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순교성인

권요셉 2014. 9. 19. 21:25

성녀 김효임 골룸바와 성녀 김효주 아녜스


 

 

 

성녀 김효임 골룸바(Saint 金孝任 Columba) 
 

 

순 교 자

김효임 골룸바(金孝任 Columba)

순 교 지

서소문 밖

순 교 일

1839.09.26

축     일

9월 20일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년도

1814-1839년 

지      

한국(Korea)

 같은이름

골롬바, 골룸바, 김 골롬바, 김 골룸바, 김골롬바, 김골룸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성녀 김효임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서울 가까운 밤섬이라는 마을에 사는 부유한 어느 외인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효임은 6남매 중 둘째이었던 갔고, 넷째가 효주 아녜스, 다섯째가 클라라이다. 이 셋은 동정을 지키었다. 효임은 부친을 사별한 뒤 어머니와 같은 때에 입교하였고, 이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들에게 결혼을 권해 마지않았고 그때마다 그들은 거절하였으며, 마침내 결혼한 여자로 보이기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말아 올려 쪽지게 하였다. 동정을 허원한 두 자매는 서울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오빠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에서 살았다. 이때 그녀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대재를 지키며 남을 권면하는 애긍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교우들이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덕행과 아름다운 표양에 경외를 표하였다.

 

기해년 5월 3일에 김사문이란 자가 효임의 집을 돈 많은 교우집이라고 고발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피신해버리고, 콜룸바 자매와 어린아이 한 명이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청에 갇혔다. 효임은 보통 여자보다 겁이 많아 어떤 교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자신이 체포되어 끌려 갈 때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효임이 동생 효주와 함께 포장 앞에 끌려 나가자 포장은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혼인을 아니 하였느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보존하고 천지, 신인,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섬기고 흠숭하여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동정의 신분과 의미를 명백히 밝힌 것은 효임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이 대답을 피하거나 다른 구실을 대었었다. “너희들은 인륜을 파괴하는 일이요, 나라에서 엄금하는 일을 감히 한단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고 너희 책이 어디 있는지 말하고, 동교인을 대라. 그리고 너희 오라비가 어디로 갔는지도 말해라.” “만 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고 우리 오라비로 말씀하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효임은 배교할 수 없고 또 교우들을 고발하지 못하며, 교리책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효임이 주리를 틀리고 뾰족한 몽둥이로 찔렸으나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는 것을 보고 포장은 “더 세게 찔러라.” 하고 형리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효임은 태연자약하게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옥으로 끌려들어간 효임 자매는 옷을 벗기고 매를 몹시 맞는 등 모욕을 당하였다. 효임은 붉게 단 숯불로 열 두 번이나 지지는 형벌을 당하였으나 4, 5일이 지나자 효임은 기운을 다시 차리고 덴 자리도 씻은 듯이 가시었다. 이를 지켜 본 형리들은 이상히 여기며 효임에게 귀신이 접한 줄로 생각하여 부적을 써서 그녀의 어깨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형리들은 자매의 옷을 벗겨 도둑감방으로 몰아넣고 모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영혼들의 천상정배가 오시어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내려 주셔서 한 사람이 능히 열 남자를 당해낼 만큼 힘을 주시어 이 역경을 이기게 하셨다.

 

 “너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이 참말이냐?” 하고 묻는 포장에게 효임은 답하였다. “관장께서 말씀하시는 제사는 헛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생일이나 무슨 명절을 당하여 아무리 자식들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청한다 할지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옥에서 나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지옥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거기서 나와 제사에 참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 그것은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효임은 조심성 있고 재간 있는 말로 재판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초가 끝날 무렵에 효임은 자기와 동생이 당한 모욕의 사실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래와 같이 덧붙여 말하였다. “서민의 딸이건 양반의 딸이건 우리는 존중함을 받을 권리가 있지 않사옵니까? 나라 법에 의해 우리를 죽이신다면 즐겨 죽겠사옵니다. 그러나 법에도 없는 그런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옵니다.” 이러한 내용의 진상을 듣자 재판장은 그녀의 언변에 감동하여, 법 이외의 형벌을 가한 자들을 꾸짖고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은 귀양을 보냈다. 그 후 효임은 다시 법정에 끌려 나가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으나, 흔들리거나 용기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칼을 받고 동정으로 순교하니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김효주 아녜스(Saint 金孝珠 Agnes)

 

