로 제시하면서 성서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서장 이후의 따라오는 181개의 장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이러한 관점에 따라 묵상해 가도록 구성되어있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장을 오랜 기간 읽고, 자신의 영적 독서와 묵상에 이것을 적용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 제 1장은 요한복음 서장을 바탕으로 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의 관점과 배경은 이냐시오의 영성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와 같이, 이 책에서도 그리스도는 엄위하신 하느님으로 묘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늘 엄위하신 주님이셨다. 그분은 모든 우주 만물,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만물의 중심이시며 구원의 기초이시다.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만물을 주재하시는 성부와의 관계를 특별히 육화의 신비를 통해 드러내신다. 이 묵상을 통해서 제시된 그리스도께 대한 인식은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상에 담겨진 두 차원의 관계를 통해서 이냐시오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말씀은 하느님의 계시일 뿐아니라 인간의 창조자이시다.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 서장과 요한복음의 서장을 오래 묵상했을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관은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계속해서 루돌프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묘사한다. 성삼위의 신비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냐시오는 그리스도의 품격을 통해서 성삼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오직 성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길이시며, 그리스도 자신도 결코 성삼위의 신비로운 관계를 떠나서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다가 오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성삼위의 마음은 말씀으로 사람이 되심으로써 죄스러운 인간을 당신과 화해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루돌프는 이 묵상을 성삼위의 각 위께 드리는 담화기도로서 마무리 한다. 인간이 마땅히 흠숭을 드리고, 찬양하고, 영광을 드려야하는 창조주 엄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러한 묵상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영적 독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이끌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삶과 말씀, 그분이 활동하셨고 일하신 장소 등에 대한 신심을 통해서 영원하신 주님께 대한 끝없는 공경심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이냐시오의 영성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하는 성삼위의 신비에 기반한다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 2장에서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죄의 현상을 다루면서 인간의 죄스러운 실존에 대해 묵상한다. 천사와 원조들의 죄는 창조주 하느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힌 죄이며,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반기를 든 죄인 것이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부 세계를 넘어, 즉 자신의 개별적인 역사를 넘어, 우주적인 차원에서 대립되어 있는 하느님과 세속의 갈등에 눈을 뜨게 된다. 죄란 창조주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만 이 힘이 극복될 수 있음을 깨달은 이냐시오의 내면에서는 깊은 내적 평화가 자리하게 된다.

 

루돌프는 계속해서 마리아의 탄생부터 성신강림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해 간다. 이냐시오는 이 묵상들로부터 많은 요점들을 <영신수련>을 구성하는데 도입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역사를 서서히 밝혀내는 면에서 뿐 아니라, <영신수련>의 전체 구성에서도 많은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앞에서의 고찰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영혼을 풍족케 하고 또 만족시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적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듯이, 분명히 이냐시오는 이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깊은 영적 기쁨을 맛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론적이며 동시에 삼위일체적인 루돌프의 영성 사상이 이냐시오의 영성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인들의 꽃]

 


이 작품이 이냐시오의 영성에 끼친 영향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교할 때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이냐시오의 [자서전]에서는 더 자주 언급된다. [성인들의 꽃]이 이냐시오에게 끼친 영향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끼친 영향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냐시오의 영적 이해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로 하여금 하느님 구원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알게 하고,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찾아내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식별하도록 이끌어 주었다면, [성인들의 꽃]은 성인들의 영웅적 모범으로써 이냐시오의 의지를 자극해서 그가 실현할 수 있는 이상을 향해 투신하도록 격려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모방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구체적인 동기가 이냐시오의 마음을 이끌었다. 그것은 바로 성인들, 즉 ‘십자가의 기사들’의 모범들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성 오누프리우스, 성 프란치스꼬, 성 도미니꼬 등은 이냐시오에게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냐시오는 복음서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보다 정직하게 반성하게 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고, 성인들의 삶을 기록해 놓은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것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순진한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이냐시오가 로욜라성에서 이 두 권의 책으로 무료한 시간을 채워야 했던 상황은 하느님의 섭리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두 권의 책 사이에서 보여지는 조화를 잠시 살펴보야야 할 것이다.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에 펼쳐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신학적 관점은 야고버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의 [성인들의 꽃]이 펼치는 영적 분위기와 매우 유사하다. 몬테지노는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면서, 그 책의 서문에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여왕께 헌장하는 글을 썼다. 그는 그 글에서, “세상의 군주는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라고 초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양위 폐하께서는 현세 군주들의 통치권이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쇠퇴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 요한 금구의 말을 빌린다면,) 지상의 왕권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왕국의 상징이자 표지에 불과합니다. 선량한 군주들은 지상에서 왕권을 다 행사한 뒤에 천국에서 이 영원한 왕국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 그렇지만 지상의 군주들이 이 하느님의 왕권에 속하는 사정에 관해서 보다 열심하고, 하느님의 신묘하신 섭리가 보내시는 재앙과 환난을 선용하여 자기들의 영원하시고 지존하신 임금께 봉사와 존경을 표하는 기인을 삼는다 하면, 지상 통치권이 장차 올 불멸하는 왕권의 표이자 상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가벨토 바가드는 야고버의 [황금전설](Legenda aurea)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책, [성인들의 꽃]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모든 덕의 으뜸이시며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십자가를 손에 들고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기사들인 성인들의 충성에 깃들고 힘차고 영광스러운 깃발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왕중의 왕, 주님들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비추어져 나오는 저 고귀한 능력, 저 비길 데 없고 불가해하며 어느 군주보다 뛰어난 도량을 우러러 뵙는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가 복자들의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삶에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오른손에 십자가를 쥐고 그것을 높이 쳐들어야 할 것입니다. 국왕의 승리와 경사를 고하는 깃발처럼 말입니다. 관대한 영혼들을 영원한 개선으로 인도하는 푯대처럼 말입니다. 성인들이 기사다운 마음으로 가슴에 두르고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정벌하러 나아가는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마귀는 지옥의 모든 종자들과 더불어 단죄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혼겁하여 멀리 멀리 쫓겨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권의 책은 그리스도의 삶을 최고의 이상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분을 따르며 섬길 수 있는지를 이냐시오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로욜라성을 떠날 때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어떤 것이 더 올바른 응답인지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냐시오 스스로 배우는 길은 더 멀고 길었다. 특별히 이냐시오는 로욜라에서의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가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만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것을 이상히 생각지도 않았고 그 차이를 따져볼 엄두도 안냈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눈이 열리면서 그는 그 차이점에 놀랐고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으며 드디어는 앞의 공상은 씁쓸한 기분을 남기는데 다른 공상은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아 갔다. 그는 서서히 자기를 동요시키고 있는 두 정신의 차이를 깨닫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는 <악마>에게서 오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이 독서로부터 적지않은 식견을 쌓아가면서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보다 정직하게 반성하게 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급기야는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구체적인 상황같은 것은 거의 생각지 않았으나, 성인들이 한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의 소망은 완쾌가 되는 대로, 하느님에 의해 고무되어 관대한 영혼들이 으례 소망하는 바와 같이 온갖 고행과 극기를 수행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다.

 

로욜라 시기는 하느님을 향한 근본적인 회심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아직 구체적인 방법 같은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면서 단순히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 시기였다. 여기에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겠다는 열망보다 앞서는 것은 지존하신 하느님께 빚을 졌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영혼 속에서 결국 보속에 대한 열망과 성인들의 행적을 본받겠다는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만레사에서의 체험

 


로욜라에서의 깊은 회심은 만레사에서의 오랜 정화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향한 과감한 투신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냐시오가 겪은 정화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기가 신앙의 신비에 관해서 많은 체험적이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미 읽고 묵상하며 요점을 기록해 둔 성인들의 삶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준주성범]을 통해서 많은 영적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또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읽으면서 많은 영적위로를 받았으며, 영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4일, 혹은 25일경의 성모축일에 몽세라트에서 철야기도를 올리며 성모님께 자신의 검을 봉헌한 후, “바르셀로나에 가는 길로 들지 않고 만레사라는 마을로 떠나, 거기에서 며칠 묵으면서 지금까지 소중히 지녀왔고 크게 위안을 받아 왔던 그 책에다 몇 가지를 써넣기로 했다.” 이 며칠이 결국 10개월로 늘었으며, 하느님께 사로 잡혀 그의 영적 열망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향한 투신이 차츰차츰 정화되어 갔다. [자서전]은 이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아주 소상히 전해준다. 이냐시오는 성인들의 삶, 특별히 성 오누프리우스의 삶을 모범삼아 기도와 보속의 새로운 삶으로 투신하면서 많은 위안을 느꼈으며, 자신의 외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구걸로 연명해 갔다. 하루에 세번 자신의 죄를 돌이키며 마음 아파했으며, 깊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두 가지 유혹이 그의 평화와 위안을 앗아갔다. 이 중 첫번째의 것은 깊은 내적 조명을 받은 후에야 유혹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밝은 대낮에 자기 주변의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일이 때때로 일어났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와서 그는 큰 위안을 맛볼 수 있었다. 무슨 물체인지는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지만, 때로는 눈동자같이 반짝이는 물건들이 많이 달린 뱀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 물체를 보는 데 재미와 위안을 느꼈고, 자주 볼수록 점점 더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그는 슬퍼지는 것이었다.

 

한참만에 그 비추임이 끝나자 그는 십자가 곁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여태까지 여러번 나타났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환시, 즉 수많은 눈동자를 가진 그토록 아름다운 형상이 또 나타났다. 그렇지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형상을 뚜렷이 바라보느라니 그 물체가 여느 때 보이던 아름다운 색깔을 하고 있지 않았으며, 거기서 그는 그것이 악마로부터 오는 것임을 똑똑히 알았고 자기 의지를 굳게 확인하였다. 그 뒤로도 그 형상은 여러번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경멸의 표시로 손에 든 지팡이를 휘저어 쫓아버리곤 했다.

 

이 유혹은 세상의 헛된 명예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진 체험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특별한 인물로 간주되고 외부의 관심을 통해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오히려 내적인 자기 포기를 통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된 경험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유혹은 마음 속에서 의심의 소리로 다가왔다:

 


그는 돌연 자기의 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듯한 고약한 생각이 떠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마음 속에서 “앞으로 남은 칠십 평생을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해나가겠느냐?” 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오는 듯했다.

 

하느님께 깊이 의존하지 못할 때, 그 누구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보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충분한 이유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때 현실과 이상의 거리감 속에서 일어나는 세심증과 걱정이 죄책감과 절망감을 영혼 안에 불러 일으키고 괴로움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똑같은 체험이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깊이 경험하며 희망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당시에 이냐시오는 이러한 것들을 쉽게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적 고통을 통하여 영들의 다양성에 대해 서서히 배워갔다.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묘사한다.

 

몽세르라트에서 그는 단단히 준비하고 성찰한 바를 빠짐없이 기록까지하여 총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빌면, 어쩐지 몇 가지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근심이 되었으며, 빠뜨렸다고 생각되는 일을 고백하고 나서도 아무래도 안심이 안되었다. 이 소심증을 치료해 줄 만한 훌륭한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성당에서 설교를 맡은 학식 많고 영성깊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고백성사를 주면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써놓으라고 시켰다. 그 말대로 했으나 고백성사를 받고나자 소심증은 곧 되돌아왔으며, 그때마다 더 미미한 일들이 생각나서 번민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 세심이 그를 해롭게 하니, 그것을 떨쳐버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가눈다는 것이 또한 어려웠다. 때로는 과거의 일은 더 이상 고백하지 말라고 고백사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한테 엄명을 내린다면 아마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고백사제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백사제에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본인이 입밖에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정말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일은 더이상 고백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은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그래서 곤란은 그치질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도미니꼬회 수도원에서 내준 자그마한 골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일곱시간을 계속해서 기도를 올리고 한밤중에도 잠자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며 앞서 말한 신심업도 빠짐없이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고행도 그의 세심을 치료해 주지는 못하였다. 세심증에 시달림받는 나날이 여러 달이나 계속되었다. 한번은 세심에 시달리다 못해 간곡한 기도를 드리면서 마침내 큰 소리로 하느님께 외쳤다. “주님, 붙들어 주십시오. 사람들 가운데서나 피조물에게서는 아무 처방도 얻지 못했읍니다. 그렇지만 그런 처방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떠한 수고든지 달게 받겠읍니다. 오 주님, 치유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십시오. 강아지 뒷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한다고 하더라도, 도움만 된다면 얼마든지 따라다니겠읍니다.”

