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돌

보이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것 같지만 꼭 필요한 돌~^^

제목 :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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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중한 자료

2010. 11. 5.

제목 :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 1994 
원작 : 스티븐 킹-소설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 1992’ 
감독 : 테일러 핵포드 
출연 : 케시 베이츠, 제니퍼 제이슨 리,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등급 : 18세이상 
작성 : 2006.02.08 
 
“드래건 레이디시여 이번에는 철의 여인이십니까!!” 
-즉흥 감상- 
 
  데드존The Dead Zone TV시리즈를 소환하면서 우선 극장판 자막을 손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며 작업을 했던지 나름대로의 완성을 보고는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은 욕구가 완전 소멸되더군요. 그래도 이 밤을 그냥 마치기가 아까워 다른 것을 찾던 도중 앞서 감상한바 있던 영화 ‘미저리Misery, 1990’에서 드래건 레이디로 열연한바 있던 케시 베이츠가 나오는 작품이 보이기에 이렇게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뭔가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이번 작품을 조금 소개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듯한 소리로 작품이 문을 엽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계단에서 굴러 내려오는 군요. 다행이 죽지 않고 정신을 차린 노파는 이어 계단을 내려온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여자에게 힘겹게 애원조로 말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미친 듯이 주방을 뒤져 결국 몽둥이를 집어 듭니다. 그리고 노파의 머리를 내려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던 그녀 앞에 우체부 한명이 나타납니다. 
  이야기는 뉴욕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던 셀리나에게 어머니와 관련된 기사가 도착하게 되고, 그녀가 오래전 전에 뛰쳐나온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어긋난 듯한 모녀의 만남 속에서 18년 전의 사건이 현재와 엇갈리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며 대망의 결론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으흠. 스티븐 킹 님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은근슬쩍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다 보니 한 작품을 접한 뒤로 다른 작품을 보기까지 어느 정도의 비워짐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도무지 연달아보기는 벅찬 기분이 드는 군요. 거기에 이 작품의 원서 번역본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저는 비명을 질러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영상으로 멋지다는 기분이 든 작품을 원작이라는 것을 통하면 더욱 입체적인 감상이 되기 때문에 그 쾌감으로 그날의 생활이 다운되는 경험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웃음) 
 
  이번 작품은 정말 환상적인 모습으로 펼쳐지는 일식을 보여주면서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철학으로 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잊고 싶은 진실을 극복하기 위한 영혼이 산산조각 날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 과정속의 인물들을 표현하고 잡아내신 배우들과 제작진들께 심심한 박수를 보내며, 또한 원작 소설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꼭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때론 악녀가 되는 것이 편하다며,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만들면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 비록 뒤틀린 듯한 삶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분명 그것은 부모이자 어머니의 모습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부모가 되어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미혼으로 세상이 불평불만 가득한 20대이지만, 은근슬쩍 들어오는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다보니 흐음. 조만간 부모 되는 마음을 알게 될 날도 멀지 않은 것일까요?(웃음) 
 
  눈은 그쳤지만,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말 그자체로 칼바람 같습니다. 슬슬 발렌타인데이도 다가오는 시점에서 다들 옆에 생체 난로를 비치해두셨나 모르겠군요. 저는 그냥 전기난로 깐 침대위에서 무선 인터넷 개통된 제 노트북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지내볼까라는 우울한 생각을 해보며 이번 감상 기록을 종료해봅니다. 
 
Ps. 저는 요즘 들어 어머니를 도와 음식 만들기를 해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굉장히 좋아 하시더군요. 문득, 효도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케시베이츠의 열연이 돋보이는 1994년 작인 이 돌로레스 클레이븐이란 영화는 처음에는 그냥 그런 따분한 영화려니 생각한 것과는 달리 스토리가 아주 탄탄한 영화로 오히려 스티븐킹의 원작소설 보다도  오히려 더 잘 만들어진 것같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베라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돌로레스가 베라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현재의 어두운 색채와 과거회상의 현재보다는 좀 더 밝은 오렌지 색의 적절한 색체효과 삽입을 통하여 만들어진 영화로 주로 카메라 시점으로 돌로레스 셀레나 메키 형사를 통하여 사건을 이끌어가는 영화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의 열연과 영화속에서 사건들의 조각을 풀어나가는 재미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의 정서와도 조금와 닿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를 잘 다루어서 공감도 갔기에 더 눈을 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면인 개기 일식이 일어나는날 돌로레스가 남편을 죽이는 장면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하는데, 베라가 돌로레스에게 조언을 해주는 대목에서 베라가 돌로레스에게  "사고는 때로 불행한 여자에게 오는 유일한 친구지. 가끔은 못된년이 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야"  라는 말을 해준 것을 계기로 돌로레스는 개기 일식을 기다려 남편을 죽이려고 하는데 어쨌든 죽이는데 성공한다.

