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ie Review

劍聖 2012. 1. 3. 09:32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여주인공 리스베트(루니 마라)는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생이었을 12살 때 아버지를 불에 그슬린 전력을 갖고 있는 아가씨다. 복지국가 스웨덴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리스베트를 모른 척 하고 있지 않고 후견인이라는 제도 아래 묶어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정기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끔 하면서 동시에 후견인의 보호 아래 있게끔 만든 게다.

 

하지만 리스베트를 위한 제도적 장치인 후견인 제도는 도리어 그녀를 옭좨 맨다. 리스베트의 후견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병상에 누워 있는 후견인을 대신하여 새로운 법적 보호 변호사인 닐스(요릭 밴 와게닌젠)가 선임된다. 리스베트는 돈을 벌어도 그녀가 직접 돈을 관리하지 못한다. 후견인이 승인을 해야 돈을 만질 수 있다. 자기의 돈을 자기가 쓰려고 해도 맘대로 지출하지 못하고 후견인에게 반드시 허락을 얻어야만 하는 후견인이라는 보호 장치가 리스베트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닐스는 지출 각서를 빌미로 리스베트에게 오럴 섹스를 강요한다. 화장실에서 구토하는 리스베트. 닐스의 만행은 이 수순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녁 식비를 승인받기 위해 전화한 리스베트에게 닐스는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닐스의 집에 들어온 리스베트를 목 졸라 실신시킨다. 이윽고 의식을 찾은 리스베트, 한데 들어올 때 입었던 옷이 하나도 없다. 알몸으로 침대 위에 엎드려 묶여 있다. 저녁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법적 보호 변호사의 사인이 필요했던 리스베트는 정욕에 눈이 먼 닐스라는 색마에게 유린된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리스베트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후견인 제도는 이를 악용한 짐승 같은 닐스에게 악용된다. 보호해야 할 약자를 위해 고안한 장치가 실은 약자의 약점을 비수 같이 파고든다는 역설이다.

 

리스베트의 사례처럼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가장 안전하다고 믿은 것이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돌변하는 두 얼굴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가족주의는 어떠한가? 디즈니 계열의 영화는 물론이려니와 헐리우드의 여타 영화들이 철석같이 옹호하는 가족주의조차도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차갑게 조롱한다(참고로 영화의 원작은 미국이 아니라 스웨덴 소설이다).

 

 

스웨덴의 최고 재벌 방예르 그룹의 총수인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는 40여 년 전 사라진 손녀의 행방을 밀레니엄의 발행인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의뢰한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에 의해 드러난 손녀의 실종 뒤에 숨겨진 전말은 헐리우드의 철옹성 같은, 가족주의라는 가치관 수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참혹하기 그지없다. 가족주의라는 제일 명제는 손녀의 실종 사건이 밝혀지면서 처참하게 도륙하고 유린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안전하게 여긴다는 마지노선이자 최후의 보루인 가족마저도 믿을 게 되지 못한다는 몸서리처질 잔인함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그 잔인함과 몸소 마주쳐야 한다. 그게 밀레니엄의 세계관이니까.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메커니즘에 포획된 피해자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후견인 제도 혹은 가족주의와 같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던 메커니즘이 실은 알고 보면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돌변해버리고 마는 ‘가치관 전복’을 영상으로 설파한다. 가족주의의 붕괴를 하나만 더 언급하겠다. 초반에 리스베트가 아버지를 불에 그슬린 건 단지 리스베트가 어릴 적부터 미쳐버렸기 때문일까? 아버지의 학대를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불에 그슬린 게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 이전에 가족주의 안에서 이미 폭력이 군림하고 있었다.

 

여자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는 러닝 타임 내내 이어지는 화두로 작용한다. 더불어 1편인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시리즈에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질문이다.

 

문제는, 이런 여성의 억압이 스크린 안에서만 혹은 소설 안에서만 행해지던가? 스크린 또는 소설 안이라는 가상의 터울 안에서만 이뤄지면 좋으련만 저 멀리 지구 반 바퀴에서 들려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성매매를 거부했다는 이유 때문에 화장실에 6개월 동안이나 감금된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고 손가락은 부러지고 눈은 퍼렇게 멍든 사하르 굴(우리나라로 치면 중학생에 해당하는 불과 15세의 미성년자다)의 비참한 이야기는 남성 중심의 메커니즘 앞에 굴복당하는 여성 잔혹사다.

 

유태인은 20세기 중반에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은 남성이 만든 아우슈비츠에 갇혀 21세기에도 신음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닐스에게 능욕당하는 리스베트, 비뚤어진 가족주의에 의해 사라져간 헨리크의 손녀 하리에트, 그리고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의 사하르 굴이 들려주는 신음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여성 혹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가운데 드러나는 처참한 디스토피아다.

 

흥미있게 읽고갑니다.
명절에 싫었던 기억에
집안 어른들이 여자는 집안일 잘 배워 시집가야한다고
그릇에 예쁘게 담는 연습삼아 해보라고 할때였다.
남자는 그럼 집안일 안하고 여자 부려먹기만 할건가?
내가 나이들어서도 남자들이 바뀌지않는다면 그건 절망적인걸 그랬다.
요즘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봉급은 남성대비 50~75% 정도다. 고위층으로 갈수록 승진은 힘들다.
맞벌이여도 여자가 살림하고 남자는 도와준다는 인식이 많다.
무슨 관계든 상생이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