 

순 교 자

김효임 골룸바(金孝任 Columba)

순 교 지

서소문 밖

순 교 일

1839.09.03

축     일

9월 20일

신     분

동정 순교자 

활동년도

1816-1839년 

지      

한국(Korea)

 같은이름

김 아녜스, 김아녜스, 아그네스, 아네스, 아녜스  

 

 

 


성녀 김효주 아녜스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마을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는 6남매의 자녀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였다. 아녜스는 성교회에 입교한지 오래지 않아 벌써 탁월한 모범을 보이더니, 언니 콜룸바(Columba)와 동생 클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고 아름다운 덕을 쌓았다. 이들 자매는 모친을 잃은 뒤에는 서울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용머리 마을의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5월 3일 포졸들이 서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김 안토니우스(Antonius)의 집을 포위했으나, 그들이 올 것을 눈치 챈 안토니우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한 후였고, 그의 집에는 김 아녜스와 콜룸바 그리고 세 살 된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장은 아녜스 자매를 어르기도 하고 별별 약속을 다하며 배교시키려 하였으나 얻은 것은 거절뿐이었다. 이에 포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니 아녜스는 9월 3일에 순교한 6명의 신자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이 분통을 터트리기도 하였지만, 김 아녜스는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마음속으로 우리 구세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의 힘 때문이라 생각하여 등에 몇 가지 주문을 쓰게 하고,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열세 군데나 뚫게 하였지만, 이러한 형벌에도 그녀는 전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포졸들은 아녜스를 끄집어내어 학춤형을 가하며 온갖 비웃음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녜스는 용기를 내어 그 괴로움을 달게 참으며 굳게 마음을 가졌고 더욱더 열심히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 바치며 묵묵히 참아 받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한 후, 포장을 옷을 벗긴 채로 그녀를 죄수들의 감방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정녀들의 천상배필이 그녀를 구원하러 오셔서 초인적인 힘을 넣어주어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의 힘을 능가할 만큼 힘이 강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마침내는 옷을 돌려주고 그녀를 여자 감방으로 데려갔다.

 

5월 9일 김 아녜스는 언니인 김 콜룸바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고, 5월 12일에는 형조판서 앞에 출두해서 그동안 감옥에서 당한 여자로서의 모욕을 형조판서에게 호소하자, 형조판서는 이 같은 처사를 저지른 포장과 포졸들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부터 여교우들은 악형보다도 더 괴로운 그와 같은 모욕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아녜스는 언니 콜룸바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년 9월 3일이요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聖女 김효임 골롬바(1814-1839),

동정, 참수형(26세로 1839년 9월 26일 순교)

 

 

 

기해 박해의 순교자들 중에는 유명한 동정 자매가 있었는 바 동생은 김효주(아녜스)요, 언니는 김효임(골롬바)이다. 동생의 꿋꿋한 마음가짐처럼 언니도 성교의 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행동하였다. 특히 그녀가 포청과 형조에서 답변한 내용은 대단히 용감하고 이지적인 것으로, 당시 여교우들이 알고 있던 교리의 깊이 뿐만 아니라 골롬바 자신의 신앙심도 함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김 효인 골롬바는 서울 가까운 밤섬이라는 마을에 사는 부유한 어느 외인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골롬바는 6남매 중 둘째이었으며, 네째가 아녜스(효주), 다섯째가 글라라이다. 이 셋은 동정을 지키었다.


골롬바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편과 사별한 후 자녀 여섯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후 골롬바는 그녀의 두 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리고 결심하고 서울서 20리 떨어진 용머리에 사는 오빠 김 안또니오의 집에서 몇해 동안을 살고 있던 중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때 그녀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일주일 두 번 대재를 지키며 남을 권면하는 애긍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교우들이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의 덕행과 아름다운 표양을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기해년 5월 3일에 김사문이란 자가 골롬바의 집을 돈많을 교우집이라고 고발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도망가고 그의 누이 두 사람과 세 살 된 어린 아이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청에 갇혔다. 골롬바는 보통 여자보다 겁이 많아 어떤 교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며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자신이 체포되어 끌려 갈 때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 효주와 함게 포장 앞에 끌려 나가자 포장은 물었다.


