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ical Review

劍聖 2012. 1. 10. 08:57

<눈의여인>은 극작가 안지운이 정유란에게 헌사하는 대본을 안지운의 친구와 지인에게 재연하는 극중극의 형식을 갖는다. 안지운의 대본 가운데 초반부 설정은 다음과 같다. 어느 시골 마을에 사랑하는 두 연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가씨밖에 모르던 젊은 남자는 돌연 나타난 아름답고 세련된 눈의 여인에게 홀려 사랑하는 연인을 망각하고 눈의 여인을 따라 도시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고 눈의 여인을 따라가는 남자를 사회적 관점으로 조망하면 자본주의, 배금주의에 경도된 세태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다.

 

농경 사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도회지의 화려함과 세련미,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를 눈의 여인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경도되어 정신적 위안, 만족보다는 물질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배금주의적 세태를, 눈의 여인을 따라 도시로 흘러들어가는 시골 청년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알레고리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눈의여인>을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관점이기에 필자는 다른 프리즘으로 접근코자 한다. 왜냐하면 눈의 여인을 배금주의라는 알레고리로만 바라보다보면 다른 캐릭터, 예를 들면 눈의 여인에게 빼앗긴 연인을 찾기 위해 가수가 되는 아가씨를 분석함에 있어, 그리고 대본 밖에 있는 실제의 인물들, 가령 안지운이라던가 정유란, 황유식과 같은 캐릭터를 분석하기에는 분석적 한계가 따르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이 될 수 있는 프리즘은 과연 무얼까? 철학적인 관점으로 조망하면 <눈의여인>은 시뮬라크르에 잠식당하는 현실의 층위로 분석 가능하다. 안지운이 사랑하는 여인인 정유란을 위하여 집필한 대본은 어디까지나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층위에 불과할 따름이다. 헌데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안지운의 대본은(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안지운이 속한 현실의 층위에 지각 변동을 발생시킨다. 안지운이 정유란과 황유식, 송보람에게 들려주는 대본 속 이야기는 안지운의 이야기 안에만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정유란과 황유식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윤색하고 각색하기를 바란다. 안지운의 대본에 자신의 관점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시뮬라크르를 변형시키는 일련의 과정들 가운데서 현실 속 인물들이 교란을 일으킨다.

 

안지운의 대본 속에서 눈의 여인에게 연인을 잃어버린 시골 아가씨는 연인을 되찾기 위해 도회지로 상경한다는 설정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녀는 자신이 유명세를 타면 자신의 유명세로 눈의 여인에게 빼앗긴 연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가수가 되길 희구한다. 이윽고 기획사에 소속되어 유명 가수가 된 그녀, 하지만 안지운의 이 대본을 황유식은 영화감독답게 대중이 원하는 코드로, 흥행성을 보장하는 코드로 안지운의 대본을 바꾸기를 바란다. 소속사 대표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프로포즈하기 시작한다는 설정으로 말이다. 삼각관계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안지운이 원하던 각본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 속 인물들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안지운의 각본을 각색하고 윤색한다.

 

정유란과 황유식이 자기들 멋대로 각색하는 대본을 안지운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일부 대본은 이들의 요구에 수긍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창의성을 훼손하는 수위의 각색은 안지운이 참지 못한다. 안지운이 아무리 정유란을 사랑하더라도 정유란의 각색으로 창의성이 빛을 잃는다면 안지운은 참지 못한다. 실제 세계 가운데의 안지운과 정유란 두 사람의 관계는 대본의 창의성과 각색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변형에 의해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둘은 처절하게 싸우고 자신의 마인드를 상대에게 관철시키기를 원한다.

 

어디 이들뿐인가? 대본이라는 시뮬라크르는 안지운과 그를 존경하는 송보람의 관계마저도 굴곡지게끔 변질시킨다. 대본 하나가 안지운과 정유란, 그리고 안지운과 송보람을 균열 가운데로 밀어붙인다. 시뮬라크르가 현실 속 인물의 관계를 교란하고 분열시킨다. 가상이라는 층위에 머무르길 거부하고 현실의 층위를 교란하고 영향을 미친다. 시뮬라크르라는 가상의 층위가 현실을 교란할 뿐만 아니라 잠식 현상마저 부추기는 현상을 <눈의여인>을 통하여 분석 가능하다. 가상이라는 층위가 현실 가운데로 침투하는 시뮬라크르는 TV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만 관찰 가능한 게 아니다.

 

(사진: 극단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