 

 물론 영화에서는 자기자신이 직접 밀어서 우물에 빠뜨린것은 아니었지만 우물이 있는곳까지 남편을 유인하여 빠져죽게했다는 것만으로 살인죄가 성립된다. 나는 돌로레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아서 그런지 몰르겠지만 남편이 그정도면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돌로레스 자신이 직접 남편에게 그런 심판을 내려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원작소설에서는 남편이 우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라왔지만 다시 돌로레스는 밀어 떨어뜨려 버린다. 이부분에서는 약간 영화에서는 덜 잔인하게 묘사된 것같다.

 

 그리고 리틀톨 섬이란 곳이 공간적 배경인데 이 섬은 돌로레스의 평생의 모성애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상징물 중 하나 인 것같다. 즉 셀레나를 위해서 평생을 리틀톨 섬 에서 하인 생활을 한 돌로레스의 모성애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상징적 공간 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개기일식이란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말해보자면 태양은 부성애 달은 음지에서도 꿋꿋하게 자식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모성애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달이 태양을 가리는 시기인 개기일식이야말로 돌로레스의 모성의 가장 정점의 표출이 살인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하여간 이제껏 본 영화들 중에 가장 재미있게 봤고 다시 한번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매우 유익한 영화라고 생각되었다

 



명백히 페미니즘적 소재를 가지고 사건을 구성하고 있으나 이 영화를 두고 페미니즘 영화라고 하기도 참 어색하다. 감독(혹은 원작가 스티븐 킹)이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것 자체를 형상화하기 위해 영화(혹은 소설)를 만들었다고는 결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단지 소재적(표층적) 차원에 국한되어 있을 뿐 영화가 노린 감상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 군더더기 없이 꽉 짜인 내러티브를 확인하는 쾌감이 그것이다. 영화의 원작자가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인 만큼 과연 스토리 구조가 매우 탄탄하고 디테일에 있어서 마치 철저히 계산된 것처럼 각 부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한 편의 이야기가 뼈대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뼈대가 근본이고 살은 이야기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부차적으로 덧붙여진 것이다. 관객은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면서 단순히 살에 불과해보였던 것이 뒤에 가서 이야기의 형성에 필수적인 뼈대로 부각되는 장면을 곳곳에서 목격하게 한다. 엄밀히 따져 이 작품에서 사소하게 취급받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요소가 뼈대이자 살인 것이다. 이에 내러티브 혹은 형식의 완결성이라는 관념이 솟아나면서 관객들은 쾌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려나 인간은 무언가 완전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 미적 쾌감을 느끼지 않는가. 이와 같은 충일감의 제시는 훌륭한 문예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문예를 창작하려는 이들이 배워서 해로울 건 없을 것이다(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저서에서 이에 대해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쾌감은 주제와는 무관하다. 영화는 페미니즘적 소재를 분명하게 들이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거리'를 관객에게 전혀(혹은 거의) 던져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륜 따위는 개의치 않는 망나니 남편에 대한 피해의식,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그 사랑의 깊이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딸... 이러한 핵심 화소는 어떤 것은 페미니즘 문제로 보편화시키기에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이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진부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이 그나마 더 설득력 있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되며, 모녀 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화해의 문제라면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가을소나타>에서 그 진경을 보여준 바 있다(비록 모녀가 궁극적인 화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다시 말해, <돌로레스 클레이본>에 나타나는 페미니즘적 사유 혹은 인식수준은 지극히 기초적인 데 머물러 있다. 이는 감독(혹은 원작자 스티븐 킹)이 애초에 페미니즘적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처음의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훌륭한 이야기 구조를 얽어내기에 매우 적절한 소재거리로서만 발견되고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야기 형태라는 밥상(황정민이 말한 그 밥상)이 이미 차려져 있고 나중에 페미니즘이 캐스팅된 형국이라고나 할까. 작가 스티븐 킹에 대해 말하자면 그에겐 기발하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운용이 그의 글쓰기에 있어 가장 본질적이다. 따라서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란 그것이 페미니즘이든 작가의 고뇌든 현대인의 불안의식이든 모두 등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제법 진지하고 중요한 주제들을 많이 다루어왔던 것 같다. 이는 여타의 상업작가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시 그의 주된 관심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가 다루는 주제들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다지 깊지가 못하다. 나는 그가 이쪽 방면에 재능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의 상당한 부분을 '이야기만들기'에 쏟아붓고 있어 문학의 중요한 다른 측면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스티븐 킹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야기의 기교적인 꽉짜임(치밀함)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를 꿰뚫어보고 명료화하는 인식의 꽉짜임(치밀함) 역시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이나 영화는 진기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와 더불어 우리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의무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본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이러한 인식의 꽉짜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라 생각한다.

