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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聖 2012. 6. 6. 11:01

6월 4일 방영된 <힐링캠프>에서 법륜스님과 관련한 인터뷰는 거시적으로 분류하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인도의 빈민 어린이를 향한 구호의 손길, 두 번째는 북한의 빈민 참상을 언급하며 동시에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한 내용, 세 번째로는 법륜스님의 전매특허인 ‘즉문즉답’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즉문즉답’을 제외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층위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법륜스님과의 인터뷰 가운데 첫 번째로 방영된 이야기는 인도의 빈민 어린이를 위한 구호 활동이다. 법륜스님은 “도움을 바라는 어린이를 위한 구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구제를 받는 아이가 거지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구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아이가 구호의 도움만 받는다면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 거지를 면키 어렵다는 이야기다. 주긴 주어야 하는데 거지가 되지 않을 만큼만 주어야 한다.

 

이 부분 만큼에 있어서는 제프리 삭스가 주장하는 ‘원조의 물량공세’를 배격하는 의견이다. 제프리 삭스는 주장한다. 최빈국이 가난을 면하려면 그 나라에 대대적인 도움을 제공할 때에야 가능하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제프리 삭스가 주창하는 공급론 방식의 원조에 관하여 법륜스님은 경계한다. 물고기가 필요한 어린이에게 물고기를 낚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물고기만 준다면 그 아이는 커서도 물고기 잡는 법을 모른 채 물고기만 바라는 형국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인도에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법륜스님은 학교를 세움으로,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배움의 기회를 얻음으로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인도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트 제도가 폐지된 나라다. 하지만 카스트에 대한 뿌리 깊은 전통을 제거하지 못한 나라다. 공식적인 4계급 가운데 가장 하위계급인 ‘수드라’에도 속하지 못하는 계급이 있다. ‘달리트’라고 일컫는 불가촉천민 계급이다.

 

이들은 ‘수드라’보다 못한 계급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계급이다. 불가촉천민이 지나간 길은 불결하기에 자기가 지나간 길을 다른 계급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서는 아니된다. 이 때문에 자신이 지나갈 길을 쓸기 위해 꽁무니에 항상 빗자루를 메고 다닌다. 혹여 다른 계급 사람과 우연히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불가촉천민은 ‘황천길 직행 티켓’을 구매하는 셈이다.

 

법륜스님은 카스트 계급에 공식적으로 들지 못하는 계급인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 건립을 결심한다. 인도 자국 안에서는 사람 취급을 받지도 못하는 천민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호혜다. 법륜스님의 호혜정신 앞에는, 카스트 제도가 주창하는 ‘사람 아래 사람’은 없는 셈이다. 배움을 통해 불가촉천민의 아이들이 지적 호기심을 깨닫게 만드는 것, 지적 자양분을 토대로 미래의 직업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법륜스님의 호혜정신은 ‘물고기를 넘어 물고기 낚는 방법’을 가르치는 ‘지혜로운 구호’인 셈이다.

 

또한 법륜스님이 제창한 학교 시스템은 ‘배움의 순환구조’를 창출한다. 상급학교의 청소년이 유치원 아이를 가르치게 만드는 배움의 시스템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돌봄의 시스템 구축을 의미한다. 어른만이 아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청소년이 아이를 가르침으로 배움은 순환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게다. 유치원에서 누이 혹은 오빠를 통해 자라난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 이들은 또 다른 세대의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친다.

 

법륜스님이 제창한 도움의 발상, 즉 거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구호를 넘어서서 학교를 통한 구호라는 선순환 구조의 구호를 경제학적으로 조망하면, 윌리엄 이스털리가 주창하는 빈곤을 끊을 사회적 방법의 착안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효울적인 대안이다.

 

학교에 나오는 학생에게 영양실조를 막기 위한 소정의 음식물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자연스레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게끔 만드는 건 제프리 삭스의 공급론을 넘어서는 효율적인 구호 방식이다. 경제학적으로 바라보아도 법륜스님의 구호 방식은 아주 현명한 구호 방식을 택하는 셈이다.

 

 

두 번째는 법륜스님이 북한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구호를 역설하면서 통일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필자가 대학원 재학 시절 한 학년(2학기) 아래 탈북자 후배가 있었다. 한데 그는 간혹 학교 구내식당에서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있었다. “북한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데 남한 학생들은 음식을 너무 많이 남긴다. 학생들이 먹다 버린 음식쓰레기만으로도 북한 인민에게는 성찬이 될 것”이라 하면서 화를 냈다.

 

1995년 북한의 대홍수 이후로 3년 동안 자그마치 삼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법륜스님은 배고파도 구걸할 자유가 없는 북한의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통일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 부분을 시청하며 남한의 음식쓰레기에 관한 부끄러운 실태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버리는 음식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지출되는 비용은 자그만치 20조 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한 해 사교육비와 맞먹는 거대한 비용이다. 냉장고 안에서 조금이라도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식당에서 얼마 먹지 않은 음식은 대부분 포장해서 싸갖고 가지 않고 음식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만들던 시절’은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 이야기’요, 이제는 음식을 너무 많이 남기는 ‘풍요의 비극’ 가운데서 살고 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남기거나 버리는 음식의 아주 일부라도 이를 굶주린 북한 사람이 본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우리가 버리는 음식쓰레기 처리 비용 만큼이나 우리가 북한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베푼다면 북한에는 이미 ‘굶주림’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먹을 것이 없어 손자를 삶아먹다가 총살당하는 할아버지의 실상을 안다면 우리는 감히 음식쓰레기를 버릴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정신이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음식이 북한의 어느 누구에게는 귀한 양식이 될 수가 있음을 상기하고 다시금 되새기는 것, 다른 하나는 통일은 다음 세대가 이루어야 할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세대에 이루어야 할 몫임을 자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