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순교성인

권요셉 2013. 11. 30. 19:52

       

  순교자

전장운 요한

  순교지서소문 밖
  순교일1866.3.09
  축   일9월 20일
  신   분상인,순교자

  활동년도

1810-1866년

  첨부자료

  최형_베드로.hwp

   

 

 

 

  

‘승연’으로도 불렸던 전장운은 서울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지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 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최형,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으나, 얼마 뒤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고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는 바람에 전장운도 3월 1일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었고, 3월 9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그 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천주교 마산교구 홈)

 


 

 

성 전장운 요한(Joannes)은 서울 애고개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승연이다. 착한 성격을 지닌 그는 열심한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부친을 잃은 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한편 가죽부대와 담뱃대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신앙이 굳지 못하여 감언이설에 빠져 배교하고 풀려 나왔었다. 이때부터 전 요한은 언제나 깊은 참회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 요한은 실망하지 않고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신부가 입국하자 즉시 회개의 성사를 받고 자기의 열성과 신심을 되찾아 열심히 살았다. 이 때문에 많은 교우들도 그의 열심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그 후 전 요한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살았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그의 참된 신앙생활을 보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 권한을 주었으며, 1866년에는 최형 베드로(Petrus)와 함께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겼다. 그래서 출판에 종사하던 임 요셉으로부터 집을 샀으나, 아직 목판의 인수인계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박해가 일어났다. 전 요한은 피신도 하지 않고 목판을 사수하였다. 신자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는 “내가 어디에 간다 하더라도 천주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여기서 체포되나 다른 곳에 피했다가 체포되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교우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 하고 말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와서 집을 지키던 그에게 “이 집은 천주교도의 집인 줄 알고 있는데 당신도 천주교도요?” “그렇게 물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틀림없는 천주교도입니다. 나를 체포해서 가겠다는 말씀이신 모양인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자, 앞장서십시오. 나 기꺼이 따라 가리다.” 이리하여 그는 순순히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 마리아’만을 부르면서 갖은 고통을 다 참아 받았다. 3일간의 고문과 심문이 끝나고 1866년 3월 9일 사형선고가 내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전 요한의 목을 베는 희광이는 전에 신자였고 잘 아는 사이인 고성철이란 사람이었다. 그가 “내 어찌 차마 자네 목을 벨 수 있겠소?” 하며 거절하려 하자 전 요한은 “당신은 임금께 복종하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는 거요?”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칼에 목이 땅에 떨어지니, 때는 1866년 3월 10일이요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리아 사랑넷)

 


 

 聖 전장운 요한(1811-1866), 참수형(56세로 1866년 3월 9일 순교)

 

전장운 요한은 1811년 서울 애고개에서 태어났다. 그의 또다른 이름은 '승연'이었다. 그는 열심한 모친에게서 영세를 받았으며, 어렸을 때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또다른 한편으로 수공업인 가죽 부대와 담뱃대를 만들어 파는 등 농사일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839년 기해년 대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신앙이 약했으므로 감언이설에 빠져 배교하여 풀려 나왔었다. 이때부터 전 요한은 언제가 깊이 탄식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배교행위에 대한 크나 큰 가책을 느꼈으니 기해박해 이후 한국 땅에 성직자 없는 시기가 다시 오게 되어 신부와의 접촉이 일체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 요한은 실망하지 않고 1848년에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곧 참회, 회개하여 고백성사를 받고 그때부터 다시 모든 신심 행위에 열성을 다하여 깊은 신앙으로 종교생활을 하였다.


많은 교우들도 그의 열심에 감복하여 그에 대해 존경심이 두터웠다. 그는 그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화목하게 살았는데, 베르뇌 장 주교는 그의 열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익히 보았다가 그에게 세례를 베푸는 권한을 주었고, 1866년에는 최형(베드로)과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소업을 맡겼다. 그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는 그가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고 또 손재주가 있어 능히 목판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출판에 종사하던 임 요셉으로부터 집을 샀으나 아직 목판이 인수 인계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장 주교가 체포되어 박해가 일어났으나 전 요한은 피신도 하지않고 목판을 사수하였다.

신자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는 "내가 어디에 간다 하더라도 천주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여기서 체포되나 다른 곳에 피했다가 체포되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교우들이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라고 하였다.

각오했던 대로 1866년 3월 1일(음력 1월 15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7일 후에 그도 체포되어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최형과 함께 교회 서적 출판의 죄목으로 문초받기 시작하였다. 심문관들은 "너는 도망간 창동 임 생원의 집을 지켜주었던 것을 보니 평소에 그와의 친분을 알 수 있는데, 임자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실토하고 배교하여 살아 남는 것이 어떤가?"


이에 그는 "나는 이문동에 살면서 장사로 생계를 삼았고 아현동에 살던 황 생원에게 30년 전에 천주교를 배웠습니다. 그후 베르뇌 장 주교님을 집에서 만난 후 수년동안 천주님을 섬겼는데 어찌 배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 생원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간 사람인데 피신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밖의 일은 죽은 한이 있더라도 아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그는 최형과 함께 '채창'이란 고문을 받았다. 채창이란 어깨와 발가락을 때리는 형벌로, 발가락이 부러지고 무릎뼈와 어깨뼈가 으스러 졌다.

그런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고 굽히거나 물론 배교하지도 않았다. 그가 주관했던 출판소 일은 정부에서 중요시했던 것이므로 그는 다시 최형과 함께 1월 18일에 문초를 받았다. "너는 남의 집을 지켜주면서 그 집 주인의 성이 임(任)가인지 임(林)가인지도 모르며 더우기나 행방조차 모른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묻자, "그 사람은 임(林)가로 이름이 치화(致和)라고 들었지만 그밖의 것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네가 10년 전부터 안다는 사람의 이름을 잘 모른다니 곧이 듣겠느냐?"

"저는 본래 무식하여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렇게 무식한 놈이 교리를 어떻게 배웠는가?" "언문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닙니까?" 언문으로 된 교리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 무식한 놈아, 이제부터 배교하다면 살려 주겠으니 배교하겠는가?"


 "죽으면 죽었지 배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이 포도청의 문초기록에 나타난 그의 심문 내용이다. 그는 끝까지 임씨의 집 지켜주는 사람으로 정부에서 알게 하였다. 몰수된 서적과 판본을 모두 불지르고 전국에 퍼진 교회서적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여 불지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 마리아만을 부르면서 갖은 고통을 다 참아 받았다. 3일간의 고문과 신문이 끝나고 1866년 3월 9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사형 집행문에는 "죄인 전장운과 최형은 이단과 결탁하여 서양 종교에 빠졌으며 사학서(邪學書)들을 대량 출판하여 전파하고 선전하였으며, 국가에서 엄금하는 사교(邪敎)를 철석같이 믿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 번 죽어도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니 법대로 사형에 차하기 바란다"다는 내용이었다.


서소문 밖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목을 베는 희광이가 전에 교우였던 '고성칠'로 그전부터 잘아는 사이었기 때문에 "내 어찌 차마 당신 목을 벨 수가 있겠소?" 하며 거절하려고 하자, 그는 "당신은 임금에게 볼종하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이데 무엇을 꺼리오. 어서 치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순교의 화관과 장렬한 생명의 제사를 전능하신 분에게 바쳤다. 그의 시체는 아내의 손에 의해 3일 후에 정성껏 거두어져 안장되었다.

< 교훈>
전 장운 요한은 교회 서적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다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말씀이 담긴 교회서적은 많으나 이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는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봅시다.
 


방문해서 전장운 요한 잘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에 평화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