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llet Review

劍聖 2010. 12. 7. 23:22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마르첼로 나스트로얀니상’을 수상한 영화 <블랙 스완>과 탄광촌 소년의 ‘드림 컴 트루’인 뮤지컬과 영화 <빌리 엘리에트>에 모티브를 제공하는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 <백조의 호수>가 이번 겨울에도 어김없이 관객을 찾아왔다. <백조의 호수>는 <호두까기 인형><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더불어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명곡이다. 국립발레단이 공연하는 이번 <백조의 호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하는 로열발레단 버전(새드 버전)이 아닌 지그프리트와 오데트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볼쇼이 버전(해피 버전)을 선보인다. 올해 국립발레단이 선보이는 <백조의 호수>의 캐스팅은 별들의 잔치라 불려도 무방하다. 두말이 필요 없는 에이스인 김주원과 김지영을 비롯하여 <라이몬다>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알렉산더 볼치코프와 이번 공연을 통해 국내 무대에 처음 데뷔하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퍼스트 솔로이스트 최유희가 공연한다.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 내용 분석은 정신분석으로 바라볼 때 흥미로운 관점이 도출되는 발레이다. 이 내용 분석은 프로이트와 라캉과 더불어 융의 개념으로 설명하되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을 위주로 분석할 것이다 (로드발트와 오딜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다른 자아’로 해석하는 이 글의 정신분석은 필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인간성의 양면으로 바라보는 악마 로드발트와 그의 딸인 흑조 오딜을 정신분석으로 해석함을 밝힌다).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백조의 호수>에서 악마 로드발트의 위상을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지그프리트 왕자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마로 그리고자 한다. 1막 1장에서 지그프리트의 성년식에 초대 받은 여인들은 축배의 춤을 출 때 지그프리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만 지그프리트에게는 이들에겐 추호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지그프리트에게는 자신만이 꿈꾸는 사랑의 로망이 있지만 왕궁 안의 여인을 통해서는 순수 사랑이라는 로망을 충족시킬만한 여인이 보이지 않는다. 로드발트는 사랑의 로망을 충족시켜줄만한 여인을 찾을 수 없는 지그프리트의 심리적 아포리아를 이용한다. 지그프리트를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마법에 걸린 백조 여인들을 보여준다. 이 여인들 가운데서 지그프리트는 자신의 사랑의 로망을 충족시킬 아름다운 여인 오데트를 만나고 이내 사랑에 빠진다. 2막에서 나타나는 백조의 호숫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절망하던 지그프리트의 ‘연애 로망’이 오데트를 만나 실현되는 상상계의 공간이다. 지그프리트의 현실에 상상계가 침투하고 실현된다. 지그프리트의 사랑의 로망은 이상형의 여인 오데트를 만남으로 현실화한다.

 

 

 

과연 악마 로드발트는 지그프리트의 연애 로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랑의 전령인가? 만일 이 역할에 머무른다면 로드발트는 더 이상 악마가 아니다. 악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이루어주는 초자연적 존재이다. 백조의 호숫가는 로드발트에게 저주 받은 호수가 아니라 지그프리트의 판타스마고리아를 현실 가운데서 충족시켜주는 장소로 승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로드발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로드발트는 지그프리트의 이상형인 오데트를 왕궁이 아닌 백조의 호숫가라는 외부에서 찾게 만들어주는, 지그프리트가 의식 세계 가운데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다른 자아로 관찰해야 한다. 왕궁에서 해결되지 않던 낭만 연애 로망이 로드발트라는 다른 자아에 의해 성취되기 때문이다. <루시드 드림>의 주인공 최현석의 다른 자아가 살인범 이동원인 것처럼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에서 로드발트는 다른 버전의 <백조의 호수>와는 달리 지그프리트의 다른 자아로 바라보아야 한다.

 

2막 2장에서 지그프리트와 로드발트의 대결 구도 역시 기존 <백조의 호수>와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봄이 마땅하다. 즉 지그프리트와 로드발트라는 각기 다른 ‘두 인격체의 대결’이 아니라 지그프리트 안에서 펼쳐지는 선과 악이라는 ‘두 자아의 대립 구도’라고 보아야 한다. 자아들이 상호 충돌을 일으키는 장이 2막 2장이다. 지그프리트와 로드발트가 대결할 때 악마의 힘을 지그프리트가 당해낼 수 없었던 데에는 로드발트가 지그프리트 안의 부정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지그프리트 안에서 일어나는 두 자아의 대립은 오데트라는 외부인 ‘타자’의 개입이 있어야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로드발트를 지그프리트의 부정적인 자아로 바라볼 때 백조 오데트와 상반되는 캐릭터인 흑조 오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기존의 <백조의 호수>에서는 악마 로드발트와 그의 딸인 흑조 오딜을 백조 오데트와는 별개의 인물로 간주해서 바라보는 것이 정석이다. 하나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는 로드발트만 지그프리트의 부정적 자아로 바라보지 않고 오딜 역시 부정적 자아로 바라본다. 흑조 오딜을 융의 관점으로 볼 때 지그프리트의 무의식 안에 숨겨진 ‘아니마’로 바라본다면 오딜은 지그프리트의 부정적 자아인 로드발트의 연장선 상에서 오데트를 바라보되 1막 2장처럼 지그프리트가 바라본 것처럼 순수한 오데트로 바라보지 못한다. 지그프리트의 무의식 가운데서 아니마로 투사하여 바라보는 오데트로 유추해야 한다. 이 때 지그프리트의 아니마는 순수한 사랑으로 표상되는 아니마가 아니라 로드발트라는 부정적 자아가 끼어듦으로 오데트를 흑조 오딜로 잘못 투사하게 된다(오딜은 로드발트처럼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아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오딜은 2막 1장의 여러 사람 앞에서 엄연히 실존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백조의 호수>는 정신분석으로 바라볼 때 영화 <아이덴티티>처럼 자아와 다른 자아와의 투쟁(지그프리트 對 로드발트)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존 <백조의 호수>와는 관전 포인트가 달라지는 것이 틀림없는 발레이다.

 

<백조의 호수>는 수많은 안무자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탄생했지만 다른 <백조의 호수> 버전과 달리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은 1막과 2막에 추가된 ‘악마와 왕자의 남성 2인무’와 '광대의 36회전', 그리고 ‘궁정의 왈츠군무’ (어떤 관객은 이 부분 때문에 그리가로비치 버전을 택한다), 2막에서 각 나라 공주의 춤에 새로 삽입된 '러시안춤'과 기존 버전보다 솔리스트들의 기량이 더욱 보강된 민속춤의 묘미는 주역의 춤이나 백조 군무 못지않게 관객들의 많은 박수를 받는 부분이다. 1막에 나오는 광대의 32회전 기교도 볼만하지만 2막 1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32회전의 푸에테는 발레리나가 구사하는 기술 중 최고의 기술이다.

 

(사진 출처: 국립발레단. 본 사진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복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