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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松 2020. 5. 15. 13:32

전두환 사면 배경-내란반역죄를 덮었던 검찰의 직무유기와 3당야합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내란반역죄를 덮어주는 개소리를 한 날부터 복기해 보자.

검찰은 18일 "신군부 세력의 새로운 정권창출과 직접 연관된 5.18사건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사법적 판단대상이 될수 없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관련자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검찰의 이같은 결정은 지난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시작으로 본격 전개된 일련의 사건전개 과정이 당시 구헌정질서의 붕괴로 인한 극심한 소요발생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이기 때문에 사법기관이 그 적법성 여부를 따질 사법적 심사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기초해 내린 것이다.

즉 5.18사건은 10.26사태로 인한 구헌정질서의 붕괴이후 새로운 정치질서가 태동하는 과정으로서 계엄법등 당시 법률적인 토대를 기초로 행해진 합법적이고 정치행정적인 조치의 일환으로 전개됐다는게 검찰의 수사결론이다.

검찰은 이러한 판단의 논거로서 독일등 외국 헌법학자와 국내 일부 형법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연구해온 법이론중 `통치행위론'과 `성공한 쿠데타론'등을 들고 있다.(5.18사건, `공소권 없음' 결정배경과 파장, 연합뉴스, 1995.07.18.)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뜻에 따른 것이다. 김영삼은 처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93년 5.3 특별담화

      에 그대로 드러난다. 

93년 2월 金泳三 대통령의 취임으로 일시 이 지역 주민들은 5.18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일부 학생과 주민들이 3당합당 등의 이유로 金대통령의 5.18묘역 참배를 반대하고 金대통령의 5.18관련단체의 면담거부 등으로 이때도 역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金대통령은 93년 5월13일, '진상규명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며 5.18기념공원 조성등의 재정지원 1천억원을 약속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해 5월관련단체들로 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5.18斷案...光州.全南민 투쟁의 승리, 연합뉴스, 1995.11.2)


      "진상규명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말은 "진상규명 하지 말자" 혹은 "아무도 처벌하지 말자"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김영삼이 95년

       11월 24일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金泳三대통령이 24일 5.18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도록 민자당에 지시함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법에 따라 이들 학살 책임자들에 대해 어떤 처벌이 이뤄질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5.18 피해 당사자를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金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의 단안을 내린데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특별검사제 도입등 특별법이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제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金泳三대통령은 지난 93년 5.18 특별담화를 통해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연장 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말하면서도 "진상 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밝혔으나 이제 5.18 해결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5.18斷案...光州비극 15년만에 매듭 전망, 연합뉴스, 1995.11.24.)


       그렇다면 김영삼은 왜 생각을 바꿔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것일까. 바로 전날인 95년 11월 23일 헌재의 6차 평의에서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타당하지 않다’라는 판단을 내부적으로 내렸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찰이 기소를 포기하자 5.18 사건 고발인 28명이 헌법소원을 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金汶熙 재판관)는 23일 5.18 사건의 불기소 처분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제6차 평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오는 27일 7차 평의를 갖기로 했다. (憲裁, 5.18사건 7차평의 27일 개최, 연합뉴스, 1995.11.23)


다음달 21일께 5.18 헌법소원사건에 대해 최종 결정할 예정이었던 헌재는 정치권의 선수로 헌재의 입장이 다소 무색해졌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민자당이 중심이 돼 특별법이 제정될 경우, 헌재의 결정 자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헌재가 다음달 결정에서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재수사 명령을 내릴 것을 감지한 청와대측이 이같은 대안을 내 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며 대통령의 결단을 유도해 낸 것 만으로도 헌재는 제 몫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다.

기실 이같은 상황논리의 근거는 지난 23일 가졌던 7차 재판관 평의에서 각 재판관들의 의견이 제출돼 어느정도 의견취합이 이뤄졌던 과정으로 설명된다.

즉, 이날 가진 평의에서 재판관들 가운데 5-7명이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판소 관계자는 " 이날 의견이 취합된 것 만을 놓고 볼 때 헌재는 창설이래 가장 의미있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맞은 것 같았다"면서 " 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아쉽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서 알수 있다.
이는 헌재 재판관들이 당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는 위헌 의견으로 상당수 개진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憲裁 내달 5.18소원 결정 전망, 연합뉴스, 1995.11.25.)


         그래서 바로 다음날 자기가 먼저 특볍법 제정을 발표해 선수를 친 것이다. 자기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기소가 진행

         되면 정국 주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김영삼의 잔머리와 졸렬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자 검찰은 나중에 이렇게 변명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 지난달 30일 서울지검에 12.12 및 5.18 특별수사분부가 전격적으로 구성된 직후 한 검사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사실 이번 수사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도 했다. 이미 12.12와 5.18에 대해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낸 검찰이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로 스스로 과거의 결정이 잘못댔음을 드러내는 수사에 나서게 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들이다. (검찰의 '과거청산' 떳떳한가. 한겨레, 1995.12.18)


         이처럼 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5.18 고소 고발인들이 헌법소원을 취하함으로써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은 무산됐다. 하지만 언론보도를

         통해 헌재의 판단을 알 수는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헌재의 입장은 " 성공한 쿠데타, 즉 내란 기수범에 대해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 결정은 잘못"이

         란 것으로 요약된다.