 "너희가 천주교를 믿는다니 참말이냐?" "예 우리가 천주를 흠숭하고 공경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혼인을 아니하였느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보존하고 우리의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섬기고 흠승하여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동정의 신분과 의미를 명백히 밝힌 것은 골롬바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이 대답을 피하거나 다른 구실을 대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인륜을 파괴하는 일이요, 나라에서 엄금하는 일을 감히 한단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고 너희 책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 동교인을 대라. 그리고 너희 오라비가 어디로 갔는지도 말해라." "만 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고 또 교우들을 고발하지 못하며, 교리책을 바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골롬바는 주리를 틀리고 뾰죽한 몽둥이로 찔리었으나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는것을 보고 포장은, "더 세계 찔러라"하고 형리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골롬바는 태연자약하게,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더 아뤄 말씀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옥으로 끌려들어간 골롬바 자매는 옷을 벗기우고 매를 몹시 맞는 등 모욕을 당하였고, 벌겋게 달은 숯불로 열두번이나 지지는 심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4,5일이 지나자 골롬바는 기운을 다시 차라고, 덴 자리도 씻는 듯이 가시었다. 이를 지켜 본 형리들은 이상히 여기며 골롬바에게 귀신이 접한 줄로 생각하여 부적을 서서 그녀의 어깨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형리들은 자매의 옷을 벗겨 도둑감방으로 몰아놓고 모욕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영혼들의 천상정배가 오시어 그들에게 초인간적인 힘을 내려 주셔서 한 사람이 능히 열 남자를 당해낼 만큼 힘을 주시어 이 역경을 이기에 하셨다.


그후에도 또 문초를 여러번 당하자 골롬바가 질문을 하였다. "도대체 우리가 믿는 이 도리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우리를 이다지도 가혹하게 벌하십니까?" "너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니 참말이냐?" "관장이 말씀하시는 제사는 헛된 일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 들은 생일이나 무슨 명절을 당하여 아무리 자식들이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청한다 할지라도 자기가 마음대로 옥에서 나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지옥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거기서 나와 제사에 참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가. 그래서 우리는 헛된 제사는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골롬바는 조심성 있고 재간있는 말로 재판관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문초가 끝날 무렵에 골롬바는 자기와 동생이 당한 모욕의 사실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여 말하였다. "서민의 딸이건 양반의 딸이건 우리는 존중함을 받을 권리가 있지 않사옵니까? 나라법에 의해 우리를 죽이신다면 즐겨 죽겠사옵니다. 그러나 법에도 없는 그런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옵니다."라고 말하였다.


 "도대체 누가 감히 백옥 같이 고귀한 젊은 여자들에게 능욕을 가했단 말이냐"하고 형조판서는 화가나서 법 이외의 형벌을 가한 자들을 꾸짖고,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은 귀양을 보냈다.


그 후 골롬바는 다시 법정에 끌려나가 세 차례나 곤장을 맞았으나, 흔들리거나 용기가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5개월간의 옥중 생활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9월 26일, 26세의 나이로 순교와 동정의 두 가지 영광을 방도 주님 품에 안겼다.

 

 <교훈>

하느님께서 정결의 아름다움을 당신 능력으로 지켜주셔고 국가도 형조판서를 통하여 정결의 아름다움을 보호하셨습니다. 성녀 김 효임 골롬바는 항상 하느님을 모셨기에 연약한 몸에 하느님의 큰 힘을 지닐 수 있었다. 우리도 정결의 덕을 쌓기 위하여 하느님의 우리 안에 모십시다.

 



성녀 김효주(金孝珠) 아녜스(1816-1839)

 


성녀 김효주 아녜스와 효임 골롬바는 그들보다 먼저 성인품에 오른 아녜스와 비비안나라고 불릴 만큼 과연 그들의 순교는 가히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장한 순교였다. 효주와 효임은 어머니가 두 자매를 임신할 때마다 문고리에 달린 거문고를 꿈에 보았고 또 그 기묘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816년에 출생한 효주는 언니 효임과 같이 중국인 유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천주교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집안에서 이를 엄히 금했다. 또한 부인과 딸들에게 미신 행위를 강요하므로 그들은 그때마다 몸을 피해 절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절망한 나머지 패가망신할 것이 두려워 이웃과 다투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효주는 천성이 온순하고 상냥했으며, 그의 모습은 외모에도 역력했다.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써 효주의 아름다운 표양에 탄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집은 본시 부유했으나 효주는 언니 효임과 함께 전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열심 수계하는 데 전념했다. 효주는 묵주가 없는 교우에게 직접 만들어 나눠주고 가난한 교우들에게 많은 애긍을 했으니 또한 그들은 그것을 본분으로 여겼다.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효주 일가는 그 사이 밤섬에서 고양(高陽) 땅 용머리로 이사해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박해가 점차 심해져 사방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마침내 5월 3일 포졸들이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와 그들의 집을 포위했다. 모두 피신하고 효주와 언니 효임 그리고 3살 된 어린아이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일단 마을 이장에게 인도되었다가 어린아이만을 남겨둔 채 효임과 효주만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체포 당시 포졸들이 동생 효주에게 몹시 심하게 굴자 효임은 용감하게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따라 갈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거칠게 군단 말이오?”