 

이런 상념에 시달리는 동안 그는 방안에 있는 커다란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격렬한 유혹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가 기도하는 자리 바로 곁에 큰 구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죄임을 깨닫고 “주님, 주님께 득죄하는 짓은 결코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곧 사뢰었다. 그리고 이 두 기도문을 여러번 되뇌었다. 그때 간절한 소망을 하느님께 받기 위해 소원이 성취될 때까지 여러 날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견디었던 성인의 이야기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한참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자기도 그렇게 하기로 드디어 작정했다. 하느님께서 자기 세심을 치유해 주실 때까지, 아니면 죽음이 진실로 임박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식음을 전폐할 것을 다짐하였다. 먹지 않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껴질 때는 빵을 달라고 청해서 먹기로 했다 (물론 빵을 달라고 청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먹을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 하는 말이다).

 

그는 주일에 성체를 영하고 나서 고행을 시작하였다. 한 주간 내내 아무것도 안 먹었으나 평소의 신심업은 그대로 하며 성무일도에 참여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면서 여러번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주일에 그는 고백성사를 받으러 가서 고백사제에게 자기가 한 일을 자세히 아뢰곤 했으므로 그 주간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낸 일을 말씀드렸다. 그의 고백사제는 단식을 당장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자신은 아직도 체력이 왕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제의 말에 복종하였고, 그래서인지 그날과 이튿날은 세심에서 자유로와진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사흘째되는 화요일에 기도를 바치고 있느라니 자기의 죄가 하나하나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여 그는 과거에 지은 죄들을 하나씩 따지게 되었고 드디어는 죄를 다시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에 연이어서 지금 자기의 삶에 강한 혐오감이 느껴지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주께서는 이런 방식을 거쳐 그가 꿈결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가르침을 통해 그는 드디어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해서 몇가지 경험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들이 엄습해오는 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그는 과거지사는 더 이상 고백치 않기로 굳은 결심을 세웠다. 그날로부터 그는 세심을 벗어났으며, 주께서 자비로이 자기를 해방시키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체험은 가장 원천적인 정화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신수련>의 첫째 주간을 끝마치는 체험이기도 하고, 크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죄스럼을 인정하는 체험을 대변해 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된 내적 은혜들을 성삼위의 신비, 창조의 신비, 성찬의 신비, 그리스도의 인성, 성모 마리아께 대한 새로운 인식등의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자서전]에 전해 준다.


첫째, 그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극진한 신심을 가졌고, 매일 성삼위 각위께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성삼위께 기도를 드릴 때면 무엇때문에 성삼위께 네차례의 기도를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서 그다지 곤란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루는 수도원 층계에 앉아 <성모의 성무일도>를 염하고 있노라니 그의 오성이 승화되더니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가 세 개의 현(弦)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는 흐느끼며 자제를 잃고 말았다. 그날 아침에 그 층계 위에서 시작된 이 감격은 점심 때가 되도록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그는 크나큰 희열과 위안을 느끼며 여러 다른 비유를 들어가면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께 기도하던 때에 경건심을 체험했던 그 인상은 평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둘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손길로 언젠가 자신을 비추어 주셨는데, 그는 거기에서 위대한 영성의 환희를 맛보았었다. 그가 느끼기로는 하얀 물체를 본 듯도하고 그 물체에서 몇 줄기 광선이 흘러나오는 듯도 했는데, 하느님께서 그 물체로부터 빛을 내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고,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자기 영혼에 비추어 주셨던 조명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세째, 그가 근 일년간 보낸 만레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안을 주시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치유하시는 효험을 본 후, 그는 형식을 따라 고수해 오던 극단적인 행위를 중단하고 손톱과 머리를 깎았다. 그러던 어느날, 앞서 말한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있는데 거양성체 때 새하얀 광선같은 것이 위에서 내려옴을 심안으로 보았다. 먼 훗날에 와서도 그는 이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거룩한 그 성사에 어떻게 현존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그는 심안으로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넷째, 그는 기도중에 자주, 그것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인성을 심안으로 뵈었다. 그에게 나타난 형상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흰 몸체인데 지체는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다. 만레사에서 그는 이것을 여러번 보았었다. 스무 번 내지 마흔번을 보았다 해도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이것을 보았고, 다음에 빠두아 근처를 여행하다가도 보았다. 또한 성모님도 비슷한 형상으로 뵈었는데 지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본 것들은 그를 강화시켰고, 그 후에도 언제나 그의 신앙을 굳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 관한 이런 신비들을 가르쳐주는 성경이 없다 하더라도 자기는 자기가 본 사실만으로도 신앙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한번은 그가 신심으로 만레사에서 일 마일쯤 떨어진 성당으로 길을 나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 바울로 성당이라고 했던 것 같다. 길은 까르도넬 강가를 뻗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는 않았으나 영신 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와 보일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그는 예순 두해의 전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티스카가울리_로욜라의성이냐시오와성프란치스코하비에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체험들은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 체험은 이냐시오가 이제껏 받은 모든 영적 인식과 체험들이 한데 엮어져 한 결정체를 이루는 지성적 인식의 통합적인 체험이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바는 이러한 영적 인식이 이냐시오가 로욜라성에서 읽은 책들에 제시되어 있던 영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이냐시오 자신도 언급했지만, 그가 지닌 성삼위께 대한 신심은 그가 만레사 시기에 육안으로 뵌 환시에만 의존되어 있지는 않다. 이 신심은 미리 로욜라에서 읽은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지니게 된 신심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레사에서 그의 지성이 신비적으로 조명된 체험은 성삼위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인 그의 신심을 더 없이 깊게하고 심화시켰고, 성인들의 삶을 본받겠다는 막연하고 순진한 열망을 더욱 세련된 투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물론 그가 [성인들의 꽃]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겠다는 결심은 하였으나, 아무런 실수나 몰이해 없이 이러한 삶을 추구해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실천적으로 경험하는 실패와 좌절의 아픔들을 통해 자신의 결심이 점차로 자리잡혀 가는 체험을 했다.

 

만레사의 체험에서 한 가지 더 언급되어야 하는 점은 지성적 깨달음 내지는 지성적 인식이 강조된다는 특징이다. 즉 신앙의 빛에 의해 조명된 영적 인식이 점차로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영상이나 상상들은 점차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인식은 객관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냐시오의 내면의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속에서는 구원의 기초와 계시의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는다. 이냐시오는 엄위하신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존경심과, 가장 거룩한 성삼위께의 최대의 사랑을 지녔다. 이러한 하느님의 지존하신 현존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인식함으로써, 이냐시오는 마침내 구원의 기초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신의 전 삶을 내어드리는 투신을 했다.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창조된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도록 초대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인식의 체험은 특별히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 속에서 깊이 용해되어 나타났고, 따라서 이 체험은 만레사에서의 체험의 집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영적 인식이 통합되는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계시의 중개자로 체험된다. 계시의 절정은 창조주이신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에 드러났다. 영적 환시들이나 조명들이 개별적으로 이냐시오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깊은 인식은 오히려 이냐시오의 영적 삶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창조된 만물과 그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화해를 이루며, 바로 이를 통해서 온 우주 만물이 성화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러한 신비를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게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바로 이 신비를 중심으로 엮어졌다.

 

만레사의 체험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하느님께서 이냐시오에게 가르쳐 주신 것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객관적인 구원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이 이냐시오의 주관적 체험을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만레사에서 아냐시오는 진정한 영적 가난에 도달해서 자신의 이기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났다. 가장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비로서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지혜를 배웠으며,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항복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배웠다. 이러한 정화의 단계에 뒤이어 따라온 체험은 이냐시오에게 참된 신앙을 지니도록, 해방시키시고 거룩하게 이끄시는 진리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하느님의 신비를 수용하고 받아들임을 통해 그가 이미 로욜라에서 지녔던 순진한 열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면서, 이냐시오의 삶의 방향은 결정되어 나갔다. 복음적 가난과 진정한 마음의 겸손,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신앙이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만레사에서의 체험은 끊임없이 이냐시오를 변화시켜갔으며,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갔다. 물론 자신의 비참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 은총의 힘에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하느님의 은혜로운 현존 앞에서 만이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태도가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바와 같이,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얻어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이러한 시발점을 바탕으로, 이냐시오의 삶의 근본 방향은 은총과 구원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의 역사에서 하시는 역할에로 설정된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 묵상과 <두개의 깃발> 묵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영성적 교육도구로서 표현되었다. 이냐시오는 구원의 역사에 몰입함으로써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 주시는 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냐시오의 마음 깊숙이에서 불타오르는 열망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만레사에서의 이냐시오는 아직 이 열망을 구체화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점차로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신비에 눈을 뜨면서 진정 가난하고 겸손한 영적 마음 속에서 은총의 힘으로 서서히 배워 나갔다. 그는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남을 구하는 일에서 뿐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도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배워 나갔다. 서서히 이루어진 이러한 배움은 <영신수련> 안에 사랑을 그 최고의 원리로 삼는 영신식별에 대한 규칙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의 일년간을 만레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여러 영적인 싸움과 갈등, 수많은 은총을 통해서 이냐시오의 마음 안에는 <영신수련>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곳을 떠날 때 쯤에는 이미 <영신수련>의 기본 사상과 골격이 이냐시오의 영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한 가지 관점

 


성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바로 그분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모든 인간을 한 형제 자매로서 받아들이며, 우주적 구원사업에 동참함으로써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된 소명을 의식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에 이끌려 그분의 계시된 구원계획에 동참함을 통해서 영적으로 자신을 재 점검할 때, 더 진보하고 더 조명된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에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교의와 은총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깊이 인식하고 수용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창조되고 이끌리는 우주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께로 나아간다. 인간은 보잘것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주적 구원의 여정에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동참하도록 초대되었다. <영신수련>의 그리스도의 왕국 묵상에서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이 이 소명을 표현한다:

 

영원한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 사람들을 당신앞에 두시고,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르시면서 ‘나의 소원은 전세계와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고, 내 성부의 영광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나와 같이 수고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다음에 영광 중에 나를 따르기 위하여 어려운 때에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더 생각할 가치가 있는지 묵상해 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냐시오의 내적 체험에 대한 이해는 <영신수련>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로욜라성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꽃]을 읽으면서 이냐시오에게 객관적인 지평으로 제시된 영적 지식들이 어떻게 이냐시오의 내부에서 주관적인 응답으로 표출되었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만레사에서의 체험을 통해 이냐시오는 객관적으로 제시되고 설정된 구원의 진리를 묵상하고 자신의 지난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다 보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점점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갔고, 점차로 얻게된 영적인 새로운 인식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이 구원의 역사에서 주 그리스도께서 펼치시는 구원 사업에 대한 결정적인 투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깊은 영적 체험들이 구체적으로 <영신수련>으로 표현되면서 발전한 것이었다. 즉 <영신수련>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 앞에서 일어나는 철저한 정화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기적 사욕을 극복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자신을 내어 놓도록 영혼을 이끌어 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신수련>의 기원은 만레사에서의 체험에 있다. 하지만 로욜라에서의 체험과 만레사에서의 체험 사이에는 이냐시오가 영적 독서를 통해 얻게된 구원의 객관적 진리라는 연결점이 놓여있다. <영신수련>의 기원은 하느님을 만나면서 얻어지는 영적 생동감, 바로 그것이다. 이 영적 생동감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중심 계시진리를 향해서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개방된 자세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은총과 체험은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과 영적성장을 위해서 <영신수련>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향해 회심하도록 촉구한다면,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일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흠숭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관상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심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이며, 서서히 지금 여기에서 밝혀지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작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러한 것이 <영신수련>이 기대하는 열매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지평에서 <영신수련>에 펼쳐지고 표현된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영신수련>을 올바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신수련>은 우선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과 그의 <영신수련>을 구분해서 다룰 필요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둘은 객관적인 지평과 주관적인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진리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없이 단지 심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영신수련>을 다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형성 그 자체가 이냐시오의 체험안에서 전개된 역동적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영신수련>을 통해 선포되고 전해지는가는 이미 <영신수련>의 기본 구조 안에 담겨져 있다. 즉, <영신수련>은 이것이 불러 일으키는 영적 체험이 <영신수련>을 해석하는 눈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고, 그 자체 안에 해석의 틀이 제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끝)

 

[신학전망 105호(1994년 여름), pp147-168/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 나타난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심종혁(예수회 신부/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I. 들어가는 말

 


<영신수련>의 내적 기원으로서의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을 살펴보면 그의 회심 체험은 그리스도교적 구원 체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음을 보여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체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이냐시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투신으로 발전해갔음을 보여준다. <영신수련>에 관한 연구를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의 체험이 어떻게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헌신하도록 이끄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즉 구원 체험의 원형으로서의 회심 체험이 지니는 역동성을 <영신수련>의 체험적 구조를 통해 밝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신수련> 피정에는 고유한 역동적인 흐름이 있어 한 단계에서 또 다른 단계로 전개되는 영적 체험의 연속성이 고유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연속성이 형성하는 역동적 구조는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동일한 은혜의 역동성이기에, 이 <영신수련> 피정에서 핵심적인 지표는 물론 성서적 구원 체험이다.