 

< 돌로레스 클레이븐 >은 자녀의 불행 앞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분연히 일어서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여성의 인권을 위하여 /
역설적이게도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여성영화!!
늘 당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닌 아르테미스처럼 복수라는
적극적 행동으로 나선 현대적 여성의 잠재적 본보기이다.




< 돌로레스 클레이븐 >

테일러 핵포드감독이 만든 이영화는
조그만 섬에서 일어난 두건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15년전의 살인과 현재의 살인'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영화이다


영화를 본 후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
감독이 주는 메시지에 억눌려 한동안
< The end >의 자막을 보며 멍하니 앉아있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만든 사람들'을 알려주는 자막을 보지도 않고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나오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자막을 끝까지 보고도 일어서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 있어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 그랬고,
< 벤허 >와 < 닥터 지바고 >가 그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 돌로레스 클레이본 >은
한동안 나에게 문제를 제기하며 자리를 뜨지 못하게 붙들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떠올리기도 싫다.
비록 
집안에서 편안한 자세로 비디오로 감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 자신에게 '화두'(=여성)는 여전히 던져주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나의 삶과 돌로레스의 삶을 대비하여 생각해 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누가 말했었다.
그렇다.
어떤 사물을 볼 때에는 아는 만큼 보는 것이 틀림이 없다.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던 모든 것이 종합되어,
내 삶의 가치를 형성하고 내면의 어떤 것을 형상화시켜
자신을 그것에 고착화시켜 지금의 나를 만든다.


프로이드 . 융 . 아들러의 심리학을 모두 동원하여
인간의 본성을 연관하여 생각해보아도
인간의 본성은 악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게 하는 영화였다.
선으로 포장하고,
희생으로 미화하여도
결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폭력에의 저항 = 폭력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잠시 고대 그리이스신화에 나오는
데메테르와 아르테미스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데메테르의 복수가 수동적인 복수라면
아르테미스의 복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복수였다. 데메테르의 모성본능은 지금의 학자들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 < 데메테르 >
그녀는 딸의 납치에 방관하는 남편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다.
지하의 신 하데스에 잡혀간 딸을 위해 도와달라고 매달리지만
그녀의 간청에 귀기울이지 않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데메테르는 상심하여 말라간다. 풍요의 신이며 곡식의 신인 그녀의 보살핌이 없이는 열매를 구할 수 없다.
곡식은 말라가고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녀의 상심에 피해를 당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할 수 없어 그녀의 청을 들어 주는 제우스는
페르세포네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내어 준다.
천상의 신조차 움직이는 모성본능의 극치이다.**


이러한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남편이 아내에게,
아버지가 딸에게 행하는 성의 학대에 본능적인 모성으로 대항한다.

나의 영화평...

하나: 성의 학대에 대한 개념과 신체적 . 행동적 징후와 그 후유증은...

