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음악의 도시 비엔나와 오페라 이야기

모차르트와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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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2009. 6. 1.

[모차르트와 비엔나]

 

모차르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비엔나의 이곳저곳

6세 때에 처음으로 비엔나 방문. 25세 때에 비엔나에 정착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에 활동했던 유명 인사들. 어린 모차르트가 있고 그 뒤애는 글룩과 하이든이다. 앞에 있는 사람은 여제의 주치의였던 고트프리트 반 스비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에 포함되어 있는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사이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Maria-Theresien Platz)가 있고 여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기념상의 좌대 사면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치세 당시에 여제를 위해 크게 봉사했던 장군들과 학자들, 관리들의 모습이 동상처럼 세워져 있다. 자연사박물관 쪽을 향한 면에는 제국도서관장을 지낸 학자인 제라르 반 슈뷔덴가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고 그 뒤에 왕실 주조책임자인 요제프 힐라리우스 에켈, 헝가리 출신으로 제국사관으로 임명된 역사학자 기요르기 프라이, 독일 출신이지만 말년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 그리고 이들 가운데의 귀여운 어린 아이는 다름아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인연은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하여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황실 가족들을 위해 연주회를 가진 것이다. 이후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두 아들인 요제프 2세, 레오폴드 2세와도 관련을 맺고 지냈다.

 

쇤브룬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소개로 인사하고 있는 그림.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차르트가 처음 비엔나를 방문한 것은 6세때인 1762년이었다. 아버지 레오폴드, 누나 난네를과 함께 연주를 위해 왔다. 쇤브룬 궁전 등에서 신동으로서 연주회를 가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인 프란시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가 자리로 돌아 올 때에 마루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서 넘어지자 옆에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망내딸인 마리아 안토니아(훗날 마리 앙뚜아네트)가 달려나와 모차르트를 일으켜주었다고 한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모차르트가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 때의 쇤브룬 궁전 연주에서 생긴 이야기이다. 당시 모차르트 가족이 머물렀던 곳은 1구 플라이슈마르크트(Fleischmarkt) 28번지였다. 당시에는 흰 황소(The White Ox)라는 여관이었다.

 


쇤브룬 궁전에서의 모차르트(쇤브룬 궁전 타페스트리)


1구 플라이슈마르크트 28번지의 오늘날 모습. '카페 트라라'는 예전에 '흰 황소' 여관이었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비엔나에 처음 왔을 때 이 여관에 머물렀던 곳이다.


- 두번째 비엔나 방문은 같은해 10월이었다. 역시 연주를 위해서 비엔나를 방문했다. 1구 프라이융(Freyung) 3번지에 묵었었다. 이 때에는 단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었다.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를 했다. 다른 자료에는 그해 10월에 암 호프의 팔레 콜랄토에서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졌다고 한다. 팔레 콜랄토의 벽면에 이에 대한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암 호프 13번지이다.

 

암 호프 13번지 팔레 콜랄토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명판.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trat in der zweiten Oktober Woche des Jahres 1762 in diesem Hause erstmals vor die Offentlichkeit der Stadt, die ihm einst Heimat und Schiksal werden sollte. Mozartgemeinde Wien 1956 이라고 적혀 있다. 모차르트가 1762년 10월 둘째 주에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이 도시의 대중 앞에 모습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어린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와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팔레 콜랄토. 암 호프 13번지이며 벽면에 이에 대한 명판이 있다.

 

- 세번째 비엔나 방문은 11세때인 1767년이었다. 9월부터 10월까지 두달 동안 머물렀다. 1구 봐이부르크가쎄(Weihburggasse) 3번지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가리볼디(Gariboldi)백작의 저택이었으며 현재는 엘리자베트황비(Kaiserin Elisabeth)호텔이다. 엘리자베트황비는 씨씨를 말한다. 이 호텔의 현관에 이 건물에 투숙했던 유명인사들의 명단을 적어 놓은 것이 있다. 모차르트가 명단의 첫번째에 있다. 그 다음에는 음악가로서 클라라 슈만, 프란츠 리스트, 안톤 루빈슈타인, 리하르트 바그너, 안톤 브루크너, 에드바르드 그리그 등이 이 호텔에 묵었다고 되어 있다.