 

한편 <영신수련>을 이끄는 지도자는 피정자의 영적 체험을 깊이 이해해서 그가 놓여진 상황에 맞게 필요한 영적 지도를 베풀고 묵상을 이끌어 주어야 하기에, <영신수련>에 담긴 역동적 구조에 대해 이론적으로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그 자신이 영성생활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영적 체험의 다양성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성생활 혹은 영적 체험에 대한 인식은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친밀하고도 민감한 감응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활동하도록 배려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에 담긴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영신수련> 안에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제기되며, 이에 대한 개개인의 답 또한 여러 각도에서 아주 다양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은총의 역동성이 그러한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자아는 결코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의 종 횡적 관계 안에서 동시적으로 발견되는 자아이기에 늘 하느님과 세상을 향해 개방된 자아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영신수련>, 특별히 <원리와 기초>에 담겨진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을 살펴볼 것이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사상은 전체 <영신수련>의 전제 조건이며 그 나아갈 방향적 지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는 <영신수련> 피정을 위해 피정자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요구되며, 이러한 준비를 위해 <원리와 기초>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원리와 기초>의 본문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담긴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이냐시오의 삶이라는 좀더 폭넓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II. <원리와 기초>

 

 
<영신수련>에 관한 초기 연구에 의하면 <원리와 기초>는 이냐시오가 알카라 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레뚜리아(Pedro Leturia)신부와 이파라기르(Ignacio Iparraguirre)신부의 연구에 의하여 이냐시오가 파리에서 체류하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작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거기에 담겨진 내용과 실제적인 문자적 표현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 문자적 표현은 파리 시절에 완성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물론 만레사에서의 체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신학사상을 밝히기 위해 접근할 때 놀라게 되는 사실은 이 본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나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하느님께 대한 공경심, 세상 사물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인간의 궁극 목적에 더 합당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열망해야 한다는 내용 등만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초기 주석들은 <원리와 기초> 본문이 단지 <영신수련>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영신수련>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그리고 <선택 과정>의 전개 과정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영혼의 구원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불편심 등의 <원리와 기초>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생활 신분의 선택에 있어 중요하게 작용하는 원리이며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원리와 기초>에 담긴 내용은 (1) 인간 영혼의 구원, (2) 모든 창조물에 대한 불편심, (3)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창조주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모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열망 등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조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은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그것이 우리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되지 않았으면, 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없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에로 보다 더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 전체 과정의 축소판이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리스도 왕국> 묵상에 엿보이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통해 파악된다. 만일 <원리와 기초>가 하나의 묵상 형태로 사용된다면, 그 전개는 분명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정자는 <영신수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질서에 자신의 삶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수용하게 될 때, 그는 바로 <원리와 기초>로 되돌아와 그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선택을 위한 길잡이>에서 새삼 강조된다: “모든 선택에 있어서 그것을 잘하기 위하여는,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맑고 밝아야 한다. 즉 한결같이 내가 창조된 목적인 우리 주 하느님의 영광과 내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원리와 기초>에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표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찬미하고 공경하고 봉사하는” 그분은 바로 창조주이시며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홀로 원수를 쳐 이기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이행하고 계시며,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하고 계신 분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만레사에서의 하느님 체험에 근원을 둔 이냐시오적 신학의 기본적 골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언제나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영신수련>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러한 점을 명백히 밝혀준다. 원조의 죄를 묵상하는 첫째 묵상에서 엿보이는 이냐시오적 그리스도론의 특징은 창조의 신비에서 구원의 시작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하느님의 창조는 말씀의 육화이기에, 비록 천사나 원조의 등장이 예측되기 이전 일지라도 그안에 성자 그리스도의 현존이 있다.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은 은총안에 있다. 영원하신 성부께 대한 봉사와 흠승이라는 표상안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의 우주적 표상이 담겨있다. 십자가에 못박시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가져온 죄로부터의 해방은 지상의 모든 존재가 그 창조된 본연의 목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원리와 기초>에서 엿보이는 이냐시오 신학에서는 자연과 은총 사이의 금욕적 이원론이 없다. 그의 신학과 신비주의에서는 세상과 천상계, 포기와 포용, 모든 것에 대한 기꺼운 포기와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함 사이의 긴장과 조화가 있다. 하느님이야말로 자연과 은총의 주재자이시며, 영원하신 말씀에 의해 창조된 자연 세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본연의 목적에로 회복되어야 한다. 즉 창조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지닌다.

 

 <원리와 기초>의 세 요점, 즉 구원, 불편심, 더 많이(magis) 등은 <겸손의 세 단계>와 연결된다. <원리와 기초>에 깔린 영감은 피정자가 자신의 삶의 신분을 올바로 선택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 사물에 대한 불편심을 지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지닐 수 있는 태도이다. 동시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는 배경을 통해서만 가능한 ‘더 나은’ 봉사의 선택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원리와 기초>를 구성하는 문장 하나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봉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불편심의 의미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기꺼운 포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십자가의 신비 안에 담긴 위대한 삶의 질서를 통해서 그 참다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원리와 기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서 우리는 첫째 주간의 죄와 지옥의 신비, 그리고 영원의 언어로서의 십자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III. 이냐시오의 영적 세계관

 


우리는 이제 위에서 언급한 <원리와 기초>의 신학적 사상의 기본 골격이 이냐시오의 체험에 세계에서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휴고 라너(H. Rahner)는 이냐시오 영성의 역사적 형성을 다룬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신수련>의 단순한 문체나 [회헌]의 집약된 문장의 저변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담겨있다. 이냐시오의 마음에 담겨진 세계, 찬란하고도 따스한 세계, 만레사에서 하느님과 신비적 만남을 통해 얻게된 신비적 조명으로 부터 형성된 세계가 담겨져 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이 세계를 뚫고 들어가 이냐시오로 하여금 위대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끔한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엿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하는 그의 세계관이란 바로 ‘이냐시오의 마음에 담겨신 세계’를 의미한다. 이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이냐시오의 고유한 인식이 담겨있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인식과 영적 세계관은 로욜라와 만레사의 체험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하고 발전해갔다. 하느님, 창조물, 인간, 그리스도, 인간의 다양한 활동 등 여러 주제에 관한 이냐시오의 사상은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521년 로욜라의 회심에서부터 1555년의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기술한 [자서전], 하느님 체험을 실천적 방법론으로 구성한 <영신수련>, 구체적인 상황들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설명된 이냐시오의 사상을 엿볼수 있는 편지들, 사도적 삶의 제도적 체계를 구성한 [예수회 회헌], 그리고 그의 내면의 삶을 엿보게 해 주는 [영적일기] 등을 폭넓게 연구해야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회 사료집](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Jesu)에 수집되어 있는 다양한 문서들, 특별히 초기 동료들이 전해준 귀중한 증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자료들과 이냐시오의 세계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이에게는 <영신수련> 자체 만으로도 피정자가 피정을 시작하면서 설정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적 목표가 충분히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의 세계관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는 부분은 물론 <원리와 기초>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과 <두개의 깃발> 묵상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러한 축을 중심으로 죄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의 생애가 묵상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 1. 엄위하신 창조주 하느님


이냐시오 영성은 그리스도중심의 삼위일체적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냐시오에게 하느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삼위이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온 우주 만물을 사랑으로 내시고, 사랑을 주시며, 그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끊임없이 모든 창조물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은혜로서 온전한 자기 봉헌으로서 이 사랑에 응답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단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냐시오의 구체적인 삶에서 더 잘 드러나는 영성적 특질을 의미한다. <영신수련>과 [회헌] 혹은 편지 등의 객관성을 드러내는 문헌에서는 비교적 그리스도중심의 영성적 특질이 더 잘 드러나고 있으며, [자서전]이나 [영적일기] 등의 주관적 문헌에서는 그 자신의 내밀한 내적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그의 생애에 계속되는 성삼위의 현존이 뚜렷하게 엿보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냐시오적 신비주의의 특성을 다른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신비주의적 특이성이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봉사를 향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특이성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지니는 의미를 이냐시오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밝히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냐시오의 삶에 있어서 교육을 통해 얻게 된 여러 종교적 이념들보다는 체험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하느님이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자서전]에 담긴 만레사에서의 신비체험이나 라스토르타에서의 체험, 혹은 [영적일기]에 담긴 여러 체험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늘 자신을 엄위하신 하느님(Divine Majesty) 앞에 놓이게 했으며, 이 만남과 현존은 그의 삶을 뒤바꿔 놓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이르는 문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엄위하신 하느님이시며, 자신의 삶 속에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시다. 이분과의 만남은 헛된 명예만을 따랐고 어둠의 세력에 의해 좌절에 빠졌던 지난 날의 삶으로부터 이냐시오 자신을 이끌어 냈다. 우리를 하느님을 향해 이끌어 주시어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베푸시는 그리스도는 단지 교의적 가르침을 명상하는 가운데에 머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적극적인 신앙을 향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하느님이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며, 끊임없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냐시오에게 다가오셨고,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냐시오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분께로부터 고유하고 우주적인 사명을 받고 있음을 깊이 의식하게 되는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 만레사에서의 깊은 하느님 체험은 이냐시오의 마음을 전폭적으로 변화시켜 자신의 야망과 세속적 영광을 추구함으로부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적극적 봉사에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도록 했다. 특별히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 묵상의 원천적 씨앗이 이 만레사의 체험에 담겨있다. 이 묵상은 <영신수련>의 전개 과정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핵심적 기둥이다. “영원한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 사람들을 당신 앞에 두시고, 그들을 한 사람 한사람씩 부르시는” [95] 모습을 관상하면서 이냐시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엄위하신 하느님의 영광에 봉사하고자 하는 사도적 열정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이냐시오의 영적 생애 맨 첫 순간에서부터 그 핵심에 자리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활동적 현존이시기에 이냐시오를 신적 친밀감 속으로 이끌어 주셨다. 즉 하느님의 완전하신 현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배울 수 있기에, 우리는 타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고 도움을 줄 수가 있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 당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실 때에만 이 만남은 가능하다. 이냐시오는 특별히 창조주께서 친히 그 피조물과 관계하시며 일치를 이루시는 만남의 순간을 중시한다.