휴유증만 조금 적어보고...
둘: 돌로레스가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딸 셀리나는
어머니로부터 감정의 별리를 맛보는 비극적 가정사를 살펴본다.


하나:

성학대는 시간경과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의 공통된 과정을 거쳐간다.
학대의 초기에는
수면장애,
신경질,
가해자에 대한 공포심 등의 불안 증세가 두드러지며,
나이에 맞지않는 성적행동,
관심을 끄는 행동,
지나치게 매달리는 행동,
성에 관한 혼란된 행동,
성적 방종,
고독,
우울,
슬픔 등
자아개념의 손상에 연결된 행동변화가 나타난다.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장애,
우울,
자아존중감의 저하 및 자살행동,
약물남용,
기타 정신과 질환(경계선인격장애, 다중인격장애),
성기능 장애,
성범죄 등의 문제를 갖게 된다.



둘: 이제 영화 < 돌로레스 클레이븐 >으로 돌아가 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우리를 갈등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고뇌하게 만든다.
삶에 대한 순수한 반성이 없는 삶은,
'계란 찜에 소금과 새우를 가미하지 않은'
무덤덤하고 무미건조한 삶일 것이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산다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데메테르의 모성본능인 수동적인 항거를 넘어선
아르테미스처럼 능동적 항거인 남편 살해라는 형식으로 도전한다.

그리스 신화속의 지하의 신 하데스가 상징하는 것-폭력, 암흑-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아버지를
테메테르처럼 울거나 매달리거나 풍요를 주지않는 수동적 저항이 아닌
직접행동의 살인을 저지른다.


감독 테일러 핵포트는
그녀가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초점을 맞춰두고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배우를 기용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다.

삶의 근원적 상처를 부둥켜 안고
힘들고 지쳐 싸움을 포기할 지경에 이른 돌로레스.
그러나 폭력의 희생자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며 자랑인 딸
셀리나에게까지 이르렀음을 알고 눈노가 표출된다.

근친상간적 성의 학대,
친아버지가 딸에게 휘두르는 성의 폭력에 터져버리는 모성본능.
이러한 내면연기를 펼치는 '캐시 베이츠'를 보노라니
감독의 미장센
-무대의 장치,분장, 의상, 소도구를 포함하여 촬영의 기법까지-
이 부각되어 보이기보다는 배우기용이 최선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적재적소에 배우를 기용하는 것도
감독의 자질이라면 자질이겠으나...
예쁘지도 더구나 아름답지도 않은 얼굴로 미인의 세계에서
연기로 살아남은 캐시 베이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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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는 섬에 산다.
영화 속의 섬은 평화와 안식이 있는 고향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감옥과도 같다.
어찌보면 한국의 여인상과 흡사한 돌로레스의 삶이다.
애정도 식어버린 남편과 살며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는 삶.
돌로레스의 소망은
딸 셀리나를 감옥과도 같은 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남편이 딸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있음을 안 그녀는
섬을 떠나기 위해 은행에 저축한 돈을 찾으러 가나
이미 돈은 남편이 인출해 간 뒤였다.

절망하는 그녀.
자식에게 관심도 없고
항상 술에 찌들려 살며 아내를 때리고
이제는 자식을 위해 저축한 돈마저도 가로채 간 남편.

아내가 저축한 돈을 남편이 인출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법의 체계는
아내는 남편의 부속물임을 인정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남편이 돈을 가로챈 사실을 알게된 그 날,
이후 개기 일식이 있던 날, 남편은 의문의 실족사를 한다.
딸은 떠나고,
15년 후 어머니의 살인혐의로 기소되자 섬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15년전의 죽음과 현재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짙게깔며 베일은 벗겨지기 시작한다.
돌로레스가 허드렛일을 하던
집의 주인인 베라의 은근한 해결책 제시에
돌로레스는 남편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베라는 남편의 끊임없는 바람기에 지쳐
교통사고를 위장하여 남편을 죽인다.
그 사실을 알게된 아들과 딸까지도 죽인 베라는
돌로레스에게 모성적 보호 본능을 일깨우며
남편을 죽이라고 부축인다.
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클레이본의 본능을
불을 붙이는 베라는 전형적인 아르테미스식 복수의 원형이다.


