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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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2017. 12. 8.

우리가 몰랐던 모차르트에 대한 이얘기 저얘기


모차르트


-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보다 더 머리가 우수하다는 얘기가 있다. 더욱 창조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차르트는 왼손잡이였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도 왼손잡이였고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루드비히 반 베토벤, 니콜로 파가니니도 왼손잡이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라 베네데티(Nicola Benedetti: 1987-)도 왼손잡이이다.

- 모차르트의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인 '레퀴엠'은 모차르트가 처음에 작곡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누가 의뢰한 것인지 몰랐었다고 한다. 어떤 집사가 찾아와서 자기 주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작곡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의 사후에 프란츠 폰 봘제그 백작이란 사람이 세상 떠난 자기 부인을 위해 레퀴엠을 의뢰한 것이 밝혀졌다. 폰 봘제그 백작은 다른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고서 만들어오면 마치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을 부탁하고서 완성되면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자랑할 생각이었지만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자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러 온 사람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레퀴엠을 찾으로 오자 원래 의뢰한 사람이 폰 봘제그 백작인 것을 알게 되었다. 폰 봘제그 백작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을 자기가 작곡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콘스탄체의 주장에 의해 작곡료 잔금은 지불했다고 한다. 미완성인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비엔나의 미하엘러키르헤에서 초연되었다. 모차르트를 추모하기 위한 음악회로서 친구이며 후원자인 반 슈비텐 남작이 주선했다고 한다.

- 모차르트는 누가 레퀴엠을 의뢰했는지를 몰랐다. 다만, 누군가 자기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레퀴엠을 돈을 주고 작곡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모차르트는 그 즈음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음까지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레퀴엠을 일부러 완성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 미완성의 레퀴엠을 완성한 사람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르였다. 완성된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추모음악회에서 연주되었다. 1848년에는 프레데릭 쇼팽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고 1840년에는 나폴레옹 1세를 파리의 앵발리드에 다시 안치할 때에 연주되었다.


비엔나의 중심가에 있는 슈테판성당(슈테판스돔). 이곳에서 모차르트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은 이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 밀로스 포어맨이 감독한 1984년도 영화인 '아마데우스'에 보면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볼피'(Wolfie)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어느 서류나 자료를 보아도 볼피라는 애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영화가 만든 이름일 것이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풀 네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이다. 그런데 세례받은 이름은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누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annes Chrisostonus Wolfganus Theophilus Mozart)였다. 테오필루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신의 사랑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모차르트는 테오필루스라는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마데우스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모차르트는 언어에 대한 재능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자기의 이름을 편리한 대로 여러 나라 말로 바꾸어 쓰기를 좋아했다. 1770년 이후에는 중간 이름을 아마데우스 대신에 아마데오(Amadeo) 또는 아마데(Amade)라고 쓰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언어 재능을 자기의 이름에 다르게 적용한 또 다른 케이스도 있다. 1791년 프라하에서 자선음악회가 열렸을 때의 프로그램에 적힌 모차르트의 이름은 Gottlieb였다. 글자그대로 보면 '신이 사랑하는(Gott+lieb)'이다. Theophilnus 또는 Amadeus의 독일어 버전이다.


잘츠부르크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모차르트 생가


-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인 41번 K 551은 '주피터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당연히 모차르트가 붙인 제목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주피터라는 제목은 모차르트가 붙인 것이 아니다.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 그리고 임프레사리오로 이름난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모차르트의 사후에 붙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도 더 지나서야 알려졌다.

- 모차르트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유머에 대한 이상한 센스가 있었다. 점잖은 사람들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는 상스러운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면서 좋아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런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모차르트와 식구들은 그런 용어를 쓰는 것이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재미있으라고 썼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얘기였다. 나중에 영국의 극작가들이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아마데우스'라는 극본을 만들면서 상스러운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상당히 사용했다. 마가렛 대처 수상이 그 '아마데우스' 연극을 본 일이 있다. 출연자들은 이른바 네 글자 단어)four-letter words)들을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fuck, shit 등이었다. 대처 수상은 어떻게 저럴수가 있느냐면서 극작가를 비롯해서 주역 배우들을 몹씨 비난하였다. 극단측은 대처 수상에게 '저희들이야 무얼 알겠습니까? 다만, 모차르트의 서한에 그런 단어들이 진짜로 나오기 때문에 인용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모차르트의 임종. 상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실제로 이런 형편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 모차르트는 수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고는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어떤 자필 악보를 보면 여백에 방정식 같은 것을 적어 놓은 것도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특히 황금분할(Golden Section)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고 한다. 황금분할의 수학적인 내용은 여기에서 설명할수가 없지만 그저 대략만 말하자면 황금분할이란 모든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것이라는 이론만 알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황금분할은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에서 널리 찾아 볼수 있는데 모차르트는 그것을 음악에도 적용했다는 것이다. 피아노 소나타에서 그렇고 또한 오페라에서도 그런 경우를 찾아 볼수 있는데 예를 들면 '여자는 다 그래'의 2막 전체가 황금분할을 적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피아노 소나타의 경우를 보면, 피아노 소나타 1번 C 장조의 1악장은 100개의 음표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에는 38개의 음표가, 후반부에는 62개의 음표가 있다고 한다. 두 파트의 음표의 비율은 정확히 1.618인데 이것이야 말로 황금분할의 비율이라는 것이다. 작곡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쉽겠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어려운 설명같아서 생략코자 한다.

-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다섯 곡을 작곡했다. 모두 뛰어나게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다섯개의 협주곡은 주로 그가 19세 때인 1775년에 작곡한 것이다. 불후의 명곡인 다섯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러한 짧은 기간에 작곡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연주회의 스탠다드 레퍼토리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악상을 가다듬고 있는 모차르트


- 플루트는 천사의 악기라고 불리지만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플루트 협주곡을 하나 썼다. 작곡의뢰가 들어와서 어쩔수 없이 작곡했다는 것이다.

- 모차르트는 1778년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 간 일이 있다. 마음에 드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모자의 파리 방문은 힘든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밤이나 낮이나 돈많은 귀족들이 피아노 연주를 해 달라고 부르면 혹시나 좋은 조건의 잡을 구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에서 찾아갔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재잘거리는 중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피아노를 쳤지만 사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연주가 끝나면 Oh, c'est un prodige, c'est inconveivabble, c'est etonnant!(와, 신동이야 신동! 정말 뛰어나네, 대단해)라면서 짐짓 찬사를 보내지만 나중에는 차가울 정도로 Adieu 한 마디도 없이 떠난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배고픈 중에 여관 방에 들어가기도 싫어서 정처없이 거리를 배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파리에서 몇몇 사람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여서 겨우 숙식비를 해결할수 있었으니 가련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결국은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22세의 모차르트는 앞이 캄캄했지만 어찌어찌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고 더 이상 파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힘든 시기였다.

- 쇼팽은 일반적인 핑거링(운지법)으로는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피아니스트들을 아주 골탕 먹이는 핑거링 기법을 늘어 놓은 작품들이 많다. 베토벤도 의도적으로 어려운 핑거링의 곡들을 작곡했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마스터하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니 알아 모실만하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단순명쾌하고 스무스하며 유연성있는 핑거링의 곡들을 작곡했다. 정상적인 핑거링으로 연주할수 있는 곡들이었다. 모차르트는 명랑하고 화려한 피아노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연주자들을 골탕먹이면서까지 기교를 과시토록 하는 것은 싫어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K 331. 3악장 론도 알라 투르카, 일명 터키 행진곡의 도입부 악보. 명랑하고 화려하지만 대단한 기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