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ical Review

劍聖 2012. 6. 27. 09:52

원작 <오즈의 마법사>는 잠시 잊어라.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스핀오프다. 스핀오프란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는 걸 뜻한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Photo of Jemma Rix and Suzie Mathers with the Australian Tour Ensemble by Andrew Ritchie)

 

<오즈의 마법사>에서 ‘악의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서쪽 마녀가 알고 보면 마녀가 아니라 왜곡된 오즈의 현실에 반기를 드는 ‘아나키스트’인 반면, 우리가 착한 마녀로 알고 있는 동쪽의 마법사는 실상 ‘허영녀’에 ‘작업녀’였다는 발칙한 뒤집기는 스핀오프가 아니면 불가능한 설정이다.

 

스핀오프가 ‘선’과 ‘악’을 대표하는 마녀의 본질을 이렇게 180도 뒤바꿔놓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동쪽 마녀 글린다에게 감정이입하기보다는 사악한 서쪽마녀 엘파바에게 자연스레 감정이입하게 된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서사 구조

<오즈의 마법사>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여성인 도로시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 사자, 마법사 오즈는 모두 남성이다. 동쪽 마녀와 서쪽 마녀 정도만이 여성인, 남성과 여성이 골고루 분배된 이야기다.

 

하지만 <위키드>는 여성 중심의 이야기다. 뮤지컬의 앞부분에서 서쪽 마녀가 죽었다고 시민들이 기뻐할 때 서쪽 마녀와의 옛 우정을 회상하는 동쪽 마녀는 스토리텔러이자 주인공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서쪽 마녀 엘파바는 이야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위키드>는 글린다와 엘파바 두 여성이 서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공연이다.

 

반면 남성 캐릭터인 오즈의 마법사, 또는 동쪽 마녀의 남친인 피에로는 조연 이상의 역할을 차지하지 못한다. <위키드>는 동쪽 마녀와 서쪽 마녀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루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반면 <오즈의 마법사> 속 주인공인 도로시는 같은 성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대사 속에서만 회자될 뿐 단 한 번도 무대 위로 관객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Photo by Andrew Ritchie)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

사쪽 마녀 엘파바의 녹색 피부색은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시각에 대한 비판 어린 알레고리다. 엘파바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초록색이다. 다른 이와는 구분되는 초록이라는 피부색은 ‘다름’의 영역에 속할 따름이지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엘파바는 우수한 학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마법 학교에서 ‘은따’(은근히 따돌림) 당한다. 피부색이 달라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다름異’을 ‘틀림誤’으로 간주하는 시추에이션이 비단 <위키드>라는 가공의 세계에만 국한되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외당하는 건 우리네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일상에서, 학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외당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도할 수 있다.

 

엘파바의 경우처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엘파바가 당하는 가상의 이야기 속 ‘소외’는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 세태를 반영하는 알레고리다.

 

아니, 뮤지컬 <위키드>의 원작 소설이 출간된 1990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1990년보다 지금이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진 게 없을 것이다.

 

(Photo by Jeff Busby)

 

악의 화신? 알고 보면 파시즘에 대항하는 아나키스트!

오즈의 마법사는 ‘허당’이다. 변변한 마법 하나 다룰 줄 모르고 그 흔한 마법어 하나 제대로 발음할 줄도 모른다. 이에 비해 엘파바는 마법의 DNA를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듯하다. 엘파바의 마법 학장조차 몇 줄 밖에 읽지 못하는 옛 주술서를 엘파바는 초등학생 국어책 읽듯 술술 읽어버리는 천재다.

 

엘파바가 자신의 천부적인 마법 실력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만 쓰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녀는 아마 글린다 이상가는 ‘오즈의 블루칩’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대중을 장악하는 능력’과 엘파바의 ‘재능’이 결합한다면 오즈를 통치하는 데 있어 불과 기름이 만난 것 같은 촉매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다. 더불어 엘파바가 주류 계층으로 편입코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면 오즈의 2인자로 군림하는 것쯤은 어렵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나 엘파바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권력을 잡는 길을 버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쪽을 택한다. 그 길이야말로 엘파바의 양심이 허락하는 길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파시스트’다. 소수자, 이를테면 동물의 말할 권리를 박탈하고 이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파시즘의 근원은 오즈의 마법사로부터 기인한다. 엘파바가 수학하던 쉬즈 대학의 동물 교수인 염소 딜라몬드 교수가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도 오즈의 마법사가 획책한 억압 때문이다.

 

오즈의 마법사에게 억압당하는 동물 군상은 ‘소수자’에 대한 알레고리다. 외국인 근로자나 다문화 가정, 장애우 등 현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소수자에 대한 알레고리다. 엘파바는 소수자를 탄압하는 파시즘의 길을 거부한다. 영광와 풍요로움의 길을 버리고 소신의 길을 걷는 걸 선택한다.

 

비록 그 길이 세인들에게 마녀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오즈 전체에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험난한 길이 예상될지라도 말이다.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넘버는 1막 마지막에 엘파바가 노래하는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이다. 이 넘버는 최고의 마법사로 권력을 누릴 기회를 박차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길 원하는 엘파바가 결국에는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는, 엘파바의 아나카스트 정신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감동적이면서도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넘버다.

 

아무 것도 모르고 <오즈의 마법사>만 안다면 서쪽 마녀에게 돌을 던지기 쉽다. 하나 <위키드>를 통해 서쪽 마녀의 내면을 알게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녀에게 돌을 던지지는 못한다. <위키드>는 동전의 ‘앞면’만 알던 우리에게 ‘뒷면’에 가려진 ‘진실의 민낯’을, 두 마녀의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와 감미로운 넘버로 제시한다. 특히 이야기와 넘버가 혼연일치할 때 관객에게 전해지는 파급력이 얼마만큼 큰가를 온 몸으로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뮤지컬이다.

 

관람 전 유의사항이 하나 있다. 만일 <오즈의 마법사> 원작이 가물가물하다면 공연을 관람하기에 앞서 필히 예습하라. <오즈의 마법사>와 뮤지컬 <위키드>의 2막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