**< 아르테미스 >
사냥과 수렵의 신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어머니 레토를 모욕한 니오베를 벌주기 위해 나선다.
니오베의 일곱 아들들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큰아들은 말을 돌며 재주를 부리고 있었고,
둘째는 승마연습을
셋째와 넷째는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씨름을 하였다.
나머지 어린 세아들은 장애물 뒤에 숨어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활을 쏘아 아폴론은
첫째, 둘째, 셋째……일곱째 아이들은 차례로 거꾸러뜨려 죽인다.
아들의 죽음소식을 전해들은 암피온 왕은
통곡을 하다 스스로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결해 버린다.

그런 다음에도 자만심을 버리지 않고 니오베는 레토에게 소리친다.
아직 나에게는
어여 쁜 딸이 일곱이나 남아있어 승리를 자랑하는 레토여!
니오베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활을 당겨 차례로 죽여버린다.**


남편의 바람기와 그것을 앎으로 해서
재산에 대해 협박하는 아들과 딸을 아르테미스식 사형에 처한 베라는
돌로레스에게도 개기 일식의 날을 암시하며 남편살해를 가르쳐 준다.

 

개기일식이 있던날
남편을 들판의 오래된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돌로레스.
돌로레스는 남편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우물넓이를 가늠하며 연습을 한다.

큰 체구로 열심히 멀리뛰기를 하는 돌로레스.
(딸을 생각하며 자신의 나머지 삶을 딸에게 바칠거라고 작정하면서)

드디어 결정의 시간,
남편에게 술을 사주고 약을 올려
들판으로 유인하여
우물까지 와서 멀리뛰기로 우물을 넘고 남편은 빠진다.

빠져나오려는 남편에게 돌을 들어 내려쳐 끝내는 살인하는 돌로레스,
그 때의 돌로레스에게는 죄의식이란 없다. 단지 분노만 있을 뿐
그 때
로레스가 멀리 뛸 때 슬로우 모션으로 잡은 동작기법은 탁월했다.

그리고 딸은 떠난다.
셀리나의 우의식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음을 감지한다.
셀리나는 어머니를 미워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자신을 성추행하고 있다는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만 존재 할 뿐--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질투심에서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라고…
어머니의 질투심은
아버지를 쫓아내고 자신을 성에서 쫓아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긴세월 15년을 섬에 찾아오지 않는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에서 살펴보면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경쟁한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한 어머니는
딸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지 않는다.
차츰 여아는 엄마의 강함에 억눌려 어머니와 닮아감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은 유지하려고 한다는 동일시 이론이 있다. **


셀리나는 아버지의 성추행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음에도
어버지께서 던져주는 사랑 조각에 매달려 사실을 애써 부인한다.
어머니에게는 주지 않았던 할머니의 목걸이 선물로 인해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이는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아버지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한다.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였던 아버지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아버지의 더러운 손에 대한 기억을 기억밖으로 밀어내며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배신행위로 기억 밖으로 밀어냈다.


성을 떠나 15년간 살면서
정상적인 이성과의 관계를 지속치 못하는 셀리나를 보면서
영화 밖의 나는 성추행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가 새삼 깨달았다.
대중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무의식에 파고든다.
그러므로 영화가 대중에게 주는 기능을 관과할 수가 없었다.

영화속의 현실은 현실속의 현실과는 다르다.
그러나 영화속의 현실을 보며
현실속의 현실을 유추하는 범속한 나로서는
영화를 보며 현실을 반추해 볼 수밖에 없다.


현실, 소설보다 기막힌 현실은 생경한 현실로 다가오지 못하고,
영화속의 현실에 더 생경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영화속의 인관관계로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나에게 접근하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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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버린 어머니와,
전도양양한 딸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화해해가는 과정이 이다지도 가슴저미는 것은.....
캐시베이츠와 제니퍼제이슨리의 성숙된 연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루를 무위로 보내며,

비디오본것이나 주절대는 것을 보면...

나는 영원한 가납사니인가보다.