 

피정 동안에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의미에서, 찾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께 충실한 영혼에게 당신의 뜻을 표시하시고, 그를 당신의 사랑과 찬미에로 이끄셔서 그가 지금부터 더 낫게 당신을 섬길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고 좋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정 지도자는 어느 한편에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말고, 오직 저울처럼 중간에 서서, 창조주가 피조물과 더불어, 또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주와 더불어 직접 행동하도록 맡겨 둘 것이다.

 

이냐시오의 삶은 천주 성삼과의 내밀한 일치를 통해서 얻게되는 영적 확신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과 사도적 활동은 이러한 하느님과의 사랑 깊은 일치가 드러나 표현되는 현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하는 하느님의 이미지, 즉 ‘엄위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늘 성삼위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를 독립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냐시오의 마음 속에서 이 성삼위의 통일성이 깨어진다거나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그리스도와 하느님, 그리스도와 성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지 않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동시에 그는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앞에 놓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그는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의 굴레 속에서 다가오시는 엄위하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이냐시오는 만레사 체류 초기에 사변적 수준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지녔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 극진한 신심을 가졌고, 매일 성삼의 각위께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성삼위께 기도를 드릴 때면 무엇때문에 성삼위께 네 차례의 기도를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이러한 의문은 실천적 체험의 수준에서는 아무런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사변적 수준에서 엿보이는 그리스도와 성삼위의 이질적 긴장은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하느님 신비의 의심할 수 없은 통일성에 대한 깊은 인식 속에서 사라진다. 생활한 체험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신다. 오직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남 녀 가릴 것없이 모든 인류는 신적 신비의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삼위이신 하느님께 이르는 문이시며, 동시에 삼위이신 하느님의 온전한 현현이시다.

 


2.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

 
인간의 마음을 교육시키고 당신의 모상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한 영혼에게 다가오시고,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께 대한 어떤 개념이나 서술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구체적인 인물의 삶과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주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냐시오가 자주 사용하는 ‘창조주 하느님’이란 표현은 그가 지닌 하느님의 통합적 비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냐시오는 또한 세상과 삶의 한복판에서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발견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위해 늘 일하시며 온 우주를 성부의 영광 속으로 이끄신다. 그와 동시에 이냐시오의 가슴은 세상을 향해 열려지면서 이 세상의 장엄함의 근원이신 분을 향한 공경심에 가득차게 된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거기에 담겨있다. 그 목적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모든 인류에게 반영해주고, 인간은 그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럼으로써 참다운 행복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비추어주시는 빛에 따라 위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적 역동성 안에서 창조물을 사랑하게 된다. 바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비추시는 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사용하게 된다.

 

영원한 행복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의해서, 온 우주는 무에서부터 이루어져 영광을 향한 여정속에 놓여졌다. 이 여정은 한편으론 우주의 자연적 존재 목적 뿐 아니라, 영광을 향해 움직여 나가도록 부여된 근본 지향이 성취되는 모습과 이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역할을 드러내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 역할은 인간이 하느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며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되돌아 간다. 하느님에 의해 이끌리는 전체 우주는 자석과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함을 통해 상승하는 운동 속에 놓여진다. <영신수련>의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은 이러한 영적 인식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나의 제한된 능력이 절대자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내려오듯이, 모든 선과 은혜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양을 생각할 것이며, 또 같은 모양으로 의로움과 착함과 인자함과 자비가 마치 태양에서 광신이 내려오고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내려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 말한 대로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끝마친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체험하면서 모든 창조된 존재의 궁극 원리이신 분과 성화를 향한 존재의 궁극적 목적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여 한없이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했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 안에서 그 참다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고유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흘러나온다. 즉 이냐시오의 눈에는 가장 미소한 것 안에서도 엄위하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비추어지게 된 것이다 (Non coerceri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 모든 것에서 주도권을 지니시는 하느님의 우위성이 자리잡으면서,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는 힘과 재능이 형성되었다. 세상의 모든 창주물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언어이며, 계시 사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Finding God in all things) 하는 자질이며, ‘바로 행동 그 자체 안에서 관상적인’(simul contemplativus in actione) 자질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각성의 원천적인 체험은 만레사에 있으며, 특별히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조명 체험 안에 잘 드러나 있다.

 

한번은 그가 신심으로 만레사에서 일 마일쯤 떨어진 성당으로 길을 나섰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 바울로 성당이라고 했던 것 같다. 길은 까르도넬 강가를 뻗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는 않았으나 영신 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와 보일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그는 예순 두해의 전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조물은 하느님 계획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목적, 즉 하느님을 찬미하고 봉사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서 개개의 창조물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 식별할 수 있고, 성스럽고 신적인 창조계의 질서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방법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이냐시오가 받은 이러한 은혜는 그가 창설한 예수회에 전수되는 은혜이며, 모든 예수회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은혜를 향하여 초대되었음은 예수회 [회헌]에 법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상기하면 분명해진다.


이러한 기초 위에 세워졌을 때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주 하느님의 인간적 도구를 갖추는 자연적인 수단은 우리 수도회 전체를 보존시키고 발달시키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봉사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그 수단 자체를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주 하느님의 지고하신 섭리에 따른 은총에 협조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왠가하면 그분은 손수 창조하신 모든 자연적인 수단과, 그리고 은혜로운 조물주로서 주신 초자연적인 수단 모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는 존재인 사람은 건전하고 충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매우 부지런히 힘쓸 것이며, 또한 설교, 강론, 기타 더불어 대화하며 사람들을 다루는 여러 좋은 방법을 통해 이를 사람들에게도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814]

 

이냐시오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는 바로 그가 하느님을 참다웁게 만나는 체험에서 형성된 태도로서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을 공경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태도로 표현된다. 창조된 세상이 하느님 안에서 지니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놓여진 지평이신 하느님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체험한다함은 바로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인지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의 양태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체험으로서, 하느님과의 구체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체험이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이는 충실함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의 방향성이 <원리와 기초>에 담겨져 있는 근본 사상이다.

 

 

3. 인간과 그의 소명

 
이냐시오는 온 우주를 하느님을 향해 움직여가는 실체로서 파악했으며, 바로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세계관은 형성되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으로 충전되어 있고,” 인간은 세상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알며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완성이고 행복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냐시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우주적 여정에 놓여진 자신의 실존을 의식케 했다. 하느님 체험이 그에게 가져온 변화만 보더라도 이러한 점은 명백해진다.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성부를 향한 이 우주의 여정에서 책임을 지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특별한 소명에 의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드러나는 신비스런 구원의 경륜 중심에 놓여져서, 창조와 구원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하느님의 협력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냐시오의 영적 이해를 형성하고 있는 기반이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계획에 대한 자신의 체험임을 상기한다면, 그 모든 것의 궁극적 표준은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봉사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신수련>을 마무리하면서 피정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최종적으로 구하는 은혜는 “만사에 있어서 지존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하고자”하는 것이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하느님께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창조물 안에 규정해 놓으셨다. 창조물은 한편으로 인간의 존재 목적이 성취되는데 도구로 사용되도록 조성되었으며, 또 한편으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성부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모든 창조물이 성부께 이르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일한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을 찬미하는 수단을 제공하셨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인간이 자신이 지니는 책임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향한 이 우주의 여정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것을 통해 성취된다. 즉 모든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자연적 재능 뿐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에 힘입어, 매사에 있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함으로써 우주의 완성에 동참하는 소명인 것이다.

 

이냐시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지니는 소명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소명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서 세상을 향한 소명이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봉사하도록 불리우는 소명인 것이다. 둘째로, 이 소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소명으로서,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섬긴다 함은 바로 신비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로, 참다운 소명과 봉사는 늘 식별된 사랑의 정신을 요구한다.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봉사의 소명: 이냐시오는 창조와 구원의 사업에서 인간이 지니는 역할을 ‘엄위하신 하느님께 대한 봉사’라는 표현으로써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인간 실존의 궁극적 의미와 그가 드러내는 장엄함은 이냐시오에게 ‘봉사함’이라는 표현 속에서 결정화된다. 봉사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 존재 목적으로 부여받은 구원의 여정에서의 책임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분과 협력한다는 의미이다. 창조물의 기본 방향을 존중하고, 구원을 위해 타인을 도우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영원 안에서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신적 영광으로 들어오도록 온 세상을 조성하셨다. 이러한 협동은 겸손한 봉사로서 엄위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끊임없는 공경인 것이다. 이냐시오가 자신의 체험 안에서 이 ‘봉사’ 의미를 발견한 것이 바로 이냐시오적 회심의 특수성이다. 한 마디로, 봉사함이란 인간 완성을 위해 부여된 신적 임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관대하게 협력자로 동참하면서, 구원의 여정의 움직임을 존중함으로써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동료 인간을 위해 애씀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그분께 대한 끊임없은 숭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봉사의 마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냐시오에게 하느님께 대한 봉사는 자신을 내어주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관대한 사랑의 응답으로서의 봉사라는 역동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냐시오의 태도가 그토록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향하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이다. 아무리 미소한 경우에 있어서라도 이 봉사를 거절한다는 것은 구원 사업에서 자신이 지니는 엄청난 책임을 게을리하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제한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며 사랑하시는 분께 대한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 안에 관여되어 있고, 엄위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존재하시며 일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영신수련>의 <그리스도 왕국>묵상에 집약적으로 상징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소명: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파악되는 이냐시오적 세계관의 인간학적 특질은 그 궁극적 목적이 창조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냐시오적 세계관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살펴질 수 있으며, 특히 <영신수련>에는 그리스도중심의 역동적 흐름이 아주 고유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영적 생활에 각성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구원 뿐 아니라 중개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성삼위의 내적 친밀함 속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냐시오가 로욜라와 만레사에서 만난 이는 영원하신 주님으로서 엄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그분을 통해서 이냐시오 자신은 참다우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놓여진 자신을 발견했고, 어떻게 그분께서 모든 이 안에 그리고 창조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지를 깊이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영광, 그리고 그분의 힘을 깊이 인식하면서 어떻게 그분께서 강생의 신비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 영혼의 깊은 심층에서 경외와 감사를 불러 일으키시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즉, 이냐시오에게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절대 군주이시다. 그의 영적 체험의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삼위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함 속으로 이끌렸고, 그분의 현존을 통해서 매사에, 온 우주 만물 속에, 특별히 인간과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견은 더 깊은 내적 발견으로 이끌어 갔다.

 

은총의 구원적 경륜 속에 펼쳐지는 이해와 경배, 그리고 감사로움의 역동적 관계는 영혼 속에 관대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애덕의 정신을 더 깊이 살며 모든 창조물과 더불어 지존하신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열정을 고취시킨다. <영신수련>을 마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극적으로 표현되는 역동성이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에 의해 정화된 관대한 영혼은 마음 깊숙이에서 어떻게 신적 은총이 사랑과 봉사의 열정을 불러내는지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는 하느님께 받은 무수한 은혜를 진심으로 깊이 알기를 구함이니, 그 목적은 그 모든 은혜를 완전히 알아서, 만사에 있어서 지존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되기 위함이다.” 한없이 관대하시고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끝없는 선하심을 통해 인간 영혼의 깊은 심층으로부터 관대한 응답을 이끌어 내신다.

이냐시오가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와 구원의 업적을 관상하면서 지니게 된 열정은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하신 분께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분과 함께 일하고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서 그의 생애를 통해서 결코 시들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은 1637년 11월 라스토르타에서의 내적 환시의 체험과 더불어 공동체적인 특성으로 심화되면서 교회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예수회의 기초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적극성에 있다. 그리스도는 이제 전적으로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지평 위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가 가시적 우두머리를 지닌 교회에의 봉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된다는 점이 이냐시오적 은사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식별된 사랑: 주님께 대한 봉사의 열정이 이냐시오를 사로잡고, 이 열정이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결코 인간적 야심이나 세속적 질서에 따라 흐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의 근원은 하느님이며, 신적 의지와 목적이 그 궁극적인 척도이다. 이냐시오는 완덕이나 그리스도를 모방함을 그 자체 안에서 다루지 않고, 늘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관련해서 다룬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완성은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거나 혹은 수행된 봉사의 사명이 성공된 여부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입장에서 개별적인 특수성에 따라 하느님의 안목으로 보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꺼리낌이나 조건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무엇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알아듣도록 원하고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이냐시오의 궁극적 척도는 ‘위로부터’라는 표현에 아주 잘 드러난다. 즉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봉사의 열망, 그리스도를 본받고 완덕을 향한 열망은 오직 하느님의 관점에 의해서, 그분의 구원적 의지에 따라서 식별되고 다듬어져야 한다.

