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Review

劍聖 2012. 4. 18. 11:34

처가살이의 유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었다. 고려시대를 훨씬 넘어서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졌으니 말이다. 결혼한 남자가 처가 식구와 더부살이하는 전통은 천 년 이상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 처가살이가 조선시대 들어서서는 시집살이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내의 집안에서 남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남편의 집 안으로 들인다.

 

 

이는 거주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아내가 시집살이를 한다는 건 가부장이라는 메커니즘 아래에 여자가 종속된다는 걸 뜻한다.

 

‘열녀’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열녀는 조선 시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세상을 뜨면 다른 남성과 다시 결혼할 수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부재의 상황이라면 여자는 결혼한 몸일지라도 시댁에 묶이거나 정절의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다른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 여자가 다시 시집갈 수 있는 ‘재가’의 기회는 봉쇄당한다. 바로 ‘열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다. 아내는 ‘일부종사’를 통해 성적 선택의 기회를 평생 한 남편에게만 의탁해야 한다. 만일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옛날 고려 시대처럼 다시 시집갈 엄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열녀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자의 성을 남성 혹은 남자의 가문에 얽어맸기 때문이다.

 

성적 평등을 고려한다면 열녀 이데올로기는 아내에게만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남편에게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열부’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열부라는 개념은 조선 시대 바로 전 시대인 고려 시대에서야 찾을 수 있다. 바로 ‘의부’를 통해서다. 의부는 아내가 세상을 뜨면 다시 결혼하지 않았던 남편이다. 고려 시대에는 의부라는 개념이나마 있었지만 조선 시대 들어서는 의부 혹은 열부라는 개념이 휘발하고 만다.

 

이 지점으로부터 성적 불평등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한 남성에게만 정절을 다해야 하지 혹여 그 남편이 죽는다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 시대 남편에게는 여자처럼 정절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이혼도 가능할뿐더러 아내 외의 다른 여자인 첩도 합법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기생은 어떠한가. 기생은 단지 양반의 술자리에서 가무를 통해 흥을 돋워만 주는 여자는 아니었다. 남편은 아내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으로 ‘딴 짓’을 할 수 있었다.

 

열녀라는 잣대는 아내를 가부장이라는 메커니즘 안으로 포획하기 위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지 여성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인 강명관 교수는 지적한다. 조선이 만들어지면서 성리학을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남성은 가부장적 사회의 완성을 위해 여성에게 열녀라는 윤리관을 덧입히고 이를 통해 여성을 종속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

분명 <열녀의 탄생>은 인문학으로 바라보는 ‘여성 잔혹사’다. 국가 및 남성이 결탁하여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의 이데올로기를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오백여 년에 걸쳐 여성에게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게끔 만들었다는 강명관 교수의 의견에는 십분 동의한다. 옛 사료를 하나하나 뒤져가며 저술한 땀의 흔적이 배어 있는 책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책은 두 부분에 있어서 난맥을 품고 있다.

 

<열녀의 탄생>에 있어 첫 번째 지적할 점은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은이가 한문학자 교수이기에, 저서 자체가 옛 문헌에 의존하기에 용어 가운데에서 한자어가 많이 섞일 수밖에 없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책 속의 한자어를 독자를 위해 요즘의 우리말로 옮겨 기술하는 친절함에 있어서는 그 노력이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몇몇 단어만 예를 들어보자. 책 속의 한자어 ‘하종’은 남편을 따라 죽는다는 뜻으로, ‘피로’라는 단어는 적에게 붙잡혔다는 개념으로, ‘췌언’은 쓸데없는 말로, ‘임병양란’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전쟁으로 풀이해서 쓰기만 했더라도 읽기가 한결 쉬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쓰는 데 있어서만큼은 소홀히 하고 있다.

 

둘째로는 열녀와 성폭행을 비교하는 부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열녀는 왜적의 성폭력을 피해 자결하거나 혹은 격렬히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는 왜적의 손에 열녀가 어떻게 죽어갔는가 하는 것을 잔혹하리만치 묘사하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왜 잔혹한 살육을 묘사함에 있어 순화하지 않고 도리어 적나라하게 묘사했을까? 저자는 이를 두고 왜적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려는 의도로 파악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잔혹성을 강조하는 묘사 속에 숨겨진 의도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의 열녀 편에서도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부분인지라 이에 대해 반박하진 않겠다.

 

하지만 성폭행을 피해 열녀가 자살하거나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저자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의식화의 결과라고 보는 관점은 논리를 비약시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요즘의 여성도 강요된 성폭행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성폭행을 시도하는 강간범을 뿌리치려 하는 건 동양과 서양, 옛날과 지금을 막론하고 여성에게 있어 공통된 반응이다.

 

굳이 가부장제의 강요가 아닐지라도 피치 못할 상황이라면 엄한 남자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극한 경우에 있어서는 자결할 수도 있는 것이 보편적인 여성의 심리다. 일전에 모로코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에게 결혼을 강요당한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저자는 왜적의 성폭행을 피해 열녀가 자살하거나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는 것을 두고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지키기 위하여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폭행 당하고 싶지 않은 여성의 보편적인 심리를 저자가 남성 이데올로기로 재단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국가-남성의 이데올로기에 아녀자를 포획하려 열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는 십분 동의한다. 또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도’의 열녀 편에서 두드러지게 묘사한 열녀의 죽음을 묘사함에 있어 참혹한 묘사는, 왜적의 잔혹함을 고발하기보다는 여성이 성적으로 남성에 종속되었음을 은연중에 아녀자에게 강요하려는 의도된 편집이라는 관점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여성이 왜적의 성폭행을 피하기 위해 자결을 택하거나 끔찍하게 죽어가는 열녀의 모습을 국가-남성의 이데올로기 안으로 굴절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논리적 비약마저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이는 결론을 미리 맞춰놓고 역사적 사료가 저자가 미리 마련한 결론에 해당한다고 강요하는 논리적 비약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진: 돌베개)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블로거님과 조금 다른 생각이 있어 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어 댓글남깁니다^^저자가 '성폭행을 피해 열녀가 자살하거나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가부장제에 의하여 강요된 의식화의 결과'라고 하셨고 지금 블로거님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요. '저항'에 초점을 맞추기 보단 '자살'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보면, '저항'은 당연한 행동이지만 '자살'은 남성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란 것입니다. 현대와 비교했을 때 성폭행은 피해자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폭행의 한 종류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해야한다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단지 폭행의 한 종류가 아닌 정절과 처녀성(이는 남성들에 의해 강요된 것입니다)을 잃었다고 생각했기에 자살한 것입니다. '성폭행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여성의 보편적인 심리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들의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행동이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블로거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