 

 카이저린 엘리자베트 호텔 로비. 씨씨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네번째 비엔나 방문은 이듬해인 1768년 3월이었다. 1구 크루거슈트라쎄(Krugerstrasse) 10번지에 있는 러시아대사 갈리친(Gallitsin)공자의 저택으로 그의 초청으로 그 집에서 묵으며 연주회를 가졌다. 1768년에는 또 다른 커다란 행사가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후원한 고아원의 교회가 봉헌식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 12세의 어린 모차르트가 교회봉헌을 위한 감사의 미사곡을 작곡해서 직접 지휘한 것이다. 12월 7일, 현재의 3구 렌베그() 91번지 교회에서였다. 교회 외벽에 그에 대한 내용을 적은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렌베그 91번지의 고아원교회. 붉은 타원으로 표시된 곳에 12세의 모차르트가 그가 작곡한 미사곡을 지휘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 다음번 비엔나 방문은 1779년 아버지 레오폴드와 함께 직장을 구하러 왔던 것이었다. 1구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 18번지에 두달동안 체류하다가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이 때 묵었던 집은 현재 다스 티그라(Das Tigra)호텔이다. 다스 티그라 호텔의 벽면에 모차르트가 와서 묵었다는 명판이 걸려 있다.


티퍼 그라벤 18번지 호텔 다스 티그라의 벽면에 붙어 있는 명판. In diesem Hause wohnte Wolgang Amadeus Mozart wahrend seined dritten Wiener Aufenthaltes im Sommer des Jahres 1779. Das Erleben der Musik Wiens entschied hier seinen Weg zum Meister deutscher Kunst. 라고 적혀 있다.

티퍼 그라벤에 있는 호텔 다스 티그라

 

- 모차르트는 25세 때인 1781년 잘츠부르크를 작별하고 단신 비엔나로 왔다. 마침 당시 잘츠부르크를 통치하고 있던 콜로레도 대주교가 비엔나를 방문하는 일이 있어서 대주교 일행의 일원으로 비엔나에 왔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다시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콜로레도 대주교와 함께 비엔나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3월 16일 부터  콜로레도 대주교의 비엔나 시내궁전에 투숙했다. 이곳이 현재의 1구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7번지로서 현재는 튜톤기사단 비엔나 본부인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Deutschordenshaus)이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고용인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하인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그때만해도 모차르트의 명성은 신동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어서 비엔나의 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높았었다. 때문에 모차르트는 대주교가 자기를 하인으로 대하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모차르트는 두달을 그렇게 지낸 후에 도저히 참을수 없어서 대주교와 한바탕 다툰 후에 5월 2일 사표를 던지고 콜로레도 대주교의 비엔나 시내궁전을 나왔다. 그것으로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관계도 결별이었다. 당장 갈곳이 없던 모차르트는 왕실주방장의 도움으로 그가 아는 집에 며칠 머무르다가 마침 만하임에서 알고 지내던 베버 부인이라는 사람이 비엔나에서 하숙집을 경영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를 만나 그의 집에 하숙을 정하였으니 그것이 오늘날 1구 페터스키르헤 옆 골목의 밀르흐가쎄(Milchgasse) 1번지의 집이다. 예전에는 암 페터(Am Peter) 11번지였고 그 집에는 Zum Augen Gottes(신의 눈동자)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모차르트는 25세의 청년으로서 청운의 뜻을 품고 비엔나에 와서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 지내다가 꼭 10년 후인 1791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징거슈트라쎄 7번지 건물에 부착되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명판. 모차르트가 이곳 도이치 하우스에 1781년 3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 모차르트는 페터스키르헤 뒤편에 있는 밀르흐가쎄(Milchgasse) 1번지에 살면서 요제프 2세 황제의 부탁으로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인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 이집은 프라우 베버가 경영하는 하숙집이었다. 모차르트는 프라우 베버와 가족들을 만하임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베버 가족의 큰 딸인 알로이스를 사랑하여서 결혼까지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반대 등으로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비엔나에서 프라우 베버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윽고 세째 딸인 콘스탄체와 1782년 8월 4일 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밀르흐가쎄 1번지.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페터스키르헤 옆 골목이다.

 

- 성슈테판성당과의 인연: 성슈테판성당 편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성슈테판성당과 모차르트는 인연이 많다. 모차르트는 1782년 8월 4일 성슈테판성당의 성캐서린 채플에서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비엔나에 온 이듬해에 하숙했던 집의 셋째 딸인 콘스탄체였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람들은 아니, 그러면 모차르트의 후손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겠네!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 중에서 4명은 어릴 때에 사망했고 두 아들만이 장성했는데 두 아들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서 후사가 없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직계 후손은 하나도 없다. 혹시 모차르트에게 숨겨놓은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다.

 

 

성슈테판성당의 성캐터린채플.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열렸으며 두 아들의 세례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명판에 적혀 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Wolfgang Amadeus Mozart und Constanze Weber wurden am 4. August 1782 in ihrer Wohnpfarre

St. Stephan getraut.

Ihr viertes Kind Johannes und ihr sechstes Kind Franz empfingen im Stephansdom die Taufe.