 

 <원리와 기초>에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은 배척해야 할 것이다” 하는 원리에 따르면 원천적 척도는 창조된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온전히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여기에 바로 하느님과 성령의 활동이 인간의 체험 속에서 어떻게 감지되고 식별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우리를 ‘식별’이란 문제로 이끌어 간다. 자신의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하느님의 의지가 실현되도록 지금 그분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알아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 정화를 요구하며, 자신의 삶을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정돈해야 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4. 악의 문제

 
이냐시오의 영적 체험 속에 엿보이는 하느님, 세상, 인간에 관한 그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지평 속에 놓여진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은 결코 죄의 문제와 별도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역동적 관계가 오히려 죄의 본질과 의미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죄란 인간이 자신의 삶과 우주 속에 끌어들인 무질서로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에 배은망덕하고 불충한 모습이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부여하신 원래적 질서가 파괴된 무질서의 모습인 것이다. 죄란 모든 창조물을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창조물 속에 심어진 궁극 목적을 향하는 자연 본성이 인간에의해 흐트러져 혼란 속으로 몰아 넣는 힘이며, 죄 자체도 인식치 못하게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공포를 체험하게 만든다. 죄란 공포를 불러 일으켜 사랑에 끊임없이 거슬러 행하도록 이끈다.

 

이냐시오의 관점에서는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죄의 기원과 발전을 생각한다면 분명 죄란 인간의 입장에서 창조물의 원래적 목적을 거슬러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행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자체의 성스러운 성격을 오염시켜 죄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세상에 현존하는 죄의 현실을 다루면서 이냐시오는 인간이 그가 "인간 본성의 원수"라 부르는 매우 활동적인 실체를 언급한다. 원수인 사탄은 한 인간이 지닌 약점이 이끌리는 방향으로 몰아넣어 그로 하여금 창조물을 왜곡되게 사용하도록 이끄는 힘이다. 죄의 힘은 인간이 그 자신 안에 갇혀 스스로의 노예가 되도록 이끈다. “기억력을 활용하여 제일 죄악 즉 천사들의 범죄에 대한 역사를 생각해 볼 것이요, 그 다음에는 이해력을 활용하여 그 죄의 원인을 생각해 볼 것이요, 셋째로는 의욕력을 활용하여 그 모두를 잘 기억하고 알아듣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즉, 천사들의 죄 하나와 이렇게도 많은 나의 죄를 비교해 보고, 또 그들은 단 한 가지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도 많은 죄 때문에 얼마나 여러번 갔어야 마땅하였겠는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음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천사들의 죄악을 기억에 되살린다 함은 은총 지위에 창조되었던 그들이 어찌하여 자기 자유를 창조주께 존경과 순종을 드리는 데 선용하기를 싫어하고 오만해져서, 은총 지위에서 죄악의 상태로 변하여 천상에서 지옥에로 떨어졌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냐시오가 지닌 창조물이 지니는 근본적 지향과 방향에 대한 긍정적 통찰에 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죄송스러움과 감사안에 담긴 사랑과 공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III. <영신수련> 체험을 위한 마음가짐의 준비

 


이제 이러한 영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구성된 <영신수련>의 체험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정자의 마음을 준비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1. 피정자의 선택과 준비

 

<영신수련>은 피정자의 선택에 있어서 뿐 아니라, 피정을 시작함에 있어서 피정자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스도교적인 구원 체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냐시오는 단지 <영신수련> 첫째 주간의 내용과 과정들 만은 아니고, 이들을 위해 피정자 자신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제시한다. <영신수련>은 완덕에 대한 열망에 불타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다섯째 일러두기에서 모든 영적 진보와 심화에서 필요한 마음가짐은 관대하게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가짐임이라고 분명히 제시한다: “영신수련을 받는 이가 창조주와 주님께 넓은 마음과 자유를 지니고 임하며 자신의 모든 원의와 자유를 바쳐서 지존하신 하느님께서 자기와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지니지 않고서는 아무도 <영신수련> 피정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관대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지니도록 피정자를 준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30일 피정을 위해서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충분한 지성적 능력을 지녀서 하느님의 빛에 민감하고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해 개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자질들은 한 개인의 인격적 성숙도 혹은 자유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영신수련>은 그 어떠한 이기적 사욕편정에 좌우됨이 없이 자신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들의 전 삶을 내어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피정을 진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상대해야 한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이냐시오는 피정을 시작하면서 즉시 첫째 주간에 인간의 죄스러운 조건에 관해 묵상하도록 이끄는 것 같다. 이 죄에 대한 묵상들은 단지 고백의 성사를 잘 준비시키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체험도 아닌 것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의 가르침과 많은 성인들의 예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이것은 하느님을 참으로 만날 때 얻어지는 영적 열매인 것이다. 하느님의 엄위하신 모습과 한없이 아름다우신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보잘 것없는 죄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은총의 결과이기에 아무런 준비없이 이러한 체험의 세계에 들어가기로 즉석에서 결심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히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체험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물론 첫째 주간의 체험이 진정으로 이루어 지고 열매를 맺기 위해선 여기에서 제시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인간적인 눈으로 고찰하는 것으로서는 불충분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신 빛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첫째 주간의 체험은 원천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며,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전개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이냐시오의 삶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선권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첫째 주간의 체험이 진행되기 위해 우선적으로 준비되어야하는 마음 가짐은 어떤 것일까?

 

 

2. <원리와 기초>의 제시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지도하면서 어떻게 이 <원리와 기초>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매우 단순한 형대로 지도했지만, 시간의 흐르면서 좀더 섬세한 모습으로 이 <원리와 기초>가 제시되었다.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지원자의 마음가짐을 오랜 기간 동안 준비시킨 후에, 이냐시오는 피정자에게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고, 동시에 여러 성찰 방법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죄 묵상에 들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리와 기초>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신수련>을 체험하기를 원하면서 오랜 기간 마음 자세를 준비해 온 피정자로 하여금 이 피정을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한 통괄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을 상기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조와 구원의 역사안에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시작하는 <영신수련>의 여정을 위해 마음을 준비시키고, 동시에 이 여정의 첫 발을 내딛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영신수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영신수련>을 시작했기에 비교적 덜 성공스러운 결과들을 얻게 되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좀더 충분한 준비 묵상들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리와 기초> 본문을 세분하여 몇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냐시오는 인간의 창조 목적, 수단들, 어려움 등의 세개의 요점으로 나누어 이 묵상을 제시했다. 이냐시오의 동지들과 후계자들 역시 때로는 세 가지, 때로는 네 가지의 요점으로 나누어 <원리와 기초>의 내용을 묵상하도록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까니시오(St. Peter Canisius)는 인간의 창조된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을 사용하는 올바른 자세 등의 세 가지 욧점으로 나누었고, 폴랑코(J. Polanco) 신부는 창조와 인간의 목적, 창조물의 목적, 창조물의 사용, 불편심 등의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물론 <원리와 기초>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묵상하도록 하는 것은 <영신수련>의 근본 사상에 어긋난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1599년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지침서]는 <영신수련>이 올바로 진행되기 위해서 충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원리와 기초>의 내용이 몇개의 욧점들로 나누어져 묵상하도록 제시하는 것은 사부 이냐시오의 실천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재 천명했다.

 

그러므로 <원리와 기초>는 <영신수련>을 시작하는 피정자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의 빛에 의해 자신의 삶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를 의식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신앙에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준다. 이러한 열망은 <영신수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피정자가 이미 오랜 준비기간을 통해 이러한 마음과 열망을 지니고 있으면, <원리와 기초>은 이미 형성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과 죄스러움을 의식하게 해주면서 첫째 주간의 묵상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지도자는 피정자가 영적이해력과 성숙에 도움을 주면서, 좋은 피정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시켜야 한다.

 

 

 

IV. 나오는 말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그 신비의 빛 아래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보더 더 포괄적인 것은 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향해 빛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것이 더욱 더 정확하게 진실되게 우주의 움직임에 동화 되도록 이끈다. 우주를 내신 하느님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구체적인 사람을 통해 그 장소, 그 시간에서 구원의 신비에 마음을 열도록 초대하신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시공의 상황은 늘 실존적인 상황이다. 인간 운명의 어두운 측면을 늘 지니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서 엄청난 책임을 지니고, 인간다웁게, 그리스도인다웁게 응답해야 하는 소명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늘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 속에 놓여진다. 인간은 이러한 여려움 속에서 갈등하고 수고하면서 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향해, 그분의 의도하심에 따라 쇄신해야 한다. <영신수련>의 관심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인 무질서한 애착이며, 죄의 원천인 이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개선해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도록 이끌기 위해 <원리와 기초>라는 객관적 지평을 통해 죄의 문제와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바라보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전망, 115호(1995년 가을), pp.114-136/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이냐시오식 공동식별을 위한 실천적 제안
심종혁(예수회 신부/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머리말

 
공동식별이라는 단어에 얽힌 기대가 있다. 한 공동체가 공동식별을 통해 어떤 결론을 얻었다면, 구성원 각자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함께 봉사하는 가운데 일치와 평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공동으로 식별한 결과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을 겪고,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각자가 모두 현명한 판단력을 지니고, 하느님으로부터 같은 특은에 의해 불리움 받은 동료들로서, 그분의 뜻을 찾아 행하기를 원하는 근본 지향들을 지닌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된 의견에 따라 갈라져 분열을 겪어야하는가? 공동식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왜 어떤 때에는 힘들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공동식별의 경험이 많은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식별 과정이 너무 일처리에 관심을 두어,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관계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에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고 한다. 공동 영신식별의 과정은 어떤 단체가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명한 판단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아 결정을 내리는 과정, 혹은 단체의 이익과 관계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수결의 표결에 의해 보다 더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동 영신식별의 방법은 예수회의 설립의 배경이 된 [첫 사부들의 식별]이라 불리는 문헌에서 전개된 방법에 그 원형이 담겨있기에, 이 문헌을 세세히 다루면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과 관련해서 공동식별의 방법을 해설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단지 공동 영신식별의 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하면서, 실천적인 요소만을 다루어 보겠다. 
 

 

공동 영신식별의 의미

 

 
혼동을 없애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공동 영신식별’의 의미를 밝혀두어야겠다. 공동식별이란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서 실행에 옮기는 작업과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관계적인 공동체일 수 있고, 기능적인 공동체일 수도 있다. 영속적인 공동체일 수 있으며, 임시적인(ad hoc) 공동체, 즉 일시적으로 어떤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일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아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은 공동의 목적을 향한 순수한 공동체적 행위로서 상호적이며 동시적이다. 물론 공동체에 관계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공동으로 식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장상이 개별적으로 식별했다고 해서 공동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가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적 행위가 없이도 하느님의 뜻은 다른 방법에 의하여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상이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거나, 결정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 주면서 기도 중에 얻게되는 결론을 서면으로 제출해 달라고 부탁해서 후에 그 제출된 보고들을 바탕으로 장상이 결정을 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공동체 전체가 식별을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고, 때로는 이것이 최상의 방법일 수도 있다.

 


공동식별을 위해 미리 준비할 사항

 


공동식별을 올바로 진행하기 위해서 미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올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불편심’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내적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기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 자유를 의미한다. 공동식별에 임하는 각 구성원은 이 ‘불편심’을 얻도록 충분히 기도해야 한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이성적 판단이 지배하는 토론을 통해 힘겹게 합의점에 다다르면, 선택된 결정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생긴다.

