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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聖 2013. 3. 18. 10:35

작년 가을에 개봉한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와 맥락이 비슷한 연극이 최근 막을 열었다. <독살미녀 윤정빈>이다. 살인범이 얼짱 외모를 가질 때 그의 과거 살인 행각은 중요하지 않다. 살인이라는 악행보다 잘 생긴 외모가 연예인 뺨치는 인기를 누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독살미녀 윤정빈> 역시 윤정빈이 온 경성의 화제가 된 건 그녀의 외모를 미인으로 둔갑시킨 황 기자의 필력 덕이다. 여기에서 윤정빈이 진짜 미인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미인’이 어떻게 남편을 독살할 수 있는가 하는 경성 시민의 동정표가 더 중요해서다.

 

황 기자의 필력 하나로 완성된 윤정빈이라는 미인이 경성 사람들에게 어필한다는 건 그 옛날 그리스의 프리네가 재판 받던 모습을 연상하게끔 만든다. 자신의 술 시중을 거절한 프리네에게 앙심을 품은 에우티아스는 프리네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운다. 당시 신성모독은 사형을 당할 만큼 중죄에 해당하는 죄였다.

 

하지만 프리네는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프리네의 변호를 맡은 히페레이데스가 프리네가 입던 옷을 벗기자 프리네는 배심원 앞에서 순식간에 알몸이 되고 만다. 프리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본 배심원 일동은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죄를 지을 리 없다고 판단하고 프리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독살미녀 윤정빈>도 프리네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만일 윤정빈이 미녀가 아닌 추녀였다면, 혹은 황 기자가 그녀를 미인이 아니라고 묘사했더라면 경성 사람들이 윤정빈의 무죄 방면을 사법부에 요청할 리 만무하다. 이 역시 프리네와 매한가지로 미인이 남편을 쥐약으로 독살할 리 만무하다는, 미인은 살인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외모 지상주의’적 관점의 확증 편향이 작용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하지만 연극은 미인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 편향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윤정빈의 무죄 방면을 주장하는 경성 시민들은 일제 사법부의 입장으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성 시민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일제 사법부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죄 없는 윤정빈이라는 여인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려는 사법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공정하지 못한 법 체계일 뿐이다. 경성 시민이 보기에는, 만일 윤정빈의 재판을 맡는 재판부가 일제가 아닌 한국의 사법부였다면 좀 더 공정한 법을 적용했을 텐데 지금의 사법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셈이다.

 

그렇다면 경성 시민이 주창해야 하는 건 윤정빈의 무죄 방면만이 아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법 체계를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구실이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독립의 열망을 깨어나도록 만드는 문제다. 사법부의 공정한 판결을 바라는 열망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구국의 열망으로 발전하는 셈이다.

 

편집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황 기자가 덧입힌 미인이라는 가치관이 일제 사법부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하고 관람해야 하는 연극이다. 미인이라는 가치관은 단지 윤정빈의 무죄 방면을 이끄는 확증 편향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제 사법부의 판결이 공정하기 못하다는 걸 방증하는, 나아가 일제 사법부의 불공평한 판결에 항거하는 경성 시민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발전한다는 예기치 못한 나비효과에 주목하고 관람해야 할 연극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 미디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