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무악극·창극 Review

劍聖 2011. 7. 12. 09:30

<화선, 김홍도>는 영화 <취화선>과 동일한 방식의 동선, 즉 장승업의 예술가적 생애를 담아내는 방식의 동선을 추구하지 않는다. <취화선>,<아마데우스>와 같이 예술가적 생애를 전기적으로 묘사하는 가무악극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화선, 김홍도>에서는 어떤 동선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가. 김홍도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행간의 미’를 반추한다. 김홍도가 그린 그림 속의 18세기 당시 민초들의 삶을 무대를 통해 되살림으로 <장터길>,<대장간>,<씨름>과 같은 그림 가운데 녹아있는 ‘행간의 미’를 관객은 시각적, 더불어 청각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러티브 방식이 인물 혹은 전기적 생애 묘사가 아닌 김홍도의 그림 속 ‘행간의 미’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 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사내인 손수재와 김동지는 스토리텔러가 된다. <전우치>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두 사람은 단원의 그림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단원의 풍속화들은 고유한 사연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단원의 <씨름>을 음미하되 씨름터 속 씨름장사와 한 판 겨뤄보기도 하고 <무동>을 음미하면서 우리 가락에 절로 흥겨워지기도 한다.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김동지와 손수재는 단원을 찾기 위해 단원의 풍속도 안에서 여행을 겪는다. 한데 단원의 풍속도 안에서는 스토리텔러를 위협하는 위험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원의 풍속화는 김동지와 손수재 두 인물에겐 상상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상계 안에서는 바라보고 싶은 대상이 투사될 따름이지 위험 요소는 상존하질 않는다. 김동지와 손수재의 여정 가운데에서 여행은 있되 고난이 없음은 단원의 풍속도 가운데서 스토리텔러가 겪는 일련의 여정이 상상계임을 의미한다.

 

단원의 풍속도라는 초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실마리가 되는 핵심 인물 김홍도를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두 스토리텔러는 마침내 단원을 찾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회귀’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하나 이들은 현세로 돌아오기를 선뜻 주저한다. 이는 단원의 풍속화가 스토리텔러에게 왜 상상계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두 번째 반증이다.

 

김동지와 손수재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음에도 현세로 돌아오길 그리 원치 않는다. 이는 두 스토리텔러가 현실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인물과 조우하기 때문이다.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김동지는 작고한 어머니와 만나고 손수재는 그토록 연모하던 여인 연이와 만난다. 이들이 순순히 현실로 회귀한다면 어머니와 연이와는 영영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때문에 생전에는 다시 볼 수 없는 이들과 극적으로 상봉하는 스토리텔러는 상상계에서 현실계로의 회귀를 주저하고 만다.

 

여정은 있되 위험은 부재하고 현세에는 없는 이들과의 극적인 만남은 단원의 풍속도가 김동지와 손수재에게 있어 상상계임을 반증하는 사례다. 그렇다면 단원의 상상계는 관객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관객으로 하여금 풍속화 속 ‘행간의 미’를 레치타티브와 판소리와 같은 우리 가락, 우리 춤사위로 감상하게 만드는 묘미를 지닌다.

http://olpost.com/v/2370341

 

(사진 출처: 국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