 

내적 자유: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가장 중요한 준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힘입어 자유로운 마음을 얻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설정하기에 앞서 이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내적 자유가 형성되지 못하면 이기적인 사욕에 의해 영적 눈이 가려지기 때문에 설정되는 가능성들이 편견에 의해 중립적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로써는 진정한 대화에 임할 수 없다.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선 늘 자유로운 마음의 태도를 유지하도록 각별히 애써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선 그것이 드러나면 기꺼이 실행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요구한다. 식별에 의해 결정된 바를 실행할 준비가 안됐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하고 주저한다면, 이 식별은 잘못된 것이다.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거나, 혹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서 인정하시길 원하면서 식별을 진행한 경우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는 열망은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신뢰와 이에 따르는 신실한 기도를 통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식별에 참가하는 구성원 각자는 서로 개방된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신뢰심이 없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다다르시지 않고, 오히려 공동식별 과정이 처음부터 좌절의 현장으로 변해버린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서로 개방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식별은 구성원 각자가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바로서가 아니고, 또 마땅히 따라야하는 의무감에서도 아니라,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대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공동체의 결정에 승복하게 해준다. 이러한 마음 자세와 실천 의지가 없이 공동식별을 진행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신뢰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빠르고 쉽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획하시는 시기와 장소에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관해 식별할 경우에 충분한 시간과 준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시간적으로 긴급한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종류의 식별을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고, 혹시 이러한 경우에 공동식별이 진행된다면, 주위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그 결정은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성령께서는 어떤 결정은 쉽고 빠르게 이끌어 주시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이끌어 주시기도 한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우선 순위를 지닌다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것 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불편심을 지니게 한다. 자신의 이익, 열망, 두려움 등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결정에 다다르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려면 우선 대화를 시작하고 토론을 진행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태도를 살피며 마음이 자유롭고 개방되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실천적으로 성 이냐시오는 주님께 도우심의 빛을 구하면서 기도 중에 여러 가능성들을 고려해 보면서 가장 마음에 안들고 어렵다고 여겨지는 가능성을 오히려 원하도록 애써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려질 결정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제시된 여러 가능성들과 그 이유들을 고려해 보라고 제안한다. 물론 이것은 감성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의 무관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냐시오식 불편심은 감정이 없는 기계와 같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욕심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취향이나 숨겨진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을 원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단순하고 견고한 자유의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해 이러한 감성적인 자유로움의 상태에 이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기된 주제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기된 과제를 숙고할 때에도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가능성에 대해 별로 탐탁하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하고,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 대단히 긍정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 가능성이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면서 문제를 숙고해 볼 줄 알아야 한다.

 

공동식별을 위한 원칙: 공동식별의 과정을 지배할 몇 가지 원리들은 여기에 참가하는 이들이 모두 합의하고 동의한 것들이어야 한다. 식별 과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선 서로 합의한 어떤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공동식별은 진행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평가 기준을 공동체의 평화와 순조로움에 두고, 어떤 이는 삶을 경쾌하게 해주는 건설적 긴장에 기준을 둔다면, 이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지만, 공동으로 무엇을 결정하는 기준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이 평가 기준들은 각 공동체가 지닌 목적과 소명의 관점에 따라 도출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함께 내릴 결정은 그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에 부합하고, 그 본연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식별의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공동체의 목적과 본질을 기억시키고 환기시켜야 한다. 식별을 위한 평가 기준들이 공동체의 목적과 소명의 시각에 따라 합의될 때, 공동식별은 가장 현실감있게 진행될 수 있다.

 

주제의 설정: 영적인 자유로움이 형성되면 이제 식별하려는 주제를 정확히 설정하고, 이에 따른 선택 가능성들을 간단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된 문장에 불확실한 점이 있으면, 식별 과정이 그만큼 애매모호하게 되어 쉽게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식별 과정에서 대화와 평가가 진전됨에 따라 표현된 명제가 적합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매하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숨겨진 혼란이 드러나고 가려졌던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정보가 과제를 전폭적으로 재 조정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화를 계속 진행하기에 앞서 명제를 합당하게 수정해야 한다. 또 표현된 선택 가능성들은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이상적으로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은 미리 식별이 시작되기 전에 제외되어야 한다. 또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 무엇을 요구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결정에 따라 다른 사도직에서 인원을 끌어내야 하는 인사 문제에 관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므로, 이 가능성들을 설정할 때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상황과 관계되는 사람에게 민감해야 하고, 선택 가능성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기 전에 포괄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이 목록을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표현하고, 때로는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가능성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게 되고, 시작부터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정보교환의 노력: 표현된 선택 가능성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별을 진행하기 위해, 관련된 정보가 충분히 나누어지도록 애써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끌어 주시는 움직임에 민감한 것이 결코 식별 주제에 대한 수집된 정보를 함께 나누고, 그것들을 기도 중에 고려해 보는 것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다 더 성실하게 정보가 서로에게 나누어지고, 그 정보들이 올바르게 이해되도록 촉구한다. 처해진 구체적 현실 상황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밝히시는 섭리의 움직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움직이심에 민감하게 응답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과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제시된 가능성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식별을 진행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식별의 첫 단계에서 모든 구성원이 주제의 내용과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수집된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엇을 마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참고 자료들을 나누거나, 관련된 내용들의 정보를 담은 유인물을 나누어 본다거나, 관계된 문제에 관한 전문가의 조언을 함께 들어보면서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물론 이러한 단계는 주어진 주제와 정보를 기도하면서 숙고하고 식별하는 구체적 단계에 선행되어야 한다. 새롭게 얻어진 정보나 이유들은 이미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들이나 정보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중요성을 감소시키거나 또는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단계 역시 단순한 과정은 아니다. 때로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식별을 진행하는 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도 하면서 식별이 오히려 복잡하게 꼬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가 가능한 충분히 나누어지고 이해될 수 있다면, 식별과 결정 과정은 그만큼 순조롭고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본다.

 

 

 

공동식별을 위한 구체적 준비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시된 가능성들을 살펴봄: 이제 구성원 각자는 제시된 가능성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각하게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 속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당신께서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어떤 것을 발견하도록 마련해 주시길 기대한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움직임에 대한 예민함과 열망이 없이 주제를 숙고한다면 단지 자신이 믿고 있는 바 혹은 자신의 능력에 합당한 범위에서의 현명한 판단력에 따라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와 같은 현명한 판단력은 공동식별에서 기대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아니며, 또 공동으로 식별하는 과정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는 주어진 정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면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정보를 통해 공동체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형성하는 판단이 공동체에 나누어지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확인을 구해야한다. 이렇게 얻어지는 확인은 본인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똑똑하게 생각했다는 만족감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 과정에서 함께 하시고 활동하신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일종의 신앙 체험이다.

 

 

전체 모임에서 나눌 자신의 의견을 기도 중에 형성함: 이 점은 아마 공동식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공동식별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적 역동성에 기초를 둔 공동 결정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역동적 진행 과정은 단지 어떤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거나 거부되는 인간적 심리에 근거하는 결정 과정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이 전부 고려되면서, 그 각자의 입장과 의견이 함께 참다운 것을 찾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중요한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 대화를 위해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미리 준비해야 하고, 이 의견의 형성은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성령께서는 한 공동체가 참다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덜 도전적인 성격, 덜 지성적인 능력, 덜 적극적인 설득력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노력에는 지성적 능력이 우수하다거나, 배움이 깊다거나 혹은 적중력이 큰 사람이 더 잘 식별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이 공동식별에도 적용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적 능력이 필요하고, 주어지는 정보와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자질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움직이심과 타인에게 개방된 마음을 지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재능은 떨어지지만, 더 개방적인 사람이 공동식별에서는 더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둘째 이유는 공동체에는 성격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며, 경험이 다른,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진리의 서로 다른 양상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전체에 기여하도록 하시었다. 몇몇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시기도 하고, 어떤 강한 의견에 대해 상대적 의견을 불러 일으키시면서 공동체가 균형을 이루도록 이끌기도 하시며, 새로운 반응을 불러 일으키시면서 당신께서 이끌어 가시는 방향으로 이 공동체가 나아가도록 하신다. 식별에 참여하는 각자가 공동식별의 전체 모임에 임하기 전에 미리 기도 중에 성령께서 각자를 올바른 이유와 사유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것을 기대한다면, 공동으로 이야기를 나눌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성령께서는 각자가,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상반되는 이유와 사유를 허락하시면서, 이것을 이용하셔서 공동체로 하여금 그 나아갈 바를 보다 분명히 발견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구성원 각자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기도 중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함께 모이기 전에 서로 만나서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거나 개별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은 공동식별의 과정에 결정적으로 방해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성령께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것을 방해하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쳐 결정을 조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정보를 나누거나 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보가 나누어질 때 함께 제시되는 찬성의 이유들과 반대의 이유들은 자신이 형성하는 입장에는 가능한 한 반영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한다. 공동체의 모임 후에는 각자가 타인이 나눈 의견과 입장들을 기도 중에 숙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준비 사항들이 올바르게 형성된 후에 각자는 공동식별에 임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준비가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식별이 진행되면, 계속해서 이 진행은 장애를 만날 때마다 좌절되고, 성령의 움직임과 활동이 방해를 받게 되어 모든 과정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식별을 위한 대화의 구체적 단계들

 

 
공동식별을 위한 대화의 현장에서는 아무도 미리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 고정시키지 않는다. 어느 입장도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고, 누가 누구를 비판하거나 꺾어 누르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각 구성원은 제시된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찬성의 이유들과 반대의 이유들을 모두 고려해 본다. 개방된 마음으로 주어진 가능성들을 살피면서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진실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에서는 아무도 누구에 대해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상으로 뿐만 아니라, 참으로 자신의 주장을 버릴 수 있는 자세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의 과정에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어떤 경우에는 대화의 방법이 적합하지 못한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규정되지 않은 대화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 혹은 입담이 좋은 사람들이 분위기를 주도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올바른 대화의 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상적으로는 참석자 모두가 다 말해야 한다. 공동체가 큰 경우에는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진행하고, 전체 모임에서 요약을 발표하도록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제시된 공동식별의 구체적 단계들은 준비 단계에서 형성된 자유롭고 개방된 마음가짐을 유지시켜 주고, 대화를 순조롭게 진행시키면서 기도와 성찰 중에 얻은 열매들을 잘 나누도록 기획된 것이다. 이 단계들을 보다 더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임이 논쟁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또 모든 이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도록 통괄하는 사회자를 선정해야 할 것이다. 이 사회자는 진행되는 상황을 잘 관찰하면서 식별하는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항에서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하려는 사람을 견제하면서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각별히 애를 써야할 것이다.

