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ical Review

劍聖 2012. 7. 2. 17:57

뮤지컬과 영화를 오고 간 <헤어스프레이>의 상관관계를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근친교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2007년도 존 트라볼타의 영화가 있게끔 만든 오리지널이 뮤지컬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1988년 영화가 오리지널이고 그 다음에 뮤지컬로 2002년에 선보인 후 2007년에 영화로 다시 한 번 만들어지는, 영화-뮤지컬-영화라는 약간 복잡한 계보를 가진다.

 

 

<헤어스프레이>에는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게 만드는 신나는 넘버로 가득 차 있다. 오프닝의 ‘굿모닝 볼티모어’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 캔트 스톱 더 비트’는 관객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한 ‘넘버의 롤러코스터’다. 한데 신기하다. 신나는 넘버가 하나 가득이라 해서 뮤지컬의 내용까지 마냥 신나는 내용이라고만 바라보기에는 조금은 곤란한 측면이 있다.

 

뮤지컬의 내용이 흥겹지 않다는 태클이 아니다. 볼티모어 아가씨들이 흠모하는 킹카와의 사랑 이야기, 주위의 압박에도 꿈을 잃지 않는다는 설정은 뮤지컬 장르의 전형적인 패턴인 ‘드림 컴 트루’(꿈은 이루어진다)를 답습한다. 이 이야기를 이루는 레시피는 흥겹기 그지없다. 하나 <헤어스프레이>를 찬찬히 뜯어보면 롤러코스터 같이 신나는 이야기 안에 ‘급진적인 서사’가 담겨져 있다.

 

<헤어스프레이>는 얼핏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착각하게 만드는 뮤지컬이다. 뚱보 소녀가 킹카 남친을 만나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분석으로 보면 말이다. 트레이시가 처음 링크를 만났을 때 부르는 넘버 ‘아이 캔 히어 더 벨스’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내 귀에 울리는 종소리’다. 이상향을 만났을 때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행복한 짝사랑 혹은 데이트의 징조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헤어스프레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로만 분석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헤어스프레이>는 보수적인 서사가 아니다. 어깨를 들썩거리게 만드는 흥겨움 너머에는 맞서 싸워야 하는 ‘투쟁’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트레이시가 투쟁해야 하는 투쟁의 대상은 ‘편견’이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 첫 번째는 외모지상주의라는 트레이시 자신의 외모에 대한 세간의 편견과 싸워야 하고, 다른 하나는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편견에 맞서야 한다. <헤어스프레이>는 투쟁의 서사다.

 

 

뭐, 보수적인 서사로도 분석은 가능할 게다. 대식증에 걸린 듯한 거대한 몸집으로 어떻게 무대에 서겠냐는 보편화된 세상의 편견에 맞서 무대에 오르는 꿈을 잃지 않는다는 서사로 읽는다면 말이다.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는 측면으로 바라보면 보수적인 분석이 맞아 떨어질 테다.

 

트레이시는 백인이면서도 소수자의 아픔을 안다. 트레이시의 정체성이, 주류보다는 소수자를 지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건 초반부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지지하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트레이시가 ‘인종차별 철폐’를 부르짖으려면 그녀가 흑인들과 어울린 이후에나 나오는 대사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이 사건 이전부터 이미 트레이시가 ‘인종차별 철폐’를 설파한다. 흑인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백인만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백인과 흑인이 어울릴 수 있는 ‘공존의 세상’을 꿈꾸었다는 반증이다.

 

트레이시가 백인이면서도 소수자가 되는 지점은 두 부분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는 그녀의 육덕진 몸매를 바라보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을 옹호하는 ‘인종차별 철폐’ 지지 발언을 하면서부터다. 백인이면서도 흑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트레이시는 ‘뚱땡이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힌다.

 

푸짐한 몸매와, 흑인을 옹호하는 개방적인 사고관으로 말미암아 백인이면서도 소수자로 전락한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이미 십여 년 전에(뮤지컬의 배경은 1960년대이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는 1950년대다) 지나갔음에도 흑인을 지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백인만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데 있어 흑인이라는 ‘불순물’과 섞이고자 하는 자는 백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자’와 매한가지다.

 

흥겨운 넘버 뒤에 숨겨진 트레이시의 투쟁은 ‘소수자를 대변하는 투쟁’을 트레이시 자신의 ‘자아실현’과 섞는다. 가수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은 어디까지나 트레이시 개인의 이상이다. 이 이상을 개인적인 차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흑인과 공존할 수 있는 ‘볼티모어 건설’이라는 유토피아 사상과 결부한다.

 

 

트레이시의 급진성은 자기 자신의 자아 성취, 즉 링크를 왕자님으로 맞아들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극복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이를 인종적 장벽을 넘는 통합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만 깨는 게 아니라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편견도 깨야 하는 백인판 ‘말콤 엑스’가 트레이시다.

 

트레이시의 급진성은 세상의 편견만 뜯어고치는 게 아니다. ‘아자세 콤플렉스’ 혹은 ‘엘렉트라 콤플렉스’와도 관련이 있는 급진성이다. 이 급진성은 트레이시의 어머니인 에드나가 딸 트레이시에게 바라는 바램을 걷어차는 급진성이다.

 

에드나는 TV 프로그램에 정신 못 차리는 딸 트레이시가 자신이 하는 세탁 일을 물려받길 바란다. 하지만 에드나는 어머니의 바램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한다. 어머니의 바램과는 반대의 길을 걸음으로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일어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트레이시만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트레이시의 단짝친구인 페니도 어머니를 거역하긴 마찬가지다. 페니의 어머니는 흑인의 음악을 ‘해로운 유색인종의 음악’으로 규정하고 페니에게 흑인음악을 듣지 말 것을 강요한다. 하나 거꾸로 페니는 남자친구를 사귀되 백인이 아닌 흑인을 사귄다. 어머니의 희망을 무너뜨리는 건 트레이시만의 해당 사항이 아니다.

 

급진적인 소녀 트레이시는 볼티모어를 바꿔놓는다. 외모지상주의에 똥침 놓는 건 물론이려니와 볼티모어의 킹카 링크가 달려와 자신의 여친이 되게 해달라는 고백을 받는다. 백인 우월주의에도 똥침 놓음으로 ‘다양성의 개화’에도 단단히 한 몫 한다.

 

만일 트레이시가 어머니의 말에 고분고분히 순종하고 TV 오디션을 포기하고 세탁 일을 맡았더라면 이 모든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코미디 뮤지컬 뒤에 숨어있는, 트레이시의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급진적인 사고관이 아니었음 볼티모어는 변화하지 않았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