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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聖 2012. 9. 1. 23:18

구미호 이야기, <천 번째 남자>가 이번 에피소드에는 ‘복고’를 만났다. 80년대의 정서를 드라마 가운데로 한껏 끌어들인다. 구미진(강예원 분)과 김민규(B1A4 진영 분)의 80년대 캠퍼스 풍경은, 지금은 아련한 정서로 하나 가득한 노스탤지어다.

 

 

이빨이 간지러워 구미진이 질겅질겅 씹어대던 볼펜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디자인으로 과거와 현재를 매개한다. 20대 대학생이던 김민규의 풋풋함과, 기러기 아빠가 되어버린 50대 가장 김민규를 매개하는 매체는 구미진의 이빨 자국이 선명한 볼펜 한 자루다.

 

이문세의 노래 ‘소녀’는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지 말아요...”라는 가사말로 유명한 가요다. 짝사랑하는 구미진에게 사랑한다는, 아니 좋아한다는 말을 그토록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하던 김민규의 소심함을 이문세의 ‘소녀’라는 가사로 대신하여 시청자에게 털어놓는다.

 

어디 이 뿐인가. 소피 마르소의 아름다움에 정점을 찍은 영화인 <유 콜 잇 러브>의 주제가가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에는, 김민규가 바라만 보아도 심장이 방망이질하던 구미진이 먼 발치에서 나타나는 연출이 함께 한다. 80년을 풍미하던 노래들이 당시 복식과 배경과 어루어져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이다.

 

문득 27년이 지난 지금의 김민규는 세월의 풍상 앞에 젊음의 풋풋함을 저 멀리 내던진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자식의 유학길 뒷바라지를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고 만 것에 하나 더 보태서, 아내와의 관계는 가족을 위해 그저 돈을 하염없이 부쳐줘야 하는 ‘물주’로 전락한지 오래다.

 

<천 번째 남자> 속의 복고 정서라는 건, 김민규의 찬란하던 옛 젊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정서이자 동시에 이루지 못한 첫사랑 구미진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김민규의 판타지적 정서에 다름 아니다.

 

이런 중년의 김민규 앞에 나타난 구미진은 27년 전의 첫사랑 구미진일 턱이 없어 보인다. 첫사랑 속 그녀도 당연히 나이 먹은 중년 여인으로 변해 있을 테니 말이다. 고객의 딸인 구미진이 첫사랑 구미진의 외모와 너무나도 닮아 김민규는 혼란에 빠진다.

 

김민규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건 현재 구미진의 습관이 옛날 구미진의 습관과 너무나도 닮아서다. 첫사랑 구미진은 볼펜을 씹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 지금의 구미진 역시 볼펜을 씹으니 말이다.

 

이 연출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첫사랑 구미진과 지금의 구미진의 습관이 똑같아 김민규를 헷갈리게 만든다는 건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 분)의 제자가 인우의 첫사랑이던 태희(이은주 분)가 하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장면과 비견할 수 있다.

 

남자는 헷갈려한다. 인우는 첫사랑 태희의 행동을 따라 하는 제자 때문에, 김민규는 첫사랑 구미진의 습관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현재의 구미진으로 말미암아 헷갈린다.

 

<천 번째 남자> 속 김민규의 현재가 비참해 보이는 건 기러기 아빠라는 현실 때문만이 아니다. 고객의 딸이 첫사랑과 똑같은 외모,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 남자는 핍핍한 현실 가운데서 잊고만 있던 27년 전의 대학생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그렇다.

 

 

가정을 이룬다면 행복한 꿈을 펼치겠다고 첫사랑에게 장담하던 대학생 김민규의 모습은, 가족에게는 물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혼자 생일 자축연을 가져야만 하는 현실의 비루함과는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첫사랑 구미진과의 추억을 회상한다는 건, 잊은 지 오래된 27년 이전의 복고라는 회상을 통해 아픈 현실을 마취하는 의미를 가진다. 볼펜 한 자루를 건네주기 위해 깡소주를 마시다 잠든 대학생 김민규가 대학생 구미진과 조우하고, 다시 현실에서 추억을 잊지 못해 술로 번민하던 중년의 김민규가 젊음을 그대로 간직한 구미진과 조우하는 드라마 속 평행이론은, 김민규라는 한 남자의 판타지를 더욱 가슴 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잊지 못해 잠든 김민규의 간을 구미진이 차마 빼 먹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사진 속 가족주의 때문이다. 사진 속 가족주의는 김민규의 골수만 쪽쪽 빠는 ‘어설픈 가족주의’에 다름 아니다.

 

차라리 구미진이 김민규의 간을 빼앗았더라면, 비록 육신은 영영 잠들지만 김민규는 첫사랑의 기억 속에서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을 테다. 구미진이 어설픈 가족주의로 말미암아 중년남 김민규의 판타지를 비루한 현실 가운데 남겨둔 것이 못내 아쉬운 이유다.

 

간을 빼려 하기 전, “날 위해서 죽을 수도 있나요”라는 구미진의 물음에 김민규가 순응했을 때 김민규가 구미진을 위해 간을 내주었다면 비루한 현실을 떠나 첫사랑이라는 판타지 안에서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을 텐데 말이다. 첫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순정마초가 되었을 기회를 저버린 게다.

 

(사진: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