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ie Review

劍聖 2012. 3. 29. 00:23

요즘 드라마 속 사극은 정통 사극이 아닌 퓨전 사극이 대세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더라도 사실에 근간을 두지 않고 작가의 상상력이 역사라는 사실 속에 풍부하게 곁들여진다. <타이탄의 분노> 역시 마찬가지다. 크로노스의 세 아들이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라는 점과 제우스의 아들이 페르세우스와 군신軍神 아레스라는 점, 포세이돈의 아들이 아게노르라는 정도를 제외하면 <타이탄의 분노>는 ‘정통 그리스 신화’가 아닌 ‘퓨전 신화’다.

 

먼저 페르세우스의 아들로 나오는 헬리오스를 보자. 헬리오스는 페르세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태양의 신 히페리온의 아들이다. 전쟁의 여왕으로 나오는 안드로메다는 싸움 잘하는 건 고사하고 페르세우스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지는 카시오페이아의 딸이다. 전편인 <타이탄>의 후반부에서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빠졌던 안드로메다를 떠올리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 안드로메다의 모습과 가깝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소인 괴물 미노타우루스는 영화처럼 타르타로스의 미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라비린토스 안에 있어야 정답이다. 아레스가 헤파이스토스에게 해코지하는 것도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는 아니다.

 

제우스의 아들인 군신 아레스는 요 근래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영화에서 우호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신들의 전쟁>에서는 신들의 계율을 어기고 인간 세계에 개입하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맞아죽더니 이번에는 아버지를 반역하는 패륜아로 등장한다. 하긴 그리스 신화에서도 아레스는 군신의 체면을 유지하지 못한다. 군신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아테나에게는 백전백패하질 않나, 심지어는 디오메데스나 헤라클레스에게도 꼬리를 내리니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읽어보기

<타이탄의 분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버지와 아들 신 사이에서 증오를 이끌어내고 이 증오가 이야기의 동선을 이끌어간다. 아버지 신인 크로노스와 아들 신인 제우스가 앙숙인 건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제우스를 위시한 아들 신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를 유폐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나 영화나 똑같다.

 

<타이탄의 분노>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반복되는 구조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아들인 아레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다. 하나 <타이탄의 분노>에서는 아레스가 제우스를 배신하고 타르타로스의 미로 안으로 아버지를 유폐시킨다.

 

제우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저지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아들에게 되받는 셈이다. 아버지 제우스가 할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저지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인 아레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똑같이 행함으로 대를 이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는 셈이다.

 

페르세우스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진 않다. 아버지 제우스의 편이 되어 크로노스에게 맞선다는 설정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맞서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따라서 이는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조는 약간 다르다. 대를 이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일어나는 건 맞다. 하지만 맨 처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일으키는 건 제우스가 아니라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일찍이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낸 전력이 있다.

 

이에 그리스 신화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이는 영화와는 차별되는 구조다. 아레스의 할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증조할아버지 되는 우라노스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저지른다. 이는 다음 대에서 아버지 제우스가 할아버지 크로노스를 거세하고 유폐함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반복한다.

 

영화 속에서 아레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품는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제우스가 배다른 아들인 페르세우스를 자신보다 편애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읽어보기

더 이상 신들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다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신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우스가 서서히 힘을 잃는 건 인간 탓이 크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지 않음으로 신은 힘을 잃어간다.

 

이는 기존의 신 관념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개념이다. 자고로 신이라면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 주었지 인간에게 영향을 받지 않아야 정답이지 신이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건 전통적인 신 관념과는 배치되는 일이다. 하지만 <타이탄의 분노>에서 신이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플롯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과정철학으로 보면 신이라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건 전통적인 신 관념이다. 하지만 과정철학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이라 하더라도 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다.

 

이를 쉽게 풀이해보자. 아기는 부모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아기가 ‘피조물’이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에 있어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영화관에 가서 데이트할 수도 있고 잠도 푹 잘 수 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긴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관에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아기가 울음보를 터트리면 단잠을 깨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신’인 부모는 ‘피조물’인 아기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타이탄의 분노>에서 제우스가 예전의 힘을 되찾을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인간이 하는 행동이 어떠하냐에 따라 신의 힘이 강해지느냐 약해지느냐를 결정하는 <타이탄의 분노> 속 이야기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신 관념과는 반대되는 과정철학의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