포청에 온 효주는 언니 효임과 함께 모진 고문과 혹형을 받았는데, 하루는 형리들이 효주를 외딴 방으로 끌고 가 학춤이라는 형벌을 가했다. 이 형벌은 죄수를 발가벗기고 손을 뒤로 결박 지어 팔을 공중에 매달아 네 사람이 번갈아가며 매질을 하는 것이다. 몇 분만 지나면 혀가 빠져나오고 입에 거품이 고이며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내려 쉬게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형벌이다.

 

형리들은 효주가 일찍이 들은 일이 없을 만큼, 혹독히 때리며 여러 가지 조롱과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효주는 더욱 더 열심히 자기 고통을 천주께 바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론 형벌을 중지시키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효주는, “천주대전에 가기 위해 나를 빨리 죽여주시오.” 이렇게 간청할 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언니가 겪은 형벌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혈육의 고통까지도 달게 참아 받았으니 그의 온순함은 무서운 고문이나 죽음보다 더욱 강했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08년 2월호]

 



[103위 성인 약전] 김효주

 

기해년 박해시 순교자들 중에는 유명한 동정자매(童貞姉妹)가 있었는데, 김효주 아네스와 그의 언니 김효임(金孝任) 골롬바가 그들이었다. 그들 자매가 오직 주님을 위해 동정을 지키고 순교한 사실은 너무나 진실하고 값진 것이어서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김효주 아네스는 1816년(순조16년)경 한강근처에 있던 밤선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외교인 집안이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뒤부터 모친과 그들 6남매가 함께 성교를 듣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아네스는 순전(純全)한 덕행이 외형에 드러나고 또한 숨은 덕이 많았으므로 성교에 입교한지 얼마 안되어 그녀의 아름다운 표양에 열복(悅服)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모친이 선종한 후 그녀는 언니 골롬바와 동생 끌라라와 함께 몸과 마음을 바쳐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약20리 떨어진 오빠 안또니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름다운 덕을 지켜나갔다. 기해년에 이르러 군난이 차차 심하여지고 사방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마침내 5월 3일에는 포졸들이 아는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 아네스가 있던 안또니오의 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안또니오의 가족들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피신한 뒤였으므로 당시 그 집에 남아있던 아네스와 골롬바, 그리고 3살 된 어린아이 만이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이들을 일단 마을의 이장에게 인도하였다가 어린아이만을 남겨둔 채 아네스자매는 서울 포청으로 압송하였다.

 

포장은 아네스자매가 압송되어 오자 위협하기도 하고 유혹하는 약속을 하기도 하며 배교를 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오로지 그러한 회유(懷萸)를 거절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포장은 몽둥이로 어깨와 팔꿈치와 무릎을 치게 하였고, 다섯 번이나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늘나라의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 같아 소리를 지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아니하였다. 다른 증거 자들은 예수와 마리아의 정다운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 포졸들과 관원들의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지만 그녀들은 큰소리로 부르지도 않고 침묵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구세주와 통하고 있었다. 포장은 이와 같이 훌륭한 항구심이 어떤 마력(魔力)의 힘이라고 생각하여 등에 몇 가지 주문(呪文)을 쓰게 하고는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그 글자들을 13군데나 뚫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코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이에 포장은 형벌을 중지시키고 달래보기도하며 다시 형벌을 가하는 것을 되풀이 하였다. 또 하루는 형리들이 아네스를 외딴 감방으로 끌고 가서 「학춤」이라는 형벌을 가하였다. 이 형벌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결박지어 공중에 매단 후 여러 사람이 번갈아 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몇 분만 지나면 혀가 나오고 거품이 고이며 얼굴빛이 검붉어져서 쉬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것이다.