Nach Mozarts Tod am 5. Dezember 1791 - kurz davor hatte er sich noch um die Kapellmeister-Adjunktstelle bei St. Stephan beworben - wurde am 6. Dezember das Requiem gefeiert und sein Leib in der Kreuzkapelle eingesegnet.

Aus Anlaß seines 250. Geburtstages Die Domkirche St. Stephan AD. MMVI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베버가 1782년 8월 4일 소속 교구교회인 성슈테판에서 결혼했다. 이들의 네째 자녀인 요한네스와 이들의 여섯번째 자녀인 프란츠는 슈테판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12월 6일에 크로이츠카펠레에서 레퀴엠과 함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모차르트는 세상 떠나기 직전에 이 성당의 카펠마이스터의 직분을 배정받았었다.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이 명판을 설치했다.


가운데 보이는 첨탑이 성슈테판 대성당


모차르트의 여섯 자녀중 나중에까지 성장한 두 아들의 얘기로 돌아오면 큰 아들은 요한 토마스 레오폴드 모차르트(Johann Thomas Leopold Mozart)라는 긴 이름이며 둘째 아들은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Franz Xaver Mozart)였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는 유복자로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 태어났다. 두 아들 모두 성슈테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성슈테판성당의 성캐터린카펠레(예배처)에 가면 입구 벽면에 이곳은 모차르트가 결혼한 곳이며 그의 아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곳이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에 성슈테판성당의 보조음악감독으로 임명된바 있다. 무보수였지만 대성당의 음악감독 보조라는 것은 대단한 직책이었다. 죽기전 마지막 병자성사(病者聖事)를 주관한 곳도 성슈테판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성슈테판성당 소속교구였으므로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가졌으며 나중에 이곳 지하 납골소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장례미사는 성당 기념품점 옆에 있는 오이겐공자기념 카펠레에서 거행되었다. 모차르트의 장례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가 가난하여 묘지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재활용 관에 실려 생맑스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묻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좀 오해인 것 같다. 모차르트가 빈털터리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법에 의해 그렇게 장례를 치룰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테판성당 뒷편에 붙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명판. 이 장소에서 모차르트의 1791년 12월 6일 영결미사가 거생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명판은 1931년에 비엔나의 슈베르트연맹이 제작하였다.

모차르트 영결미사에 대한 명판이 붙어 있는 장소. 지하 카타콤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입구가 있다.

슈테판성당의 뒷편 별도의 입구. 철창 안쪽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기념명판이 있다.




유덴플라츠 3-4번지의 명판. 모차르트가 1783년에 244번지 집에서 살았다는 내용이다. 모차르트가 돔가쎄 5번지로 이사가기 전에 살던 곳이다.


- 모차르트가 1784년 9월부터 1787년 4월까지 비교적 오래 산 곳이 바로 돔가쎄 5번지. 지금의 비엔나 모차르트 기념관(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이다. 트라트너호프(Trattnerhof)라는 곳에서 살다가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이곳으로 이사왔다. 모차르트는 1층과 2층의 방을 모두 썼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여유있는 생활을 했던 시기였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 집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완성되었다. ('모차르트 하우스 비엔나'에 대하여는 비엔나 박물관 편을 참고하시기 바람).



돔가쎄 5번지의 모차르트 하우스 (종전의'피가로 하우스')

 

- 모차르트는 1구 돔가쎄 5번지에 사는 것이 편리했지만 임대료를 내기가 어려워서 1787년 5월 3구 란트슈트라쎄 224번지로 이사를 갔다. 현재는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 75번지이다. 그곳에서 그해 12월 말까지 살다가 1구 슈타트 281번지로 이사를 가서 이듬해인 1788년 6월까지 살았다. 이곳에서 첫딸 테레지아가 태어났으나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1788년 6월부터 1789년 1월까지는 9구 알저그룬트 135번지에서 살았다. 그 집은 1891년에 철거되어서 본래의 모습은 알수가 없다. 현재 배링거슈트라쎄 26번지이다.


왼편에 배링거슈트라쎄 26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모차르트 기념명판이 있다. 내용은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1788년 여름부터 1790년 가을까지 살면서 '코지 판 투테'를 비롯해서 교향곡 G 단조, Eb 장조, C 장조 등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 알저그룬트(현재의 배링거 슈트라쎄)에 살던 모차르트는 1789년 1월에 슈타트 245번지로 이사를 가서 1790년 9월까지 살았다. 이 집은 현재 유덴플라츠 4번지로서 '춤 장크트 니콜라우스'(Zum St Nikolaus)라는 집이었다. 하인리히 폰 하이쎈슈탐(Heinrich von Heissenstamm)백작이 소유한 건물이었다.