 

현곡에서

옥이이모

 

<돌로레스 클레이본>에 대한 소감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1. 관객/독자로서 여러분은 누구와 동일시하며 보았습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돌로레스에게 좀 더 동일시 하여 영화를 보았습니다. 돌로레스역을 맡은 케시베이츠를 미저리라는 영화에서 먼저 보아 이미지가 이미지가 겹쳐져 그녀를 모성애가 강한 사람으로 보지 못했는데  영화를 면 볼수록 그녀가 왜 그토록 사람들을 적대시 하며 악착같이 살았는지, 왜 그토록 딸을 지키려고 했는지 이 영화를 보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해가 갔습니다. 그냥 처음에 보기에는 왜 저렇게 까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쁘게 보이려는 걸까?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좀 더 살기 편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An accident is sometimes an unhappy woman's best friend Sometimes you have to be a high-riding bitch to survive" (사고는 때로 불행한 여자에게 오는 절친한 친구지. 가끔은 못된년이 되는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야) 라는 베라의 말처럼 누구도  돌로레스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이 하나 없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차갑게 하는 것도 그녀가 자신, 혹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리틀톨 이라는 섬이 공간배경입니다.  섬이라는 공간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섬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단절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어떤일을 아무도 몰래 비밀스럽게 꾸며도 그 일이  매일매일 바뀌어 가는 대도시처럼 금방 알 수 있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섬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것 같습니다.

돌로레스가 사고로 위장하여 자신의 남편을 추락사 시킨일도  그녀의 남편이 자신의 딸을 성추행 한 일도 모두 큰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섬이기 때문에 떠들썩 하지 않고 일을 꾸밀수도 할 수도 있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장면전환에서 일어났던 색감의 변화에 주목해봅시다.

 색감이 전체적으로 어둠은 회색빛이 였으나 과거를 회상하거나 과거의 일들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는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오렌지빛이 었습니다. 아무래도 과거에는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살았어도 한가정, 단란한 한 가족이 함께 살았던 모습이지만, 현재는 그 가정이 붕괴되고 혼자 남은 돌로레스의 모습이라 어두운 회색빛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과거의 안좋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자신의 딸 셀리나가 자신을 믿고 자신과 함께 했지만 지금은 돌로레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셀리나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는 돌로레스의 시점에서 장면전환에 색감의 변화를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4. 소설과 영화 속 지배장면이었던 "일식"의 의미를 새겨봅시다.

 이 영화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 개기일식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식이 주는 상징성은 대단합니다. 너무나도 밝은 태양이 달에 의해 가려지는 그 잠깐의 순간 모든것을 눈 감아 준다는 듯한 뜻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고통받으며 살아온 누군가.. 혹은 살아남기위한 선택을 하기 위한  누군가를 위해 하늘이, 태양이 눈감아준다는 뜻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5. 소설과 영화 중 서사의 힘은 어느 쪽이 더 강하게 느꼈습니까?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소설에 좀 더 서사의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속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모두 취조실이고 자식이 모두 3명인데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조금 쉽게 혹은 간단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한 돌로레스의 행동 또한 소설속에서 좀 더 모성애가 강한 엄마로 표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군가 재미있게 봤다며 꼭 보라고 추천한 영화.










뉴욕에 살고 있는 성공한 저널리스트 셀리나는 어느날 어머니 돌로레스가 살인혐의로 구속됐다는 지방 신문의 기사를 팩스로 받는다. 셀리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신이 증오하며 떠났던 어머니와 고향의 집을 15년 만에 찾아간다.
돌로레스는 그 지방 여류 부호인 베라 도노반의 살해 혐의로 곧 정식 심리를 받게 될 예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변호사 선임을 완강히 거부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사건에 특별히 늙은 형사 매키는 돌로레스의 유죄를 확신하며 집요한 수사를 벌인다. 86건의 사건 중 85건을 해결하는 완벽에 가까운 수사 기록을 갖고 있는 매키 형사. 그런 그에게 단 한번의 오점을 안겨준 여자가 18년전 남편의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유죄가 밝혀지지 않았던 돌로레스다.

