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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聖 2013. 6. 11. 08:29

<직장의 신>은 묘한 드라마다. <구가의 서>처럼 대놓고 판타지를 표방하지 않지만 은근슬쩍 판타지를 끼어들게 만드는 드라마가 <직장의 신>이다. 중반부 전개만 하더라도 <직장의 신>은 유쾌발랄하게 정규직으로 대변되는 장규직(오지호 분)을 ‘봐 주는’ 용감무쌍한 계약직 미스김(김혜수 분)의 직장 무협지를 펼치고 있었다.     

 

 

장규직과의 내기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져 주기 바쁜 것도 모자라 위기에 빠진 사무실을 통째로 구하는 미스김의 행보는 <드라마의 제왕> 속 앤서니 김(김명민 분)과 오누이로 보일 정도로 닮았다.

 

미스김이건 앤서니 김이건 이들 두 남녀가 없이는 위기에 봉착한 사무실과 드라마 현장을 구할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앤서니 김은 드라마의 제왕이고, 미스김은 직장의 신, 구세주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확하게 표현하면 중반부 이후 들어 공포영화도 아니건만 시청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무한도전 8주년 특집과 맞물리는 정리해고라는 칼바람을 그리며 드라마는 미스김과 장규직의 대립각으로 일관하던 코믹한 요소를 배제하기 시작한다.

 

코믹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언제든지 도태할 수 있는 사무실의 생존법칙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계약이 연장되지 않으면 종이상자를 들고 퇴사해야만 하는, 혹은 회사를 위한 기여도가 낮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보따리를 쌀 각오를 해야 하는 정리해고 혹은 계약직의 비애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회사 사람들 몰래 몰래 사내 연애를 하다가 덜컥 임신을 한 박봉희(이미도 분)를 필두로 고정도(김기천 분)와 정주리(정유미 분)에 이르기까지 세 명이 돌아가며 퇴사의 위기를 맞는다. 이는 미스김이 멋지게 정규직 사원에게 한 방 먹이는 명랑 판타지에서 탈색하여 현실의 암울함을 극적으로 반영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박봉희와 고정도, 그리고 정주리가 모두 혹은 이들 중 누구라도 정말로 퇴사했다면 현실 속 정리해고라는 암울함이 드라마를 완전히 잠식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드라마는 현실의 어두움을 드리웠음에도 끝까지 두 종류의 판타지를 잊지 않고 있다.

 

하나는 미스김이라는 구원투수의 판타지다. 박봉희와 고정도, 정주리가 돌림병처럼 돌아가며 위기를 당할 때마다 그녀는 이들을 살리기 위한 구원투수를 자청한다. 장규직에게 씨름 내기를, 황갑득(김응수 분)에게 유도 내기를 한다는 건, 겉으로는 박봉희와 정주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보이는 미스김이 실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누구보다도 애쓰는 구원투수라는 미스김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 모두는 가족이라는 가족 판타지다. 가족은, 혹 누가 싫다고 해서 호적에서 팔 수 없는 게 가족이다. 약해빠지거나 혹은 대책이 없는 가족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붙이라는 인연을 끊을 수는 없다. 와이장 직원들에게 적용되는 가족 판타지는 ‘빈자리는 티가 난다’는, 함께 일할 수 있어야 와이장 직원이라는 판타지다.

 

박봉희가 없거나 고정도, 정주리가 없어도 회사는 다른 인원을 새로 뽑으면 그만이다. 회사의 가치관은 가족주의가 아니라 ‘효율성’을 따지는 집단이다. 황갑득은 회사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교체 가능한 게 직원이라고 본다.

 

하지만 와이장 사무실 직원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다. 정주리가 떠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무정한(이희준 분)은 불같이 화를 내고, 회사의 이익만 대변할 것 같던 장규직 역시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대신한다는 가치관은 회사의 가치관이지만, 든자리는 티가 안 나도 빈자리는 티가 난다고 바라보는 이들이 와이장 회사원의 심정이다.

 

정리해고라는 현실의 어두움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녀의 코믹한 티격태격을 탈색한 듯 싶어 보이지만 <직장의 신>은 코믹한 수퍼우먼이라는 판타지 대신에 다른 판타지를 제시하고 있다. 가족주의라는 판타지를 직장 안에 배치하고, 정리해고의 위기에 직면하여 허우적대는 직원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는 수퍼우먼의 판타지로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차가운 현실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는 미스김처럼 우리를 도와줄 수퍼우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운이 좋다면 직장에서 무정한처럼 나의 일을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아파하는 맘 좋은 직장 동료가 곁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정한과 같은 이가 곁에 있어줌으로 말미암아 같이 공감해주고 아파할 줄은 알아도 책임지는 일까지는 감당하지 못한다. 정리해고와 같은 극단적인 위기에 빠질 때 무정한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미스김과 같은 수퍼우먼만이 구원투수를 감당할 수 있겠지만 직장 상사와 내기까지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어주는 수퍼우먼은 우리 현실 가운데에선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미스김은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퇴출될 위기에 봉착한 전구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세 명 씩이나 구해줬지만, 현실에서는 트리가 전구를 빼라고 하면 그 전구는 빠져야만 한다. 트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아줄 미스김은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만 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드라마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시청자는 직면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벗어나는 순간 심각한 괴렝 빠지게 만드는 이 드라마, 미스김이 현실로 도래하지 않는 이상 우리 스스로가 자격증을 124개나 달아야만 하는 미스김이 되어야만 하는 차가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살고 있다.

 

(오마이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