 

유덴플라츠 가운데 건물이 유덴플라츠 3-4번지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모차르트가 이곳에 1789년에 살던 집이라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 모차르트는 1790년 9월 슈타트 970번지로 이사를 갔다. 현재의 라우엔슈타인가쎄(Rauensteingasse) 8번지로서 슈테플 백화점의 뒷길에 있는 집이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얼마후 슈타트 970번지는 슈테판스플라츠 3번지로 바뀌었다. 슈테판스플라츠 3번지의 집은 1849년에 철거되었고 새로운 집이 들어섰는데 현재 슈테플(Stefl)백화점의 뒷문에 연결된 집이다.  벽면에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이라고 설명한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에 걸려 있는 명판 . 슈테플 백화점의 뒤편길.

                     

- 모차르트는 돔가쎄에 살면서 노이에 마르크트(Neue Markt) 5번지의 집을 빌려서 음악회를 가졌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등은 대부분 이 집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그러므로 노이에 마르크트 5번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차르트 당시의 노이에 마르크트. 오른편 건물이 노이에 마르크트 5번지 하우스 추르 멜그루베(Haus zur Melgrube)로서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등이 초연되었다. 왼편의 건물은 카푸친교회이다.


- 그라벤/도로테르가쎄(Graben/Dorotheergasse)는 모차르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 거리의 어느 집이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모차르트가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Lorenzo Da Ponte)와 자주 만난 곳이 이 거리였다. 모차르트가 다 폰테를 처음 만난지 2년반후 피가로의 결혼이 탄생하였다. 다 폰테가 모차르트의 음악에 리브레토(Libretto)라는 옷을 입히지 않았다면 역사에 남아 있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다 폰테는 '피가로의 결혼' 이외에도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의 대본을 썼다.

 

젠트랄프리드포흐(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있는 모차르트 가묘와 묘비. 왼쪽은 베토벤, 오른쪽은 슈베르트의 묘지

 

- 호프부르크 정문 앞 미하엘러플라츠 한쪽에 있는 미하엘러키르헤(Michaelerkirche)도 모차르트와 인연이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후인 1791년 12월 10일,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거를 추도하는 모임이 열렸다. 친구인 엠마누엘 쉬카네더(Emmanuel Schikaneder)가 마련한 추도 모임이었다. 이 날 모차르트의 유작인 레퀴렘(鎭魂曲)이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레퀴엠의 미완성 부분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완성했다. 쉬카네더는 오페라 마적의 초연에서 파파게노를 맡았던 바리톤 겸 배우 겸 대본가 겸 흥행가였다. 쉬카네더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슈마르크트 길가에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을 방문하기를 권한다. 이 극장의 옛 정문에는 파파게노 모습의 쉬카네더와 '마술피리'에 등장했던 그의 세 아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미하엘러키르헤. 모차르트의 사후 추모음악회가 열려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초연되었다.


- 모차르트분수(Mozart Brunnen) 또는 마술피리 분수(Zauberflötenbrunnen): 4구 뷔덴의 모차르트광장(Mozartplatz)에 있는 분수이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주인공인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가 서 있는 분수이다. 1905년 칼 루에거 시장 시절에 완성되었다. 건축가 오토 쇤탈(Otto Schönthal)이 전체를 설계했고 조각가 칼 볼레크(Carl Wollek)가 조각을 맡았다. 이 분수가 있는 광장의 한쪽에 '뷔덴 프라이하우스 극장'(Freihaus-theater auf der Wieden)이 있었다. 1791년 9월 30일에 '마술피리'가 초연되었던 극장이다. 뷔덴 프라이하우스 극장(또는 간단히 뷔덴 극장)은 현재 비엔나 공과대학 도서관 건물이 있는 곳에 있었다.

 

4구 뷔덴의 모차르트 광장에 있는 모차르트 분수(또는 마술피리 분수). 이 주변에 있었던 뷔덴 극장에서 1791년에 '마술피리'가 초연되었다.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이다.


-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다. 1구 알베르티나플라츠(Albertinaplatz) 1번지이다. 저명한 음악사학자인 루드비히 리터 폰 쾨헬(Ludwig Ritter von Köchel)이 살면서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을 정리한 곳이다. 이 집은 원래 알브레헤트 대공의 저택이었으며 현재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쾨헬의 제자였으므로 저택의 몇 방을 쾨헬이 사용토록 한 것이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K(쾨헬)작업을 완성한 쾨헬은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작품에 KV이라는 기호가 붙은 것은 '쾨헬 페어차이히니스'(쾨헬 표지)라는 의미이다.

 

알베르티나 미술관(루드비히 쾨헬이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을 정리하여 쾨헬 넘버링을 한 장소: 미술관이 되기 전에는 알브레헤트궁전이었음. 쾨헬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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