18년 전, 돌로레스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 딸 셀리나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노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술주정뱅이 남편 조 세인트 조지의 학대로 몸과 마음이 상한 돌로레스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희망인 딸 셀리나를 위해 모든 걸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어린 딸 셀리나가 남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빠를 무조건 따르던 셀리나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지고, 돌로레스는 그 동안 저금한 돈을 찾아 딸과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돈마저도 조가 빼돌렸음을 알고 절망한다. 돌로레스의 사정을 알게 된 베로 도노반은 '세상에 모든 사고가 모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언질해 주며 '때론 악녀가 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지(Sometimes being a bitch is all a woman has to hang onto)'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얼마 후 개기일식 축제가 벌어지던 날, 일식을 하늘이 어두워진 순간 조가 술에 취해 낡은 우물에 실족사하고 만다. 매키 형사 외에, 지난 18년간 끈질기게 돌로레스의 유죄를 확신한 사람은 바로 딸 셀리나였다. 셀리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빠의 추행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채, 엄마에 대한 증오심만을 품고 고향을 떠났지만 심한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베라 도노반의 죽음으로 돌로레스와 셀리나, 매키 형사는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데......



상처받은 여성들의 삶과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스릴러 형식에 담은 영화이다. (사관과 신사) (백야) 등 주로 팝음악에 대한 관심을 견지하면서 평이한 수준의 영화들을 만들어온 테일러 핵포드가 감독을 맡아 호러 장르의 귀재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화했다. 캐시 베이츠와 제니퍼 제이슨 리가 상처 입은 과거를 지닌 모녀로 출연해 원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양한 기법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플래시백 장치도 볼 만하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상징적 요소들>

 

이 영화의 배경부터 상징적인 요소들의 시리즈가 시작된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그 자체로 어떤 조일 듯한 압박감을 줄 수 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는 섬이라는 배경이 억압과 성차별에 대한 상징과 맞물려 이해되기도 하며, 외진 섬 마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광기와 집단적 충동이 표출되기도 한다.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일식이 일어나던 날의 살인 사건이다. 매일 밤은 찾아오건만, 왜 하필 돌로레스는 일식이 일어날 때 남편을 죽였을까?       이 영화에서의 이러한 일식의 설정은 나약해 보이는 모성을 상징하는 달이 부성을 상징하는 해를 압도하는 상징적 표현이 바로 일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달과 해는 모성과 부성을 상징한다. 억눌렸던 모성은 바로 일식 때 해를 가리면서 캄캄한 암흑을 만들어 버린다. 부성은 항상 빛을 발산하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모든 가족들을 좌지우지하지만, 힘의 남용은 모성 본능에 의해 가려지고 해의 빛은 달빛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이러한 상징을 보여주기 위하여 남편이 우물에 빠진 후 돌로레스의 뒤로 해가 달에 완전히 가려지는 장면이 교차한다.

 

돌로레스가 남편을 살해하게 되는 가장 극단적인 원인은 딸에 대한 모성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딸을 성추행 하기 위해 귀한 물건으로 유혹한다. 어머니에게도 주지 않았던 할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딸에게 주며, 아버지는 딸이 아내보다 더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셀리나는 자신의 몸을 더듬는 아버지의 손은 싫었지만, 아버지의 선물로 인해 자신이 집안에서 가장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아이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선물, 성추행을 사랑의 표현으로 둔갑시키는 말들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이나 의식으로부터 억압하게 하거나 기억에서 차단시키는 방어를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 어린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들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하는 죄책감과 자아에 대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다.

영화 속의 딸 셀리나는 감당하기 힘든 아버지의 기억을 머리 속에서 밀어내고 어머니를 단지 아버지를 죽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증오한다. 셀리나의 어머니에 대한 고맙기도 하면서 미운 감정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그녀를 온갖 약물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셀리나가 배를 타고 섬을 떠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성추행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황급히 들어간 화장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뒷모습이 비쳤던 것이다. 그토록 보기 싫어했고 무의식적인 방어를 해야만 했던 자신의 뒷모습과 드디어 마주친 것이다. 항상 노출되어 있지만,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뒷모습과 그녀는 그제서야 직면한 것이다. 이제껏 그녀는 바로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의식에서 억압하고 싶었던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버지가 성추행 했다는 슬픈 기억과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어설프고 잔인하게 경쟁을 벌였던 자신의 모습들을

