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ie Review

劍聖 2011. 2. 19. 01:20

 

뉴욕시립발레단의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일갈하면 토마스(뱅상 카셀)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집약할 수 있다. “넌 재능은 있는데 겁쟁이야!” 니나는 백조인 오데트를 연기함에 있어 더할 나위없는 발레리나다. 교과서적인 테크닉을 정석으로 구사하는 니나는 정형화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지식한 캐릭터다. 하나 이런 니나는 흑조인 오딜을 맡기에는 폭발적인 감정적 연출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약점을 가진다. 이런 니나가 오데트 뿐만 아니라 오딜이라는 양면적인 캐릭터를 발탁 받는 시점으로부터 플롯은 갈등을 촉발하기 시작한다.

 

사실 니나는 흑조 오딜의 역할을 맡기에는 부적합했을지 모른다. 발레리나로서의 감정 발산이 반드시 실제 삶의 패턴과 결부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흑조의 배역을 맡기에는 너무나도 고지식한 삶을 영위한다. 낮에는 발레리나로 충실하고 밤에는 착한 딸의 역할에 충실하다. 일탈 혹은 삶에 있어 전환점을 구현할 만한 터닝포인트의 여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니나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는 오데트라는 백조의 자아에 가깝지 오딜이라는 부정적 흑조같은 자아는 애당초 결핍되어 있다.

 

고지식하고 착한 니나가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프리마돈나로 발탁되는 시점으로부터 니나의 자아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니, 엄밀히 표현하면 니나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또 다른 자아 alter Ego 의 존재를 발견한 셈이다. 애초부터 니나 안에서 부재하다시피 했던, 결여된 니나의 부정적 자아가 수면 위로 급격하게 떠오른다. 흑조 오딜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테크닉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니나가 흑조를 온전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적인 자아, 즉 니나의 부정적 자아를 니나 스스로가 수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판가름 난다. 영화의 동선은 니나가 부정적 자아를 대하는 자세와 부정적 자아를 받아들일 공간 확보를 위해 어떤 변화를 시도하는가를 사이코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치밀하게 보여준다. 우선 심리적 양태 중 니나가 부정적 자아를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변화를 시도하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맨 먼저 니나는 일탈을 꾀한다. 첫 번째는 어머니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이다. 니나의 어머니 에리카는 니나를 임신하면서 발레리나로서의 인생은 접고 만다. 이후 에리카는 니나를 발레리나로 성장시키되 자신이 규정한 울타리 안에서 딸 니나를 간섭하고 옭죄게 된다. 니나를 보기 위해 니나를 방문한 발레리나에게 니나가 없다고 거짓말하고 돌려보내고자 하고, 니나의 생채기 자해가 안쓰러워 과년한 딸의 손톱을 직접 깎아주기도 한다. 니나는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할 나이가 지났건만 에리카에게 있어 온실 속 화초다. 딸을 임신함으로 자신이 못다 이룬 발레리나로서의 꿈을 니나를 통해 대리 구현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욕구가 강렬하기에 딸 니나는 위험에 노출될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리카가 규정한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기에 자아의 독립은 이룰 수 없다. 하나 흑조 오딜의 배역까지 맡게 된 니나는 어머니로부터의 정신적인 독립을 꿈꾸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규정해놓은 울타리를 걷어차기 시작하고 이는 니나의 자아 안에서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어머니 에리카가 점유하던 정신적 공간의 축소를 의미한다. <블랙 스완>에서 보여지는 에리카와 니나 모녀의 심리적 다툼은 이렇게 니나의 심리 가운데서 벌어지는 자아 공간의 영유권 다툼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두 번째 일탈은 니나 자신의 일탈이다. 두 번째 일탈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어머니라는 규범화로부터의 자유가 전제한다. 어머니 에리카에 의해 규범화된 삶을 살아가는 니나와는 달리 니나의 대역으로 발탁되는 릴리는 니나와는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발레리나답지 않게 기름진 음식을 먹기도 하고 술집에서 스스럼없이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기도 한다. 규정화된 틀 안에서 육체와 정신을 방만함에 길들이지 않던 니나가 보기에 릴리는 스타일이 정반대다. 한데 릴리의 자유분방함을 통해 니나는 정신적 자유로움을 맛본다. 기존의 육체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릴리를 통해 제공받는다. 규범화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니나 자신이 모르던 육체의 쾌감에 눈을 뜨기도 하고 죄의식의 완화를 맛보기도 한다. 일탈을 통해 기존에는 알지 못하던 쾌락 기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니나는 자신이 알지 못하던 또 다른 자아를 받아들임에 있어 한결 관대해질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게 된다.

 

니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일탈의 허용은 니나의 부정적 자아에 힘을 더해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일탈이 거듭될수록 니나가 자기 자신의 환영을 보는 빈도도 잦아진다. 욕실 안에서나 연습실 곳곳에서 자신과는 또 다른 니나가 시시때때로 출몰한다. 하지만 니나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 화해하는 방법을 모르고 통합하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엄밀히 표현하면 니나는 또 다른 자아를 적대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 후반부까지 무던하게 애를 쓴다.

 

하지만 니나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끝까지 대립각을 내세웠을 때 <블랙 스완>은 니나가 치러야 할 대가를 예술혼의 완성이라는 맥락에서 극적으로 묘사한다. 필자가 영화의 마지막을, 또 다른 자아와의 통합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대립 구도로 바라보는 관점은 여태까지 기술한 니나의 심리적 변화와는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니나의 일탈 과정과 어머니 에리카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은 <블랙 스완>의 중반부까지 볼 때 또 다른 자아인 부정적 자아를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니나의 노력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나 이러한 니나의 심리적 동선 변화에도 불구하고(또 다른 자아를 받아들일 자아 공간의 확보를 위해 어머니 에리카의 공간을 니나가 자기 자신의 자아 안에서 밀어내었고 또 다른 자아의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 줄 여지를 꾸준히 니나가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스완>은 자아의 통합이 아닌, 니나의 기존 자아가 또 다른 자아와 치열하게 투쟁하는 투쟁의 장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니나는 자신의 다른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배척하고자 했으나 또 다른 자아와의 대립이라는 치열한 투쟁은 마침내 니나가 꿈꿔왔던 발레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영화를 보고나면 영화의 제목 자체가 변형된 스포일러라는 점을 깨닫게 되리라). 더불어 자아와 또 다른 자아와의 투쟁은 판타즘이라는 방식으로 니나의 육체마저 지배한다. 판타즘으로 니나의 육체를 지배하는 방식을 보노라면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