 

형리들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그 형벌을 가하는 동시에 일찍이 들은 적이 없을 만큼 혹독히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아네스는 더 열심히 자신의 고통을 천주께 바치며 신앙의 진리만을 믿고 있었다.

 

한편 포장은 동정녀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순결을 빼앗고자 하여 옷을 벗긴 채로 아네스를 죄수들의 감옥에 들여보내 갖은 욕을 당하게 하였다.

 

이때 영혼들의 천상배필(天上配匹)께서 이러한 위기를 알고는 그녀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 은총의 힘은 마치 옷처럼 그녀의 몸을 덮어주고, 초인적인 힘을 불어넣어 여자 한 사람이 남자 열 사람을 합친 것보다도 더 강한 힘이 되도록 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2일 동안을 가장 악한 사람들 중에 있었지만 그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눌려 이제 새로운 아네스가 된 이 동정녀의 순결을 범하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형리들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옷을 되돌려 주고 다시 여자 감옥으로 데려갔다.

 

그 후 아네스는 언니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형조판서에게 그 동안 포청에서 받은 모욕을 호소하였다.

 

형조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노하여 국법대로 포장과 형리들을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는 여교우들이 그러한 모욕을 당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아네스는 갖은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는 몇 달 후인 9월3일, 항상 함께하던 언니 골롬바를 남겨두고 24세로 참수 치명하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4월 1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수원대 교수)]

 



성화 '두 동정 순교자' 로마 한인 신학원 이양

 

고 장발 선생 1949년 작품


50년 로마 전교지방 미술 전람회 이후 로마 베드로신학원 지하 경당에 전시돼

 

 

 


우리나라 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인 고 장발(루도비코) 선생의 성화 작품 ‘두 동정 순교자’(Duae Virgines Martyres <사진>)가 50여년 만에 로마 한인 신학원(원장 전달수 신부)으로 옮겨져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두 동정 순교자’는 장발 선생이 194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인 성 김효임(골롬바)과 성 김효주(아녜스) 자매(당시에는 복자)를 그린 성화로, 200×100㎝ 크기의 이 유화 작품은 1950년 로마에서 열린 ‘전교 지방 미술 전람회’에 월전 장우성 화백의 ‘조선 순교자의 모후’ 3연작과 함께 출품됐었다.

 

 

‘두 동정 순교자’는 전람회 이후 전교지역에서 유학온 사제들과 신학생들의 숙소인 로마 베드로신학원 지하 경당에 전시돼 왔으나 지난 50년 간 이 작품을 찾는 한인 신자가 거의 없을 만큼 잊혀져 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신유박해 200주년 특별전을 위해 로마를 수차례방문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 담당 최승룡 신부가 베드로 신학원에 이 작품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한국 주교회의를 통해 이 성화의 로마 한인신학원 이양 작업을 추진해 왔다.

 

특히 지난 7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크레센치오 세페 추기경이 방한했을 때 당시 주교회의 의장 박정일 주교는 ‘두 동정 순교자’ 성화를 로마 한인신학원에 넘겨 줄 것을 공식 요청했고, 세페 추기경의 흔쾌한 수락으로 지난 11월 정식 이양됐다.

 

최승룡 신부는 “1925년 전교지방 박람회 때 한국 교회가 출품한 80여점의 작품 목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반면, 1950년 미술 전시회 관련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각종 귀중한 작품과 사료들이 로마 어딘가에서 썩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기 짝이 없다”며 “한국교회가 로마에 산재한 한국 관련 사료와 미술 작품을 발굴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고대했다.

 

장발 선생의 ‘두 동정 순교자’ 는 한강이 멀지 않은 서소문 밖 순교지를 배경으로 두 성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평선 위에 우뚝서 있는 두 성인의 모습은 그들의 믿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언니 김효임은 순교자의 영광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있고, 동생 효주는 언니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두 자매의 머리에 있는 미사 수건은 바람에 날려 커다란 하나의 수건을 함께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하나의 신앙, 즉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같은 믿음 때문에 순교했다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다. 또 한복과 옷고름이 바람에 따라 강하게 휘날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열렬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한편 두 동정 순교자와 함께 출품됐던 장우성 화백의 ‘조선 순교자의 모후’ 3연작은 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 소장돼 있다.

[평화신문, 2002년 12월 15일]

 

★ 발췌문헌 : 김옥희, {103위 성인전}, 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4, 109~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