또한 소설 원작을 영화로 만들어 시각화를 무척 잘 살렸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색체를 통한 상징성이다. 과거는 밝고 따뜻한 이미지로 현재는 차가운 회색 빛으로 표현하여 현재의 복잡한 두 모녀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화면 속 하늘의 색깔 또한 인상 깊었다. 딸과 어머니의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하늘은 코발트 블루 빛의 서늘한 기운을 띄고 섬사람들의 멸시와 박대에 돌로레스가 분노하는 장면에서는 하늘은 핏빛의 붉은 빛을 띄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이름 자체도 그냥 지은 이름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에서 탄탄한 스토리에 감탄하였다. 돌로레스<Dolores>는 라틴어의 doloris 에서 파생된 말로 '고통'과 '고뇌'의 뜻을 가진다. 클레이본<Claiborne> 'clay(진흙)'+born(태어나다)'라는 뜻이 된다. 진흙구덩이 같은 환경 즉 폐쇄적인 섬에서 짐승보다 못한 남편에게 학대 받는 삶 속에서 사는 그녀를 상징한다. 딸 셀레나는 로마신화의 달의 여신의 이름이다. 셀레나의 삶도 여성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고통의 연속이다.최고의 기자를 꿈꾸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번번히 무시당하고..남자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상징성을 조사하면서 작은 설정들에서도 깊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스릴러물을 가장한 굉장히 작품성 있는 페미니즘 영화 한편을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께서 레퍼런스로 언급하신 영화들을 정리해 봤어요.

 

1. 라이언의 딸 (Ryan's Daughter) 1970

http://www.imdb.com/title/tt0066319/

 

위대한 유산,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 등을 감독한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입니다. 데이빗 린의 다른 대작 영화들처럼 멋지게 찍은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풍경이 압도적이었는데 제 기억으론 그 엄청난 영화적 스타일과 작고 팽팽한 드라마 자체가 좀 불협화음을 빚었던 것 같아요.

 

1차 세계 대전이 시대 배경이고 아일랜드의 외딴 시골 작은 마을에서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주둔한 영국군대와의 갈등 속에 동네 학교 교장 부인인 주인공이 하필이면 영국군 장교와 사랑에 빠집니다.

 

영국군의 첩자로 몰려서 머리 깎이고 쫓겨나게 된 주인공과 그 남편이 같이 더블린으로 떠나며 버스를 기다리는 엔딩에서 모자 날아가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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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 1995

http://www.imdb.com/title/tt0109642/


이 영화는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습니다. 캐시 베이츠의 연기가 아주 인상적이었고 장르는 심리 스릴러물이었지만 결국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던 영화였죠.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전 원작은 안 읽었어요.) 킹의 주특기인 초자연적인 호러스토리가 아닌 일상의 호러 - 알콜중독, 아내 구타, 아동 학대가 주제였습니다. 소재가 그렇다 보니 영화도 침울한 회색/푸른색 톤 화면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생각해보면 스티븐 킹 원작의 히트 영화들 - 미저리, 쇼생크 탈출 등은 불행한 상황을 다루지만 관객 입장에서 보기가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은게 주인공들이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라 그랬던 것 같네요.



 


"Sometimes, an accident can be an unhappy woman's best friend" -  때론 불행한 여자한테는 사고가 최고의 친구일 수 있어..


위의 예고편에도 나오지만 이 대사 하나로 참 많은 걸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참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여자 사이의 단단한 우정, 믿음, 충고 그리고 살인 교사까지 그냥 이 한 줄로 끝냈어요.



회상이 많으면 극이 어수선하고 산만해지기 쉬운데 이 영화는 회상을 아주 적절하게 사용했고 페이스도 좋아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고, 복잡해 보일수도 있지만 강하게 두 캐릭터 - 엄마와 딸 중심으로 밀고 나갔지요. 모녀로 나오는 캐시 베이츠와 제니퍼 제이슨 리가 감상따위는 없이 상처와 의심을 품고 있는 모녀관계를 너무 잘 연기해 주는 바람에 생각보다 마지막에 몰려오는 묵직한 감정의 충격이 강한 영화였어요.