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순교성인

권요셉 2014. 1. 5. 02:06

 

랑페르 드 브르뜨니애르 신부

 

  순교자

랑페르 드 브르뜨니애르 유스토 (한국: 백 유스토 신부)

  순교지새남터
  순교일1866.03.07
  축   일9월 20일
  신   분신부,순교자

  활동년도

1838-1866년

  첨부자료

백_유스토.hwp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마산교구 홈)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리아 사랑넷)

 

 


 

 
聖 유스또 마리아 브르띠니에르 백 신부(1839-1866),(28세로 1866년 3월 7일 순교)

조선에 나온 성직자 가운데 키가 크고 얼굴이 길며 코가 오뚝했던 백 신부는 1836년 2월 28일 프랑스 살롱 - 쉴 - 스완스(Chalon-Sur-Saone)에서 귀족인 남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착실한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부모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신앙인으로 당당한 기품이 있었다.

 

1859년에 파리에 있는 성 슐삐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학업을 받던 중, 어린 시절부터 갈망해오던 외국 선교사기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861년 9월 부모의 승낙을 얻어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옮겼다. 그의 동료 한 사람은 브로트니에르의 마음은 참으로 비범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순교의 특은을 허락하시지 않더라도 그는 언젠가는 꼭 성인품에 오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1864년 5월에 신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빌었다.

 

1864년 6월 13일 자신이 어느 선교지로 가게 되는지를 알기 위해 장상을 찾아갔을 때, 조선이 자신의 전교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듣고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던 곳이었다"고 말하였다.이틀후 그는 블리외 서 신부, 위앵 민 신부, 도리 김 신부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1865년 5월 27일).

그들은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적당한 귀회가 올 때까지 만주 지방의 배를 주교 댁에서 대기하다가, 다시 1846년 10월 28일에 만주 해안 '내호' 하류에 머물며 조선에서 올 배를 6개월간이나 기다렸다. 이때 젊은 선교사들은 중국 뱃사공들한테 한문공부를 열심히 배웠다. 1865년 5월 2일 이 뱃사공들은 마침 백령도로 가게 되어 이들도 백령도에 가서 20일간 머물다가, 베르뇌 장 주교께서 보낸 배가 관리들에게 발각되때문에 할 수 없이 다른 범선을 얻어타고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충청도 내포 지방 부근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1865년 5월 27일에 조선 땅을 밟았다.

 

선교사들을 영접한 신자들은 내심으로 기뻐하였지만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외국 신부를 도와줌으로써 닥쳐올 위험들을 생각하고는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어떤 신자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 장 주교를 만났다. 장 주교의 주선으로 정 마르꼬 회장 집의 조그만 방에 거처를 정하고 조산말을 열심히 익히며 기도생활을 열중하였다. 백 신부는 선교활동을 시작해야겠다는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나타내었다.

 

 "우리와 같이 이런 생활에 자신을 봉헌하고 사는 자들 가운데서도 원하는 유혈 순교의 특은을 받은 기회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쌓아 놓은 공로가 있든 없든 항상 사랑과 용기를 갖고 너그러운 마음의 순교, 의지의 순교, 음식의 순교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고, 또한 많은 육체적 고행은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과 마음의 고행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얼마 후 백 신부는 장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80여명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40여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이때는 1866년 2월 박해가 일어날 무렵이었다. 2월 23일 뜻 밖에 장 주교가 체포됐다는 사실이 백 신부에게 알려지자 이에 백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면서 열심으로 마지막 미사를 지냈다. 25일에는 정 마르코 회장마저 체포되고 백 신부는 이튿날 어른 27명에게 세례성사를 준 다음, 바로 체포되었다.

 

백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될 때 제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제의를 입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백 신부는 손 하나 결박되지 않을 채 포도청으로 끌려가 만 하루를 지냈는데 그는 옥에서 "나는 조선사람인 여러분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였다.

 

백 신부는 장 주교가 갇히 의금부에 같이 결박된 채 투옥되었다. 대원군은 백 신부를 문초하지도 않고 그냥 형벌을 내리게 하였다. 백 신부는 여러 차례의 고문을 특히 다리를 몽둥이로 치는 고문과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당했다. 이런 고문에도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으며, 겸손하게 눈은 내리뜨고 아무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기도만 드리고 있었다.

 

백 신부는 장 주교와 함께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향했는데 그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이 넘쳐 흘렀다. 새남터에 도착하여 사형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극도의 피로 끝에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어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자, 다른 병졸 나서며 "지체없이 곧 죽어야 할 죄수있는 마실 물이 뭐 필요하나"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던 것이다.

 

그때 백 신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밧줄을 물어 씹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구경꾼이 "당신의 이 상태를 후회하는 거냐"고 묻자, 백 신부는 "당신도 신앙을 가지시오. 나는 이 좋은 것을 사수할 것이오"라고 세번이나 반복하여 말하였다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르뇌 장 주교와 몇가지 프랑스 말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자 장 주교께서 웃으면서 대답하였는데, 이 때 형리들은 "죽는 놈들이 무엇이 좋아서 웃느냐?"하니, 그들은 "좋고 말고"라고 답하였다. 이 때 사형장에는 3천명의 군중이 대기해 있었다.

 

그런 다음 백 신부는 베르뇌 장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에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되어 너댓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때는 1866년 3월 7일로 그의 나이 28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못다한 선교사의 역할과 사명을 그가 흘린 순교의 피로써 다하였고, 그 피는 바로 이땅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양 선교사들의 머리는 군문효수되어 사흘동안 장대에 매달려 사람들에게 현시되었다가, 박순집(베드로)과 여러 신자들이 이들 성직자들과 교우들의 시신을 찾아 와고개에 안장하였다.

 

<교훈>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1고린 1,18) 아직도 순교자의 죽음이 어리석게 보이고 순교하고픈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고상을 쳐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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