 


제 1 단계. 가능성에 대한 이유들을 나눔: 첫 한․두 번의 전체 모임에서 각자는 기도 중에 얻은 이유들을 발표하도록 초대된다. 모임이 논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각자는 반대의 이유들에 대해 개방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하며, 한 번에 한 가지 가능성에 관해서 다루면서, 각자는 이것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물론 간단한 식별의 경우에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형식으로 진행의 묘를 살릴 수도 있다. 만일 표현된 가능성이 “갑인 경우”라면 우선 첫째 모임에서 <갑에 반대하는 이유>를 돌아가면서 나누고, 둘째 모임에서 <갑에 찬성하는 이유>를 나눌 수 있다. 만일 표현된 가능성이 “갑인 경우”와 “을인 경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을에 대해 갑을 선호하는 이유>를 첫째 모임에서 나누고, 다음 모임에서는 <갑에 대해 을을 선호하는 이유>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모든 모임에서 나누어지는 내용들을 서기가 기록해서 발표하는 여러 이유들이 후에 새롭게 평가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다. 서기는 모든 이가 다 발표한 후에 기록한 내용을 요약해서 전체 앞에서 낭독하고, 사회자는 혹시 수정할 내용이나 덧붙일 내용이 있는지를 전체에게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발표된 이유들이 낭독되면 사회자는 불명확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들을 허락해야 한다. 표현된 문장이나 어휘의 의미를 확인하는 질문일 수도 있고, 이유들 밑에 깔린 어떤 원리나 가정들에 관한 질문들일 수도 있다. 혹은 제기된 어떤 이유가 하느님께 대한 더 큰 봉사에 어떻게 상관되는지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고, 제기된 어떤 이유가 공동체 전체에 무슨 의미를 제공하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인지 등의 질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이유들이 정확하게 규명되면서 그 정당성이 객관적으로 이해될수 있도록 하는 단계이다. 때로는 어떤 대립이 생기겠지만 논쟁은 아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제시한 이유가 이해되도록 애쓰고 힘들여 이야기 하겠지만, 아무도 그를 공격하거나 반론을 제기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제시된 이유들을 평가하려 들거나, 반대의 이유들을 내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제 2 단계. 앞 단계에서 제시된 이유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봄: 여러 이유들이 명확하게 이해된 다음에 각자는 정보를 교환한다는 차원 이외에는 누구와도 의견 교환이 없이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이유들을 평가해 보아야 한다. 주어진 가능성에 대해 제시된 이유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는 어떤 이유를 좀더 깊이 숙고해야 하는지를 평가하고, 더 중요한 어떤 이유들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사라지는 이유들은 어떤 것들인지 등을 평가해야 한다. 이 작업은 문제의 중요성에 따라 두 번에 걸쳐 진행될 수도 있고, 혹은 한 번에 마무리 될 수도 있다. 구성원 각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별하면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아직까지 공동체가 결정을 내린 단계가 아니므로 개방성과 불편심을 유지하면서 첫째 단계의 작업에서 영적인 자유와 관대한 마음을 유지했는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제 3 단계. 평가를 나눔: 각자는 전체 모임에서 둘째 단계에서 진행한 기도 중의 평가 결과를 보고한다. 첫째 단계에서 진행된 것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마지막에 사회자는 서기로 하여금 모임에서 나누어진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들과 이에 상응하는 이유들을 낭독하게 한 다음 수정이나 보충 사항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질문할 시간을 준다.


제 4 단계. 나누어진 평가를 기도 중에 새롭게 평가해봄: 만일 아직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여주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으면, 나누어진 평가를 새롭게 기도 중에 평가해 보는 시간을 마련하면서, 역시 이 모든 과정에서 마음의 순수성과 영적 자유를 유지했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모두가 더 이상 이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계속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염원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형성되면 이제 투표로 결론을 내릴 준비가 된 것이다.


제 5 단계. 표결: 혹자는 마지막에 표결에 의해 결정을 선택해야 한다면 공동식별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 작업은 실패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표결이 변경할 여지가 전혀없는 닫혀진 표결이라면 구성원 각자가 불편함을 느끼게 되므로 시간이 허락하고 가능한 한 대화를 계속 진행하기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는 상황이고, 이 표결이 열려진 표결이라면 식별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성령께서 이 문제에 관해서 만장일치로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신앙에 더욱 성숙하도록 좀더 겸손하고 성실하게 소수의 의견을 숙고하도록 초대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체의 몇몇 사람은 성실하게 기도하면서 문제를 숙고해 왔다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성실하게 기도하는 마음이 없이 문제를 식별하고 영적 자유로움을 유지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내려지는 결정이 만장일치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가 식별을 통해 결정한 내용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신뢰심이다.

 

 
공동결정에 대한 확인

 


만장일치로 이루어졌건 혹은 다수결에 의해 선택되었건, 잠정적으로 얻어진 결론이 올바른 것인지를 시험해 보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마음의 움직임들을 살펴 보고, 교회의 합법적 권위와 그 잠정적 결정이 수행되는 과정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올바른 결론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확인의 표시는 공동체가 누리는 일치와 평화, 신․망․애 삼덕의 증가, 그리고 어떠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용기의 증가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에 반대되는 것들은 결정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증거들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구하는 확인의 표시들은 신앙체험이지 결코 심리적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 동안 힘겹게 이 진행을 겪어 왔으면,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이 마치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평화인 양 오인될 수 있다. 함께 일하면서 어려운 일을 상대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일치와 낙관주의는 심리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체험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확인의 표시로 읽혀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확인체험은 신앙체험이면서 하느님 중심의 체험이다.

 

신앙체험으로부터 얻는 영적 위안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확인해 주지만, 확신을 지니고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우에는 교회와 장상의 정당한 권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교회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영적 위안 등의 정서적 차원의 확인들보다는 정당한 교회의 권한이 훨씬 더 안전하고 분명한 확인임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결론은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로 하여금 공동으로 결정한 사항에 관해 비록 투표에서는 반대했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모두 한 마음으로 이 결정이 지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이 결정이 새로운 정보와 경험에 의해 재고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계속되는 식별의 가능성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표시들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다. 혹시 이러한 표시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 새로이 식별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방법상의 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갖 될 것이다. 물론 중대한 문제는 그만큼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고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의 시간을 온통 성령께 내어드리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 공동식별의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과정은 사실 그리 복잡한 과정은 아니다. 수사학적 언변을 피하고, 토론을 억제하면서, 중복되는 내용의 언급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는 운영의 묘를 살려 서두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별하는 주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경우에 당일 혹은 며칠 전 평상의 기도 시간을 활용해서 준비하고, 공동모임에서 15분 간격으로 한 단계씩 진행한다면, 대개 한 시간 반 안에 모두 마무리 질 수 있는 단계들이다.

 

[사목, 175호(1993년 8월), pp.84-96/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이해
심종혁(예수회 신부/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머리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현대가 겪는 분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실 현대 세계가 고민하는 불균형은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보다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 내부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을 행치 않는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겪는 분열감이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 속에서 인간은 점차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선택하려는 의지를 잃어간다. 사랑하겠다는 결심은 점차 식어가고, 사랑하기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실존적인 위기를 자아낸다. 이와같은 정체성의 위기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일어난 여러 쇄신운동을 통해 많은 이들은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를 돈독히 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를 원하면서 ‘영신식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수도회들은 현대 세계가 당면하는 여러 도전들에 대응해서 창립자의 본래의 정신을 되돌아 보면서, 어떻게 수도생활을 쇄신할 수 있을까하며 ‘공동식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가지 도움되는 요소를 다루어 보겠다.

 

 

 

영신식별의 배경

 
사도적 영성의 원천이며 그 대명사인 이냐시오 영성(혹은 예수회 영성)의 핵심 주제는 영신식별이다. 과거 사백여년 동안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온 [영신수련]에 실려있는 두 묶음의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313-327, 328-336]은 영신식별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어왔다. 그래서 영신식별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 규범들을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 그 주된 과제였다. 특별히 [영신수련]에 담긴 ‘선택과정’[169-189]과 더불어 연구되고 적용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당면하는 여러가지 도전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각 수도회의 총회나 관구회의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식별하고 결정하는 방법으로 이 규범들이 응용되어 왔다. 이렇게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모든 이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영신식별의 실천적 지혜와 기술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어왔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서 많은 이들은 영신식별에 관한 이해를 성 이냐시오의 영신식별의 범주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영신식별의 전통과 의미는 훨씬 깊고 폭넓은 배경을 가진다. 간단히 말해서 영신식별은 악의 영향을 떨쳐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올바른 생활양식을 찾아내고,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찾아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다. 희랍어로 ‘영신식별’(diacrisis pneumaton)이라는 말은 마음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의 원천을 밝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움직임을 따라가도록 결정하는 과정을 뜻한다. 희랍어 diacrisis 와 라틴어 discernere 혹은 discretio는 원래 ‘구분하다’, ‘가르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영신식별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르침에 합당한 어떤 구체적인 행동양식을 찾고 선택하는 결정과정을 의미한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도 ‘식별’이라는 단어는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에서 사용되고, ‘선택’은 이 식별규범들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냐시오가 작성한 예수회의 [회헌]에서 영신식별의 의미와 방법은 더 폭넓게 적용되고 응용된다.

 

영신식별의 의미, 과정, 실천적인 적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개별적인 차원이거나 공동체의 차원이거나 영신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기에 그 근본 배경이 기도임에는 틀림없고, 기도와 더불어 진행되는 식별이야말로 참다운 영신식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기도와 삶을 구분해서 이해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 특별히 기도하고 식별해보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에 옮길 때는 식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린다.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영혼에게 밝혀 주시는 길이 인간 이성의 현명한 판단과는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영신식별이란 결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신식별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숙고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찾아서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찾으려는 근본적 열망이 없이, 그분의 현존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구현하려는 의지가 없이, 영신식별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기도가 일상 중에 익숙해진 신앙행위라면, 영신식별 역시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신앙행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신식별은 매우 단순한 작업일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일치를 기도로써 더욱 심화시키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 일치를 구현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일 수도 있다. 영신식별은 인내심, 꾸준함, 그리고 기꺼이 시간과 힘을 바치겠다는 관대한 마음을 요구한다. 필요할 때 수도꼭지를 열거나 혹은 필요 없을 때 잠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현존을 찾으려는 참을성있는 신앙심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뜻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의도, 혹은 어떤 뜻을 지니고 계실까? 물론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도 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고, 제자들에게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하고 기도하라고 일러 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두 가지 범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해해 왔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고, 개별적인 하느님의 뜻은 물론 한 개인에게나 한 공동체에 국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어떠한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모두가 그 본연의 모습에 맞갖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 인간 본연의 모습에 합당한가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 이성을 잘 활용해야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교 안․밖의 여러 합법적 권위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도록 원하신다. 요약하면 하느님의 보편적인 뜻은 인간 이성, 신적 계시, 그리고 정당하게 구성된 합법적 권위을 통해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을 다루면서 관심을 두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보편적인 뜻을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개개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개별적인 뜻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부르심’ 혹은 ‘성소’라는 단어가 개별적인 하느님의 뜻과 연관되어 사용되어 왔다. 왜 하느님께서는 누구는 사제로, 누구는 수도자로, 누구는 결혼생활로, 또 누구는 독신생활로 부르시는가?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신 이야기, 부자 청년을 부르시는 이야기, 등 다양한 복음서의 증언들을 토대로 전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즉, 하느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과는 달리 특수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몇몇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관점에서 ‘성소’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소’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한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48) 하시었다. 사실 주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지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마르 12,30 참조),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였음같이 서로 사랑하도록(요한 13,34; 15,12 참조) 내적으로 움직여 주실 성신을 그들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  라서 신분과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 여러 생활 양식과 여러 직책의 모든 사람들이 닦고 있는 성덕은 동일한 것이니, 그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성부의 음성을 따르며 성신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흠숭하고,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수도생활이나 사제직, 결혼생활이나 독신생활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부르심이기에 그 자체로서 거룩하다. 인간 모두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각 개인이 받은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개개인이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도록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부르심을 거부했다고해서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았다고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나라에서 추방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제시하신 소명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각 사람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기에, 바로 그 길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가장 커다란 유익이 되는 길이며, 개인적인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거나 불행해지거나 좌절된 삶을 살아간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하느님의 뜻은 단지 개개인의 일반적인 부르심 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삶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아주 구체적인 그 무엇이 있는가? 이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필자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가 구체적인 선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어떤 중요한 기여를 하도록 이끄신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고,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애써 일하는 것을 통해서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한다. 성령께서는 각자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해주고 이끌어 주도록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셨다. 식별하고 선택해야하는 범주가 때로는 사도직 자체를 바꾸는 것과 같은 중대한 결정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미 주어진 사도직에서 세세한 몇 가지를 바꾸는 작은 결정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사도직이나 전문 분야를 바꾸는 중요한 경우에서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가? 아니면 기존의 사도직과 전문 분야에서 몇 가지를 바꾸는 작은 결정들에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그 경우가 어떠한 경우이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에 의미를 지니는 그만큼 사도직과 전문 분야에서 직접적으로 하느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영신식별과 회심의 내적 체험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의미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보다 더 밀접히 활동하실 수 있도록 어떤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어떤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 방해 요소들이 등장한다. 이 방해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향한 개방성이 부족하거나, 이 뜻을 향해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가는 내적 체험에 대한 인식 능력이 부족할 때 생긴다. 우리는 선택된 결정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썼음을 상기한다면 위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는 개개인이 자신의 내적 체험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성찰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실천적인 지혜로서 영신식별의 기술은 회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즉 각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들을 이해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의도를 알게 된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내면의 체험들)을 관찰하면서 영혼의 내부 현상을 배웠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 세계에 관심하도록 자극시킨 주 요인은 그 모든 움직임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이었다. 현실적인 적응력과 박동감이 넘치는 이냐시오 영성의 한 가지 특징은 지성적으로 이해된 내부세계에 대한 확신이 모든 영적 성숙의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이 지성적 확신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표현되는데, 첫째는 지적 호기심이고, 둘째는 이 지적 호기심이 충족될 때 형성되는 진리를 향한 단호한 투신이다. 즉 영혼의 내부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영혼의 여러 현상에 대해 이해하도록 촉구하고, 지성적으로 이해할 때 얻는 확신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영신수련]은 엄밀한 의미에서 회심을 위한 체계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방법’이란 단지 어떤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넓은 의미에서 “영신수련”의 체험은 피정자를 하느님을 향해 회심하도록 유도하고, 더 나아가서 이 회심의 체험이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의 통합된 과정으로 형성되도록 이끈다. 회심이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꾸는 결단을 의미하지만, 요즘의 심리학과 종교 교육학의 도움으로 이 회심의 내적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회심의 과정을 한 개인의 신앙 생활의 성숙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좀더 세세한 반응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학과 회심의 관계를 심도있게 밝힌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의 분석에 의하면 회심의 과정은 네 차원으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있다. 지성적 차원의 회심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하느님과 연관해서 이해하게 되는 지성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윤리적 차원의 회심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행동하게 되는 윤리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감성적 차원의 회심은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여서 이에 응답하면서 이웃을 위해 삶을 영위하려는 행동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회심은 하느님의 빛에 따라 자신과 이웃들, 그리고 하느님을 진정 존경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는 신앙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회심은 어느 한 차원, 혹은 두 가지 차원, 혹은 네 차원 모두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이 회심이 단번에 급작스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회심의 본질과 과정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최근들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심의 공동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회심의 사회적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뮐러(J.J. Mueller)는 전․후․내․외의 네 방향으로 회심의 사회적 차원을 묘사한다. 회심의 사회적 차원은 과거의 전통을 의식하면서(후), 이에 담긴 가치들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다시 적용해 볼 때(전), 우리 자신에게 요구되는 변화(내부) 뿐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요구되는 변화(외부)도 의식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회심이란 삶의 여정에서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도전하시면서, 우리가 진정 마음을 바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점차로 더 깊어지고, 높아지거나, 더 풍부해지는 과정이다. [영신수련]이 이끌어 가는 회심의 과정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존재와 삶의 다양한 차원들 사이에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원추꼴의 나선 운동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움직임이란 마음 속에 일어나는 내적 충동들이 갖는 방향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영신식별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에 관심한다. 기도와 마음의 정화, 그리고 영적지도의 도움으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움직임인가를 따져보면서 이 움직임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지적인 호기심은 내부의 느낌에 관심을 두고 관찰하게 한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성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부의 느낌과 떠오르는 생각들이 단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즉, 내부의 움직임들에 대한 현실감이 없다. 둘째, 자신에게 불안을 일으키는 느낌들과 생각들을 관찰하며,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응해보면서 내적 행동 양식을 배운다. 셋째, 이렇게 내부의 느낌과 생각들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내부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남을 발견한다. 넷째, 이 때 자신의 내부 세계의 움직임들(위안과 불안의 변화)을 현실로써 인식하게 된다. 다섯째, 이러한 내부 세계의 여러 움직임들에 대한 현실감은 그 움직임들의 내용 그 너머에서 이러한 움직임들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원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한다. 여섯째, 이 다양한 원천들 사이의 대립된 양상을 파악한다. 일곱째, 인간이 지닌 다양한 열망들과 생각들의 역할을 파악한다. 즉 우리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미치는 영향들을 파악한다. 예를 들어, 서로 상반된 두 가지의 열망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구체적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여덟째, 이러한 파악과 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경험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역으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올바른 열망을 지녀야하는가를 알게된다. 아홉째, 모든 실천적 결심과 현실감의 핵심적 경험은 바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안, 혹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적 깨달음의 경험이다. 마지막으로 열째, 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안’이야말로 실천적 결정에 대해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확인이다.