         헌재의 이같은 입장은 검찰이 불기소 처분의 근거로 내세운 이론이 형식논리만을 앞세운 자의적인 법 해석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즉,`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독일형법의 이론은 `성공한 내란의 경우,내란의 주모자들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처벌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미이지 `성공한 내란은 어떤 경우에든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헌재의 한 연구관은 " 1920년대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서 나온 형법이론을 그대로 응용한 것은 검찰의 무책임한 처분이었다"면서 " 국민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현대국가에서 어느 나라도 이같은 법이론을 응용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憲裁, 5.18소원 결정 내용과 전망, 연합

       뉴스, 1995.11.27.)


그 당시 김영삼 정부 출범은 5.18이나 12.12에 주역을 했던 전두환, 노태우 세력인 민정당 세력과 당시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었던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씨 이렇게 세 세력이 합해서 만든 3당 통합에 의해서 탄생한 정권이었고, 당시 검찰은 박정희 이후 군부세력이 장악하고 그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법부를 포함해서 수사기관이 군부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군부세력이 정치적인 세력으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또하나의 큰 화근으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선후보 이회창과 경쟁적으로 영남 세력도 지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12.12나 5.18를 용서한다는  전-노 사면 공약을 김대중도 내세운 바 있었고, 민추협 이사장인 김덕룡은 "영삼 대통령은 당선이 확실시 되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바로 사면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렇게 판단을 하셨는데 그러면 어차피 김대중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고 하는데 차라리 형무소에 보냈던 내가 사면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로선 결자해지라고 그런 결자해지 원칙에도 맞고 그리고 또 제가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대통령의 철학이라고 하는 대도무문 정신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자주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말에 어려웠습니다. IMF 향하고 아들 현철씨가 형무소 가고 그런 사태 때문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그래서 식물 대통령 같을 때 제가 다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대통령 만나서 퇴임 이후를 위해서 이야기할 때 저 자신도 강력하게 각하께서 그렇게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진언도 드렸고 그래서 김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전직 대통령 형무소에 넣은 내가 풀어주고 가는 것이 사리에 맞겠다 이렇게 판단하신 거죠" 라고  그 당시 상황을 밝혔다.


전두환 사면의 배경( 나무위키 발췌)


2001년 조선일보사에서 출간된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의 하권에 위의 사면에 대해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날 김대중 당선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두환.노태우와 12.12 및 5.18 관련자들을 사면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이제 구속된 지 만 2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을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는 석방할 생각을 갖고 있었고, 또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었다. 이미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모두 검토를 마친 상태였다. 시기는 대통령 선거를 끝난 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계획대로 추진할 생각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11일 나는 김종구 법무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단 둘이 오찬을 함께 하며 전두환.노태우 씨 등의 사면 방안을 검토했

다. 나는 사면은 하되,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에 대해서는 반드시 환수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이들이 부정축재한 돈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돈이었기 때문

에 이들을 감옥에서 석방하더라도 부정축재한 돈은 환수해야 했다. 나는 김종구 장관에게 최종적인 사면 방안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선거가 진행

되는 동안에는 사면 검토 사실을 일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선거가 끝난 다음날인 12월 19일 오전 10시 나는 예정대로 김종구 법무장관으로부터 최종 보고를 받았다. 다음날인 12월 20일에는 이를 김대중씨에게 알려주었고 22일 국무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김대중씨는 전두환.노태우 등을 사면하겠다는 내 말에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좋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했다. 사면복권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고 당선자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12월 22일 오전 국무회의는 12.12, 5.18 및 비자금 사건 관련자 25명에 대한 사면안을 의결했고, 전두환.노태우씨는 구속 수감 2년여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하, 조선일보사(2001), 375~376p

또 15대 대통령 선거기간에 당시 김대중 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에 대한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기 때문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합의를 통해 특별사면을 시행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 내용 역시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9월 1일과 2일, 도하 언론에서 갑자기 여권이 전두환.노태우씨를 추석 전에 사면할 것이라는 기사가 1면 톱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9월 4일 나와 이회창씨의 주례회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앞두고 이회창씨가 전.노 사면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해버렸다. 당연히 여권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그의 말에 언론은 추석 전 사면을 기정사실화해서 대서특필했다.

전두환.노태우씨의 사면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끝낸 뒤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 이 두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나는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나는 대선이 끝나기 전까지 절대 발설하지 말 것을 전제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이런 입장을 미리 밝혀둔 바 있었다. 또 당 대표직을 맡은 이회창씨와 여러 차례 주례 회동을 할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해준 바 있었다. 이회창씨 역시 내게 선거전 사면을 거론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지지율 하락을 의식한 발상인 듯했지만, 이회창씨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풀어주는 것은 전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중략)

이회창씨 스스로 거론하지 않기로 나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더구나 사면권은 엄연히 대통령이 갖고 있는 고유의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기정 사실로 언론에 보도케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매우 불쾌했다. 나는 즉각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사면.복권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2일 오후 이회창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춘천에 있는데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나를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9월 2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나는 관저에서 이회창을 만났다. 나는 크게 화를 냈다.

"이회창 대표, 몰라도 이렇게 모릅니까. 사면을 해도 대통령인 내가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사전에 충분히 설명까지 해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어요! 정신 좀 차리세요.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은 선거가 끝난 후 내 임기 중에 사면할 것이니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마시오."

이회창씨는 크게 당황해서 다시는 이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후보교체론까지 대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들을 추스르고 끌어안지는 못하고 이런 엉뚱한 발상을 해낸 이회창씨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하, 조선일보사(2001), 33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