 

 

식별의 세 가지 단계

 

 
이제 마지막으로, 위의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기본 구조를 세 단계로 나누어 제시해 보겠다. 하느님으로 부터 빛을 구하는 첫째 단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부로부터 파견되셔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빛에 비추어 식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방향을 감지하는 단계이다. 영신식별이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 안에서 진행되기 위해서 기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개개인의 사리사욕, 편견, 내적 불안에 의해 형성되는 고정 관념 등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감겨져 있던 영적 눈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뜨이기 위해서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개방되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반자로서 사도직에 헌신하기 위한 관대하고 아낌없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도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강조하는 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써 이제 식별하고 결정하려는 문제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신적 계시로써 당신께서 원하시는 뜻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하느님 말씀의 빛에 비추어 수집한 여러 정보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고 살펴볼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올바른 식별을 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체험하는 신앙 체험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비추시는 생명의 말씀이심을 인식하게 한다. 즉,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이 새롭게 조명되도록 성령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이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고 행하신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뜻을 찾고 있는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통해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는 빛은 자신의 깊숙한 내부에 비치는 빛으로서 내면 속에 숨겨진 여러 동기들을 환히 비추셔서 여러 다양한 생각들과 느낌들의 움직이는 방향을 들추어 주시도록 구하는 빛이다.


둘째 단계는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는 단계로서, 수집된 정보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눈으로 주의깊게 고려해 보며, 동시에 관계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중에 성찰하면서 필요한 정보들과 지식, 그리고 상황의 징표들을 올바로 읽어야 한다. 특별히 공동식별인 경우에는 이 정보들이 합당한 경로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어야 한다. 즉 당면한 문제에 개입된 상황과 인물 모두에 대한 정보들이 충분히 나누어져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과 관대함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성실하고 솔직한 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셋째는 결정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도록 구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여러 확인들을 찾아보는 것은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 뿐아니라 전체 과정이 진행되는 각 단계에서도 필요하다. 각 개인이 영적위안을 체험하거나, 공동체 전체에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내적 평화 등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확인들이다. 식별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정과 함께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해도 다시 식별해야할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결정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목, 172호(1993년 5월), pp.97-106/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신부)

 

 

예수회의 창설자요 초대 총장인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 성에서 영주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의 꿈인, 용감한 기사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전쟁에 자주 참가하였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싸우던 때 30세의 몸으로 출전한 그는 다리에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자 가까이 한 것이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꽃”이란 책이었다. 처음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읽으면서 점점 그 책에 매혹되어 성인들의 단식, 밤샘, 희생과 극기 생활에 감동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와 성 도미니꼬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1522년 그는 완쾌하자 몬세라뜨의 성모 성지를 순례하고 철야 기도를 한 다음 애지중지하던 칼과 갑옷을 성모상 앞에 봉헌하고 기사복을 걸인에게 주고는 일생을 가난하고 정결하게 살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만레사의 꼬르도네 강변 동굴에서 10개월간 기도와 고신극기의 생활을 통해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그의 걸작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읽히는 “영신수련”의 골자를 완성하였다. 그가 이 만레사에서 깨닫게 된 소명은 국가를 위한 군인보다 교회를 지키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순례를 계획했으나 예루살렘에서 이슬람 교도들의 횡포가 심해 단념해야만 했다.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한 그는 3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꼬마들 틈에 끼어 라틴어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론보다는 실천가였던 그는 자신의 생활에서 얻은 영성 체험을 자주 이야기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이단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일도 있었다. 당시 교회는 마르틴 루터 등의 이단설로 혼란하던 때였지만, 교회에 대한 항구한 충성과 참 믿음이 그 오해를 풀도록 해주었다.

 

바르셀로나, 알칼라, 살라만카 등 여러 대학에서 11년 동안 공부한 그는 1534년 파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성모 승천 축일 파리 몽마르뜨르 성당에서 여섯 명의 동지들과 함께 정결 및 청빈 서원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와 성 베드로 파브르도 끼어 있었다. 이들 7인의 형제들은 성지에 가서 터키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터키와 베니스 사이의 전쟁으로 성지 순례가 불가능해지자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대신 교황께 수도회의 앞날을 맡기기로 했다.

 

1537년 형제들은 걸어서 로마에 가기로 결정했다. 로마 근교 라 스또르따 성당에 도착했을 때 이냐시오는 현시를 체험하게 된다. 예수께서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냐시오는 이 현시 순간부터 그들의 모임 이름을 “예수회”로 정했다고 한다. 성직권이 없었던 형제들은 1537년에 모두 사제로 서품되었었다. 로마에 도착한 뒤로 이냐시오는 사람들에게 영신수련 등을 지도하면서 교황을 알현하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에 루터파로 몰려 박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곧 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마침내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한 후 구두로 수도회 승인을 받고 1540년 9월 27일에 교황 칙서를 통해 예수회는 탄생되었다. 1541년 극구 사양했지만 형제들의 부탁으로 총장직을 수락하고, 15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회원들을 지도하고 예수회를 확장시켜 나갔다. 예수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비교되는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정통 신앙을 보호하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영적 왕궁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이단자들에 의해 파괴되려는 교회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냐시오는 진정한 신비가였고, 그가 저술한 “영신수련”은 지금까지도 모든 수도자 및 사제들에게 읽히는 등 영성의 대가였다. 그의 이상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었다. 그에 의해 창설된 예수회 역시 이를 모토로 정하여 어떤 활동을 하든지 교회에 대한 사랑을 우선하고 교황께 순명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예수회는 당시 어지럽던 교회와 사회 속에서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을 반박, 가톨릭을 옹호하는 한편, 새로 발견된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고 특히 교육을 중시하여 많은 대학을 설립하였다. 1551년에 로마 대학, 1552년에 독일 대학이 이냐시오와 예수회에 의해 세워졌다. 이냐시오가 선종할 당시 1천여 명의 회원, 12개 관구, 1백여 개의 분원이 생길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는 예수회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65세로 선종하고, 1609년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때 시성되었다. 축일은 7월 31일이며 1922년 비오 11세에 의해 영신수련의 주보로 선포되었다. “지기추상 대인춘풍”(指己秋霜 待人春風) 이란 말이 있다. 자신에겐 엄하고 남에겐 부드럽게 대한다는 말로서, 이냐시오는 참으로 그렇게 살았다. 우리 역시 그를 본받고, 그의 좌우명처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경향잡지, 1987년 7월호]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7년 9월 월례세미나 발표자료

 

성 이냐시오와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 과정에 대한 가르침에 나타난 “영혼의 정화”에 대한 관점 비교


(LA “VITA PURGATIVA” DEGLI “ESERCIZI SPIRITUALI” DI S. IGNAZIO DI LOYOLA E LA “SALITA-NOTTE” DI S. GIOVANNI DELLA CROCE)

김평만 신부

 

 

성이냐시오와십자가성요한.doc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06-310쪽. 
■  브라이언 그로간 저, 오영민 역, 홀로 걸어서 - 로욜라의 이냐시오, 서울(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1년. 
■  슈테만 키흘레 저, 이규성 역, 로욜라의 이냐시오, 왜관(분도출판사), 2010년. 
■  아스트라인 저, 박갑성 역, 성 이냐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00년. 
■  요셉 봐이스마이어 외 저, 전헌호 역, 교회 영성을 빛낸 수도회 창설자: 근세교회 -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예수회', 서울(가톨릭출판사), 2002년, 17-43쪽. 
■  이냐시오 저, 한국예수회 역,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서울(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01년. 
■  제임스 마틴 저, 성찬성 역, 나의 멘토 나의 성인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로욜라의 이냐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12년, 113-157쪽.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서울(으뜸사랑), 2014년, 168-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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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이냐시오, 로욜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940-6942쪽. 
■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I -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예수회', 서울(성바오로), 2005년, 67-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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